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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애국단(愛國團) 강원도단의 설립과 고성출신 단원의 활동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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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국단(愛國團) 강원도단의 설립과 고성출신 단원의 활동
가. 애국단(愛國團) 강원도단(江原這圍)의 설립(設立)과 활동(活動)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약칭 上海臨敵)에서는 본토와의 연결을 위한 기구로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하였다. 이때 상해임정을 돕기위한 국내의 애국단체들이 지하조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애국단체 가운데 서울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 비밀결사단체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 약칭 愛國團)이 조직되었다. 이 애국단의 활동임무는 상해임정에 대한 지원, 독립운동선전, 일제관직에서 종사하는 한국인의 퇴직권유, 상해임정의 재정자금의 모금과 조달(송금)등으로 상해임정 연통부의 국내조직 활동을 주로 수행하였다. 따라서 애국단은 강원 ․충청 ․전라도에 도단(道團)을 설치 하였는데, 그중 강원도단이 가장 먼저 설립되고, 규모나 활동면에서도 다른 도단보다 훨씬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애국단 강원도단은 철원에 설치하였음으로 이를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圍)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강원도단의 조직과 설립은 철원군단(鐵原郡麗)이 모체가 되어 이루어졌다. 강원도단과 철원군단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은 강원도 김화군 출신 김상덕(金相德, 일명 : 載根, 1894~1964)으로 그는 고향인 김화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 1908년 설립)를 세워 민족정신을 선양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생으로서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경에게 체포구속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던 중에 1919년 8월 6일 보석으로 출옥하자 이튿날(8, 7) 서울 남대문밖 노상에서 친지인 권인채(權仁采)를 만났다. 권인채는 상해임정에서 파견한 신현구(申鉉九, 38세)와 함께 애국단의 설치와 지방의 조직확대에 활약중인 인물이었다. 이때 권인채는 김상덕(25세)에게 애국단에 가입할 것과 강원도에 도단 ․군단 ․면단 등의 조직결성을 권유하였다.
이에 적극 찬동한 김상덕은 다음날(8, 8)철원으로 내려와 철원군 철원면 관전리(官田里)에 사는 이봉하(李鳳夏)집에 숙박하고 이튿날(8, 9)철원면 중리(中里)에 사는 박연서(朴淵瑞, 28세, 전도사)를 찾아가 애국단 설립을 상의한 후 그날 그집에서 김상덕․박연서․강대려(姜大呂, 30세, 대서업)․김철회(金喆會, 43세 농업)․박건병(朴健秉)등이 모여 군단설립에 대하여 일단 합의하는 동시에 11일 저택 동송면(東松面)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다시 협의하기로 하였다. 그후 약속대로 김상덕․박연서․강대려․김철회․박건병․김완호(金完鎬, 25세, 포목상)․이용우(李用雨,28세, 양조업)․오세덕(吳世德)등이 도피안사에 회집하여 군단설치를 재확인하면서 그들은 철원군란의 조직을 알리고, 독립운동에 관한 지방민심과 정보를 상해임정에 보고하며, 또 시위운동전개․독립운동자금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애국단 철원군단은 강원도단의 설치에 앞서 조직되었는데 군단의 임원으로 군단장에 이봉하, 서무과장 강대려, 재무과장에 김완호, 통신과장에 박연서, 학무과장에 박건병, 의교부원에 김철회․이용우 등이 선출되였다. 이같이 군단설립과 조직을 갖춘 후 이를 서울 본단에 보고하기 위하여 김상덕은 권인채에게 박연서(통신과장)를 보낸다는 소개장을 주어 상경하도록 하였다. 이에 박연서는 8월 12일 서울 효자동(柳根의 집)에서 권인채를 만나 함께 북창동의 신현구를 방문하여 철원군단의 조직상황을 보고하였다. 신현구는 애국단의 설립이 상해임정과 관계하고 있음을 증명하면서 현재 강원도단이 없음으로 편의상 철원에 강원도단을 설치하자고 하였다. 이에 박면서는 다음날(8. 13)애국단 명의로 군단장 이봉하를 도단장에, 군단 각 과장을 도단의 각 국장으로 임명하는 사령장을 받아가지고 8월 14일 철원에 돌아왔다.
