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강원지방의 의병항쟁(義兵抗爭)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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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절 한말의병의 봉기와 강원의병의 항쟁
1. 강원지방의 의병항쟁(義兵抗爭)
한국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으로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치열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시기의 한말의병(韓末義兵)은 갑오의병(甲午義兵, 1894)․을미의병(乙未義兵, 1895)․을사의병(乙巳義兵, 1995)․정미의 병(丁未義兵, 1907)으로 이어지면서 전환기의병(轉換期義兵, 1909)이 종식되는 1914․5년까지 전후 약 20년동안 대일구국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강원의병은 독립운동의 초기단계인 을미의병에서부터 '피의 항쟁'을 펼쳤다. 원래 한말(乙未)의병의 진원지였고 웅거지였기도 한 강원도지역은 당시 화서(華西 李恒老) 학통에 연원하여 춘천유럼의 척사이념(斥邪理念)이 남달리 철저하였고, 산포수가 많아 전투 역량을 높일 수 있었고, 산악지대로 장기전과 유격전을 펼치는데 작전상의 이점이 많았으며, 무기제조장의 설치로 어느 정도 자체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강원의병의 대일 항쟁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을미의병(前期 제2단계)은 일제가 저지른 민비(開妃)시해사건(또는 明成皇后弑害 : 乙未事變)과 친일내각이 강행한 단발령공포, 갑오․을미개혁 등을 단행함으로써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투철한 유림들이 주도하여 '국수보복(國讐報復)'을 부르짖고 기의토적(起義討賊)의 깃발을 높이 올렀다. 이때 강원의병 가운데 돋보인 의병진영은 영서북부지역에서 이소응(李昭應)의 춘천의병(春川義兵), 영서남부지역에서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또는 湖左義斥) 그리고 영동지역에서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병(또는 關東義兵)이었다. 1896년 1월 18일에 기병한 춘천의진은 을미의병중에서 처음으로 관찰사(曹寅承)를 처단한 의진이었다. 그러나 서울진격 중에 가평부근 벌업산(寶納山)전투에서 경군(京軍)에게 패산(敗散)하여 잔여의병은 제천의진과 강릉의진으로 이동 합세하였다.
한편 제천의진은 원주의병(동 1. 13 : 禮平義兵)을 모체로 동년 2월 3일 영월에서 기의(起義)하여 한말의병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대일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제천을 중심으로 제천 ․ 단양 ․ 충주 ․ 청풍 ․ 원주일대에서 활약한 제천의진은 관찰사(충주부 金奎輸)․군수(단양 權浦, 청풍 徐相耆)등 친일관리를 처단하였고, 그후 서북대장정(西北大長征)을 감행하여 충북 ․ 강원 ․ 함남을 거쳐 평안북도의 초산에 당도(8. 24)하였다. 또한 강릉의진은 강릉을 중심으로 동년 1월 30일 영동구군도창의소(嶺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여, 친일경무관보(親日警務官補, 高償植)등을 처단하고 '원산진공작전(元山進攻作戰)'을 시도하는 등 강원도 영동일대와 함경도 남부지역 에서 의세(義勢)를 떨치 었다.
이렇듯 강원의병이 대일항쟁을 펼치고 있을 때 고종(高宗)은 아관파천(俄館播遷, 2. 11)을 단행하였고, 친일개화파 내각이 물러나자 단발령을 철회하였으며, 국왕은 의병해산을 종용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하였다. 그러나 척사적이고 전투적인 강원의병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조금도 멈출수 없다하여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관군보다 의병의 열세로 제천의진의 일부는 초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가 후일을 기약하였고, 강릉의진의 잔여 의병 역시 일부는 개마고원(蓋馬高原)과 두만강쪽으로 도만(渡滿)하여 재기를 다짐하게 되었
다.
