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문화재

- 고성군의 문화 유적

작성일
2025-07-25
조회
8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죽왕면 사무소에서 7번 국도를 타고 간성방면으로 북상하다 공현초등학교를 지나면 왼편으로 현재 신축중인 선유담모델이 나온다. 이 모텔의 뒷편 약 300m 거리 에 지금은 논, 밭으로 경작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호수였다는 선유담 유적이 위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동헌으로 부터 10리 쯤의 거리에 선유담이 있으며, 이곳에 노송이 어우러진 자 그마한 산이 있고, 그 산의 반석 위에 택당 이식(澤堂李植)이 '가학정(駕鶴亭)'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한편 군구 김광우(金光遇)는 영조 22년(1746)에 선유담 산록에 '유한정(幽間亭)'을 세웠다고 전하며, 이곳의 절경에 감탄하여 우암 송시열(尤庵宋詩烈)이 친필로 "선유담(仙幽潭)"이라는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현지 조사 결과 가학정 기둥자리와 선유담이라는글자가 음각된 암반이 두 곳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가학정 초석이 있는 곶형태 지형의 민묘 부근에 있는 300cm×600cm×90cm정도의 암괴 위에 좌행의 '仙幽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담(漂)'자는 자연박리에 의해 멸실되었다. 글자 크기는 55cm×35cm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동남편 지역 약 200m거리의 산능선 아래 바위에 세로행의 '仙幽潭)'이라는 글이 음각으로 새겨진 바위가 또 하나 있고, 고성군에서 1995년 5월에 세운 알림표석이 서 있다. 이곳의 글자는 완연하게 있으며 크기는 52cm×37cm이다.



◇송호정(松湖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정․각(정자)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 산 22-1 용소두봉
【시        대】1959년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1959년 10월 3일 면장 최창길(崔昌吉)씨와 지방독지가가 김원섭(金元燮) 창건기성회장을 중심으로 1백7십만원을 모금하여 건립하였다. 송지호 서편에 동편으로 뻗은 곶형(串形) 지역에 위치한다. 1994년 완전 보수하였으나 1996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화강암 초석 4기가 부서진 채로 남아 있었다가 1997년 8월 군비 8천만원을 들여 새롭게 원형 복원 되었다. 지금의 현판은 함귀호(咸貴鎬) 강원도교육위원이 서(書)하고, 이창석(李昌錫) 목공예가가 찬(纂)하였다.



◇고성 적곡사지(高城 笛谷奇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2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동리 농오에 의하면 마을 서북편 "재"있는 곳에 있었다고 들었다. 이곳은 절골이라고 하고 또는 오음봉육을봉(五音峰六律峰)이 있어 적동(笛洞)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오봉 2리 마을에 서편쪽으로 현재 상수도 취사장 우측에 있다. 전체 지형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현재 군데군데 계단식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기와 조각 하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곳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약간 높은 곳에 올라서면 멀리 동해 바다와 송지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위치상으로는 삼면이 산으로 둘려쌓였고, 동쪽이 트여 있어 범부가 보아도 좋은 자리였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왕곡마을
【지정사항】전통건조물보존지구 제1호(1988년 8월 18일)
【유적종류】가타유적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
【시        대】고려시대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왕곡 마을에는 건립연대가 50-150년된 한옥들이 집단적으로 많이 모여 있으며, 지붕의 형식도 팔작지붕으로 동일하고 겹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외양간의 모양은 지붕에 이어져 있는 형과 덧달아낸 형식의 두가지가 있고, 사랑방의 난방은 별도로 하는 형이 있다. 이 마을은 금강산계 문화권에 속하며, 집은 북부지방과 강릉 지역의 주거에 영향을 받으며, 동족마을로서의 생활상이 지역의 자연적 환경에 잘 적응한 모습을 이루었다. 대체로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향의 배치에 집과 집사이에 비교적 넓은 텃밭이 있으며, 집앞에 담은 거의 없고 뒷면에 담이 있는 특색이다. 집은 정지와 외양간, 안방과 웃방, 도장, 마루와 사랑방으로 구성된 겹집 '―' 자형이거나 외양간이 정지에 붙어 밖으로 나온 'ㄱ'자형이 대부분이다. 이 마을에는 1871년 지어진, 함희석 효자각과 함씨 사세오효자각(四世五孝子閣)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최종복 가옥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가(민간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1리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최종복
【유적내용】
전면 3칸, 측면 2칸의 "ㄱ"자형 초가지붕 가옥으로써 외양간은 별도로 이어져 있다. 자연석 세겹 대쌓기 기단에 시멘트 몰탈을 마감하였으며, 호박돌 초석을 두었고, 외벽은 흙벽이고 내부는 벽지, 천정지, 비닐장판 마감이다. 전면의 중간은 봉당으로써 현대 주택의 현관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으나, 추운 겨울의 작업 공간도 겸하고 있어 복합적인 용도로 민가에서는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흙마루 형태로 사용되다가 마루가 도입되는 것이 영동 북부지방 민가 평면의 특징이다. 본채의 뒤에 바닥, 벽은 흙바닥, 천장은 서까래로 엮은 광이 있고, 뒷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돌과 진흙으로 된 흙담이 둘러싸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경자 가옥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가(민간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1리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한경자
【유적내용】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 형식의 가옥으로 마루가 전열 2칸에 걸쳐 있다. 이러한 평면에서는 마루의 뒤에 안방이 있고, 측면에 사랑방이 있으며, 그 뒤에 안방으로만 통하는 출입문이 있는 도장방이 있는 것이 보통이나, 지금은 측면의 방을 확장하여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자연석 두겹대쌓기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창호는 마루 부분 은 외짝 여닫이 세살문과 두짝 여닫이 세살문, 온돌방은 두짝 여닫이 세살문으로 되어 있으나 마루방 부분의 창호가 온돌방보다 높고 길게 되어 조망, 출입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외벽은 띠방을 두르고 재사벽 바름 마감하였고, 내부는 벽지와 천정지로 도배하였다. 마굿간을 본채의 지붕에 이어져 있지 않으며 벽의 하부는 판벽, 상부는 재사벽 바름마감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함정균 가옥(咸丁均 家屋)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78호(1985년 1월17일)
【유적종류】고가(민간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1리 375번지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함정균
【유적내용】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 가옥이다. 정면 2칸에 마루가 있고 그 뒤에 안방, 측면에 사랑방과 고방이 있는 영동북부 지방의 전형적인 평면형이다. 자연석으로 3단 쌓기(높이 62cm)위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기둥을 세운 후 굴도리를 결구 하였다. 외벽은 재사벽 마감이고 전면 창호는 세살문으로 짜여 있고 마루방 부분의 하부에는 머름대를 두르고 벽체 중간
에는 띠방이 있다. 사랑방 측면에는 아궁이가 있고 고방간과 사랑방 사이의 벽체를 외부로 연결하여 쌓은 후 지붕을 잘아내어 서까래를 걸고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체의 뒤쪽에는 툇
마루를 가지며 마루 양측 끝에는 하부는 뒤주, 상부는 두짝여닫이문이 달린 벽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수장 공간이 있다. 본채의 공간이 있다. 본채의 우측에는 시멘트 기단(15
cm), 자연석 초석, 네모기둥, 팔작지붕 시멘트 기와 집의 방+방+헛간(흙바닥)으로 평면이 구성된 사랑채가 있다. 전면은 장마루로 둘러 싸여 있고 지금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대
체로 원형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이 시멘트로 보강되어 원형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어 아쉽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함형찬 가옥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가(민간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1리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함형찬