그리하여 철원군단 임원들은 동 20일경 강대려(서무과장)집에 모여 박연서의 상경 결과 보고와 도단 임원의 사령장을 교부하였다. 결국 철원군단과 강원도단은 실제적 활동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강원도단은 본부와의 통신연락 등의 비용으로 2백원을 갹출(醵出)하기로 합의하고, 그 자리에서 참석한 이연수(李延洙, 29세, 의생)가 입단하였으며, 그후 신상완(申尙玩, 29세, 승려)․신순풍(申順豊, 29세, 면서기)․김상헌(金祥憲, 27세, 승려) ․이석윤(李錫允, 21세, 승려)․나병규(羅炳圭, 68세, 의생) 등이 가입하였다. 강원도단의 박연서 (통신국장)가 화천교회 목사로 전임하자, 구 후임으로 김철회(외교부원)가 맡았다. 따라서 단원들은 군단위의 조직확장을 위하여 원주 ․횡성 ․강릉 ․평창 ․울진 ․삼척 ․평해 ․영월 ․정선 ․고성 ․양양 ․김화등 각군을 순회하여 군단을 조직 설치하거나 조직을 도모하였다. 특히 김철회의 권유로 입단한 조종대(趙鍾大, 27세, 농업)는 동년 9월부터 각군지역을 순방하면서 조직확장에 나섰는데, 그는 원주에서 조윤여(趙潤如, 43세, 전도사), 횡성에서 방기순(方基淳, 36세, 목사)․탁영재(卓英才, 52세, 목수), 강릉에서는 안경록(安慶祿, 39세, 목사)․엄성훈(嚴成勳, 47세, 목재상)을 만났으며, 또 10월 2일 양양에서 김영학(金永鶴, 43세, 목사)을 만나 애국단 가입과 군단설치를 권유하였다.
애국단 입단에 찬동한 양양의 김영학은 조종대와 함께 토성면 아야진리(我也津里)의 김형석(金亨錫, 43세, 농업)을 애국단에 가입하게 하였고, 이어 토성면 운봉리(雲峯里)의 이근옥(李根玉, 36세, 농업)그리고 김연수(金延洙, 26세, 대서업) ․문명섭(文明燮, 20세, 농업), 토성면 백촌리(栢村里)의 이석규(李碩圭, 27세, 농업)도 가입하도록 권유하였다. 강원도의 군단 중에서 평창군과 양양군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평창군단은 엄성훈의 활약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강릉에서 조종대를 만난 후 평창에 들어와 10월 20일경 평창면 중리(中里) 이기헌(李起憲, 37세, 의생)의 집에서 이기헌․이근세(李根世, 47세, 농업)․조두환(曹斗煥, 41세, 농업)․고제락(高濟洛, 45세, 농업)등에게 군단설립을 권하여 찬동을 얻고 서로 통신방법을 협의하였으며 강릉에 돌아와 그 결과를 철원의 강대려(서무국장)에게 서신으로 알렀다.
