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후기의 고성군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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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조선후기의 고성군
1592년 왜구의 침략과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국가와 민족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래도 위정자들은 군제를 개편하고 성곽(城郭)을 수축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려고 노심초사하였고,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면서도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보다 낳은 생활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탐관오리들은 사치와 방탕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큰 줄기는 발전적인 측면으로 흘렀고, 18세기 영조(英祖) 정조시대(正祖時代)에는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고 문화의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영조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 전체의 부(府) 목(牧) 군(郡) 현(縣)과 고성군(高城郡) 간성군(杆城郡)의 상황을 살펴보면 간성군은 강릉진관소속(江陵鎭管所屬)으로 음관4품(蔭官四品)의 군수(郡守)가 관할하였으며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30인, 아전 40인, 지인 20인, 사령 25명, 관노 18명, 관비 10명 등 총 147명의 관원과 관속이 있었고, 간성군의 관아는 아사(衙舍) 43간(間), 군기고(軍器庫) 12간, 관청(官廳)이 34간, 상정청(詳定廳)이 12간, 군사(郡司) 6간, 향청(鄕廳) 15간, 훈련청(訓練廳) 8간, 군관청(軍官廳) 12간, 군학당(郡學堂) 6간, 작청(作廳) 16간, 지인청(知印廳) 4간, 군청(郡廳) 8간, 사령청(使令廳) 8간, 관노청(官奴廳)8간 등 총192간 이었다.
또한 고성군(高域郡)도 강릉진관소속(江陵鎭管所屬)으로 음관5품(舊官五品)의 군수(郡守)가 관할하였으며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1인, 아전 41인, 지인 20인, 사령 18명, 관노 27명, 관비 21명 등 총 141명이 있였고, 관아는 객사(客舍) 33간, 아사(衙舍) 112간, 향청(鄕廳) 21간, 군기청(軍器廳) 7간, 훈련청(訓練廳) 12간, 군청(軍廳) 10등 총 195간 이었다.
간성군과 고성군의 위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조선 후기 강원도 각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호구(戶口)와 관원(官員) 관속(官屬)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 2>와 같다.
<표 2> 조선후기 강원도 府․牧․郡․縣의 戶口와 官員․官屬表(1759)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같이 간성군은 군수가 관할하는 군(郡)으로서 2,194호에 남자 3,505명, 여자 7,836명으로 총 11,341명이 거주하였으며 이를 관할하는 관원과 관속은 군수를 포함하여 총 146명이었다. 고성군도 역시 군수가 관할하는 군(郡)으로서 1,937戶에 남자 3,850명, 여자 3,026명으로 총 6,876명이 거주하였으며 이를 관할하는 관원과 관속은 군수를 포함하여 141명이었다.
간성군이나 고성군은 호구가 제일 많은 원주(原州)(8,323戶 37,754名)나, 강릉(江陵)(6,831戶 32,202名)에 비교하면 철씬 적고, 호구가 가장 적은 평창군(平晶鄧)(525戶 3,161名)이나, 흡곡(525戶 2,461名)에 비하면 훨씬 큰 군(郡)이었음을 알 수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여 영조(英祖) 35년(1759) 당시의 간성군과 고성군의 면(面) 리(里)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의 <표 3>과 <표 4>와 같다.
<표 3> 杆城郡의 面 里와 호구현참 (1759年)



이상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같이 간성군은 9개면, 77개리에 2,133호, 11,031명이 거주하여 18세기 간성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1,031명의 인구중에서 남자는 3,401명이고, 여자는 7,630명으로 여자가 남자의 배가 훨씬 넘는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의 강원도 전체의 인구중 남 너의 비을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이며 그것이 인류사회의 자연법칙이었다. 그런데 간성군만 여자가 남자의 배가 넘는다는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각 리별 통계가 거의 여자나 남자의 배가 넘으므로 숫자상의 착오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간성군은 동해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관계로 남성의 사망이 많아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인구조사 당시 고의로 남성의 수를 줄였는지 확실한 내용을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아무튼 특이한 현상이다.