【유적내용】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이어서 반칸 정도 크기의 툇마루 칸이 한칸 더 있다. 전면에 대청이 2칸에 걸쳐 있고, 그 뒤에 안방이 있으며, 측면에 사랑방과 수납 공간이 있는 평면 형태이다. 안방의 뒤와 사랑방의 측면에 툇마루가 있고 부엌에는 광이 있는 것으로 저장 공간과 방문객을 위한 공간이 많이 필요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방의 툇마루에는 뒤주가 있고 사랑방 측면에 출입을 위한 일각대문이 흙담을 두르고서 만들어져 있으며 작은 담안에 사랑정원을 따로 가지고 있다. 잘 다듬어진 장대석을 두겁게 쌓아 기단을 형성하고 사랑방 전면에는 별도의 아궁이가 있으므로 긴판석을 아궁이 위로 지나가게 하여 툇마루로 이용하고 있다. 사랑방 측면에는 화강석 장대석을 둘러서 작은 화단을 만들고 사랑방 출입을 위한 장대석 기간을 한단 쌓은후 댓골을 놓고서 툇마루를 통하여 전면 사랑으로 들어간다. 측면의 사랑 마당과 기와와 흙으로 만들어진 굴뚝과 흙, 돌, 기와잇기의 담은 잘 조화되어 큰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전면 창호는 두짝 여닫이 세살문으로 되어있으며, 대청은 청판있는 머름대를 하인방 위에 설치하였으나 대청의 부엌쪽 창호 부분에는 출입의 편리를 위하여 생략하고있다. 마구간 상부에 수날 공간이 있고 지붕의 합각부에는 까치 구멍이 있으며, 광의 바닥은 우물마루 바닥이고, 벽은 판벽이며,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양근 함씨 정려(楊根咸氏旅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374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함씨 종중
【유적내용】
동몽교관(童蒙敎官) 함성욱은 부친인 함취관이 병환으로 위독하게 되자 단지하여 피를 먹여 7일을 더 연명케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선양하여 조봉 대부(朝奉大夫)의 작위를 내렸다. 그 뒤 함성욱의 아들 함인흥과 함인홍 형제, 함인호의 아들 함덕우, 함덕우의 아들 함 희룡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5효자가 모두 단지하여 부친의 생명을 연장하였으며, 아울러 3년의 시묘를 함으로서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 가문이라 하여 작위와 벼슬을 내렸으며,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1820년 효자비를 건립하고 "사세 오효자가(四世五孝子閣)"이라 명명하였다. 현재의 효자각은 1984년에 건립되었으며, 효자각의 양기둥 안쪽으로 홍살문이 별도로 설치되어 그 안쪽으로 효자비가 배치되었으며, 한 가운데 상돌이 놓여 있다. 5기의 효자비는 각각 그 이면에 효자의 효행과 행장을 기술하고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210cm×210cm)의 팔작지붕이다. 비각의 초석은 화강암제로 장란의 한쪽을 절단한 형태이다. 비는 모두 1984년에 오석을 사용하여 다시 새겨 만든 것이다. 주변은 석축을 하고 기와를 없어 보존관리가 양호한 편이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함희석 효자각(咸熙錫 孝子閣)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효자각)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396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함씨 종중
【유적내용】
오헌 함희석은 함덕인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후하며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였고, 가세가 빈한한 가운데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친이 병환으로 앓게 되자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봉양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간 시묘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1869년에 건립한 효자비는 높이 175cm, 너비 50cm, 두께 25cm의 규모로, 비각은 1871년 12우러에 건립되었으며 비각의 측면으로 대문을 세우고 그 둘레에 담을 쌓았다. 비의 전면에는 "효자전통대부돈영부도정강릉함희석지려(孝子前通政夫敦率府都正江陵咸熙錫之閭)"로 각지되어 있으며, 비각의 전면 기둥 안쪽으로 홍살문을 세운 것이 이채로운 양식이다. 현재 효자각에는 "강릉함씨효자지려(江陵咸氏孝子之閭)"로 각자
된 현판에 게판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그 효행과 행장이 기록하였다. 비각의 주춧돌은 3단의 고주형이고 앞 초석 2매의 전면에는 전자(業字)로 거북 구자(龜字)를 새겨 놓았다. 주변은 토
석혼축의 담장을 두르고 위에 기와를 얹었다. 희석은 함덕인(1828-1860)의 장남으로 효행이 뛰어나 조정으로 부터 정려를 받았다. 1869년에 건립한 효자비는 화강암제로 팔작지붕의 개석을 얹었다. 1871년에 12월에 건립한 비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전면 기둥 안쪽으로 홍살을 세운것이 이채롭다. 비각의 주춧돌은 3단의 고주형이고 앞 초석 2매
의 전면에는 전자(篆字)로 거북 구자를 새겨 놓았다. 주변은 토석혼축의 담장을 두르고 위에 기와를 얹었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이덕균 가옥(李德均 家屋)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77호(1985년 1월 17일)
【유적종류】고가(민가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 419번지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이덕균
【유적내용】
자세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원래의 구성리에 있었던 가옥을 75년전 현 위치로 이축하였 으며 대패를 사용하지 않고 자귀로 지은 가옥이다. "ㄱ"자 겹집 평면으로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 형식 가옥이다. 전면 전열 2칸은 우물마루으로 되어 있고 측면에 사랑방과 골방이 있다. 전면이 3칸일 경우는 영동북부지방에 서는 마루가 안방으로 변환되며 한칸이 마루일 경우는 뒤쪽으로 안방이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 이다. 본 가옥은 2칸에 걸쳐 마루가 있으므로 사랑방은 측면으로 이동하였다. 부엌에 이어서 마굿간이 본채와는 지붕이 이어져 있지 않고 조금 낮게 "ㄱ"자로 튀어 나와 있다. 기단은 자연석 초벌대기단위에 세겹대를 더 쌓은 후 시멘트몰탈을 석축사이에 넣어 보완하였다. 이 기단은 70년전 만들었으며 원래는 흙마루였다 한다. 우물마루 대청의 중간마루에는 6.25이후 개조하여 곡식을 저장하는 뒤주가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대청의 벽은 회벽, 천정은 합판 무늬목으로 마감하였고 큰방과 옷방 사이에 두짝 미닫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확장하여 한 칸으로 사용하며 바닥은 비닐장판, 벽지, 천정지 마감이다. 사랑방 마감은 큰방과 동일하며 도장방은 흙바닥 위 대자리를 깔았고 난방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마구간의 상부는 다락이 있어 수남공간으로 사용되며 외짝 판벽 여닫이 문이 있고 측면에는 정자형 창호가 걸려 있다. 본채의 뒷편으로 전면 3칸의 맞배지붕형식 고방채가 방+광+광의 평면 형태로 증축되어 있다. 방은 현재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천정은 고미반자, 방바닥과 중인방 아래벽은 시멘트 몰탈, 벽상부와 외벽은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중간 광에는 뒤주가 있고 ㄱ자로 이어내어 함석 지붕의 헛간을 달아 내고 있다. 기와가 들린 곳이 많고 퇴락하여 교체가 요망된다. 덤벙주초를 사용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정철수 가옥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가(민가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 1반 119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개 인
【유적내용】
구성초등학교 분교와 담을 사이에 두고 본 가옥이 있다. 원래 이 가옥은 지금의 위치보다 조금 높은 산위에 있었으나 집안의 호환을 당하여 150년쯤 전에 이 곳으로 이축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 팔작겹집으로 평면의 구성은 이덕균씨택과 거의 흡사하며 외관은 옛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중간 마루를 온돌방으로 개조하였으나 원
래 이곳은 대청마루였으며, 특히 2짝 여닫이문이 달린 작은 온돌방이 하나 있어 제사때에 집사만 이곳에 들어가서 의식을 행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마루에서 차례를 지냈다 한다. 기단은
자연석 쌓기(86cm)를 한 후 시멘트 몰탈 마감을 하였고 마구간과 부엌을 현대식으로 용도변경 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부엌과 마구간은 2짝 여닫이 통판문으로 제작되었고 집의 각기둥의 크
기는(25-30cm)는 집 규모에 비하여 큰 부재를 사용하였다. 초석은 덤벙주초를 사용하였는 건물에 비해 상당히 큰 괴석을 사용하였다. 마구간은 다른 건물들과 달리 큰 부재를 사용하여
둔중한 느낌을 준다. 조사 당시 정철수써는 이미 사망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삼포리 봉수지(三浦里 烽燧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봉수(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봉수동
【시        대】청동기시대
【유적내용】
