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민속

-- 상례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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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상 례(喪禮)

① 임 종

임종이 가까워 지면 본인이 자녀를 모두 기별하여 불러 들인다. 자식이 아무리 많더라도 부모의 임종을 한 자식이 참다운 자식이라는 습속이 있어 부모의 병환이 깊으면 자식은 만사를 제쳐놓고 임종을 보기 위하여 달려 온다. 수의는 노인일 경우에는 회갑년에 만들고 회갑년이 아닐 때에는 윤월에 만든다. 윤월에 만드는 이유는 윤월은 남는 달로 무엇을 하여도 탈이 없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수의는 명주나 삼베로 만들었으나 근년에는 삼베로 많이 만든다.

② 초 혼

사람이 죽으면 초혼을 하기 위하여 사자방을 짓는다. 죽정리 심씨에 의하면 죽정리에서는 사자밥을 지을 백미는 시신이 있는 방에서는 절대로 떠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한다. 사자밥 3접시와 고명을 달리한 탕 3접시를 외양간 지붕위에 올려 놓고 사자의 속적삼을 들고 가서 지붕위에서 북향하여 사자의 속옷 왼쪽 동정을 잡고 「복」을 세번 연호한다. 송정리의 李應圭씨 구술에 의하면 사자의 생년월일을 부르고「복」이라 하는데도 있고 남자의 경우에는 이름을 부르고「복」이라 하는 가문도 있다 한다. 초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시신을 보지 아니한
다시 말하면 임종을 보지 아니한 집안 사람이 한다고 한다.

◇복(復)

○ 시속에 초혼(招魂)

현재 이 고장에서 행하고 있는 초혼관계에 대하여 거진읍 초계리 李白圭씨는 다음과 같이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운명(殞命)하면 고례와 같은 계층구별을 지금은 두지를 않고 보통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서 입던 가벼운 웃옷 하나를 광주리에 담아서 지붕위에 올라가서(혹은 마당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왼손으로 직령을 쥐고 오른손은 허리에 대어 옷을 흔들면서 살았을 때의 호(號) 또는 성명을 목소리를 내어 "아무동네 아무게 복(復)"이라고 세번 넋(靈魂)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허공에 있는 죽은 사람의 넋(魂)을 다시 돌아오게 불러 얼(魄:體)과 다시 결합시켜 소생을 염원하는 성심에서 행하는 뜻인데 이같이 하여도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결국 사망한 것으로 확정하고 장례를 치루는데 초혼만은 고례를 현재까지 전승하고 있다
복의는 지붕에서 날려 시신을 덮기도 하고 장전에는 영좌에 놓기도 하나 가정에 따라서는 상여 나갈 때 적당한 곳에서 불사르고 생전에 입던 깨끗한 다른 옷을 유품으로 남기기도 한다.
「복」을 부르는 사람은 성년남자로서 시신을 보지 않았던 이웃 또는 친척중에서 상주가 지정하는 사람이 행한다.

③ 습(襲)과 염(殮)

시신에 수의를 입히기 전에 상주외에 약간사람(남상에는 상주급 남자로, 여상에는 주부급여자)이 사자의 병의를 벗기고 향목을 울군 향탕으로 전신을 씻고 반함(飯含)을 한다. 반함은 쌀을 물에 불려서 그릇에 담고 버드나무로 숟갈을 만들어 장차자의 순서로 사자의 입에 떠 넣는다. 이때 아들마다 세번씩 떠 넣고 한번 떠 넣을 때마다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라고 부른다. 반함 뒤에는 이목구비를 솜으로 막고 수의를 입히고 손톱과 발톱을 깍아서 각각 주머니에 넣고 얼굴을 베로 싸고 다시 백지를 넣고 마포로 전부를 싸고 일곱군데를 묶는다. 이때 천금(天禽)을 덮고 습할 때는 상인은「복건」을 쓰며 습과 검이 끝나고 나면 입관을 한다

④ 성 복(成服)

성복 전에는 상주라 할지라도 평복을 하고 있다가 성복 때에 비로서 상주와 유복친들은 상복을 입는다. 상주는 중단, 제복, 두건, 굴건, 행전을 했다고 하나 지금 고성군내에서 상주의 정장을 하는 가문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가정의례준칙을 내세우기도 하나 첫째로 상복이 남아 있는 것이 없을 뿐더러 지금은 지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고 한다.
고규(古規)를 지키려고 하는 가문에서는 겨우 중단과 두건이 고작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상복에 두건을 쓰는 것이 많다고 한다. 복인들은 중단도 없고 장사 당일에 두건을 쓰고 있으나 그것도 당내의 모든 유복친이 다 두건을 쓰지 않고 가장 가까운 근친만 두건을 쓰고 있다. 성복에는 사진과 혼백과 유물을 영좌에 봉안하고 성복제를 지내며 관은 집앞에 임시로 이장하기도 한다. 조석으로 상주는 관앞에서 조석곡을 하고 상식을 올린다.

⑤ 매 장(埋葬)

고성군내의 모든 부락이 아직 상여를 가지고 있다. 이 상여는 단독이나 씨족중심의 것은 없고 부락공동용으로 되어 있다. 교동리에서는 만년계를 모아 이 계에서 상여를 만들어 계원은 무료로 쓰고 있으며 기타 모든 부락이 부락계에서 상여를 만들었고 14인 또는 16인용으로 되어 있다. 장사비용은 가문에서 부조를 받아 충당하는 상가도 있고 계가 있는 부락에서는 계원들이 의무적으로 내는 곳도 있다. 교동리의 경우 조반미라고 하여 계원 1인당 백미 1두를 내어 이것으로 장사내용의 일부를 충당하고 있다. 장사당일의 첫절차인 조전(朝奠)에서는 사례에 있는대로

永遷之禮 靈辰不留
今奉柩車 式遵祖道

라는 축문을 읽고 운구하는데 거의 부락마다 선소리꾼이 아직 있어 선소리를 한다. 행로중에는 친척이나 차자(次子)이하가 로제를 받고 산소에서는 참파토축문을 읽고 산신제를 지내고 묘설(墓設)을 한다.
고성지방은 타지방보다 풍수에 대한 관념이 강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곳 고노들은 택당 이식이 간성현감으로 와 있을때 풍수에 능한 택당이 이곳에 명당이 많다고 하였으므로 그것을 찾으려는 생각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노들의 말에 의하면 택당이 이곳 현감으로 있을 때 지금의 죽왕면 오음산에 올라 참으로 보기 드문 명당자리라고 감탄하면서 아홉번 발을 굴렀다하여 이곳을 구둔리라 이르게 되었다하여 이 근처에는 몰래 조상의 백골을 묻고 평토로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고 한다. 택당이 현감으로 있을 때 읊은

古城山下邑之陽 猛虎出林藜藿長
案向玉帶三品位 水流金谷一庫藏
文星乾亥明崗鳳 其勢丙丁下棧羊
深鎖海門看不見 蓬萊歸客立彷徨

의 시는 이곳의 풍수를 읊은 것으로 여기에 명당이 있다고 믿고 있고 아직도 고노들은 이 시를 외우고 있을 정도로 풍수에 대한 관념은 강하다. 지금도 묘지는 지사라는 사람을 불러 풍수에 맞도록 정하는 것은 물론 하구의 시간도 지사의 결정에 따라 하는 가문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