1592년 왜구의 침략과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국가와 민족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래도 위정자들은 군제를 개편하고 성곽(城郭)을 수축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려고 노심초사하였고,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면서도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보다 낳은 생활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탐관오리들은 사치와 방탕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큰 줄기는 발전적인 측면으로 흘렀고, 18세기 영조(英祖) 정조시대(正祖時代)에는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고 문화의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영조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 전체의 부(府) 목(牧) 군(郡) 현(縣)과 고성군(高城郡) 간성군(杆城郡)의 상황을 살펴보면 간성군은 강릉진관소속(江陵鎭管所屬)으로 음관4품(蔭官四品)의 군수(郡守)가 관할하였으며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30인, 아전 40인, 지인 20인, 사령 25명, 관노 18명, 관비 10명 등 총 147명의 관원과 관속이 있었고, 간성군의 관아는 아사(衙舍) 43간(間), 군기고(軍器庫) 12간, 관청(官廳)이 34간, 상정청(詳定廳)이 12간, 군사(郡司) 6간, 향청(鄕廳) 15간, 훈련청(訓練廳) 8간, 군관청(軍官廳) 12간, 군학당(郡學堂) 6간, 작청(作廳) 16간, 지인청(知印廳) 4간, 군청(郡廳) 8간, 사령청(使令廳) 8간, 관노청(官奴廳)8간 등 총192간 이었다.
또한 고성군(高域郡)도 강릉진관소속(江陵鎭管所屬)으로 음관5품(舊官五品)의 군수(郡守)가 관할하였으며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1인, 아전 41인, 지인 20인, 사령 18명, 관노 27명, 관비 21명 등 총 141명이 있였고, 관아는 객사(客舍) 33간, 아사(衙舍) 112간, 향청(鄕廳) 21간, 군기청(軍器廳) 7간, 훈련청(訓練廳) 12간, 군청(軍廳) 10등 총 195간 이었다.
간성군과 고성군의 위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조선 후기 강원도 각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호구(戶口)와 관원(官員) 관속(官屬)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 2>와 같다.
<표 2> 조선후기 강원도 府․牧․郡․縣의 戶口와 官員․官屬表(1759)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같이 간성군은 군수가 관할하는 군(郡)으로서 2,194호에 남자 3,505명, 여자 7,836명으로 총 11,341명이 거주하였으며 이를 관할하는 관원과 관속은 군수를 포함하여 총 146명이었다. 고성군도 역시 군수가 관할하는 군(郡)으로서 1,937戶에 남자 3,850명, 여자 3,026명으로 총 6,876명이 거주하였으며 이를 관할하는 관원과 관속은 군수를 포함하여 141명이었다.
간성군이나 고성군은 호구가 제일 많은 원주(原州)(8,323戶 37,754名)나, 강릉(江陵)(6,831戶 32,202名)에 비교하면 철씬 적고, 호구가 가장 적은 평창군(平晶鄧)(525戶 3,161名)이나, 흡곡(525戶 2,461名)에 비하면 훨씬 큰 군(郡)이었음을 알 수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여 영조(英祖) 35년(1759) 당시의 간성군과 고성군의 면(面) 리(里)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의 <표 3>과 <표 4>와 같다.
<표 3> 杆城郡의 面 里와 호구현참 (1759年)



이상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같이 간성군은 9개면, 77개리에 2,133호, 11,031명이 거주하여 18세기 간성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1,031명의 인구중에서 남자는 3,401명이고, 여자는 7,630명으로 여자가 남자의 배가 훨씬 넘는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의 강원도 전체의 인구중 남 너의 비을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이며 그것이 인류사회의 자연법칙이었다. 그런데 간성군만 여자가 남자의 배가 넘는다는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각 리별 통계가 거의 여자나 남자의 배가 넘으므로 숫자상의 착오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간성군은 동해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관계로 남성의 사망이 많아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인구조사 당시 고의로 남성의 수를 줄였는지 확실한 내용을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아무튼 특이한 현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