또 평창군단의 이근세(군단장)․이기헌(군단 동신원)등은 애국단을 위장하여 창일계(昌-契)를 조직하고, 평창면내의 우필규(禹弼奎)등 17명을 군단에 가입하도록 권유하고 출자금(1구좌 10원씩 31구좌)을 약속받았다. 한편 엄성훈의 아들 엄정섭(嚴政燮)은 조종대의 권유로 삼척 ․울진 ․평해(平海)방면을 담당하여 군단조직의 임무를 맡았는데 그 성과는 알 수 없다. 이와같이 애국단은 강원도 각군으로 퍼져서 청년 ․기독교 목사 ․의생(醫生). 사찰 승려 ․유학자 등 각계 각층에서 가담하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20년초 1월 말경 독립운동자금 모금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철원의 부호가 밀고하여 강원도 뿐만 아니라 충청 ․전라도의 애국단 조직이 탄로되고 말았다. 이에 대부분의 애국단원들은 1920년 9월 30일 예심을 거쳐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5년에서 6월형이 선고되었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 9, 1984, 1003쪽 참조) 신현구 ․조종대 ․신상완 각 5년, 김상덕 ․이근옥 각 4년, 강대려 ․김상헌 각 3년, 박연서 ․김영식 각 2년, 이연수 ․김영학 ․엄성훈 각 1년 6월, 김철회 ․이봉하 ․이용하 ․김완호 각 1년, 신순품 8월, 김형석 ․이기헌 ․이근세 ․이석윤 각 6월, 나병규는 벌금 100원에 처하였으며, 다만 문명섭 ․이석규 ․김연수 등은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체포에서 방면되기까지 10개월의 구속기간에 사실상의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나. 고성출신(高城出身) 애국단원(愛國團員)의 활동
애국단 고성군단의 조직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양양군단에 가입한 핵심단원 중에 김형석(金亨錫, 아야진리) ․이근옥(李根玉, 운봉리) ․김연수(金延流, 운봉리) ․문명섭(文命燮, 백촌리)등은 모두가 간성군 토성면 출신으로 양양군단에 가입하기 6개월전만 하더라도 사실상 고성군(당시 간성군)의 군민이었다. 이는 1919년 3․1운동직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동년 5월 15일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개명되는 동시에 간성군에 속해 있던 토성면(土城面)과 죽왕면(竹旺面)이 양양군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애국단 가입시기에 그들의 향리가 양양군으로 편입된 이후의 동년 10월이었음으로 양양군 단원으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1963년 이후)는 위의 2개면이 다시 고성군으로 환원된 상태임으로 여기서는 고성군 출신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미 전항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철원애국단의 조종대(趙鍾大)가 동년 9월 부터 도내 각군을 순회하면서 애국단의 가입을 권유하고 군단설치를 종용하였다. 그는 동년 10월 2일 양양면의 김영학(金永鶴)을 찾아가 군단설치와 청년들로 하여금 상해임정에 직접 투신할 수 있도록 권유하면서 그 책임(군단장)을 지웠다. 이어 조종대는 10월 초순경에 토성면의 김형석을 방문 하여 역시 같은 취지로 권유하는 동시에 김형석의 주선으로 이근옥과 만나 애국단 가입과 상해임정에 직접 투신할 각오가 섰을 경우, 철원애국단의 이연수(李延流)와 의논하도록 당부하면서 이연수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이근옥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김영학은 김형석에게 군단설치등을 협의하고, 김형석은 10월 중순경 이근옥에게 다시금 애국단의 참여와 상해임정에 투신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찬동한 이근옥은 동향인 김연수 ․문명섭 ․이석규 등에 게 권유하여 애국단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3․1운통 당시 향리에서 주민에게 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할 것을 촉구한 바 있는 이근옥(고성지방의 3․1운동 참조)은 김연수 ․문명섭 ․이석규를 포섭하여 함께 상해로 가서 임정에 투신하기로 다짐하였고,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10월 31일 간성에 모여 같이 출발하였다. 처음부터 이들은 철원애국단의 이연수를 만나 의논하고, 이어 서울의 애국단 본부를 경유하여 상해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철원의 애국단원이나 서울의 본부단원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다니던 처지였음으로 그들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근옥만이 서울에 남고,그밖의 일행은 부득이 귀향하지 않을수 없었다. 서울에 머물면서 상해행을 고집하던 이근옥은 대동단(大同圍)이 주도하여 작성한 '조선독립선언서'․'대한독립군 환영 취의서(趣意書)'라고 제목한 선언문을 박화식(朴華植)으로부터전달받고, 이를 가지고 귀향하여 이듬해 (1920년) 2월초순경 고성군 오대면 건봉사(梧垈面乾鳳寺)에 들려 이운파(李雲植)주지와 탁능허(卓凌虛)승려에게 이러한 취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군자금 모금활동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애국단의 정체가 일제에게 탄로되어단원 거의가 피체됨으로서 이상옥 역시 투옥되었고, 그후 애국단의 활동도 끝나게 되었다.
