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1.강원지방의 3 · 1운동 전개와 성격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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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일제식민통치하의 독립운동

1. 강원지방의 3․1 운동 전개와 성격
3․1운동은 1910년 국치(國恥, 8. 29)이래 일제의 악랄(惡辣)한 식민지 무단통치(헌병경찰제도)와 경제적 착취,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농촌경제의 파탄 그리고 민족문화말살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었고,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승하(昇遐)에 대한 반일기운의 평배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월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기대가 가세하여 전개된 민족적 거사로의 1919년 기미년 3․1만세운동이었다. 그러므로 3․1만세운동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따라서 3․1운동은 사상적으로 유교의 왕도사상(王道思想)과 천도교의 민족주의, 신문화운동과 기독교의 활동을 통해 보급된 근대사상과 한말의병투쟁에서 조성된 항일풍토가 만세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1919년(己未) 3월 1일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강원도 3․1운동은 3월 7일 춘천 (현, 春川農工)에서 시발하였고, 3월 10일 철원에 이어 5월 9일 양양의 만세시위가 잠잠해질 때까지 2개월에 걸쳐 전개되였다. 3․1운동은 우선 교통이 편리한 도시로부터 군․면 그리고 자연촌락에 이르기까지 거족적이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강원도의 3․1운동은 비교적 늦게 일어났으나, 그 투쟁과정에 있어서는 강렬하고도 끈질기게 전개되었다. 3․1운동을 촉발시키고 확산시키는데에는 독립선언서의 역할이 매우 컸다. 도내에서 독립선언서가 처음으로 전달된 곳은 평강(2. 28)의 천도교였고, 그후 철원 ․금화 ․화천 ․회양 ․통천 ․간성 ․이천군 등으로 배포되었다. 또한 고종의 국장에 참례한 유학자 ․기독교인과 귀향 학생들에 의하여 유입되었으며, 횡성에서는 서울에 사람(張道動)을 보내 입수한 후 평창 ․강릉 ․원주 ․영월 ․정선군에 전달되었다. 강원도 3․1운동은 3월 7일 춘천(현, 춘천농공)에서 학생만세운동으로 점화된 후 3월 10일 철원, 12일 금화, 17일 간성(현, 고성군), 23일 화천, 27일 청성 ․원주, 4월 1일 홍천, 2일 강릉․통천, 3일 양구, 4일 이천․양양, 5일 평강, 7일 정선, 10일 울진, 14일 회양, 15일 삼척, 21일 영월군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 다만 인제(3.27) ․평창군(4. 3)에서는 거사직전에 탄로되어 만세시위가 무산되고 말았다. 도내 3․1운동은 대체로 천도교․기독교의 교단조직을 통해서 계획되었으나, 점차 국장(國葬)에 참례하여 서울의 시위를 목격한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였고, 귀향학생들이 선도적 역할을 하며 보다 거도적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유학자가 주도한 시위는 홍천군 동면(4. 2), 양양군 도천면 ․강현면(4. 4), 삼척군(4. 6)지역이었고,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합동하여 추진한 곳은 홍천군(4. 1)지역이었다. 또 기독교인과 유학자가 합세한 곳은 양양군 양양면 ․서면 ․손양면(4. 4)이었으며, 천도교인과 유학자가 합세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된 곳은 평창군(4 .3)이었다. 천도교인끼리 벌인 곳은 양구(4. 3)․춘천군(3. 28)이었고, 기독교인만으로 일어난 곳은 강릉군(4. 2) ․통천군 장전리 (4. 2)였으며, 학생들만으로 일어난 곳은 춘천(3. 7) ․횡성(3. 17)․ 삼척(4.15) ․통천읍(4. 9)으로 춘천농업학교 학생과 보통학교 학생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도내 3․1운동은 3월말부터 4월초까지 시위가 가장 많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4월 1일부터 10일까지의 절정기에는 하루 평균 5개소에서 시위가 있였다. 대체로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4. 8 ; 주동자 朴奎束 ․吳世玉, 피살 9명, 부상 20명),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4. 3 : 主주동자 金德元 ․ 全性烈, 피살 8명, 부상 20명), 횡성군 횡성읍(4. 1 ; 주동자 崔宗河, 피살 5명, 부상 8명)에서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특히 양양군 양양읍(4. 4)의 경우 1회에 4천명의 시위에 참여하였는가 하면, 원주군 부론면(3. 27)에서는 8명이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수백명의 규모로 시위를 벌였다. 또한곳에서 통천군 고저리(庫底里)처럼 몇일씩 계속하거나 장날마다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낮에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펼치고 밤이 되면 각처에서 봉화를 올려 독립만세를 외쳤다.
강원도 3. 1운동은 초기에 지식인 ․종교인이 주도하여 평화적 비폭력시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점차 청년 ․학생 ․농민 ․노동자 ․상인층에 의하여 폭력적 무력항쟁으로 바뀌어 감으로써 평화적 시위와 폭력시위를 겸행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일제를 축출하고 독립을 쟁취함에 있었음으로 무력투쟁은 자연스럽고 당연하였다. 그러므로 화천(3. 23) ․김화군(3. 28)에서 시위군중이 헌병에게 무력을 가하고 우편소와 일인상점을 공격함으로써 무력시위가 발생하였다. 통천군 고저리(4. 6)에서 3일동안 계속된 시위는 노동자 ․농민 ․서당생(書堂生)이 합세하여 총검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이에 강원도에서만 총 26건에 50회의 무력시위가 빚어졌다. 도내에서 전개한 만세시위는 총 95건에 이르고, 144회 이상의 시위에 6만5천4백명이 참가 하였으며, 사망자와 부상자는 수백에 이르렀다. 일제는 강원도 시위와 관련하여 검거된 수가 1천 156명(철원의 여자 6명 포함)이라 하였다. 도내에서 피검자가 가장 많은 곳은 175명의 화천군과 172명의 양양군이고, 50명이상인 곳은 원주군 ․홍천군 ․김화군 ․철원군 ․영월군 ․강릉군 ․이천군 ․청성군 ․통천군 ․삼척군 ․춘천군이며, 50명이내인 곳은 회양군 ․울진군 ․평강군 ․간성군(22명) ․정선군 ․양구군 ․인제군으로 14명의 평창군만이 가장 적었다.
그러나 일제는 국제적 이목을 고려하여 3. 1운동의 실태를 고의로 축소하여 그들의 만행을 감추려하였으므로 피검자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江原道史 歷史編, 1995, 1321쪽 참조) 참으로 3․1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거족적 자주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은 한국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에 천명하여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일제가 통치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궁지로 몰아 넣었다. 특히 3․1운동은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시아 약소국가의 민족운동과 저항운동의 선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