노일(露日)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소위 을사 5조약(1905. 11. 17)을 불법으로 늑결(勒結)하고, 한국의 재정과 외교권을 강탈하여 준식민지적인 통감정치(統監政治)를 자행하였다. 이에 유생들은 상소(上疏)․격문(檄文)으로 조약파기(條約破棄)를 주장하고, 중망(衆望)있는 지사들은 자결로 민족의 분기(奮起)를 촉구하자 마침내 '주권회복(主權回復)'을 위한 구국의병항쟁이 다시 일어낮다. 을사의병(中期 제3․4단계)당시 강원의병은 조약늑결직전인 1905년 9월에 기병한 원용석(元容錫)의 주천의병(酒泉義兵)으로 촉발하여 이듬해 병오년(丙午年)부터는 영서지방에서 박장호(朴長浩)의 홍천의진, 최도환(産道燥)의 양구의진, 영동지방에서 김하규(金夏奎). 황청일(黃淸一)의 삼척의진, 김현규(金顯奎)의 울진의진이 일어나 강원의맥(江原義賦)을 이어 갔다.
을사의병의 불길이 채 꺼지기도 전에 일제의 강압과 기만에 의한 고종퇴위(1907. 7. 21)와 체결요건도 갖추지 않은 정미조약(동 7. 24) 그리고 한국군대해산(동 8. 1)이 강행됨으로써 한국은 군대없는 나라꼴이 되고 말았다. 이에 최후의 보루(堡壘)로 여겨오던 군대마저 해산당한 처지에서 '국권방위(國權防衛)'를 위한 정미의병(後期 제5․6단계)이 치열하게 전개되였다. 결국 한말의병에 해산군이 가담․합세함으로써 해산병을 주축으로한 새로운 의병부대가 봉기하게 되었고, 따라서 해산군의 의병화로 무장의 강화, 작전과 전술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강원도의 경우,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에서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特務正柱)․김덕제(金德濟, 正駙)의 의병진은 정미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고, 특히 민긍호의 의진은 강원의 병의 핵심적 근간을 이루었다. 이때 민긍호의진은 원주 ․제천 ․충주 ․장호원 ․량근 ․화천 ․양구 ․고성 ․강릉 등의 강원도와 경기도일대에서 의세를 떨쳤고. 역시 김덕제의 의진은 영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릉 ․양양 간성 ․통천떼서 한때 기세를 잡았다. 또한 원주진위대와 때를 같이하여 동년 8월 제천에서 재기한 이강년(李康秊)의 의진은 한때 민긍호의진과 공동작전을 펴기도 하였고, 경상 ․경기 ․강원도 전역을 누비면서 서울진공을 시도하는 연합의병진영과도 합세하여 대일항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한편 동년 9월 원주에서 재기한 이인영(李鱗榮) ․이은찬(李殷瓚)의 원주의진(또는 關東倡義軍)은 대일선전포고를 열강에게 알리는 동시에, 동년 12월 전국의병연합체인 13도창의대진 소(十三道倡大陣所)를 결성하여 민긍호 ․이강년의진 등 전국의병진과 더불어 서울탈환작전을 시도하였으며, 강원 ․경기도일원에서 독립전쟁으로서의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임진강
유역을 기반으로 하여 동년 9월 기병한 왕회종(王會鍾) ․김주묵(金濤黙)의진은 강원도 철월 ․화천에서 활동하였고, 동년 10월 경기도 연천에서 재기한 허위(許蔿)의진은 철원지역에서 활동한 후 13도창의대진소가 시도한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이 되어 격전을 벌였다. 이때 성익현(成益鉉) ․변학기(邊鶴基) ․주광석(朱光錫) ․최돈호(崔焞鎬)의진 등 수많은 의병진이 영동일대에서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춘천의진과 제천의진에서 활약한 유홍석(柳弘錫)은 1907년 8월 그의 문족과 문인들이 의병을 소모하여 춘천(柯亭里)을 증심으로 가평부근 주길리(珠吉里)전투에서 혈전을 벌여 춘천의병의 의맥(義豚)을 이어 갔다. 특히 유홍석의 자부인 윤희순(尹熙順)은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돋구고 군자금을 모금하는등 적극적으로 춘천의진을 지원하였다. 또한 을미의병 이래 의병활동을 벌여온 지용기(池龍退)의진은 동년 8월부터 화천 ․춘천에서 활약하였으나 방동리(芳洞里)전투에서 혈전 끝에 전사하였고, 을사의병 당시 홍천에서 재기한 박장호적진은 이강년 의진과 한때 합세하기도 하였으며, 그후 만주 삼원보(三源堡)로 들어가 1919년 의병출신을 주축으로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圍)을 조직하고 그 도총재가 되어 대일항쟁을 벌였다.