가. 애국단(愛國團) 강원도단(江原這圍)의 설립(設立)과 활동(活動)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약칭 上海臨敵)에서는 본토와의 연결을 위한 기구로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하였다. 이때 상해임정을 돕기위한 국내의 애국단체들이 지하조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애국단체 가운데 서울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 비밀결사단체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 약칭 愛國團)이 조직되었다. 이 애국단의 활동임무는 상해임정에 대한 지원, 독립운동선전, 일제관직에서 종사하는 한국인의 퇴직권유, 상해임정의 재정자금의 모금과 조달(송금)등으로 상해임정 연통부의 국내조직 활동을 주로 수행하였다. 따라서 애국단은 강원 ․충청 ․전라도에 도단(道團)을 설치 하였는데, 그중 강원도단이 가장 먼저 설립되고, 규모나 활동면에서도 다른 도단보다 훨씬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애국단 강원도단은 철원에 설치하였음으로 이를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圍)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강원도단의 조직과 설립은 철원군단(鐵原郡麗)이 모체가 되어 이루어졌다. 강원도단과 철원군단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은 강원도 김화군 출신 김상덕(金相德, 일명 : 載根, 1894~1964)으로 그는 고향인 김화에서 신창학교(新昌學校 1908년 설립)를 세워 민족정신을 선양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생으로서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경에게 체포구속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던 중에 1919년 8월 6일 보석으로 출옥하자 이튿날(8, 7) 서울 남대문밖 노상에서 친지인 권인채(權仁采)를 만났다. 권인채는 상해임정에서 파견한 신현구(申鉉九, 38세)와 함께 애국단의 설치와 지방의 조직확대에 활약중인 인물이었다. 이때 권인채는 김상덕(25세)에게 애국단에 가입할 것과 강원도에 도단 ․군단 ․면단 등의 조직결성을 권유하였다.
이에 적극 찬동한 김상덕은 다음날(8, 8)철원으로 내려와 철원군 철원면 관전리(官田里)에 사는 이봉하(李鳳夏)집에 숙박하고 이튿날(8, 9)철원면 중리(中里)에 사는 박연서(朴淵瑞, 28세, 전도사)를 찾아가 애국단 설립을 상의한 후 그날 그집에서 김상덕․박연서․강대려(姜大呂, 30세, 대서업)․김철회(金喆會, 43세 농업)․박건병(朴健秉)등이 모여 군단설립에 대하여 일단 합의하는 동시에 11일 저택 동송면(東松面)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다시 협의하기로 하였다. 그후 약속대로 김상덕․박연서․강대려․김철회․박건병․김완호(金完鎬, 25세, 포목상)․이용우(李用雨,28세, 양조업)․오세덕(吳世德)등이 도피안사에 회집하여 군단설치를 재확인하면서 그들은 철원군란의 조직을 알리고, 독립운동에 관한 지방민심과 정보를 상해임정에 보고하며, 또 시위운동전개․독립운동자금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애국단 철원군단은 강원도단의 설치에 앞서 조직되었는데 군단의 임원으로 군단장에 이봉하, 서무과장 강대려, 재무과장에 김완호, 통신과장에 박연서, 학무과장에 박건병, 의교부원에 김철회․이용우 등이 선출되였다. 이같이 군단설립과 조직을 갖춘 후 이를 서울 본단에 보고하기 위하여 김상덕은 권인채에게 박연서(통신과장)를 보낸다는 소개장을 주어 상경하도록 하였다. 이에 박연서는 8월 12일 서울 효자동(柳根의 집)에서 권인채를 만나 함께 북창동의 신현구를 방문하여 철원군단의 조직상황을 보고하였다. 신현구는 애국단의 설립이 상해임정과 관계하고 있음을 증명하면서 현재 강원도단이 없음으로 편의상 철원에 강원도단을 설치하자고 하였다. 이에 박면서는 다음날(8. 13)애국단 명의로 군단장 이봉하를 도단장에, 군단 각 과장을 도단의 각 국장으로 임명하는 사령장을 받아가지고 8월 14일 철원에 돌아왔다.
