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2.고성지방의 의병항쟁(義兵抗爭)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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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성지방의 의병항쟁(義兵抗爭)

가. 을미의병(乙未義兵)의 기인(起因)과 항쟁(抗爭)

(1) 을미의병 (乙未義兵)의 봉기원인(蜂起原因)
운양호(雲揚號) 사건(1875)을 이르켜 끝내 1876년 2월 3일(양 2. 27)강화도 조약(일명 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한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한국에 파병하였고, 동년 6월 21일(양 7. 23)무력으로 궁궐(경복궁)을 침범하는 등갑오왜변(甲午倭變)을 야기하였다. 그러므로 민족존망의 민족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위기적 상황에서 갑오의병(甲午義츄 : 前期 제 1단계)이 일어났다. 이와같이 일제의 침략에 따라 자행된 갑오왜변은 갑오의병의 봉기원인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경북 서상철(徐相轍)의 안동의병(安東義弄 1894, 8)에 이어 평남 김원교(金元喬)의 상원의병(祥原義兵 1895. 7)이 일어났다. 당시의 갑오의병은 그 후 을미의병 전단계에서 일어난 문석봉(文錫鳳)의 회덕의병(懷德義 1895. 10)이나 김이연(金利彦)의 강계의병(江界義兵 1895. 10)보다 한 단계 앞서 봉기한 의병부대로서 한말의병이 기점문제와 관련되기도 한다. 한편 을미의병은 한말의병의 전기 제2단계에 해당하는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876년 문호를 개방한 이래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 ․일 ․노의 3국이 각축전을 벌인 끝에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에서의 세력강화를 획책하여 1895년 8월 20일(양 10. 8) 민비(間妃 : 明成皇后)를 시해(賦害)하여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야기하였고, 이듬해 득세한 친일내각은 시해사건의 진상조차 은폐하면서 국왕(國王 : 高宗)을 강압하여 단발령 공포(동 11 .15)등의 충격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이에 앞서 감행한 변복령(蠻服令 동 6월 ․12월)과 같은 갑오개혁(1894. 7)과 그 후의 을미개혁(1895. 11. 17)을 강행함으로써 사민(士民)들의 충격과 분노가 일시에 특발하게 되였다.
이렇듯 일제의 침략세력에 의하여 감행된 갑오왜변 ․변복령 ․을미사변 ․단발령 공포 등 일련의 만행은 민족감정의 처지에 볼 때 역사상 그 유레가 없는 민족적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일제가 자행한 민비시해사건과 국왕에게 강제로 발표케한 국모폐위조칙(國母廢位詔勅)은 참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정변(政變)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단발령 실시는 국민으로 하여금 정부와 일제를 원수처럼 여기게 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변복령은 오랑캐와 금수를 상징하는 개화와 예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을미의병의 봉기원인의 직접적인 기운은 변복령이 내려진 직후 1895년 초부터 비롯되었고,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는 그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같은 만행과 만국적 위기에 처하여 친일적 관료와 일제를 상대로 한 국수보복(國警報復)을 부르짓고 마침내 기의토적(起義討賊)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2) 고성지방의 의병항쟁(義兵抗爭)
한말의병은 관군이 아닌 민병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하여 '피의 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호국정신은 만주 ․노령과 중국대륙에서의 독립군과 광복군에 계승발전되어 대일군사노선(對日軍事路線)을 형성하는데 그 핵심적 근간(根幹)을 이루었다. 따라서 한말의병은 전 항쟁기간을 통해서 전국 어디서나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또 직 ․간접적으로 의병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강원의병은 한말의병에 있어서 그 규모로 보아 가장 크게 봉기하였고, 항전(抗戰)에 있어서도 가장 끈질기게, 가장 오랫동안 국내외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실로 을미의병 당시 강원도지방에서 봉기한 의병가운데 돋보인 의병진은 영서북부지역에서 이소응(李昭應)의 춘천의진(또는 春川義兵)과 영서남부지역에서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진 (또는 호좌의병) 그리고 영동지역에서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진(또는 關東義兵)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에 을미의병 당시 영동지역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강릉의진은 전항전과정상, 거의(擧義, 1896. 