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민속

-- 산속(産俗)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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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산속(産俗)

① 기자(祈子)

남계중심의 지난 날의 가족제도 속에서 대를 이을 자손을 낳는 다는 것은 여자에게 부과된 가장 큰 임무일 뿐만 아니라 가계 승계라는 유교 윤리의 가치기준은 가장인 남자에게도 큰 책 무로 지워졌다. 그러나 지난 날 이 가계승계의 책무는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많았고 여자쪽에 지워진 책무의 중압은 기자행사(祈子行事)를 여자가 맡게 하고 있다. 여자가 기자치성(祈子致誠)을 맡는 풍속은 전국적 현상으로 고성에서도 예외없이 기자는 여자가 하고 있고 고성의 기자치성은 몇 가지로 유별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사찰에서의 기자치성이다. 건봉사라는 대찰이 있는 고장이기에 건봉사의 신도가 많았고 건봉사의 출입이 자유로웠을 때에는 건봉사에서 불식에 의한 기자치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소요되는 경비를 절에 맡겨 놓으면 승려가 그
를 맡아 불당에서 치성을 드리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본인이 직접 치성을 드리는 방법이 있고, 승려와 본인이 합동으로 불전에서 기자치성을 드리는 방법이 있다.
둘째는 향로봉에 가서 하는 기자치성이 있다. 향로봉은 이 고장에서 가장 명산으로 알려진 산으로 그 영험이 크다는 전설 때문에 향로봉에는 기자하는 습속이 있다. 여기서의 치성절차는 불식과는 달리 순수한 토속형식의 치성제를 한다.
세째는 집 인근에서 하는 기자치성으로 주로 죽왕면의 오음산 계곡에서 행하고 있다. 여기서는 아무 날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로 음력 3월3일과 9월9일에 많이 하며 백미로 메를 짓고 초지를 걸어 놓고 치성을 한다. 여기서의 기자치성은 현재도 행하여 지고 있다.

②산전금기(産前禁忌)
태중에는 불필요한 외출은 삼간다. 외출을 삼가는데도 두가지 의미를 두고 있다. 그 하나는 외출이 잦으면 부정한 사물에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 산모나 태교에 해롭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출이 잦으면 불의의 낙상이 염려된다는데 있다. 중량 있는 것을 들지 못하게 하고 다듬이질을 하지 못하게 한다.
임부의 상가출입은 물론 집안 사람들도 상가에 가지 아니한다. 불가피하게 상가출입을 하여야 할 때는 귀가하여 이남박에 숯을 띄운 물을 마시고 방안에 들게 한다. 상가와의 음식수수를 금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한다. 개나 닭을 비롯한 생물을 집에서 잡지 않을 뿐더러 먹지도 않고 더우기 개고기는 집 안에 들이지 아니하며 해물로는 뼈 없는 문어와 같은 류는 먹지 못하게 하고 닭고기도 못먹게 한다. 뼈 없는 해물을 금하는 것은 뼈 없는 아이를 낳을 것을 염려한 속신이고 닭고기를 금하는 것은 임부가 닭고기를 먹으면 아기의 관절에서 닭뼈가 나온다는 속신이라 한다. 임부가 두 사람이 있어 한 집에서 한해에 출산하면 뒤에 낳을 아이는 불길하다 하여 다른 집에 가서 낳게 하거나 친가에 보내서 낳게 한다.
산부의 첫 국밥에 쓰는 미역을 시장에서 사 올때 꺾어 가지고 오며는 안된다. 꺽지 말고 그대로 들고 오거나 길이가 길어서 꺾지 않고서 다니기가 불편할 때에는 꺽이지 않게 말아서 가지고 온다. 미역을 가지고 오면 산부가 난산을 한다는 속신이 있다.