을미의병때 제천의진(또는 湖左義兵)을 주도하였던 유인석은 노령(露領)에 항구적인 항일기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부산 동래를 띠나 블라디보스톡(海蔘威)으로 들어갔다. 그는 1910년 6월 이상설(李相卨) ․이범윤(李範允)등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도총재로서 국내진공작전을 도모하였고, 이어 동년 8월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회장인 자신의 명의로 구미열강에게 호소문을 보내 닥쳐을 국치(國恥 : 韓日倂呑)에 대비하려 하였다. 그 후 노령에서 만주 봉천성(奉川省)으로 옮긴 유인석은 이소응 ․유홍석을 비롯한 그의 종족(宗族) ․사우(士友)들과 함께 조국광복을 염원하다가 마침내 1915년 1월 관전현(寬甸縣)에서 타계함으로써 사실상 한말강원의병사 역시 그 종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같이 강원의병은 국가존망에 처하여 생사를 초월한 우국충정의 전투적 의병이었다. 또한 수백 수천이 참가한 집단적 항쟁을 펼침으로써 가장 희생이 많았을 뿐 아니라, 가장 처절하게, 가장 오랫동안 끝까지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구한말의병의 항일정신과 그 전통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계승되어 민족군대로서 그 사명을 수행하였다.
1. 강원지방의 의병항쟁(義兵抗爭)
한국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으로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치열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 시기의 한말의병(韓末義兵)은 갑오의병(甲午義兵, 1894)․을미의병(乙未義兵, 1895)․을사의병(乙巳義兵, 1995)․정미의 병(丁未義兵, 1907)으로 이어지면서 전환기의병(轉換期義兵, 1909)이 종식되는 1914․5년까지 전후 약 20년동안 대일구국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강원의병은 독립운동의 초기단계인 을미의병에서부터 '피의 항쟁'을 펼쳤다. 원래 한말(乙未)의병의 진원지였고 웅거지였기도 한 강원도지역은 당시 화서(華西 李恒老) 학통에 연원하여 춘천유럼의 척사이념(斥邪理念)이 남달리 철저하였고, 산포수가 많아 전투 역량을 높일 수 있었고, 산악지대로 장기전과 유격전을 펼치는데 작전상의 이점이 많았으며, 무기제조장의 설치로 어느 정도 자체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강원의병의 대일 항쟁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을미의병(前期 제2단계)은 일제가 저지른 민비(開妃)시해사건(또는 明成皇后弑害 : 乙未事變)과 친일내각이 강행한 단발령공포, 갑오․을미개혁 등을 단행함으로써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투철한 유림들이 주도하여 '국수보복(國讐報復)'을 부르짖고 기의토적(起義討賊)의 깃발을 높이 올렀다. 이때 강원의병 가운데 돋보인 의병진영은 영서북부지역에서 이소응(李昭應)의 춘천의병(春川義兵), 영서남부지역에서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또는 湖左義斥) 그리고 영동지역에서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병(또는 關東義兵)이었다. 1896년 1월 18일에 기병한 춘천의진은 을미의병중에서 처음으로 관찰사(曹寅承)를 처단한 의진이었다. 그러나 서울진격 중에 가평부근 벌업산(寶納山)전투에서 경군(京軍)에게 패산(敗散)하여 잔여의병은 제천의진과 강릉의진으로 이동 합세하였다.
