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1.독립대동단(獨立大同團)과 상해임정(上海臨政)참여운동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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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대동단(獨立大同團)과 상해임정(上海臨政)참여운동

가. 대동단(大同團)의 결성(結成)과 활동
독립대동단(약칭 : 大同團)은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조직은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수립(1919, 4. 13. 선포) 직전인 1919년 3월말경에 전협(全憁, 45세, 전 一進會 평의원) ․최익환(崔益煥, 30세, 전 一進會 회원)등이 서울 봉익동(風翼洞) 전협의 집에 모여 ①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②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③사회주의를 형성할 것 등의 강령을 제창하고,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대동단은 귀족 ․관리 ․유림 ․종교계 ․상공계 ․학생 ․부녀계 등 11개 사회단체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점조직(點組織)으로 결성하였다. 이에 김찬규(金燥奎, 전 참판) ․박영효(朴泳孝, 철종의 사위, 전 중추원 고문)․김가진(金嘉鎭, 전 법부대신)․ 민영달(閱泳達, 전 내부대신) ․곽종석(郭鍾錫, 전 참찬) ․김복한(金福漢, 전 중추원의관)등 137명이 참가하였고, 동년 4월 중순 김가진을 대동단 총재로 추대하여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평안 ․함경도 ․만주 안동현등지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의 조직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때 단원모집과 자금모집은 전협이 담당하였고, 선전문 등의 인쇄물 배포 등의 일은 최익환(崔益煥)이 당당하였다.
따라서 최익환은 권봉석(權奉錫)으로 하여금 자금을 공급토록 하여 인쇄시설을 설치하고, 비밀히 선언문 ․진정서 ․포고문 등을 인쇄하는 동시에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지 아니하면 혈전(血戰)이라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의 참여를 고취하였다. 그러나 동년 5월 23일 일경에게 탐지되어 전협과 김찬구는 피신하였고, 최익환(문서책임자) ․권석봉(인쇄책임자) ․이능우(李能雨, 자금조달책임자) ․나경섭(羅景燮, 노동자배포책임자) ․김명철(金永喆, 일본인배포책임자)등이 체포되었는데, 이를 '제1차 대동단사건'이라고 한다. 대동단은 최익환이 피체되자 그 후임으로 정남용(郵南用, 24세, 高城출신)이 그 일을 맡아 수행하였고. 당시 청년외교단원인 송세호(宋世鎬, 26세) ․나창헌(羅昌憲, 24세)등 청년들을 입단시켰다. 그리하여 대동단은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배포와 대동신보(大同新報) 제작을 통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였고, 상해임시정부(약칭 : 상해임정)가 수립된 후에는 본부를 상해로 옮기려고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전협 ․정남용 등은 의친왕(義親王 : 李珊, 고종의 둘째아들)을 상해로 탈출케 하여 임시정부의 수령으로 추대하려는 거사를 꾀하였다. 이에 총재인 김가진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安昌浩)에게 의친왕의 탈출계획을 글로 적어 협조를 청하였다. 상해임정에서도 의친왕을 옹립함으로써 유립은 물론 국내외에 임정의 위상과 신망을 높이려 하였다. 그러므로 상해로부터 귀국한 강석룡(姜錫龍, 38세)은 의친왕 비(妃)의 동생인 김춘기 (金春基, 26세)를 통하여 상해임정의 뜻을 전하자 의친왕이 동의함으로써 전협과 강석룡 ․정남용 ․이재호(李在浩, 26세, 高城출신)는 의친왕의 탈출계획을 서둘러 세우게 되었다.
