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문화재

1.고성산(高城山)과 수타사지(壽陀寺址)

작성일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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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명승고적

제 1절 명 승

1. 고성산(古城山)과 수타사지(壽陀寺址)
위치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고성산(古城山)은 해발 291여m의 산정에 만여평의 구릉지로 되어 있다.
산위에는 마르지 않는 천수(泉水)가 있고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임진왜란 때 각종 난을 방어하던대 요새지이기도 하다.
수성지(水城志)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초 축성으로 되어 있으며 주위가 2,565척이라고 전하고 있고 성곽이 무너져 내런 돌이 산록에 무수히 산재해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근거로 최근 문화재연구소의 학술조사에 금수리 고성산성의 초축년대는 성의 기저부를 10~20cm씩 들여 쌓으면서 축성하고 또 쐐기돌을 활용한 고구려시대의 전형적인 축성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석성임이 확인됐다. 또한 성내부에서 고구려․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와편, 토기편, 도기 등의 유물이 다량 산포되어 있어 이 성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신라의 변방의 요충지로 이용 되었고 고려~조선시대에는 외세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유적지였음을 알 수 있다.
6.25동란 때도 아군이 이곳에서 북한군과 격전, 간성을 탈환하는데 거점이 되는 요충지로서 큰역할을 하였으며 북한군 패잔병들이 북쪽으로 도주하던 중 이곳에 은신하다 갔다고 한다.



지금도 성주변에 군사시설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다. 이산 밑에는 아주 옛날 수타사(壽陀寺=水陀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의 기둥이 빈대로 엉켜붙어 있어 승려들이 견디다 못해 절에 불을 지르고 홍천으로 이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말엽 공양왕이 1392년 7월 14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에 원주로 추방된 뒤 다시 간성으로 피하여 수타사에서 2년동안 있다가 1394년(太祖 3년)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로 재유배 되었다고 한다. 일부 농경지로 변해 버린 수타사지에는
낡은 석탑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홀로 지키고 있다. 이 탑의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으나 4층 옥계석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단층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을린 평면 방형의 5층 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언급되어 있다



간성군 읍지에 실려 있는 공양왕 행적



고성산 서남쪽으로는 풍치가 빼어난 관대암(冠帶岩, 관대바위)과 탑동폭포가 있는데 학생들의 소풍지로도 유명하다. 관대암 주변에는 독사와 지네가 많이 서식하고 있지만 탑동폭포는 물이 맑고 물고기도 많이 서식하고 있어 천렵꾼들이 찾아 들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