한편 제천의진은 원주의병(동 1. 13 : 禮平義兵)을 모체로 동년 2월 3일 영월에서 기의(起義)하여 한말의병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대일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제천을 중심으로 제천 ․ 단양 ․ 충주 ․ 청풍 ․ 원주일대에서 활약한 제천의진은 관찰사(충주부 金奎輸)․군수(단양 權浦, 청풍 徐相耆)등 친일관리를 처단하였고, 그후 서북대장정(西北大長征)을 감행하여 충북 ․ 강원 ․ 함남을 거쳐 평안북도의 초산에 당도(8. 24)하였다. 또한 강릉의진은 강릉을 중심으로 동년 1월 30일 영동구군도창의소(嶺東九郡都倡義所)를 설치하여, 친일경무관보(親日警務官補, 高償植)등을 처단하고 '원산진공작전(元山進攻作戰)'을 시도하는 등 강원도 영동일대와 함경도 남부지역 에서 의세(義勢)를 떨치 었다.
이렇듯 강원의병이 대일항쟁을 펼치고 있을 때 고종(高宗)은 아관파천(俄館播遷, 2. 11)을 단행하였고, 친일개화파 내각이 물러나자 단발령을 철회하였으며, 국왕은 의병해산을 종용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하였다. 그러나 척사적이고 전투적인 강원의병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조금도 멈출수 없다하여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관군보다 의병의 열세로 제천의진의 일부는 초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가 후일을 기약하였고, 강릉의진의 잔여 의병 역시 일부는 개마고원(蓋馬高原)과 두만강쪽으로 도만(渡滿)하여 재기를 다짐하게 되었
다.
노일(露日)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소위 을사 5조약(1905. 11. 17)을 불법으로 늑결(勒結)하고, 한국의 재정과 외교권을 강탈하여 준식민지적인 통감정치(統監政治)를 자행하였다. 이에 유생들은 상소(上疏)․격문(檄文)으로 조약파기(條約破棄)를 주장하고, 중망(衆望)있는 지사들은 자결로 민족의 분기(奮起)를 촉구하자 마침내 '주권회복(主權回復)'을 위한 구국의병항쟁이 다시 일어낮다. 을사의병(中期 제3․4단계)당시 강원의병은 조약늑결직전인 1905년 9월에 기병한 원용석(元容錫)의 주천의병(酒泉義兵)으로 촉발하여 이듬해 병오년(丙午年)부터는 영서지방에서 박장호(朴長浩)의 홍천의진, 최도환(産道燥)의 양구의진, 영동지방에서 김하규(金夏奎). 황청일(黃淸一)의 삼척의진, 김현규(金顯奎)의 울진의진이 일어나 강원의맥(江原義賦)을 이어 갔다.