한편 상해임정으로부터 귀국한 이종욱(李鍾郁, 46세, 상해임정 내무부 參事)은 전협과 협식한 후 동년 10월 10일 서울 관수동(觀水洞) 박봉구(朴奉九)의 집에서 김가진 총재를 만나 농민으로 가장시키고 김가진과 그 아들 김의한(金毅漢)을 동반하여 기차 편으로 함께 만주 안동으로 탈출, 10월 30일 상해에 도착하여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기고 상해임정과 연계하면서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김가진의 상해도착이 이루어진 후에 전협과 강석룡은 의친왕 탈출계획을 결행키로 하고 동년 11월 9일 밤 정남용 ․이을규(李乙奎, 25세) ․한기동(韓基東, 22세) ․송세호 등으로 하여금 상복으로 가장한 의친왕을 보위하여 수색역(水色驛)에서 3등 기차편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송세호는 관헌의 경계를 피해서 서울역에서 승차하여 평양역에서 하차한 후 다음날 안동으로 향하였고, 한기동은 개성역에서 하차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의친왕 일행이 11일밤 압록강을 건너 안동역에 도착하여 하차할 적에 미리 탐지한 평안북도 경찰부 미산(米山) 경부(警部)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의친왕과 정남용 ․이을규 등이 서울로 압송당하였다. 이어 이튿날(12일)서울 초음동(初音洞) 이관수(李觀修)의 집에 머물던 이재호(李在治)가 검거되었고, 19일에는 전협 등관계자 수명이 차례로 체포됨으로써, 의찬왕의 상해임정 참여계획 역시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관련자 29여명은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 1심판결에서 징역 6월부터 8년까지의 실형이 언도되었는데 전협은 징역8년(결심공판때 10년), 최익환 6년(결심에서 5년) ․정남용 5년, 이재호 4년, 송세호 ․한기동 ․나창헌 3년 ․이을규 ․권봉석 등 20여명은 2년에서 6월까지 선고받았다(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3, 1983. 99쪽 참조) 이로써 전협은 7년간 복역하다가 병보석 치료(金釋病院)중에 순사(殉死)하였고, 고성출신의 정남용은 복역 5개월 만에 옥사하였으며, 이재호는 4년의 옥고를 치렀다

나. 고성출신(高城出身) 대동단원(大同團圓)의 활동(活動)

(1) 정남용(鄧南用)의 활동(活勳)
정남용(이명 : 南容․必成, 1896~1921)은 고성군 현내면 철동(縣內面 徹洞)출신으로 고성 건봉사(乾鳳寺)에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상경하여 휘문의숙(微文義塾)과 중앙불교포교당(中央佛敎布敎堂)에서 수학하였다. 3․1운동 직후 1919년 3월말경 전협(全協)․ 최익환(崔還煥)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독립대동단(獨立大同團)에 가입 활동하였다. 흔히 대동단이라고 부르는 이 비밀조직단체는 독립달성을 위하여 민족대단결을 표방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사회 각계인사들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따라서 이 단체는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정남용은 1919년 5월 대동단의 최익환 등이 피체되자 그 후임으로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대동단이 발행하는 선언서와 임시규칙 등 각종문서를 인쇄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을 뿐만아니라 대동단의 청년층 조직을 주도하여 송세호(宋世鎬)․나창헌(羅昌憲) ․이재호(李在浩) 등을 가입시켜 조직확대에도 진력하였다. 그러나 '제 1차 대동단사건' 으로 최익환 등이 피체되어 대동단의 조직이 노출되었고, 또 기관지인 대동신보(大同新報)등의 발행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자 일경적 포위망도 그만큼 압축되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전협과 정남용 ․이재호 등의 주도인사들은 대동란 본부를 상해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그 첫단계로 총재인 김가진(金蒸鎭)을 동년 10월 10일 우선 상해로 망명케 하는 동시에 고종(高춘)의 둘째아들이요 순종(純宗)의 이복동생인 의친왕(義親王 : 李坰)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상해에로의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정남용은 동년 11월 9일 밤 이을규(李乙奎) ․한기동(韓基東) ․송세호와 함께 상복으로 가장한 의친왕을 보위하여 3등 열차편으로 함께 혹은 각기 국경을 넘어 만주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평북 경찰부 米山경부)에 의하여 하차와 동시에 체포되어 의친왕과 정남용 ․이을규 역시 서울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1920년 12월 경성지 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에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마침내 복역 5개월이 되던 1921년 4월 1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이재호(李在浩)의 활동(活勳)
