문화재
9. 문헌(文獻)의 정자(亭子)들
작성일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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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헌(文獻)의 정자(亭子)들
◇영월루(詠月樓)
위치 : 미상
언제 누구에 의해서 건립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부터 풍광이 좋은 곳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관동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쪽에 위치하여 밤낮으로 일출과 월출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편액(扁額)은 선조 7년(1574) 간성군수를 역임한 황린(賁璘)의 자제로 서화(書書)에 능통하였던 황집중(驚執中)이 제(題)하였다. 그리고 경종 3년(1732)에 심한 바람으로 붕괴 되었으나 이후 복원하지 못하다가 정조 4년(1708) 봄에 간성군수 홍계서(洪繼瑞)가 이곳에 9칸짜리 2층 누각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만경루(萬景樓)
위치 : 미상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관동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군의 읍소로부터 남쪽으로 40리 거리에 건립 되었다. 이곳에 천후산(天吼山)의 한 줄기가 바다에 연해지면서 돌로된 봉우리가 우뚝 일어서도 층층이 이어져 높이가 수십 길은 되는데 위에는 노송이 몇 그루 굽어져 있으며, 아래에는 물이 맑아 고기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만경대의 동쪽에 만경루를 건립하었으니 정자의 풍치는 그야말로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경루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건립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영조 때에 이미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농향정(濃香亭=蓮亭)
위치 : 미상
관동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읍성 내에는 본래 연못이 없고 다만 작은 웅덩이가 있었을 뿐이나, 이후 연못을 축조하여 연(蓮)을 심어 길렀다. 선조 40년(1607) 간성군수 임득의(林得義)가 비로서 사정(財亭)을 이곳에 건립하였으며, 인조 10년(1632) 여름에 연못을 수축하면서 작은 구릉에 정자를 재건하였으며, 일명 '연정'이라고도 한다.
◇무진정(無盡亭)
위치 : 미상
관동지(關東誌)의 기록에 의하면 능파대에서 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석강(石崗)이 바다로 연하여 빚어낼 절경이 있다. 이곳에 어느 방백(方伯)이 올랐다가 그 절경에 매료되어 정자를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육송정(六松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군의 읍소(邑所)로부터 서쪽으로 10여리 거리에 한 뿌리에서 6그루의 소나무가 생장하였으며, 육송정은 이로부터 명명되었다. 다만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간성군지'의 기록에서 3그루 만이 남아 있다고 하였으며, 매년 초봄에 관리들이 이 나무 아래서 회렵(會獵)을 가졌다고 전하고 있다.
◇비음정(悲昑)
위치 : 미상
관동지(關東誌)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선유계곡에 있었으며 이곳에 반석이 평탄하여 백여명의 둘러 앉을 수 있는데 물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골짜기에 반향을 불러 온다하여 선조 7년(1574) 간성군수 황린(黃璘)이 선유령(仙遊嶺)을 개척하면서 명명하였다.
◇무송정(茂松亭)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군의 읍소(邑所)로부터 북쪽으로 50여리의 거리에서 작은 봉우리들이 해안에 연접해 있으며, 이곳은 노송으로 둘러져 있다. 부원군(府院君) 무송(茂松) 윤자운(尹子雲)이 사신으로 와서 이곳에 루대(樓臺)를 수축하고 '무송정(茂松亭)'이라 명명 하였다.
◇사선정(四仙亭)
위치 : 미상
관동지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북쪽으로 5리의 거리에 4칸의 정자가 있었으며, 이곳으로부터 삼일포가 한눈에 들어 온다고 전한다. 정자의 명칭은 신라시대 사선(四仙) 즉 영랑(永郎)․술랑(述郎)․안상(安祥)․남석(南石) 등 네명의 화랑이 이곳에 삼일을 유행(遊行) 하였다는 세전(世傳)에 근거하고 있다. 고성군수 권세태(權世泰)의 기록에 의하면 사선정은 고려 말엽 존무사(存撫使) 박모(朴某)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선조 17년(1584)에 군수 김한(金潤)이 중수하였고 현종 2년(1663)에 군수 이숙진(李叔鎭)이 중수 하였으며, 숙종 6년(1680) 군수 이식(李湜)이 중수 하였다. 정조 9년(1785)에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다음 해에 군수 이지광(李趾光)이 개건 하였으며, 순조 19년(1819) 군수 윤광열(尹匡烈)이 개수하고 단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산정(海山亭)
위치 : 미상
관동지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서쪽으로 1리의 거리에 6칸 규모의 정자였다고 전해진다. 해산정은 명종 22년(1567) 군수 차식(車軾)이 건립 하였으며, 17세기 초반에 군수 허계(許啓)가 중창 하였고 숙종 12년(1686)에 군수 이적길(李迪吉)이 다시 중창 하였다. 영조 30년(1754) 군수 안개(安鍇)가 옛 것을 철거하고 규모를 조금 줄여서 다시 중수 하였다. 정액(亭額)이 세 개 있는 바, 하나는 한호(韓濩)의 필적이고 하나는 문정공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필적이며, 나머지는 하나는 김수증(金壽增)의 필적이다. 그러나 이 편액은 이미 순조연간에 퇴락 하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순조 19년(1819) 군수 윤광열(尹匡烈)이 정자를 중건하
고 단청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호정(帶湖亭)
위치 : 미상
관동지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남쪽으로 2리의 거리에 남장(甫江)에 연하여 건립되었으며, 4칸 규모였다. 17세기 초반에 군수 허계(許啓)가 창건하고, 군수 이적길(李迪吉)이 '대호정(帶湖亭)'이라 명명하였다. 이후 퇴락한 것을 순조 13년(1813)에 군수 안광우(安光迂)가 옛터에 새로이 창건하였다.