삼포리 봉수지는 속초-고성간 7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대한불교 태교종 반야사 진입로로 진입하여 바로 우측 해발 약 59m 높이의 산 정상에 위치한다. 봉수지의 주변은 30~40 년생된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봉수지 동편 바로 앞에는 민묘 1기가 자리하면서 봉수지의 외곽토루(土壘)를 파괴한 상태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순포리 부락에 동북 약 50간 (90m)의 산정에 있으며, 약 6간(lOm) 서방애 석총 외주에 토루가 있고 불완전하다."라고 하였고, ≪문화유적총람≫에는 "여진 말갈족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이라 전하며 장광 7.27m(24척), 높이 5.45m(18척)인 석축단이다."하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삼포리 유물산포지(高城三 浦里散布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사유물 출토지․분포시)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봉수단주변)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우물산포지는 죽왕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600m 거리에 동서로 길게 뻗은 해발 4-50m의 야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야산 능성과 사면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유적은 동편이 동해바다에 면해 있으며 북으로는 仁亭川이 가로지르는 넓은 농경지(논)가, 남쪽과 서쪽으로는 비교적 낮은 야산들이 자리하고 있어 산포지의 정상부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트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이 정상부에는 통일신라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봉수단이 조영되어 지금도 그 흔적이 잘 남아있다. 유물은 봉수단이 있는 곳으로부터 서편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반야사 뒷편으로 나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 위쪽의 경사면에서 무문 토기과 공열토기편 및 반달돌칼, 석촉, 돌도끼등 다양한 종류가 채집되었다. 또한 이 능성과 더불어 좌우로 가지처럼 뻗어 있는 능선에서도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어 이 일대 상당히 넓은 지역에 청동기시대 유물이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성 어명기 가옥(高城 魚命驥 家屋)
【지정사항】중요민속자료 제131호(1984년 1월 10일)
【유적종류】고가(민가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551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어명기
【유적내용】
현 집터에서 생활한 것은 약 400년 정도 되었으며 1750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어태준(1705-1758)이 3년에 걸쳐 동일장소에 재건축하였다. 이 가옥을 어명기의 2대 조부 어용주가 농토 약 300평을 주고 구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지붕가옥이다. 영동북부 지방의 민가 평면은 겹집이 대부분이며 그외 툇마루를 겹집에 붙여서 측면칸이 반칸 정도 더 긴것은 있으나 이 가옥과 같이 완전한 측면 3칸 가옥은 현재까지 조사되어진 것으로는 유래를 찾기 힘든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평면 구성은 전면 2칸 마루의 경우 측면이 사랑방이 되고 그 뒤에 도장방, 마루뒤로는 안방과 건넌방이 있으나 여기서는 측면에 사랑방이있는 것은 같으나 그 뒤의 방이 하인방이 되며 도장방은 안방옆의 중간방으로 옮겨져 있다. 이것은 평면이 민가의 형식이나 측면 3칸의 규모에서는 상류주택의 요소인 대청마루와 하인을 위한 공간이 도입되머 평면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가옥의 구조체에서는 지붕이 덛집 형태로 되어 있어 측면의 길이 증가에 따른 환기, 통풍을 원할히 해주고 있다. 본채의 기단은 장대석(길이 약 170cm)세경대 쌓기 기단(높이 85cm)이며 사랑방의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전면에 있으므로 기단 부분에 화강석 장대석을 3단 쌓아 사랑방 앞에까지 연결하여 마루밑에 긴 아궁이 통로를 두고 있다. 전면 창호는 두짝 여닫이 세 살문이고 하부에 머름대를 두고 있다. 집의 우측면에는 뒷 후원으로 가는 협문이 있고 툇마루에는 홍예보를 걸치고 있으며 마루 상부는 서까래+회토 마감을 하고 있다. 뒤쪽 잘 꾸며진 후원에는 방+광+광으로 된 3량가 팔작기와 지붕의 헛간채가 있으며 방의 벽은 흙벽, 천정은 고미반자이고 광은 마루바닥에 판벽으로 방과 광사이에는 외짝 여닫이 세살문이 있다. 본채의 좌측에는 우진각 지붕 흙벽의 방앗간이 있었으나 1996년 고성산불 화재로 소실되었다. 1997년 변소와 방앗간이 복원되면서 방앗간의 위치가 현재 위치로 변경되었다. 주초는 치석을 않고 덤병 주초를 사용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①(高城 文岩里 遺蹟 ①)
【지정사진】<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사유물 출토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 1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이 산포지는 죽왕면 최남단으로 동해안에 면해있는 해발 41.9m 야산의 남쪽에 면하여 자리하고 있다.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북쪽으로는 야산이 감싸안고 있고, 남․서쪽으로는 넓은 평
야와 문암천이 흘러 동해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약 400m거리에 동해안이 있어 신석기시대인들의 생활근거지로서 알맞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유적일부는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부분지역은 민가들이 들어서 마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해방지 목적으로폭 3m 깊이 1.5m정도의 수로가 지나고 있어 이 유적의 중요부분이 훼손되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시급한 형편이다. 유물은 마을 뒷편 텃밭과 야산의 하단부에서 채집되었다. 특히 유물이 집중수습된 곳은 주민들이 쓰레기를 묻기위하여 구덩이를 팠던 지역
에서 였다. 수로의 단면에서 나타난 지표하 약 90cm에서의 진흙포함층과, 유물이 구멍이를 팠던 곳에서 주로 채집되는 것으로 볼 때 , 유물 및 유구 포함층이 잔존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곳에
서 수습된 토기는 구연부분에 주로 압날에 의해 시문된 다양한 문양을 보여주고 있으며, 저부형태는 모두 평저이다. 또한 융문기문 토기가 다량 수습됨으로써 이 유적의 성격 및 시대를 가
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②(高城 文岩里 遺蹟 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상유물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 1리
【시        대】철기시대
【유적내용】
속초-거진간 7번 국고를 따라 북상하다가 토성면과 죽왕면의 경계인 문암교를 지나 약 1.5km쯤에서 우측으로 진입하면 문암 1리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마을에서 우측으로 해발 5m높
이의 모래언덕에서 철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민무늬토기 조각이 지표 채집되었으며, 불맞은 돌들이 지표상에 노출된 점을 보아 집자리 유적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천진리 고분(高城 天津里 古墳)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천진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7번 국도 동편 해안쪽으로 형성된 천진리 마을에 있다.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김인황씨댁인 민가에 있다고 하였는데, 김인환씨 댁을 찾았으나 별세하셨고 그 부인인 이창원씨에
의하면 군땅을 불하할 때 주민들에 의해 건축공사를 하면서 훼손되어 멸실되였다고 한다. 현재 시멘트로 완전히 덮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이곳으로부터 북서편으로 직선거리 약
lOOm 정도가면 샤시문을 제작하는 김정수씨댁 옆에 훼손된 1기가 있다. 예전에는 꽤 높고 넓은 봉분이 있었다고 하나 현채는 도굴과 주민들에 의한 경작 등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잘려나
가 봉분을 알아 보기 힘들다. 현 잔존높이는 130cm 정도되며, 동서 5.5m, 남북 8.7m가 남아 있고 봉분 위에는 20-30년된 해송, 리키다소나무가 각 1그루씩 자라고 있다. 이 고분은 일명 소금무덤이라고도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에 토성면 천진리에 연중 화재가 계속 일어났는데 이 소금무덤을 만든 후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액막이를 위한 헛무
덤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천진리 부락의 남방 하안 전급 사유림 중에 있음. 토축 직경 약 12m, 높이 약 2m의 2기 완전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관찰사 조석여 불망비(高城 觀察候 曺錫與 不忘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불망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민간인 출입제한구역내)
【시        대】조선시대
【유적내용】
청간정 북편에 있는 경승지인 만경대 절벽 아래에 소재한 선정비이다. 만경대 바위암벽에는 조선조 4대 명필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의 친필인 초서체의 '만경대(萬景臺)'암각문이 있다. 비좌는 최근에 시멘트로 만들었고 비신의 재질은 현무반암 계통의 암질로 비수는 없다. 전면에는 "관찰사조공석여영세불망비(觀 使曺公錫與永世不忘碑)"라 새겨 있고 후면은 연호가 없이 간지로 "계묘십월일(癸卯十月日)"이라 명시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다. 비신의 규모는 99cm×37cm×12.5cm이다.



