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조선후기의 고성군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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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高城郡 面 里 호구현황



고성군은 7개면, 53개리에 1,999호, 6,848명의 인구가 거주하였고 이것으로 18세기 고성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간성군과 고성군의 행정체제는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많은 변천이 있었다. 1830년대에 제작된 관동지(關東誌)에 의하면 1759년의 자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9개면(面) 77개리(里)로 되었던 간성군은 8개면(面) 61개리(里)가 되었다. 이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郡內面 : ①安心里 ②新城里 ③金章洞里 ④天下井里 ⑤水洞里 ⑥防築洞里 ⑦金龍洞里 ⑧面門外里
2) 海士面 : ①艮材里 ②校洞上里 ③校洞下里 ④內於君里 ⑤萬山里 ⑥長關里 ⑦釜洞里 ⑧淨土里 ⑨八音川里
3) 大垈面 : ①大垈里 ②恭洞里 ③石門里 ④竹泡驛里 ⑤盤巖回里 ⑥浦南里
4) 梧峴面 : ①鏡浦里 ②水外里 ③上距呑里 ④神城里 ⑤花浦里 ⑥外坪里 ⑦山北里 ⑧蓬湖里⑨月安里
5) 縣內面 : ①烈山里 ②馬直里 ③檢長洞里 ④蛇川里 ⑤明波里 ⑥道發里 ⑦雲根里 ⑧草阜里⑨加老里 ⑩禾達里 ⑪草島里
6) 旺谷面 : ①芝谷里 ②副津里 ③加乙道里
7) 竹島面 : ①痲佐里 ②西坡里 ③甫豆乙里 ④責浦里 ⑤花井里 ⑥甘民堂里
8) 土城面 : ①土城里 ②鶴也洞里 ③院基里 ④東老洞里 ⑤仁角里 ⑥院岩里 ⑦獐川里 ⑧沙也只津里 ⑨沙也只里 ⑩廣浦里 ⑪淸澗里 ⑫栢村里

이상과 같이 영조(英祖)시대(1759)에 9개면(面) 77개리(里)였던 간성군의 행정체제는 약 70여년 후인 순조(純祖)시대(1830)에 와서는 면(面)은 1개가 줄고, 리(里)는 13개리(里)가 감소하여 8개면(面) 64개리(里)로 되었다. 영조(英祖)시대에 리(里)로 취급하였던 해진(海津)은 순조(純祖)시대(1830)에는 리(里)로 취급하지 않고 별도로 진(津)으로만 표시하였다. 순조(純祖)시대(1830년) 간성군에서 관할하였던 해진(海津)은 ①건진(乾津) ②괘진(掛津) ③가포진(加浦津) ④거탄진(巨呑津) ⑤대범미진(大辨味津) ⑥저도진(猪島津) 등 6개였다. 이 때 간성군의 호구는 2,305호에 12,045명이었다. 영조(1759)때 2,133호 보다 272호 증가하였고, 인구는 영조(英祖)때 11,031명 보다 1,014명이 증가하였다.

고성군 역시 많은 변천이 있었으니 순조(純祖)시대(1830)의 고성군의 면(面) 리(里)와 호 구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石里 ⑩未口味里 ⑪末無致里
2) 一北面 : ①沙峴里 ②上坪里 ③下坪里 ④浪汀里 ⑤長島里 ⑥後津里 ⑦湫洞里 ⑧西墟里⑨靈津里 ⑩寡洞里
3) 二北面 : ①桂月里 ②雲田里 ③五里里 ④城眞里 ⑤龍溪里 ⑥養珍里
4) 西 面 : ①內洞里 ②全城里 ③七松亭里 ④確谷里 ⑤五柳洞里 ⑥化立里 ⑦追水里 ⑧件亭里
5) 南 面 : ①確谷里 ②小侍郎洞里 ③凉庫里 ④胎峯里 ⑤上正月里 ⑥下正月里 ⑦七松亭里⑧草峴里
6) 水洞面 : ①德山里 ②外沔里 ③內沔里 ④新垈里 ⑤沙飛里 ⑥院垈里 ⑦古未城 ⑧下炭屯里⑨上炭屯里 ⑩黑淵洞里 ⑪上院洞里
7) 安昌面 : ①浦外里 ②鑑湖里 ③城子洞里 ④草丘里 ⑤江亭里 ⑥大療驛里 ⑦松島里 ⑧雁回里 ⑨地境里 ⑩九川洞里