1. 17~1. 30)―강릉입성과 부대정비(2. 1~3. 1)―원산공략을 위한 북진(元山次略北進, 3. 4~4. 30)―동해남북연안일대의 의병항쟁(4. 4~5. 31)―북행 ․해산(北行解散, 6월초~10. 5)등의 5단계로 구분한다. 따라서 강릉의병의 활동무대가 동해남북연안을 중심으로 전개하였고, 또 고성 ․간성지방이 그 길목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강릉의진의 항전과정 중에서 고성지방을 중심으로 전개한 의병활동에 대하여 민용호가 지은 『關東倡義錄(국사편찬위원회, 1984)』을 중심으로 관련 사실만을 뽑아 간추려본다. 민용호가 이끄는 강릉의병(총수 2,380명의 의병중 강제동원된 상당수의 농민을 귀가시킴)이 원산항을 공략하기 위하여 북진의 장도(壯途)에 오른 것은 1896년 3월 4일(음 1 .21)로 강릉에 입성(2. 1)한지 2개월 뒤의 일이었다. 이제 강릉의진은 주문진을 경유 해안선을 따라 양양(3. 5) ․간성(杆城 3. 8)을 거쳐 3월 9일에는 고성(高城)에 이르렀다. 이때 권형원(權亨源, 고성군 서면 출신)이 일본군 8명을 붙잡아 민용호에게 받치자 그를 고성유진장(高城留陣將)으로 임명하고, 이틀동안 고성에 유진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동안의 북진연로(北進沿路)의 고을은 이미 의병의 활동지역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없이 순탄한 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성에 도착하였을 때 군수 홍종헌(洪鍾憲)이 나와 영접해주는 형편이었다.
그 후 3월 14일 고성을 떠나 3월 17일(음 2. 4) 원산으로부터 7․80리 떨어진 신평(新坪)에 도착한 민용호는 원산항의 공략을 세웠다. 이 때 일기불순(진눈깨비가 내림)으로 강릉의진이 유진하는 동안 3월 19일 원산으로부터 일본군이 급습해왔다. 뜻밖에 당한 강릉의병은 결사항전하였으나 화력의 얼세로 백병전까지 필쳤음에도 불구하고 원산공략 직전에 패하고 말았다. 당시 안변군수 임면호(任冕鎬)가 함흥관찰사 김유성(金裕成)에게 올린 보고에 의하면 신평전투에 투입된 의병총수는 1,700명이었고, 이 전투로 인하여 민간인 9명이 사망하고, 51채의 가옥이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민용호는 신평전주에서 의병 사망자 수십명, 일본군 사망자 180명으로 기록(關東倡義錄 29쪽)하고 있으나, 전후 사정을 미루어보아 일본군 보다는 의병의 타격이 훨씬 컸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신평전투에서 패전한 강릉의진은 4월 3일(음 2. 21) 강릉에 회군할 때까지 흩어진 의병을 규합 수습하고, 의병소모에 진력하는 등 전력손실수습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제 신평전투를 치른지 이틀 후 강릉의진은 회양(3. 20)․양구(3, 23)를 거쳐 3월 29일 양양에 도착 하였다. 이 때 민용호는 일본군이 고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북방으로부터의 위협과 후 한을 막기 위해서 별동장 김연상(別動將 金演常)에게 군사 5백명을 주어 고성에 급파시켰다.
(關東倡義錄, 29~30쪽) 과연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4월 11일(음 2. 29) 신평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고성 ․ 간성의 의병을 격퇴 시키려고 그 여세를 몰아 고성항으로 남하하자. 김연상의병부대는 2백여명의 일본군을 맞아 기습공격으로 접전끝에 적군 97명을 사상(死傷)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고성승첩(高城勝捷)'은 비록 민용호의 휘하 별동부대가 수행한 전투이지만 강릉의병사상 최고의 전과를 올린 승전이었다.(關東倡義錄 33쪽) 한편 강릉의진이 본진인 강릉으로 회군한 이후, 동년 5월 24일(음 4. 12)에 신임 관찰사 서정규(徐廷圭)는 친위대 제2대대 중대장 정위 김홍권(正尉 金澔權)등과 맹일호(孟一鎬, 전강릉부 主業)․이석범(李錫範, 강릉의병 좌군장 역임)등을 앞세워 강릉의 의병본진을 향해 돌격해 들어왔다. 이에 관군(官軍 : 京軍)과 수성전(守成戰)을 벌인 강릉의병은 전력의 얼세로 마침내 강릉을 버리고 임계(臨溪)로 물러난 후 삼척지역으로 이진(移陳)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음 4. 19) 뒤쫓아 공격해은 관군에게 유진장 김헌경(金鑛卿, 삼척출신) ․선봉장 김도현(金道鉉, 전 안동의병장)과 민용호의 강릉의병장이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끝내 패퇴하여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다. 이즈음(5월중)에 춘천의병의 별동부대인 성익현(成益絃)의병부대가 강릉의진과 합세하고자 동해안 일대로 진출해왔다. 그리하여 통천을 지나 고성지방으로 내려온 그는 고성군수 홍종헌(洪鍾憲)과 양양군수 양명학(楊命學)을 차례로 처단한 후 양양 속사동(束沙洞)에 이르렀다.