◇효녀 김혜 김씨 정려각(孝女 金氏 旌閭閣)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민간인 출입금지구역내)
【시        대】근대(1900년)
【유적내용】
조석여 선정비와 인접해 있는 정려각으로 원형 주초석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을 짓고 그 안에 효행명정(孝行命旌)에 대한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 내용은 "효녀가선대 부박귀룡처정부인김해김씨지문 명정 상지갑오팔월일 광무사년경자십월일 중수 본군수이정하서(孝女嘉善大夫朴貴龍妻貞夫人金海金氏之門命旌上之甲午八月日光武四年庚子十月日重修本郡守李鼎夏書"라 되어 있고, 그 옆에는 덧붙여 "개축서기일구칠십년칠월이십팔일 육군대령소주영(改築西紀一九七十年七月二十八日陸軍大領蘇珠英)"라 되어 있다. 정부인 김씨의 효행사실에 대하여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현판의 간지로 보아 1900년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고, 한국전행 이후 1970년에 정려각을 개축하면서 정려현판 역시 다시제작하여 게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청강정(淸澗亭)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32호(1971년 11월 16일)
【유적종류】정․각(정자)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89-2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토성면 청간리 89-2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청간정은 본래 청간역(淸濡驛)의 정자였고 하나 그 창건 연대나 창건자가 분명치 않다. 다만 조선 명종 18년(1555)에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한 기록과 현종 3년 (1662)에 최태계(崔泰繼)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당시 좌상 송시열이 금강산에 머물다가 이곳에 들려 친필로 "청간정(淸澗亭)"이란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그후 갑신정변 때에 전소된 채 방치되었다가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등의 발의로 현재의 정자를 재건하였으며 1953년 중수, 1980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정자는 190cm높이의 12개 돌기둥을 주초석으로하여 그 위에 3칸×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루정으로 주위에는 잔잔한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1997년 4월 11일 산불이 이 지역까지 번졌을 때, 이 대나무로 인해 청간정의 북동편 모서리 난간과 기둥 1기가 불타기도 하였다. 현 정자의 '청간정'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현 정자의 북서쪽으로 약 lOOm 거리에 해발 약 20m의 바위산 (군사보호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곳임) 이 있는데 이 산 암벽에 행서체 '청간정'이라 종(縱)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의 평균크기는 종 50cm×횡 38cm인데 송시열의 글자(초서체)가 좌행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 크기는 종49cm×횡30c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만경루(萬景樓)'에 대한 설명과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재군남사십리만경대남일리이임간수…(在郡南四十里萬景臺南一里以臨澗水…중략)"라는 내용이 사실임이 이를 통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관동읍지(關東邑誌)≫ : 고성군, 1985, ≪고성군지(高城郡誌≫



◇아야진 성황당(我也津 城隍堂)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목조물(성황당)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리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아야진항구 마을의 남편 바닷가 야산과 마을 북편 야산등대 밑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것은 벽돌로 쌓아 기와를 얹고 주황색 칠을 하였다. 벽돌로 담을 둘러 외부와 격리하였다. 매년 10월에 길일을 잡아 제를 올린다고 하는데, 바다에 먼저 면해 있기 때문에 풍어제를 올릴 것으로 추정된다. 당집 앞쪽에는 5-6평 넓이의 시멘트로 만든 사각의 시설(높이 70cm)이 있는데 제사준비를 위한 곳이다. 모서리와 중간부분에 둥근 고리시설을 하여 차양막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당집 쪽으로 가마솥 2기를 걸어 놓을 수 있도록 아궁이 시설도 마련하고 있다. 북편의 것은 최근 고성군에서 예산을 지원하여 현대식으로 개축하였는데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1996년 6월30일에 건축하였다. 내부에는 "성황신지위(城隍神之立)"라는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이근철옹 영세불망비(李根喆翁 永世不忘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불망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리
【시        대】조선시대
【유적내용】
7번 국도를 통해 토성면에서 간성쪽으로 올라가다 아야진항 입구와 아야진 해수욕장 입구가 만난는 지점, 버스정류장의 위쪽 밭에 위치한다. 비는 옥개석이 없는 하현형의 형태로 화강암류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각자의 마모가 심하다. 전면에는 "가의대부근이근철영세불망비(嘉義大夫李根喆世不忘碑)"라 각자되어 있고 전면 우측에 "백가활한 무○제민(百家活患務○濟民)." 전면 좌측에 "일편어석 천재감인(一片語石千載感人)"이라 되어 있다. 건립 연대가 명문되어 있는 뒷면은 마모가 심하여 "○○○(十○)(二年)○삼십(二十)"만을 판독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천학정(天鶴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정․각(정자)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177
【시        대】근대 (1931)
【유적내용】
천학정은 토성면과 죽왕면을 경계로 흐르는 문암천을 지나 1km를 가면 교암리 마을 앞에 송림이 우거진 조그마한 동산에 건립되었다. 이 동산을 동해의 신비를 간직한 기암괴석의 깎아지른듯한 해안 절벽에 위치해 있으며, 더욱이 남북으로 청간정과 능파대가 위치하여 정자의 풍광을 돋우고있다. 천학정은 1931년 지방 유지 한치응․최순문․김성운 등이 발의하여 전면 2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으로 건립하였으며, 현재 40cm의 초석 9개 위에 건립된 정자는 1994년 고성군에서 전체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정자의 전면에 "천학정"현판이 게판되어 있으며, 정자 내에는 "천학정기(天鶴亭記)"와 그 좌측으로 "천학정" 시판이 게판되어있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면장 한치룡 영세 기념비(面長 韓致龍 永世記念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념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시        대】근대(1920)
【유적내용】
토성면 교암리에 있는 '천학정(天鶴亭)' 으로 들어가는 입구 우편 공터에 자리하고 있다. 비는 자연암괴의 평편한 윗면에 홈을 파서 세웠다. 비 전면에는 "면장한공치룡영세 기념비"로 각자되었으며,그 후면에는 "단기사이오삼년 경신팔월일 교암송계"라 음기하여 1920년에 이 지역 계원들에 의해 건립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한치룡의 호는 오봉으로 현조하는 '천학정'에 대한 '천학정기'를 쓰신 분이다. 비는 화강암재를 사용하였으며 비고 llOcm, 폭 41cm, 두께 18.5cm 규모로 갓은 없는 형태이다. 기념비의 전면에는 "면장한공치룡영세기념비(面長韓公業孫永世記念碑)"로 각자되어 있으며 , 그 후면에는 1920년에 교암송계의 계원들에 의해 건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박길준 가옥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가(민가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백촌리 82
