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2.고성지방의 3 · 1운동 전개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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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성지방의 3․1운동전개

현재의 고성군은 3․1운동때(1919. 5. 15이전)에 간성군이었다. 고성군은 강원도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3월17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으로 당시 간성군 고성면에는 일본군 보병 제 20사단 제74연대의 1개소대가 이미 3월에 주둔하고 있었다. 또 간성군은 헌병이 경찰업무를 맡고 있던 고을이었다. 고성군의 3․1운동은 3월 14일에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배포되어 민중의 독립의식이 고취되면서 일어났다. 간성군 신북면 계월리(新北面 桂月里)의 청년 김동원(金車元, 22세)은 3월초에 독립선언서 1통을 입수하였다. 그는 선언서를 마을에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3월 13일밤에 고성면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지고 와 자기집에서 첫머리에 '고성재판(高城再版)'이라는 제목을 붙인 선언서 50매를 등사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14일에  고성읍 밖으로 간성가도 지경리까지 게시판에 이를 붙이거나 길위에 뿌려서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체포된 김동원은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언도(1919. 4, 30)받고 공소하여 경성복심(覆審)법원에서 10월의 징역형을 선고(동 6.12)받았다.
또한 당시 개성(開城)의 한영서원(韓英書院)에 다니던 학생 이동진(李車振)은 간성에 귀향하여 지방청년 함기석(咸基錫)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한 선전문을 작성하였다. 그들은 "지금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키니 문명교육을 받은자는 누구라도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는 선언문을 간성보통학교 4학년 교실 입구에 붙여 학생들의 각성과 만세시위를 촉구하였다. 이 선언문을 읽고 자극받은 간성보통학교 학생 정종구(鄭種龜, 이명 : 正一)․남기일(南基一)․이응규(李應奎) ․ 최화길(崔和吉) ․김영집(金永集)․서병택(徐炳澤) ․남기봉(南基鳳) ․함청일(咸淸一) ․함성희(咸成熙) ․임갑용(任甲龍) ․박종진(朴鍾鎭) ․김응섭(金應燮) ․이내구(李乃九)등이 앞장서서 3월 17일에 전교생 150명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대한독링만세를 외쳤다. 교정에서 만세를 부르던 학생들은 때마침 이날이 장날이어서 간성읍 시장(간성읍 장날은 2일과 7일)의 군중들과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펼치려고 교문을 나섰으나, 일제의 관헌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그리고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헌병간성분견대(分造隊)에서 1주일간 갇했다.(동아일보, 1919. 5.22 ; 매일신보, 1919 .5. 22)이때 체포된 학생들은 학교장(일본인, 黑江透)의 교섭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배후조정을 한 이동진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의 판결에 공소하여 경성복심(覆審) 법원에서 6월의 징역형을 딴았다.
그런데 간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벌인 이후 3월 27일 고성에서는 간성 ․거진 ․현내면(縣內面)등 각처에서 파견한 대표와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이었고, 각 동리에서도 부락단위로 남여가 모여 방마다 산에 올라가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미흡하다.(江原道史 歷史編, 1995. 1309쪽 참조)한편 간성군(현 고성군)에서는 간성군수가 4월 5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토성면(土城面) 교암리(橋岩里) 장터에 갔을 때 '군수를죽여라'는 선전문이 붙어 있었다. 일제는 이를 계기로 4월 5일부터 간성군내의 시장을 일제히 폐쇄하였다. 이에 오대면 봉평리(梧垈面 逢坪里) 시장(거진 부근)은 4월 13일 까지, 토성면 교암리 시장은 16일까지, 간성읍 시장은 17일까지 폐쇄조치하여 군중의 집결을 미연에 방지하는 등 삼엄한 경계가 취해졌다. 이는 토성면 운봉리(雲峯里)의 이근옥(李根玉)이 계시한 선전문 때문에 취한 조처였다.
이근옥은 4월 중순경 토성면 교암리 (橋岩里)․운봉리 ․죽왕면 오호리(五湖里)의 계시판 그리고 토성면 용암리(龍岩里)의 간성가도와 인제가도의 기로표(岐路標)에 '충고동포(忠告同胞)'라고 표제하고 "조선민족은 파리(巴里) 강화회의에서 의정(謠定)한 국제연맹의 원칙에 따라 민족자결의 의사를 표시하여 조선독립의 목적달성을 위해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며, 시위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내용의 선동문을 첨부계시하였던 것이다. 그후 이근옥은 애국단(愛國鬪)에 가입하여 애국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제의 헌병사령부 통계에는 간성군내에서 22명이 검거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알려지지 않은 만세시위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