(關東倡義錄 54쪽) 그러나 김홍권이 이끄는 관군의 공격을 받고 성익현은 부득이 간성의 건봉사(乾鳳寺)로 퇴각 유진하였다. 이에 민용호는 성익현의 의병부대와 결합하기 위해서 북상하여 연곡 ․양양 ․간성방면으로 나아갔다. 이에 김홍권의 관군(경군)은 강화도 관군 5백명이 지원 뿐만 아니  5․6백명의 예수교인들이 가세하여 간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용호의 강릉의병은 6월 12일(음 5. 2) 그 예봉을 꺽으려 간성의 관군과 일대 접전을 벌렸다. 이 간성전투에서 거둔 전과는 의병측이 30여명의 관군을 포로로 잡은데 비하여 6․70여명의 의병이 부상을 당하는 등 오히려 패하여 순포(巡浦)로 퇴각하였다. 이번에는 관군이 순포에 유진하고 있는 의병진을 공격하자 이를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한 결과 이 싸움에서는 관군측의 사상자와 포로자가 2백명에 달하는 뜻밖의 대승을 거두었다.(關東倡義錄 55~56쪽) 그후 민용호의 강릉의병은 항전의 결의를 늦추지 않고 항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마침내 6월 24일(음 5. 14) 양양에 주둔한 관군을 공격하여 중대장 김홍권 이하 80여명의 관군을 사살하는 대승을 또 다시 거두였다. 실로 양양전투는 민용호의 강릉의진이 거둔 최후의 승전 개가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후 강릉의진의 의병활동은 급격히 쇠퇴하여 의병진의 여러 의병장을 잃는 처지에서 동년 10월 5일 끝내 두만강을 건너갔고, 마침내 강릉의병은 해체되었다. 이때 민용호는 후일을 기약하면서 서간도를 지나 심양(瀋陽)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강릉의병은 1896년 1월 중순 원주에서 거의(擧義)한 이래 10여개월에 걸쳐 을미의병을 필친끝에 그 막을 내렸다

나.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인(起因)과 항쟁(抗爭)

(1) 정미의병(丁未義兵)의 봉기원인(蜂起原因)
한국을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안으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 2. 23)와 한일외국인고문 용병에 관한 협정서(第1次韓日協豚約 1904. 8. 22)를 강제로 체결하고, 밖으로는 영일동쟁(英日同盟, 제1차 1902. 1. 30 ; 제2차 1905. 8. 12)과 태프트 ․가쓰라 밀약(密約 : W. H. Taft―桂太郎覺書, 1905. 9. 5)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다져놓는 한편, 마침내 러시아를 패퇴시키고 노일강화조약(露日講和條約 : Portsmouth 강화조약, 1905. 9. 5)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에서의 독점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을 체결된 것처럼 거짓 반포하였다. 이에 한국은 불법적인 을사5조약의 특결(勒結)로 외교권 등 국권의 일부가 강탈당하였고, 1906년 2월 1일부터 일제가 통감정치를 자행함으로씨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준식민지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같은 처지에서 전국의 유생들은 상소 ․격문으로 조약파기를 주장하고, 중망(衆望)있는 지사(志士)들은 자결로 민족의 분기를 촉구하자,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구국의병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므로 을사의병(中期, 甲辰 : 제3단계 ; 乙未 : 제4단계)은 을사5조약의 체결과 애국지사들의 순국을 계기로 기의(起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병항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이듬해인 1906년(丙午年)이었으므로 이를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을사의병 당시 강원의병의 경우 홍천의 박장호(朴長浩)․양구의 최도환(崔道換)․ 삼척의 김하규 ․황청일(金夏奎․黃淸一)․울산의 김현규(金懸奎)의병부대가 봉기하였다. 그러나 한말의병의 극치를 이룬것은 그 이듬해부터 일어난 정미의병(丁末義兵)이었다. 당시 고종(高宗)은 일제의 야욕을 국내의 힘만으로는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국제정의에 호소하여 열강의 여론이나 간섭에 의한 국권회복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1907년 6월 25일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에서 '헤이그 밀사사건'이 알려지자, 일제는 그 책임을 지워 고종의 양위를 강행하였다. 이제 고종의 퇴위는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 처사로 그사실 자체가 조선멸망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정미의병 봉기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정미의병이 본격적으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고 가장 치열하게 반일투쟁을 전개하게 된 계기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 동 7. 