【시        대】근대(1929)
【유적내용】
이 가옥은 마을의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어 있고 상류주택의 배치 형식 인 ㅁ자 배치를 하고 있다.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문의 상량문을 통해 1929년에 건축된 가옥임을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어 있고 상류주택의 배치형식인 ㅁ자 배치를 하고 있다. 1929년에 건축된 가옥으로 주인이 거처하고 있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안채는 마루를 중앙에 두고 안방, 건너방이 있고 안방에서 ㄱ자로 꺾어져 부엌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이 거처 하였으며, 건너방은 며느리의 생활 공간이었다. 부엌은 집의 규모가 크므로 부식을 보관하는 찬광과 찬모의 뒷방에 붙어 있다. 홑집의 굴도리 팔작기와지붕 형식의 가옥으로안채가 겹집이 아니고 흩집으로 구성된 것이 이채롭다.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 세겹대 쌓기이며, 건너방에서 안방까지 툇마루가 연결되어 있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되지 않고 세살 분합문이 있으며 건너방의 뒤쪽에는 수납, 기타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공간으로 머릿사랑, 마루, 큰사랑으로 구성되고 이어서 아랫사랑과 마구간이 있다. 큰사랑의 안채쪽에 방다박보다 15cm정도 낮은 지금의 현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 신발방이 라는 공간이 있는데 흙바닥으로 되어 있고 신발의 수납과 우천시의 이용을 돕는 방으로써 출입하지 전의 전이 공산의 역할을 한다. 일제시대 때 건축된 가옥이기 때문에 남녀의 공간 구분이 엄격하지는 않으나, 출입구 부분은 나누어져 있어 남녀의 공간 마당과 행랑 마당이 있다. 즉 집의 좌측으로 맞배지붕 형태의 판벽, 판문을 가진 곳간채를 본채와는 별동의 형태로 가지고 있다. 담장은 하단부에는 불규칙하게 치석된 사각형의 돌을 격자문형태로 쌓고 그 위에 벽돌 또는 자연석과 기와로 혼축하였다. 그리고 맨위에는 기와로 덮었다. 처마밑 구조는 양서 국화문 쇠서 여의주 수서 수탉으로 조식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백촌리 토성(高城 栢村里 土城)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백촌리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이 토성은 토성면사무소에서 간성으로 북상하다 문암교를 건너기 직전 검문소의 건너편에 있는 백촌리 마을 3반의 12호를 감싸고 있는 낮은 구릉일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백촌리토성', '자사성지'라는 별명과 함께 고려시대에는 마호검사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이 성지는 타원형의 평면에 북고남저(北高南低)형을 하고 있다. 동광중․농고등학교와 인접해 있는 북벽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인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나 완전한 형태의 축조구간은 확인되지 않고 최근에 개설한 군사용 교통호에서 토석혼축의 기단부만 노출되어 있다. 동문지(東門址)로 추정되는 구간은 오래전부터 가옥이 들어서 형태를 찾아 볼 수 없고. 40여m의 남벽 역시 약간의 윤곽선만 확인 될 뿐이다. '성문개'로 불리고 있는 '서문지(西門址)'는 도로의 확장 및 주택의 중축으로 원형을 찾아 볼 수 없으나, 남북으로 연결되는 체성(體城)의 기단부에서 북벽과 같은 토석혼축의 구간이 노출되어 있으며 판축양식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성 내부의 전체 면적은 약 1만여평정도이며 북벽 후사면의 밭으로 이용되는 완만한 대지는 인위적인 삭토의 흔적이 뚜렷하다. 성의 내부에는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기와 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다량 산포되어 있다. 서문지역 남쪽 모서리에는 기단부로 보이는 축성 흔적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鑛調査資料)≫에 "통성면백촌리 사유백촌리부락(土城面栢村里私有栢村里部落)의 주위에 있음. 주위 약 250간(450m) 토축불완전(土築不完全)"이라 하였고, ≪문화유적총람(상)≫에는 "흔적만 남아 있는데 서남 218m의 봉근(峰筋)이고 약 450m의 토축(土築)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가선대부 김학현 묘비(嘉善大夫 金鶴鉉 墓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묘비(키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 1리 남쪽 무나무골(무레골)
【시        대】근대
【유적내용】
마을 입구에서 남편 개천을 따라 (남편 농로) 설악산 쪽으로 약 1km정도 가다 보면 광산김씨 묘역이 나온다. 이 묘역 동편 아래 도로편에 김학연의 묘가 있다.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이 있으며 묘역 주변에는 수령 100년 정도되는 소나무들이 있다. 비는 갓이 있고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크기는 115cm×40.3cm×l7cm이다. 비의 정면에는 "가선대부광산김공휘학현지묘비(嘉禪大夫光山金公諱鶴鉉之墓碑)"라 새겼고, 비 우편에는 "계미년구월 입 계미년구월이십일손백수근지(癸未年九月立癸未年九月二十日孫伯流謹識)"라 적어 1943년에 이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 좌편에는 "공즉광성군휘정십팔세손야조휘기섭부가선재윤유삼(公卽光域郡諱鼎十八世孫也祖諱箕燮父嘉善在潤有三)" 이라 적혀 있다. 비의 뒷편에는 4행으로 "남일녀장석현삼차두현차즉공야기삼월사일장해좌원자통정욱묘재수청치대평병좌유비석손백수력양양고성춘○학교훈도현임양양공의차손중수억수인수○금공지행장이준복지입언군자불감술언계미구월이십일(南一女長碩鉉三次斗鉉次卽公也忌三月四日葬亥坐原子通政旭墓在水淸峙大坪 坐有碑石孫伯流歷襄陽高城春○學校訓導現任裏陽公醫次孫仲洙億流仁流○今公之行狀以竣復之立言君子不敢述焉/癸未九月二十日)"이라 적혀 있다. 김학현은 갑인(甲寅)년 (1854)에 태어나 공의(公醫)를 지내다 계미(癸未)년(1943)에 사망하였다. 김두현의 형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김두현 송덕비(金斗鉉 頌德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 1리 138
【시        대】근대
【유적내용】
이 비석은 권영구씨댁 뒷편 밭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밭의 소유주는 김용문씨이다. 김두현은 김용문씨의 고조부인데 소화(召和) 6년(1931) 문중에서 그의 공적을 기려 세운 비다. 비 대
좌는 경작토에 매몰되어 있으며 비신과 비갓은 화강암제로 이루어져 있고 갓에는 기왓골 조각이 있다. 비의 전면에는 "증통훈대부예조판서광산김공두현지비(贈通訓大夫禮曺判書光山金公斗鉉之碑)", 전면우측에는 "명 성자침중의윤고 희노불형사중시견(銘性姿沈重義允高喜怒不形處事中矢見)" 좌측에는 "교자논손활인구체 인어무점자선보시(孝子論孫活人求濟言語無慈善普施)"라 새겨 있다. 6행으로 된 음기에 의하면 김두현은 계해년(癸亥年)(1863)에 태어났고, 광무(光武) 2년(1898) 증직, 경오년(庚午年)(1929)에 사망하였으며 특별한 벼슬은 없었다. 비문은 참봉 엄주얼(嚴柱烈)이 짓고, 종손 백수(伯流)가 세웠다. 비의크기는 132cm×55cm×2l.5c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이태영 가옥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성 (민가의 고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시        대】<시대미상>
【관  리  자】
【유적내용】
1993년 4월 16일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그 터만 알 수 있다.