◇어풍정(馭風亭)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감호 남쪽 산록에 건립 되었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초엽에 고성군의 도사(都事) 정유(鄭油)가 창건하여 '어풍정'이라고 명명하였다. 순조 연간에 심씨(沈氏)의 소유가 되었다.
◇칠송정(七松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남쪽으로 10리 거리의 강에 접해 있는 기암절벽 위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7그루의 노송이 있어 정자명은 이로부터 명명되었다. 17세기 중엽에 우암 송시얼(宋時烈)이 '칠송정(七松亭)'이라 대자로 제액하였으며, 부학(副學) 조지겸(趙持謙)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순조 연간에 최씨(崔氏)의 소유로 바뀌었다.
◇쌍벽정(雙碧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칠송정 아래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맑은 물과 바위, 소나무가 어우러져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다. 언제 누가 건립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승정(一勝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 부터 남쪽으로 5리의 거리로 남강 하류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세전(世傳)에 처사 신무(愼懋)가 기거하였다고 한다
◇망악정(望嶽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 관아에 구하당(九霞童)이 있는 바, 그 동쪽에 노송(老松)이 있었다고 전한다. 경종 1년(1721) 바람으로 노송이 뿌리 채 뽑혀 넘어지자 군수 이복영(李復永)이 그 자리에 1칸 짜리 정자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 서쪽으로 풍악(楓嶽)을 바라볼 수 있다하여 '망악정(望嶽亭)'으로 명명 하였다. 정조 7년(1783)에 정자가 퇴락하여 터만 남았으며, 정조 10년(1786)에 군수 이지광(李趾光)이 다시 건립하였으며, 순조 18년(1818)에 군수 윤홍규(尹弘圭)가 중수 하였고 다음 해 군수 윤광열(尹匡烈)이 단청하였다.
◇영월루(詠月樓)
위치 : 미상
언제 누구에 의해서 건립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부터 풍광이 좋은 곳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관동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쪽에 위치하여 밤낮으로 일출과 월출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편액(扁額)은 선조 7년(1574) 간성군수를 역임한 황린(賁璘)의 자제로 서화(書書)에 능통하였던 황집중(驚執中)이 제(題)하였다. 그리고 경종 3년(1732)에 심한 바람으로 붕괴 되었으나 이후 복원하지 못하다가 정조 4년(1708) 봄에 간성군수 홍계서(洪繼瑞)가 이곳에 9칸짜리 2층 누각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만경루(萬景樓)
위치 : 미상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관동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군의 읍소로부터 남쪽으로 40리 거리에 건립 되었다. 이곳에 천후산(天吼山)의 한 줄기가 바다에 연해지면서 돌로된 봉우리가 우뚝 일어서도 층층이 이어져 높이가 수십 길은 되는데 위에는 노송이 몇 그루 굽어져 있으며, 아래에는 물이 맑아 고기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만경대의 동쪽에 만경루를 건립하었으니 정자의 풍치는 그야말로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경루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건립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영조 때에 이미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농향정(濃香亭=蓮亭)
위치 : 미상
관동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읍성 내에는 본래 연못이 없고 다만 작은 웅덩이가 있었을 뿐이나, 이후 연못을 축조하여 연(蓮)을 심어 길렀다. 선조 40년(1607) 간성군수 임득의(林得義)가 비로서 사정(財亭)을 이곳에 건립하였으며, 인조 10년(1632) 여름에 연못을 수축하면서 작은 구릉에 정자를 재건하였으며, 일명 '연정'이라고도 한다.
◇무진정(無盡亭)
위치 : 미상
관동지(關東誌)의 기록에 의하면 능파대에서 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석강(石崗)이 바다로 연하여 빚어낼 절경이 있다. 이곳에 어느 방백(方伯)이 올랐다가 그 절경에 매료되어 정자를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육송정(六松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군의 읍소(邑所)로부터 서쪽으로 10여리 거리에 한 뿌리에서 6그루의 소나무가 생장하였으며, 육송정은 이로부터 명명되었다. 다만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간성군지'의 기록에서 3그루 만이 남아 있다고 하였으며, 매년 초봄에 관리들이 이 나무 아래서 회렵(會獵)을 가졌다고 전하고 있다.