그리하여 철원군단 임원들은 동 20일경 강대려(서무과장)집에 모여 박연서의 상경 결과 보고와 도단 임원의 사령장을 교부하였다. 결국 철원군단과 강원도단은 실제적 활동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강원도단은 본부와의 통신연락 등의 비용으로 2백원을 갹출(醵出)하기로 합의하고, 그 자리에서 참석한 이연수(李延洙, 29세, 의생)가 입단하였으며, 그후 신상완(申尙玩, 29세, 승려)․신순풍(申順豊, 29세, 면서기)․김상헌(金祥憲, 27세, 승려) ․이석윤(李錫允, 21세, 승려)․나병규(羅炳圭, 68세, 의생) 등이 가입하였다. 강원도단의 박연서 (통신국장)가 화천교회 목사로 전임하자, 구 후임으로 김철회(외교부원)가 맡았다. 따라서 단원들은 군단위의 조직확장을 위하여 원주 ․횡성 ․강릉 ․평창 ․울진 ․삼척 ․평해 ․영월 ․정선 ․고성 ․양양 ․김화등 각군을 순회하여 군단을 조직 설치하거나 조직을 도모하였다. 특히 김철회의 권유로 입단한 조종대(趙鍾大, 27세, 농업)는 동년 9월부터 각군지역을 순방하면서 조직확장에 나섰는데, 그는 원주에서 조윤여(趙潤如, 43세, 전도사), 횡성에서 방기순(方基淳, 36세, 목사)․탁영재(卓英才, 52세, 목수), 강릉에서는 안경록(安慶祿, 39세, 목사)․엄성훈(嚴成勳, 47세, 목재상)을 만났으며, 또 10월 2일 양양에서 김영학(金永鶴, 43세, 목사)을 만나 애국단 가입과 군단설치를 권유하였다.
애국단 입단에 찬동한 양양의 김영학은 조종대와 함께 토성면 아야진리(我也津里)의 김형석(金亨錫, 43세, 농업)을 애국단에 가입하게 하였고, 이어 토성면 운봉리(雲峯里)의 이근옥(李根玉, 36세, 농업)그리고 김연수(金延洙, 26세, 대서업) ․문명섭(文明燮, 20세, 농업), 토성면 백촌리(栢村里)의 이석규(李碩圭, 27세, 농업)도 가입하도록 권유하였다. 강원도의 군단 중에서 평창군과 양양군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평창군단은 엄성훈의 활약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강릉에서 조종대를 만난 후 평창에 들어와 10월 20일경 평창면 중리(中里) 이기헌(李起憲, 37세, 의생)의 집에서 이기헌․이근세(李根世, 47세, 농업)․조두환(曹斗煥, 41세, 농업)․고제락(高濟洛, 45세, 농업)등에게 군단설립을 권하여 찬동을 얻고 서로 통신방법을 협의하였으며 강릉에 돌아와 그 결과를 철원의 강대려(서무국장)에게 서신으로 알렀다.