【참고문헌】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화암사(高城 禾岩寺)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114호(1990년 9월 7일)
【유적종류】사찰(현존 고사찰 및 부속건물)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산 136-11
【시        대】통일신라
【관  리  자】화암사
【유적내용】
세계 잼버리 대회장이 있는 신평들에서 1km정도 계곡안으로 들어가서 자리하고 있다. 진입로는 잼버리 대회시 입구까지 2차선 아스팔트길로 건설되어 있어 이곳을 찾기에 편하다. 화암사는 본래 건봉사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신흥사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혜공왕때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화암사(華巖寺)라 명명하였으며, 이후 여러차례의 화재를 겪어 조선 고종원년(1864)에 이곳 수바위 밑에 옮겨 짓고, 이 바위를 한자로 표기해 수암사(穗岩寺)라 하였다가 1912년 화암사라 개칭했다. 현존하는 일주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체 등 모든건물들은 1991년 세계 잼버리 대회준비를 위한 주변 정비 계획에 따라 기존 건물들인 법당들을 철거하고 새로이 중건한 것이다. 따라서 화암사에서 옛 건축물은 부도군과 일부 계단석들만이 남아 있어 옛 산사의 품위를 잃어 버렸다. 이 부도군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아세아문화사, 1977,<화암사사적>, ≪건봉사본말사적유점사본말사지≫, P.147 : 조선총독부, 1911, <화엄사사적>,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p.88 : 고성군․강릉 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화엄사 삼성각 서편 부도군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시        대】<시대미상>
【관  리  자】화암사
【유적내용】
이 부도군에 대한 조사내용은 강릉대학교박물관의 조사보고서(1995)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부도군이 있는 곳은 삼성각 서편 약 20여평의 대지로 2기가 자리하고 있다. 석조부도 1은
2매석으로 방형의 지대석을 이루었으며, 이 지대석 위에 아무 조식이 없는 평면 8각의 부재를 놓아 중대석을 삼고 있다. 하대석은 중대석 받침은 없다. 탑신 받침인 상대석은 상단에는 복엽 8판 연화문이 들려 있고(양련) 판단과 마주보며 하면에 단엽 8판의 연화문이 대칭되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원구형으로 표면에는 아무 조식이 없다. 옥개석은 사모지붕의 형태인데, 지붕 위 상면에는 기와골이 모각되어 있고, 4우(隅)의 합각선이 두툼하다. 낙수면에는 각각 화문(花紋)이 조각되어 있는데, 합각의 상면과 연결되어 있다. 옥개석의 상면에는 보주형의 상륜부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역삼각형의 구조를 보이고 있어 불안한데, 강릉대 조사단은 2기의 부도재를 합하여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체 높이는 249cm이다. 석조부도 2는 석종형 부도로 탑신의 상단에는 화문이 양각되었고, 보주의 하단에도 단엽 16판의 복련이 조식되어 있다. 보주의 하단과 탑신의 화문 사이에는 단엽 8판의 복연이 있다. 전체 높이는 120c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화암사 일주문 부근 부도군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시        대】<시대미상>
【관  리  자】화암사
【유적내용】
일부문에서 화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17.8cm×9.5cm 규모의 담장 내에 13기의 부도와 1기의 비석이 2열로 배치되어 있다. 각 부도에 대한 설명은 뒷줄 좌
측부터,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순서를 정해 설명할 것이다. 영담탑(影潭塔)은 장방형의 지대석을 구비한 석종형의 부도이다. 지대석은 83cm×71cm×l5cm 크기로 높이 115cm의 석종형부도를 놓았다. 부도의 상면에 1조의 음각선을 돌리고 윗쪽에 7엽의 삼각형 모양의 화문을 음각하였다. 정상에는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된 낮은 보주가 있다. 부도의 전면에는 자경 13cm의 '영담탑(影潭塔)'이란 명문이 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이 영담(影漂)임을 알 수 있다. 원봉탑(圓奉塔)은 장방형의 지대석을 구비한 석종형 부도이다. 지대석은 108cm×110cm×l5cm 크기으로 상면에 높이 180cm의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부도의 상면에는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된 높직한 보주를 배치하고 화면에는 2조의 음각선을 돌리고 보륜처럼 처리하였다. 부도의 전면에는 자경 14cm의 '원봉탑(圓奉塔)'이란 명문이 있다. 청암탑(淸巖塔)은 자연석의 장방형 지대석(거칠게 치석)을 구비한 석종형 부도이다. 지대석은 126cm×l12cm×23cm 크기로 상면에 높이 134cm의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상면에 놓인 보주는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단에는 2조의 음각선을 돌리고 있다. 부도의 전면에 자경 15.7cm '청암탑(淸巖塔)'이란 명문이 있다. 춘담당대선사비(春潭堂大師碑)는 비좌․비신․이수를 갖춘비석이다. 비좌는 장방형으로 133cm×93cm×58cm이 크기로 상면 각변의 모를 죽여 약간 경사지게 하였다. 비신은 79cm×167cm×20cm의 크기로 양면에 명문을 새기고 있어 2면 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자경은 양면이모두 4cm으로 동일하다. 이수는 123cm×85cm×68cm의 크기로 전면에는 장방형 액(額) 3개가 산자형을 이루고 있고 측면에는 음각된 장방형 약이 2개씩 있다. 후면에는 세로방향의 장방형
액 2개를 중앙에 놓고 좌우에 소형액을 음각하였다. 이수의 하단은 각변의 모를 죽여 굽형을 이루고 있고, 정상에는 2개의 보주석을 놓았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1m이다. 또 음기(陰記)된 내용 중 "봉수(泰修)"는 "봉수(奉秀)"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경파치성 상좌 연성대인(鏡波致聖上佐蓮城大仁)"에서 "상좌(上佐)"의 음각은 자체(字體)가 비문의 글자와 비교할때 조잡하여 처음에는 낙서로 생각하였으나. 내용상으로 볼 때 누락된 자구를 후일 누군가 추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판단된다. 춘담대법사탑(春潭大法師塔)는 화강암을 거칠게 치석하여 상면에 볼록하게 부도를 놓을 수 있는 원형의 대를 다시 마련하고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136cm×82cm×l7cm의 크기으로 상면에는 높이 5cm의 부등변 8각형 단받침을 형성하여 석종형 부도를 받고 있다. 부도는 높이 170cm로 전면에 자경 I8cm로 "춘담대법사탑(春潭大法師塔)"이라 음각되어 있다. 부도의 상면에는 삼산형의 고사리문이 음각되어 있고. 상단에는 높직한 단위에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된 보주를 놓고 있다. 전면
에는 단엽 9판의 양련이 음각죄어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화곡당탑(莘谷當塔)은 8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지름 76cm, 높이 48cm의 8각형으로 전면에는 단엽 8판의 2중 양연이 돌려져 있고. 연화문의 사이사이에는 간엽이 조식되어 있다. 석종형 부도는 높이 124cm로 정상에는 1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탑신과 1석으로 조상된 보주를 놓았다. 부도의 전면에 자경 13cm의 "화곡당(葦谷堂)"이라 음각되어 있다. 무명부도(無名浮屠)는 장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부도는 석종형으로 높이 105cm 크기이다. 상면에는 단엽 12판의 돌출된 양연대 상면에 삼치창형의 양각선이 형성되어 있고. 정상에는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된 낮은 보주가 있다. 부도 대석(浮屠臺石)은 장방형 지대석 상면에 높이 12cm, 지름47cm의 8각형 받침을 조출하고 있다. 탑신받침은 1변 길이 14cm로 복엽 16판의 복연이 돌려져 있다. 무명부도(無名浮屠)는 장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기단, 탑신, 옥개석을 받고 있다. 지대석은 장방향으로, 상면에는 부등형 8각형이 받침을 조성하여 기단을 받고 있다. 기단은 팔각형으로 높이 12cm, 1변 35cm, 지름 72cm의 크기로 상면에 복엽 11판의 복연이 조식되어 있다. 탑신은 원구형으로 높이 50cm, 지름 72cm의 크기이다. 옥개석은 상면의 모를 죽인 사모지붕의 형태로 합각선이 두툼하여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48cm이다. 무명부도는 방형 지대석 상면에 높이 19cm의 2단으로 조성된 8각형 괴임대를 조출하였다. 괴임대의 상면에는 8각형의 2단의 하대석을 놓았는데, 상면에 복엽 16판의 복연대가 조식되어 있다. 하대석의 상면에 8각형의 중대석과 고복형 석재 등 1석으로 조성된 부재가 놓여 있고, 상면에 옥개석을 놓았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합각선이 두툼하다. 전체 높이는 180cm이다. 무명부도는 지대석 상면에 원통형의 탑신을 놓았다. 상면에 높이 20cm의 2단으로 구성된 원형받침부를 조출하였고 받침의 하단에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어 있으며 상단은 1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상면이 수평인 원구형으로 높이 60cm, 지름 44cm의 크기이다. 인봉탑(印奉塔)은 장방형의 지