③출산(出産)

산바래질을 지방에 따라서는 부정이 없는 유복한 부인을 택하여 한다고도 하나 고성지방에서는 산바래질할 부인을 따로 데려오지 않고 시집에서 출산을 할 때에는 시어머니가 하고 친정 에서 출산할 때에는 친정어머니가 한다.
태중에도 그러하지마는 출산이 있으면 가내에서 살생을 금하고 부정을 가린다. 부정중에는 특히 상인과 상가의 음식을 가린다. 출타하여 개가 죽은 것을 보았다거나 상여를 보았을 경우는 귀가 후 방에 들기 전에 숯을 물에 담근 정화수를 마셔 부정을 가랜 뒤에 방에 들어간다. 출산 후 태줄은 칼이나 가위로 끊되 이 때 이 용구들은 끊는 물에 넣었다가 쓴다. 출산 후의 금승은 고성지방도 다른 지방과 같이 출산 후 금승에 남자는 고추를 달고 있으며 또한 남자나 여자나 구분없이 금줄에 솔가지를 다는 예도 있다. 이 솔가지를 「송침」 이라 이르고 다만 남여의 차는 남자일 경우에는 보둑솔을 베어 보둑솔 전부를 달고 여자의 경우에는 한 포기의 솔을 다는 것이 아니고 솔가지를 달고 있다. 이 풍속은 고성군내가 다 같다. 금줄은 남자인 경우에는 「삼치레」까지 쳐 놓으나 여자인 경우에는 그 보다 빨리 띨 수도 있다. 출산후 처음 먹는 식사를 「첫 국밥」이라고 하고 백반에 미역국을 끓여 먹되 다른 반찬 특히 육류나 어물은 삼가고 간장만으로도 국밥을 먹는다.

④ 태(胎)
산후의 태처리는 일반적으로 왕겨에 넣어 소태(燒胎)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번 조사에서 소태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습속은 아니고 그 지방의 지리적 특색에 따라 처리하기 쉬운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교동리에서는 왕겨에 넣어 대문앞에서 소태도 하고 교동리에서도 하천가에서 사는 집에서는 짚에 싸서 강물에 던지고 있다. 거진읍 송정리에서는 소태도 하고 혹은 새끼망에 넣어 돌을 달아 둠벙(작은 저수지)에 버리기도 하고 죽왕면 공현진리에서는 이곳이 해변인 탓으로 소태는 하지 않고 태에 돌을 달아 바다에 버리고 있으며 죽왕면 오봉리는 송지호 호반마을이므로 여기서도 소태의 습속은 행하여지지 않고 태에 돌을 달아 호수에 버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태는 소태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지방이 지닌 지역적 특색에 따라 그 처리 방법이 다르다. 특히 호수나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는 소태의 풍속이 전혀 없고 호수나 바다에 버리고 있다.

⑤삼신할머니
이번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육속의 하나인 삼신할머니는 한 군데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광복전만 하여도 이 지방에도 삼신할머니를 가지고 있는 집이 있었으나 광복후의 공산치하 6.25동란 등으로 삼신할머니는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노인들은 거의가 육속으로 젊었을때 삼신할머니를 섬겼다고 구술하고 있다.
삼신할머니는 대대로 승계되어 왔으며 안방 시렁 귀통이에 대를 걸고 길이 1m, 폭 20cm정도의 자루 양쪽에 쌀을 넣어 한 중간에 대를 놓는 것으로 이 속에 넣는 쌀을 햅쌀이 나오면 일년에 한번 갈아 넣는다.
삼신할머니는 산속속신이라기 보다는 육아속신으로 산전에는 이에 대한 신속행사가 없으나 혹 난산일때에는 삼신할머니에게 비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출산이 있으면 그 집 주부가 '삼신상' 이라는 것을 차린다. 출산의 '삼신상'은 산모의 음식과 같은 것으로 차려 삼신할머니 앞에 놓고 축원을 한다. 이때 축원하는 주부는 부정을 가린다. 부정은 정화수로 세번 가래고 축원을 한다. 축원의 사설은 일정한 것은 없고 점지해준 아기가 잘 자라도록 보살펴 달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기가 병이 있을 때에는 수시로 하고 정기적으로는 초삼일, 초칠일, 삼칠일에 올린다. 삼신할머니는 종가에서는 대대로 계승되고 있지마는 분가하여 새로 집을 만들었을 때에도 아이가 나면 반드시 설치한다. 축원은 주부가 하는 것이 원칙이나 주인 남자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