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 나. 고성 지역어의 역사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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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강원도 지역에 살았던 고대 종족은 예(穢)와 맥(貊)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예(穢)가 사용했던 언어에 대한 삼국지위지 동이전 (三國志 魏志 東夷傳)은 "옛부터 노인들이 스스로 일컫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한다~언어와 풍습은 고구려와 거의 같으나 의복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其耆老舊自謂 與句麗同種~言語法俗 大低與句麗同 衣服有異)"라고 기술해 주고 있다. 예(穢)는 고구려와 거의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강원도 지역에서 사용했던 언어는 현대의 강원도 지역 방언과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 날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예전 신라어의 계통을 이어받은 언어이며, 예전 신라어는 고구려어와는 달리 한계(韓系)에 속하는 언어로 삼국통일 이후에도 경상도 방언을 중심으로 했던 언어였음에 반해 고구려어는 북방군(北方群)의 부여계(夫餘系)에 속했던 언어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소멸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가 완전 별개의 언어였다고 단정할 만큼 극심한 차이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멸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고구려어의 단편적인 모습을 추측하게 해주고 있는 삼국사기 지리지(三國史記 地理志) 권37의 지명들에서 재구(再構)해 볼 수 있는 단어들의 독법(讀法)은 중세 국어와 유사한 모습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가령 중세 국어의 엇(橫)에 대한 고구려어의 어기(於기 *es), 검-(黑)에 대한 금물(今勿kƏ mƏ r), 바회(巖)에 대한 파의(波衣), 파의(巴奈 *pai), 쇼(牛)에 대한 수(首*su)등의 일치(李基文, 1983, p.35 참조)는 북방계를 대표하는 고구려어와 남방계를 대표하는 신라어가 방언적인 차이 이상의 것은 아니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어는 산(山, 뫼)에 대한 '달(達)․공(孔)' (굵, 구멍)에 대한 '제차(濟次)․제차(齋次)',근(根․불휘, 뿌리)에 대한 참(嶄), 적(赤)(―, 붉―)에 대한 '사비척(沙非斤), 기복(斯伏)'등 다른 언어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어휘들을 보여주기도 한다(李基文, 1983, p.34참조).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본다면. 고대 강원도 지역에서 사용하였던 언어는 현대의 강원도 지역방언과 어느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한 방언적 차이가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고려의 성립과, 경주에서 개성으로의 수도권의 이전을 거쳐조선시대에서 현재까지 이르는 동안 고구려어의 언어적 특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현재의 강원도 방언으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강원도 방언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끔 우리가 이용할 만한 문헌자료나 그 이외의 어떤 자료도 남겨진 것이 없다.
다만 고성군의 고유어 지명들 중 다음의 예들에서
몽그미, 민달그미(마차진리)
용숫개미 (오봉리 송호정 및에 있는 개이름)
행개미(오봉리 송호정 건너편에 있는 개이름)
용소꾸미(화진포 가운데의 가장 깊은 소이름)
등의 마지막 음'―미' 는 진(津), 소(昭), 수(水) 등 물과 관계되는 지명의 끝에 붙어 있는 것으로 고구려어의 흔적을 보여주는 예들인 것 같아 흥미롭다. 고구려 지명에서 '수(水)'를 뜻하는 음독(音讀)은 '매(買)', 미(米)', '미(彌)'(買忽一云水城, 內乙買一云內冷米, 買召忽縣一云漏鄒忽 참조)자의 음독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들의 당시 우리나라 음은 '미'정도로 읽혀졌을 것으로 추정(李基文,1983,p.33 참조)되고 있기 때문에 상기 고유어 지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말 '―미'는 고구려어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예들이다.
반면 고유어 지명 '어리미, 어리밋골'에 대한 한자어 명칭은 '유산동(幼山洞)'으로 '―미'가 산에 대응하는 예들이 있어 앞서의 사실을 확실시하기 위해선 고유어 지명에 대한 좀 더 면밀한 검토가 따라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된 뒤에라야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오늘 날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예전 신라어의 계통을 이어받은 언어이며, 예전 신라어는 고구려어와는 달리 한계(韓系)에 속하는 언어로 삼국통일 이후에도 경상도 방언을 중심으로 했던 언어였음에 반해 고구려어는 북방군(北方群)의 부여계(夫餘系)에 속했던 언어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소멸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가 완전 별개의 언어였다고 단정할 만큼 극심한 차이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멸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고구려어의 단편적인 모습을 추측하게 해주고 있는 삼국사기 지리지(三國史記 地理志) 권37의 지명들에서 재구(再構)해 볼 수 있는 단어들의 독법(讀法)은 중세 국어와 유사한 모습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가령 중세 국어의 엇(橫)에 대한 고구려어의 어기(於기 *es), 검-(黑)에 대한 금물(今勿kƏ mƏ r), 바회(巖)에 대한 파의(波衣), 파의(巴奈 *pai), 쇼(牛)에 대한 수(首*su)등의 일치(李基文, 1983, p.35 참조)는 북방계를 대표하는 고구려어와 남방계를 대표하는 신라어가 방언적인 차이 이상의 것은 아니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어는 산(山, 뫼)에 대한 '달(達)․공(孔)' (굵, 구멍)에 대한 '제차(濟次)․제차(齋次)',근(根․불휘, 뿌리)에 대한 참(嶄), 적(赤)(―, 붉―)에 대한 '사비척(沙非斤), 기복(斯伏)'등 다른 언어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어휘들을 보여주기도 한다(李基文, 1983, p.34참조).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본다면. 고대 강원도 지역에서 사용하였던 언어는 현대의 강원도 지역방언과 어느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한 방언적 차이가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고려의 성립과, 경주에서 개성으로의 수도권의 이전을 거쳐조선시대에서 현재까지 이르는 동안 고구려어의 언어적 특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현재의 강원도 방언으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강원도 방언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끔 우리가 이용할 만한 문헌자료나 그 이외의 어떤 자료도 남겨진 것이 없다.
다만 고성군의 고유어 지명들 중 다음의 예들에서
몽그미, 민달그미(마차진리)
용숫개미 (오봉리 송호정 및에 있는 개이름)
행개미(오봉리 송호정 건너편에 있는 개이름)
용소꾸미(화진포 가운데의 가장 깊은 소이름)
등의 마지막 음'―미' 는 진(津), 소(昭), 수(水) 등 물과 관계되는 지명의 끝에 붙어 있는 것으로 고구려어의 흔적을 보여주는 예들인 것 같아 흥미롭다. 고구려 지명에서 '수(水)'를 뜻하는 음독(音讀)은 '매(買)', 미(米)', '미(彌)'(買忽一云水城, 內乙買一云內冷米, 買召忽縣一云漏鄒忽 참조)자의 음독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들의 당시 우리나라 음은 '미'정도로 읽혀졌을 것으로 추정(李基文,1983,p.33 참조)되고 있기 때문에 상기 고유어 지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말 '―미'는 고구려어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예들이다.
반면 고유어 지명 '어리미, 어리밋골'에 대한 한자어 명칭은 '유산동(幼山洞)'으로 '―미'가 산에 대응하는 예들이 있어 앞서의 사실을 확실시하기 위해선 고유어 지명에 대한 좀 더 면밀한 검토가 따라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된 뒤에라야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