대석 상면에 석종형 주도를 놓았고, 높이 95cm의 상면에는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된 보주가 있는데, 상면에 12엽의 삼각형 화문이 조식되어 있다. 무명부도는 지대석, 하대석, 탑신석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별개의 부재로 보인다. 지대석 상면에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원형을 이루며 음각되어 있고, 상면에는 단엽 16판의 양연이 조식된 8각형의 하대석이 놓여있다. 탑신은 높이 90cm의 석종형이다. 월송당탑(月松堂塔)은 평탄한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삼아 하대석, 탑신석, 옥개석을 놓았다. 2단으로 구성된 높이 30cm의 원형 하대석의 하단에는 복엽 16판 복엽이, 상면에는 단엽 21판의 양연이 선각되어 있다. 탑신은 높이 77cm의 석종형이고, 8각형의 옥개석은 보주까지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합각성이 두툼하고 낙수면의 경사 급할 뿐만 아니라 낙수면의 길이가 짧아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88c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인흥리 사지(仁興里 寺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인흥 2리
【시        대】고려시대
【유적내용】
이곳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토성면 사무소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속초시 방향으로 남향하다. 광포호를 지나면 잼버리 대회장으로 가는 306번 군도가 나오는데 이 도로를 타고 가다 세종레미콘회사의 레미콘 차량 출입구로 들어가는 방법과 둘째는 7번 국도를 타고 더 남향하여 용촌리으로 진입하여 인흥리 마을에 도달하기 전 도로 우측에 있는 세종 레미콘으로 들어가는 농로를 통하여 도달하는 방법이다. 사지라고 알려진곳은 레미콘 공장에 서 lOOm거리로 현재 약 400평의 밭과 묘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뒷편 산록에는 40-50년생의 소나무와 활엽잡목이 우거져 있고, 주위에서는 예전에 사찰이 있었음을 증명하듯 약간의 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인흥리 247번지에 거주하는 박창동(朴昌車)씨(47세)에 의하면 증조부때부터 매 절기마다 치성이 드려왔고, 6.25이후 도난 당한것을 다시 지금의 위치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벽돌건물  약 20년전 사비(私費)로 지었다고 한다. 사지 서편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벽돌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석조여래좌상인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석불은 낮은 육계가 돌출되어 있고, 양귀는 어깨까지 닿았다. 동그란 상호에 표현된 양 눈, 코, 입은 모두 인위적으로 마멸된 것으로 보이는데, 불상에 치성을 드리던 불임 여인들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마을주민의 전언으로는 이 마멸은 한국전쟁 중에 북한군의 소행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상호에 비해 비교적 넓직한 어깨를 지닌 신체에는 좌견 편단의 법의가 착용되었는데, 전면에 7-9조의 의문이 흐르고 있다. 양팔은 밑으로 내려 무릎위에 놓인것으로 보이는데, 오른팔, 왼팔, 모두 손목 이하의 파손이 심하여 수인을 확인할 수 없다. 상호는 둥근 원만상으로 신라불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가슴과 배부분이 전면으로 심하게 돌출되어 거의 수직을 이루고 있어 신체적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목부분은 체형에
비해 두텁고 삼도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불상은 평면괄각형의 대좌에 안치되었는데 대좌의 하부는 매몰되어 정확한 형상을 알 수 없으나 각형 2단의 받침이 조출되고 있다. 대좌와 불상재질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적인 조형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고 114cm, 두고 34cm, 두폭 24cm, 견폭 60cm, 흥폭 42cm, 슬고 22cm, 슬폭86cm, 대좌지름 80cm이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선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원암리사지(元岩里寺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333번지
【시        대】고려 시 대
【유적내용
현대설악프라자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사지에는 석탑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모두 경작지이거나 복토된 상태여서 당시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토성면 원암리에 거주하는 송영식씨(64세)에 의하면 이 사지에는 6.25부터 휴전후 약 3~4년 까지 1군단 사령부와 연병장이 있었다고 하며, 현존하는 석축 역시 당시에 쌓았다고 한다. 이곳의 사찰은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빈대가 들끓어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후 화암사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6.25사변 때까지도 약 2m가량되는 부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도 붕괴되어 있었고 1군단이 주둔할 당시에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사지 내에는 길이 34m, 너비 18m, 높이 4m의 3단 석축이 남아 있는데, 1군 사령부의 주둔시 개축하여 옛 자취는 볼 수 없으며, 주변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용촌리 유물포산지(江陵 龍村里 散布地)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상유물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장면 용촌리 입구
【시        대】청동기시대
【유적내용】
속초에서 고성군으로 들어가면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곳이 용촌리이다. 이 마을을 지나는 7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용촌교(龍村橋)를 건너면 도로 서편에 동-서로 길게 뻗은 해발 약 40m정도의 낮은 야산지형이 있는데 이 야산의 능선부에 유물포산지가 자리하고 있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남쪽으로 용촌천(龍材川)과 넓은 들이, 북쪽으로는 석호(潟湖)인 광포호(廣浦湖)가, 동편으로는 동해바다가 자리하고 있어 선사인들이 생활근거지로 자리잡기에 양호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무문토기 2점밖에 수습하지 못하였으나 강릉대 학교박물관 조사자료(1995)에 의하면 이곳에서 청동기시대의 돌점 및 무문토기 조각들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노상언 효자각(盧象彦孝子闇)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효자각)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 2리 547번지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광주 노씨 종중
【유적내용】