◇비음정(悲昑)
위치 : 미상
관동지(關東誌)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선유계곡에 있었으며 이곳에 반석이 평탄하여 백여명의 둘러 앉을 수 있는데 물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골짜기에 반향을 불러 온다하여 선조 7년(1574) 간성군수 황린(黃璘)이 선유령(仙遊嶺)을 개척하면서 명명하였다.
◇무송정(茂松亭)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군의 읍소(邑所)로부터 북쪽으로 50여리의 거리에서 작은 봉우리들이 해안에 연접해 있으며, 이곳은 노송으로 둘러져 있다. 부원군(府院君) 무송(茂松) 윤자운(尹子雲)이 사신으로 와서 이곳에 루대(樓臺)를 수축하고 '무송정(茂松亭)'이라 명명 하였다.
◇사선정(四仙亭)
위치 : 미상
관동지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북쪽으로 5리의 거리에 4칸의 정자가 있었으며, 이곳으로부터 삼일포가 한눈에 들어 온다고 전한다. 정자의 명칭은 신라시대 사선(四仙) 즉 영랑(永郎)․술랑(述郎)․안상(安祥)․남석(南石) 등 네명의 화랑이 이곳에 삼일을 유행(遊行) 하였다는 세전(世傳)에 근거하고 있다. 고성군수 권세태(權世泰)의 기록에 의하면 사선정은 고려 말엽 존무사(存撫使) 박모(朴某)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선조 17년(1584)에 군수 김한(金潤)이 중수하였고 현종 2년(1663)에 군수 이숙진(李叔鎭)이 중수 하였으며, 숙종 6년(1680) 군수 이식(李湜)이 중수 하였다. 정조 9년(1785)에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다음 해에 군수 이지광(李趾光)이 개건 하였으며, 순조 19년(1819) 군수 윤광열(尹匡烈)이 개수하고 단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산정(海山亭)
위치 : 미상
관동지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서쪽으로 1리의 거리에 6칸 규모의 정자였다고 전해진다. 해산정은 명종 22년(1567) 군수 차식(車軾)이 건립 하였으며, 17세기 초반에 군수 허계(許啓)가 중창 하였고 숙종 12년(1686)에 군수 이적길(李迪吉)이 다시 중창 하였다. 영조 30년(1754) 군수 안개(安鍇)가 옛 것을 철거하고 규모를 조금 줄여서 다시 중수 하였다. 정액(亭額)이 세 개 있는 바, 하나는 한호(韓濩)의 필적이고 하나는 문정공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필적이며, 나머지는 하나는 김수증(金壽增)의 필적이다. 그러나 이 편액은 이미 순조연간에 퇴락 하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순조 19년(1819) 군수 윤광열(尹匡烈)이 정자를 중건하
고 단청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호정(帶湖亭)
위치 : 미상
관동지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남쪽으로 2리의 거리에 남장(甫江)에 연하여 건립되었으며, 4칸 규모였다. 17세기 초반에 군수 허계(許啓)가 창건하고, 군수 이적길(李迪吉)이 '대호정(帶湖亭)'이라 명명하였다. 이후 퇴락한 것을 순조 13년(1813)에 군수 안광우(安光迂)가 옛터에 새로이 창건하였다.
◇어풍정(馭風亭)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감호 남쪽 산록에 건립 되었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초엽에 고성군의 도사(都事) 정유(鄭油)가 창건하여 '어풍정'이라고 명명하였다. 순조 연간에 심씨(沈氏)의 소유가 되었다.
◇칠송정(七松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부터 남쪽으로 10리 거리의 강에 접해 있는 기암절벽 위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7그루의 노송이 있어 정자명은 이로부터 명명되었다. 17세기 중엽에 우암 송시얼(宋時烈)이 '칠송정(七松亭)'이라 대자로 제액하였으며, 부학(副學) 조지겸(趙持謙)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순조 연간에 최씨(崔氏)의 소유로 바뀌었다.
◇쌍벽정(雙碧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칠송정 아래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맑은 물과 바위, 소나무가 어우러져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다. 언제 누가 건립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승정(一勝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의 읍소로 부터 남쪽으로 5리의 거리로 남강 하류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세전(世傳)에 처사 신무(愼懋)가 기거하였다고 한다
◇망악정(望嶽亭)
위치 : 미상
관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고성군 관아에 구하당(九霞童)이 있는 바, 그 동쪽에 노송(老松)이 있었다고 전한다. 경종 1년(1721) 바람으로 노송이 뿌리 채 뽑혀 넘어지자 군수 이복영(李復永)이 그 자리에 1칸 짜리 정자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 서쪽으로 풍악(楓嶽)을 바라볼 수 있다하여 '망악정(望嶽亭)'으로 명명 하였다. 정조 7년(1783)에 정자가 퇴락하여 터만 남았으며, 정조 10년(1786)에 군수 이지광(李趾光)이 다시 건립하였으며, 순조 18년(1818)에 군수 윤홍규(尹弘圭)가 중수 하였고 다음 해 군수 윤광열(尹匡烈)이 단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