을사의병의 불길이 채 꺼지기도 전에 일제의 강압과 기만에 의한 고종퇴위(1907. 7. 21)와 체결요건도 갖추지 않은 정미조약(동 7. 24) 그리고 한국군대해산(동 8. 1)이 강행됨으로써 한국은 군대없는 나라꼴이 되고 말았다. 이에 최후의 보루(堡壘)로 여겨오던 군대마저 해산당한 처지에서 '국권방위(國權防衛)'를 위한 정미의병(後期 제5․6단계)이 치열하게 전개되였다. 결국 한말의병에 해산군이 가담․합세함으로써 해산병을 주축으로한 새로운 의병부대가 봉기하게 되었고, 따라서 해산군의 의병화로 무장의 강화, 작전과 전술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강원도의 경우,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에서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特務正柱)․김덕제(金德濟, 正駙)의 의병진은 정미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고, 특히 민긍호의 의진은 강원의 병의 핵심적 근간을 이루었다. 이때 민긍호의진은 원주 ․제천 ․충주 ․장호원 ․량근 ․화천 ․양구 ․고성 ․강릉 등의 강원도와 경기도일대에서 의세를 떨쳤고. 역시 김덕제의 의진은 영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릉 ․양양 간성 ․통천떼서 한때 기세를 잡았다. 또한 원주진위대와 때를 같이하여 동년 8월 제천에서 재기한 이강년(李康秊)의 의진은 한때 민긍호의진과 공동작전을 펴기도 하였고, 경상 ․경기 ․강원도 전역을 누비면서 서울진공을 시도하는 연합의병진영과도 합세하여 대일항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한편 동년 9월 원주에서 재기한 이인영(李鱗榮) ․이은찬(李殷瓚)의 원주의진(또는 關東倡義軍)은 대일선전포고를 열강에게 알리는 동시에, 동년 12월 전국의병연합체인 13도창의대진 소(十三道倡大陣所)를 결성하여 민긍호 ․이강년의진 등 전국의병진과 더불어 서울탈환작전을 시도하였으며, 강원 ․경기도일원에서 독립전쟁으로서의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임진강
유역을 기반으로 하여 동년 9월 기병한 왕회종(王會鍾) ․김주묵(金濤黙)의진은 강원도 철월 ․화천에서 활동하였고, 동년 10월 경기도 연천에서 재기한 허위(許蔿)의진은 철원지역에서 활동한 후 13도창의대진소가 시도한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이 되어 격전을 벌였다. 이때 성익현(成益鉉) ․변학기(邊鶴基) ․주광석(朱光錫) ․최돈호(崔焞鎬)의진 등 수많은 의병진이 영동일대에서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춘천의진과 제천의진에서 활약한 유홍석(柳弘錫)은 1907년 8월 그의 문족과 문인들이 의병을 소모하여 춘천(柯亭里)을 증심으로 가평부근 주길리(珠吉里)전투에서 혈전을 벌여 춘천의병의 의맥(義豚)을 이어 갔다. 특히 유홍석의 자부인 윤희순(尹熙順)은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돋구고 군자금을 모금하는등 적극적으로 춘천의진을 지원하였다. 또한 을미의병 이래 의병활동을 벌여온 지용기(池龍退)의진은 동년 8월부터 화천 ․춘천에서 활약하였으나 방동리(芳洞里)전투에서 혈전 끝에 전사하였고, 을사의병 당시 홍천에서 재기한 박장호적진은 이강년 의진과 한때 합세하기도 하였으며, 그후 만주 삼원보(三源堡)로 들어가 1919년 의병출신을 주축으로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圍)을 조직하고 그 도총재가 되어 대일항쟁을 벌였다.
을미의병때 제천의진(또는 湖左義兵)을 주도하였던 유인석은 노령(露領)에 항구적인 항일기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부산 동래를 띠나 블라디보스톡(海蔘威)으로 들어갔다. 그는 1910년 6월 이상설(李相卨) ․이범윤(李範允)등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도총재로서 국내진공작전을 도모하였고, 이어 동년 8월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회장인 자신의 명의로 구미열강에게 호소문을 보내 닥쳐을 국치(國恥 : 韓日倂呑)에 대비하려 하였다. 그 후 노령에서 만주 봉천성(奉川省)으로 옮긴 유인석은 이소응 ․유홍석을 비롯한 그의 종족(宗族) ․사우(士友)들과 함께 조국광복을 염원하다가 마침내 1915년 1월 관전현(寬甸縣)에서 타계함으로써 사실상 한말강원의병사 역시 그 종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같이 강원의병은 국가존망에 처하여 생사를 초월한 우국충정의 전투적 의병이었다. 또한 수백 수천이 참가한 집단적 항쟁을 펼침으로써 가장 희생이 많았을 뿐 아니라, 가장 처절하게, 가장 오랫동안 끝까지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구한말의병의 항일정신과 그 전통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계승되어 민족군대로서 그 사명을 수행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