또 평창군단의 이근세(군단장)․이기헌(군단 동신원)등은 애국단을 위장하여 창일계(昌-契)를 조직하고, 평창면내의 우필규(禹弼奎)등 17명을 군단에 가입하도록 권유하고 출자금(1구좌 10원씩 31구좌)을 약속받았다. 한편 엄성훈의 아들 엄정섭(嚴政燮)은 조종대의 권유로 삼척 ․울진 ․평해(平海)방면을 담당하여 군단조직의 임무를 맡았는데 그 성과는 알 수 없다. 이와같이 애국단은 강원도 각군으로 퍼져서 청년 ․기독교 목사 ․의생(醫生). 사찰 승려 ․유학자 등 각계 각층에서 가담하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20년초 1월 말경 독립운동자금 모금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철원의 부호가 밀고하여 강원도 뿐만 아니라 충청 ․전라도의 애국단 조직이 탄로되고 말았다. 이에 대부분의 애국단원들은 1920년 9월 30일 예심을 거쳐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5년에서 6월형이 선고되었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 9, 1984, 1003쪽 참조) 신현구 ․조종대 ․신상완 각 5년, 김상덕 ․이근옥 각 4년, 강대려 ․김상헌 각 3년, 박연서 ․김영식 각 2년, 이연수 ․김영학 ․엄성훈 각 1년 6월, 김철회 ․이봉하 ․이용하 ․김완호 각 1년, 신순품 8월, 김형석 ․이기헌 ․이근세 ․이석윤 각 6월, 나병규는 벌금 100원에 처하였으며, 다만 문명섭 ․이석규 ․김연수 등은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체포에서 방면되기까지 10개월의 구속기간에 사실상의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나. 고성출신(高城出身) 애국단원(愛國團員)의 활동
애국단 고성군단의 조직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양양군단에 가입한 핵심단원 중에 김형석(金亨錫, 아야진리) ․이근옥(李根玉, 운봉리) ․김연수(金延流, 운봉리) ․문명섭(文命燮, 백촌리)등은 모두가 간성군 토성면 출신으로 양양군단에 가입하기 6개월전만 하더라도 사실상 고성군(당시 간성군)의 군민이었다. 이는 1919년 3․1운동직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동년 5월 15일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개명되는 동시에 간성군에 속해 있던 토성면(土城面)과 죽왕면(竹旺面)이 양양군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애국단 가입시기에 그들의 향리가 양양군으로 편입된 이후의 동년 10월이었음으로 양양군 단원으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1963년 이후)는 위의 2개면이 다시 고성군으로 환원된 상태임으로 여기서는 고성군 출신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미 전항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철원애국단의 조종대(趙鍾大)가 동년 9월 부터 도내 각군을 순회하면서 애국단의 가입을 권유하고 군단설치를 종용하였다. 그는 동년 10월 2일 양양면의 김영학(金永鶴)을 찾아가 군단설치와 청년들로 하여금 상해임정에 직접 투신할 수 있도록 권유하면서 그 책임(군단장)을 지웠다. 이어 조종대는 10월 초순경에 토성면의 김형석을 방문 하여 역시 같은 취지로 권유하는 동시에 김형석의 주선으로 이근옥과 만나 애국단 가입과 상해임정에 직접 투신할 각오가 섰을 경우, 철원애국단의 이연수(李延流)와 의논하도록 당부하면서 이연수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이근옥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김영학은 김형석에게 군단설치등을 협의하고, 김형석은 10월 중순경 이근옥에게 다시금 애국단의 참여와 상해임정에 투신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찬동한 이근옥은 동향인 김연수 ․문명섭 ․이석규 등에 게 권유하여 애국단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3․1운통 당시 향리에서 주민에게 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할 것을 촉구한 바 있는 이근옥(고성지방의 3․1운동 참조)은 김연수 ․문명섭 ․이석규를 포섭하여 함께 상해로 가서 임정에 투신하기로 다짐하였고,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10월 31일 간성에 모여 같이 출발하였다. 처음부터 이들은 철원애국단의 이연수를 만나 의논하고, 이어 서울의 애국단 본부를 경유하여 상해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철원의 애국단원이나 서울의 본부단원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다니던 처지였음으로 그들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근옥만이 서울에 남고,그밖의 일행은 부득이 귀향하지 않을수 없었다. 서울에 머물면서 상해행을 고집하던 이근옥은 대동단(大同圍)이 주도하여 작성한 '조선독립선언서'․'대한독립군 환영 취의서(趣意書)'라고 제목한 선언문을 박화식(朴華植)으로부터전달받고, 이를 가지고 귀향하여 이듬해 (1920년) 2월초순경 고성군 오대면 건봉사(梧垈面乾鳳寺)에 들려 이운파(李雲植)주지와 탁능허(卓凌虛)승려에게 이러한 취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군자금 모금활동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애국단의 정체가 일제에게 탄로되어단원 거의가 피체됨으로서 이상옥 역시 투옥되었고, 그후 애국단의 활동도 끝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