24)에 따른 한국군 해산이었다. 이때 한국군대는 총 7,600여명(시위대 및 인취대 4,700명, 지방진위대 2,434명, 특수부대병력 약 500여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보루인 군대마져 해산한다는 것은 국가의 멸망을 뜻함이었다. 참으로 이 지경을 당하여 의병봉기는 당연하였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정미의병(後期, 제5․6단계)은 강압과 기만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체결요건도 갖추지 않은 정미 7조약, 그리고 동년 8월 1일부터 강행된 한국군대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그리하여 정미의병은 1907년 8월부터 국권방위(國權防衛)에 기의목적을 두고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제 정미의병은 지딘달 의병을 토벌하던 관군인 해산군이 의병진에 합세함으로써 과거의 을미의병이나 을사의병과 비교할 때, 의병의 조직과 성격면에서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고, 전투면에서도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던 유생들과는 달리 치열하고도 장기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하게 됨으로써 한말의병의 극치를 이루게 되었다.

(2) 고성지방의 의병항쟁(義兵抗爭)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한국식민지화정책이 가속화되고, 이에 동년 7월 고종의 퇴위와 정미7조약을 통하여 끝내 한국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마져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일어난 정미의병(丁未義兵 後期, 제5단계 : 제6단계)은 해산군의 참여로 의병운등이 전국화되었고, 의병전술이 향상되었으며, 무기의 확충과 의병의 다. 이 싸움에서 의병들은 4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일본경찰대와 수비대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獨立運動史資料集 3,622쪽) 한편 고성군 출신 의병장 김백룡(金伯龍)의 활약도 적지 않았다. 일본측은 『暴徒史編韓資料』에서 김백룡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김백룡은 고성군의 주민으로서 나이는 43세, 부하 70여명을 거느리고 고성군에서 폭동하기 시작하여 고성 ․회양군을 횡행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3,618쪽) 이렇듯 김백룡 의병장은 고성군과 내륙지방의 회양(准陽)까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의병 70여명을 거느렀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의세(義勢) 또한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고성지방에서 활약한 의병장은 어득수(魚得水)․김해석(金海石)등과 고성의 인접지역에서 활동한 민긍호․박장호(朴長治)․금기철(琴基哲)․윤기영(尹起英)․성인호(成仁鎬)등 이었다. 따라서 간성군 현내면(縣內面), 고성군 신북면(新北面) 금강산 부근, 양양군 신흥사(神興寺)부근, 강릉군 연곡(漣谷)․옥계면(玉溪面)등이 의병들의 활동지역이었다. 어득수(40세)는 정선군 창촌리(倉村里)의 주민으로 그 곳에서 기의(起義)하여 의병 80여명을 거느리고 양양 ․간성 ․강릉 등 각군에서 활동하였으며, 김해석은 강릉군 신리면(新里面)의 주민으로 양양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 80여명을 이끌고 고성 ․회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3,618쪽)
특히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10월 20일 고성군 출신 권석근(權錫根,23세)과 이덕근(李德根. 22세)은 고성군에서 활약중인 의병소모장(義兵召寡將) 김옥배(金玉培)의 휘하 의병으로 그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의 화물운만부로 가장하여 고성읍내 일본군의 동정을 정탐하다가 헌병대 고성분대에게 발각 체포되어 마침내 동년 11월 4일 장전(長箭)에서 총살당하였다.(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90~91쪽)
고성지방에서 전개된 의병활동은 친일적인 일진회(一進會) 회원과 그 가족뿐만 아니라 일제의 관헌에 대하여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따라서 이같은 의병항쟁은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이는 1908년 5월 28일 의병 18명이 간성부근에서 교전하였다는 기록(『朝鮮暴徒討代誌(朝鮮駐箚軍司令部, 1913)』)으로보아 짐작할 수 있다.(獨立運動史 資料集 3,7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