이재호(이명 : 範宰, 1878~1933)는 고성군 현내면(縣內面, 서울 觀水洞거주) 출신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宮內府 主事)를 거쳐 시종원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정남용(鄭南用, 고성출신)의 권유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등단은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고,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등이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결성한 비밀독립운동단체이다. 당시 대동란은 사회각층의 인사를 포함한 범국민적 조직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동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상해 임정에 대한 지원을 꾀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동년 5월 23일 '제1차 대동단사건'과 이어 기관지인 대동신문(大同新聞)등의 배포로 인하여 대동단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동년 10월초 전협 등 주도적 단원들이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그 첫단계로 10월 10일 총재인 김가진(金嘉鎭, 전 법무대신)을 상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또한 의친왕(義親王, 高宗의 第2子)을 수령으로 추대하는 동시에 상해망명을 추진하였다. 이에 군내부 재직 당시 의친왕의 일본수행을 경험한 이재호는 의친왕의 망명계획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의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정운복(鄧雲福)과는 절친한 관계로 그를 통해 의친왕의 승낙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동년 11월 9일 정남용․이을규(李乙奎)․한기동(韓基車)․송세호(宋世鎬)등이 의친왕을 호위하여 함께 혹은 각기 상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米山警部)에게 발각되어 11일 압록강 건너 안동역에서 의친왕 일행이 서울로 연행당하자, 그 역시 12일 서울 초음동(初音洞, 李觀修의 집)에서 체포되었고. 이에 관련하여 체포된 31명의 단원과 함께 그는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동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33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의 이복동생인 의친왕(義親王 : 李坰)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상해에로의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정남용은 동년 11월 9일 밤 이을규(李乙奎) ․한기동(韓基東) ․송세호와 함께 상복으로 가장한 의친왕을 보위하여 3등 열차편으로 함께 혹은 각기 국경을 넘어 만주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평북 경찰부 米山경부)에 의하여 하차와 동시에 체포되어 의친왕과 정남용 ․이을규 역시 서울로 연행되었다. 이에 그는 1920년 12월 경성지 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에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마침내 복역 5개월이 되던 1921년 4월 1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이재호(李在浩)의 활동(活勳)
이재호(이명 : 範宰, 1878~1933)는 고성군 현내면(縣內面, 서울 觀水洞거주) 출신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宮內府 主事)를 거쳐 시종원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정남용(鄭南用, 고성출신)의 권유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등단은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고,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등이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결성한 비밀독립운동단체이다. 당시 대동란은 사회각층의 인사를 포함한 범국민적 조직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동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상해임정에 대한 지원을 꾀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동년 5월 23일 '제1차 대동단사건'과 이어 기관지인 대동신문(大同新聞)등의 배포로 인하여 대동단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동년 10월초 전협 등 주도적 단원들이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그 첫단계로 10월 10일 총재인 김가진(金嘉鎭, 전 법무대신)을 상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또한 의친왕(義親王, 高宗의 第2子)을 수령으로 추대하는 동시에 상해망명을 추진하였다. 이에 군내부 재직 당시 의친왕의 일본수행을 경험한 이재호는 의친왕의 망명계획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의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정운복(鄧雲福)과는 절친한 관계로 그를 통해 의친왕의 승낙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동년 11월 9일 정남용․이을규(李乙奎)․한기동(韓基車)․송세호(宋世鎬)등이 의친왕을 호위하여 함께 혹은 각기 상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米山警部)에게 발각되어 11일 압록강 건너 안동역에서 의친왕 일행이 서울로 연행당하자, 그 역시 12일 서울 초음동(初音洞, 李觀修의 집)에서 체포되었고. 이에 관련하여 체포된 31명의 단원과 함께 그는 1920년 6월 예심을 거쳐 동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33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