노상언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주경 야독으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도는 물론 웃어른을 공경하는 선비다운 행실과 선행을 다하였다. 40세 되던 해 극심한 가뭄으로 농사가 흉작이 되자, 머슴살이로 부모의 공양을 극진히 하였으며, 부모가 병석에 눕자 토지를 매각하여 치병하였다. 이로 인해 노상언은 국가로부터 효자 칙지(孝子勅旨)를 받았으며, 그의 효행은≪동국명현록≫에 등재되었다. 그의 효자각은 칙지를 받은 후 140년만에 문중에서 건립하였으나, 그 후 전쟁으로 여러 차례 이건되었으며, 현재의 효자각은 1892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비갓이 씌원진 효자비에는 "효자 학생 광주 노공 상언지비(孝子學生光州盧公象彦之碑)"라 새겼으며, 효자각 내에는 "효자학생노상언지문상지이십구월일명정(孝子學生盧象彦之門上之二十九年壬辰九月日命旌)"라 쓰여 있다. 현재의 비석은 1991년 3월 22일에 세웠으며 "효자학생노상언지비(孝子學生盧象彦之碑)"라 조석(鳥石)에 음각되었고, 비갓이 씌여져 있다. 비신은 115cm×42.5cm×l8cm, 비각 185cm×l85cm 덤벙주초, 맞배기와지붕, 담장을 잘 보존되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 : ≪동국명현록≫



◇열녀 연안 김씨 정려(烈女 延安 金氏 族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 2리
【시        대】조선시대
【유걱너린】
조선시대 고종때 노병곤의 연안 김씨는 남편이 병환으로 생명이 위독해 지자 단지하여 피를 먹여서까지 회생을 바랬지만, 남편은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연안 김씨는 청상과부로 평생동안 시부모를 모시는 효부였다.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죽은 남편을 사모하는 열녀였다. 또 시동생 노병서의 장남 조재용을 양자로 삼아 부군의 대를 이었을 뿐만 아니라 휘문고보에 진학 시키고 이어서 동경에 유학하여 조도전대학까지 졸업시키는 현모였다. 이로써 부인은 예조학사원으로부터 효부표창을 받았으며, 광주 노씨 문중에서는 연안 김씨의 효부와 열녀됨을 기리기 위하여 1952년 10월 10일 마을 어귀에 영안 김씨의 열녀 비각을 건립하고 그의 업적을 현판에 새겨 영구 보존케 하였다. 현재 열녀각은 기와를 덮은 시멘트 블록 담으로 울을 세워 각의 면모를 갖추었다. 비의 전면에는 "효열학생노병곤처 유인연안김씨지비(孝烈學生盧炳琨妻孺人延安金氏之碑)"라 새겼으며, 그 여백에 그 효행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역사와 문화유적≫



◇김행음 기념비(金杏陰 記念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념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소위 비석거리)
【시        대】일제시대(1939년)
【유적내용】
속초-고성간 7번 국도 서편의 설악물산 공장 건물 바로 앞에 위치한다. 현 위치는 신도로 건설로 인해 원 위치 에서 약 150m정도 설악물산 쪽으로 이건된 상태이다. 비의 전면에는 "김행음선생영세기념비(金杏陰永世記念碑)"라 되어 있고, 전면 우편에는 "공시백초 포재생○(公試百草 再生○)", 좌편에서 "석어불후 용표미리(石語不朽用表微裏)", 후면에는 "기묘(己卵) 4월(4月) 日 안동 양영창(安東裵永昌)"이라 음각된 것으로 보아 의술로 많은 사람을 구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건립연대는 1939년이다. 비의 크기는 97cm×48cm×26.5cm인데 비갓이 있고,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봉포리 봉수지(鳳浦里 烽履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봉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봉포리 봉수지는 봉포리 토성에서 서쪽으로 약 600m거리의 해발 58.9m 높이 산정에 위치 한다. 봉수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성황당이 들어서 있어서 거의 모두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주변 지역은 군부대 시설로 인하여 상당 부분이 파괴된 상태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봉포리 부락에 서방 약 400간(727m)의 산정에 있으며, 주위 약 20간(36m)에 토루(土壘) 완전"이라 하였고, ≪문화유적총람≫에는 "일명 성황당이라 부르며 흔적만 남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봉수로 추정되는 성황당의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고 자기 조각도 수습된 바 있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음고적조사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 총람≫상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봉포리 성지(鳳浦里 城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 88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봉포리 토성은 7번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광포호를 지나 봉포리 마을에서 좌측 lOOm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 토성의 흔적은 완전히 없어진 상태이다. 봉포리 토성은 옛 기록에는나오지 않다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토성면 봉포리 사유 봉포리 광포의 서남 2․3정(町)의 봉근(峰筋)에 있음. 주위 약 250간(454m) 토축 불완전”이라 하였고, ≪문화유적총람≫ 상에는 “토축성으로 해안에서 약 200m 서쪽에 위치한 곳에 옛 성터의 잔재가 남아 있는데, 둘레 약 500m이며 기와 조각이 산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토성은 1991년부터 택지조성사업과 신도로 건설 등이 연이어 착수되면서 많은 부분이 멸실되었으며, 1995년에 실시된 강릉대학교의 고성군 문화유적 지표조사시에도 남아 있던 성의 일부 흔적은 현재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멸실된 상태이다. 현재 성의 중심을 관통하는 7번 국도의 확장공사로 인한 절개면, 기상청 속초지국의 동남편에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경사면과 서남편 언먹너머 사슴농장이 있는 곳, 그리고 속초지국의 서측 단애면에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전국유적목록≫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통정대부 김정권 불망비(通政大夫 金正權 不忘碑)
【지정사진】<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불망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 2리
【시        대】근대(1904년)
【유적내용】
신평―용암―성대리로 연결되는 304번 군도의 도로변 우측, 성대리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 건너 동편 길가에 세워져 있는 비이다. 영월 엄씨비에서 약 90m 도편 도로가에 있다. 보(洑)의 축조과정에 자선을 베푼 김정권의 공덕을 기려 1904년 3월에 보지주(洑地主) 일동이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통정대부김정권영세불망비(通政大夫金正權永世不忘碑)'라 새겼으며, 후면에는 '벙바우보개돌인수자선기념비(洑開乭引水慈善記念碑)'라 되어 있다. 콘크리트기단에 오석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111cm×42cm×l5.5cm이다.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이 비에 각자된 벙바우는 약 400m동쪽 낮은 야산의 바위를 말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열녀 영월 엄씨 정려(烈女 寧越嚴氏旌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 27
【시        대】근대(1928)
【유적내용】
영월 엄씨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하고 부모에 효도함이 극진하였으며, 김동경에 시집가서도 남편 김동경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간병을 극진히 하였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치병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부인은 단지하여 피를 마시게 하여 남편은 완쾌되어 6년을 연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1928년 열녀로 표창되었다. 비갓이 씌워진 열녀비의 비신은 140cm, 비폭은 44cm, 두께는 21cm이며, 1928년에 작성된 "열녀 엄씨 포창완의문(烈女嚴氏褒彰完議文)"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열녀비는 용암리에서 성대리로 연결되는 도로면에 위치해 있으며, 비각은 건립되지 않았다. 그 전면에는 "전참종 김동경지 처 열부 영월 엄씨지 비(前參奉 金東經之妻烈婦寧越嚴氏之碑)"로 각자되어 있으며, 그 후면에는 효행과 행장이 기술되어 소개되고 있다. 비석은 화강암재이며, 크기는 140cm×44cm×21cm이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역사와 문화유적≫
※註 : 본자료는 19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전국문화유적총람 제3집'에서 발췌한 것이며,본자료조사를 위해 현장답사에서 수고해주신 국립문화재연구소 심영섭, 고 송필윤, 유영도, 이우형 선생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