이상과 같이 고성군은 7개면(面) 63개리(里)에 2,805호(戶)가 거주하였고, 그 인구는 5,186명(남 2,805명, 여 2,381명)이 생활하였다. 영조(英祖)때 7면(面)이던 고성군은 군내면(那內面)이 없어진 대신 동면(東面)이 신설되어 면의 명칭만 바뀌었을뿐 변함없이 7개면 그대로이고 리(里)수는 53개리에서 10개가 증가한 63개里가 되었다. 호구는 영조(1759)때 1,999호에서 1,442호로 557호가 감소하였으며 인구는 6,898명에서 5,186명으로 1,721명이 감소하였다.
1830년에대에 제작된 관동지(關東誌)에 의하면 고성군(高城郡)에는 군의 관아(官衛)로 아사(衝舍)가 있는데, 그 이름을 구하당(九霞堂)(일명 遊仙堂)이라고 하였고, 동(東)으로 13간 이었으며, 내아(內衝)가 13간이었다. 이외에 객사(客舍)[봉래관(養萊館)] 33간, 협선당(挾仙堂) 7간, 향사당(鄕射堂) 7간, 군사(郡司) 7간, 상정청(詳定廳) 6간, 훈련청(訓鍊廳) 12간, 군관청(軍官廳) 10간,작청(作廳) 19간, 수청(需廳) 17간, 서원청(書員廳) 9간, 일수청(日守廳) 9간, 관노청 (官奴廳) 10간 등 172간이였다.
또한 간성군에도 물론 군(郡)의 관아(官衛)가 있었으나 관아(官衛)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동헌(東軒)을 새로 지었고 관아주위에 연못을 파고 꽃과 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여 관아(官衝)가 화려하였고 부족한 창고나 기타 건물등은 펼요에 따라 건축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관동지 (關東誌)에 있는 고성군과 간성군의 지도를 보면 관아의 위치와 각 면(面)의 위치 등 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고성군과 간성군의 지도를 보면 다음의 <지도 3,4>와 같다. 근세 고성군 간성군의 행정체제와 강원도의 행정구조는 1895년까지 부분적인 변동은 있었으나 기본틀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894년 6월 8일 소위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서 일본공사(日本公刻 대조규개(大鳥圭介)가 제시한 전문(全文) 5조(條) 27항(項)으로 된〔내정개혁방안세목(內政改革方案細目)〕에 의하여 지방제도 개편이 제시되었고 그 후 부임한 일본공사 정상형(井上馨)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망명하여 일본에 있던 박영효(朴永孝)를 귀국시켜 500년간 지속되었던 중앙관제(中央官制)를 개편하는 동시에 지방행정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지금까지 조선 8도와 그 하부관아(下部官衙)로 있던 부(府) 목(牧) 군(郡) 현제(縣制)를 전면 개편하여 전국을 23부(府)로 하고 그 하부관아(下部官衙)로 337개의 군으로 통일하였다. 따라서 강원도 26개 부(府) 목(牧) 군(郡) 현(縣) 제도도 폐지되고 2부(府)(春川府 江陵府) 26군(郡)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고성군과 간성군은 강릉부(江陵府)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23부(府) 337군(郡) 제도는 우리의 전통을 무시한채 일제에 의하여 전략적으로 시행된 제도였으므로 그 시행이 어려웠고 또한 500여년 동안 조선왕조를 이끌어 온 전당인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겨우 국왕의 명맥만을 유지하던 고종(高宗)은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정치적인 전환을 시행하기 위하여 전국 23부(府) 337군(郡)제도를 시행한지 1년 2개월 만인 1896년 8월 4일 칙령(勅令) 제36호를 반포하여 전국을 13도(道) 8부(府) 1목(牧) 331군(郡) 제도(制度)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종전의 8도(道) 제도에 바항을 두였다. 8도중에서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만 그대로 두고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5개도를 남 북도로 분리하여 13개도로 하였으므로 그 원칙은 조선 8도(道) 제도에 근간을 두었다. 13道의 하부행정조직으로 부(府) 목(牧) 군(郡)의 지방행정조직을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두었는데 이때 강원도는 부(府)나 목(牧)은 없고 모두 4등급 군(郡)이었다. 이때 강원도의 수부(首府)는 춘천군(春川郡)에 있었고, 그 관할군은 춘천군(春川郡) 원주군(原州郡) 강릉군(江陵郡) 회양군(准陽郡) 철원군(鐵原郡) 양양군(襄陽郡) 이천군(伊川郡) 삼척군(三陟郡) 영월군(寧越郡) 평해군(平海郡) 통천군(通川郡) 정선군(旅善郡) 고성군(高城郡) 간성군(杆城郡) 평창군(平昌郡) 금성군(金城郡) 울진군(蔚珍郡) 흡곡군(黙谷郡) 평강군(平康郡) 금화군(金化郡) 홍천군(洪川郡) 낭천군(狼川郡) 양구군(楊口郡) 인제군(麟蹄郡) 횡성군(橫城那) 안협군(安峽郡) 등 26개군(郡)이었다.
이후 지방제도는 수차에 변천이 있었다. 특히 1913년 12월 29일에 공포하여 다음해인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한 총독부(總督府) 부령(府令) 제Ill호에 의하여 도(道)의 관할구 역을 조정하였다. 조선말기 기본행정구역이었던 부(府) 군(郡) 규모가 다양하여 그 면적이 최대 503평방리(平方里)에서 최소 3평방리(平方里)가 있는가 하떤 인구 또한 제일 많은 곳은 28,000호(戶)에서 제일 적은 곳은 1,800호(戶)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따라서 부(府) 군(郡)을 통합하거나 분할 조정하였는데 그 기본은 군(郡)의 면적은 40평방리(平方里), 호수(戶數)는 1,000호(戶)를 기준으로 하고 면(面)은 면적 4평방리(平方里)를 최저 기준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1914년 3월 1일부터 부(府) 군(郡)을 조정하였고 동년 4월 1일부터 면(面) 리(里) 동(洞)을 조정하였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1916년까지 조정되었다.
이때 조정된 전국지방행정구역은 13도(道) 12부(府) 220군(郡) 2,518면(面) 28,181리(里)로 되었는데 1910년 한일병탄 당시와 비교하여 보면 군은 317개군 중에서 97개군이 감소되었고, 면은 4,322개면 중에서 1,804개면이 감소되었다. 이때 강원도는 21군(郡) 178면(面) 1,944리(里), 동(洞)으로 되었다. 고성군(高城郡)은 간성군(杆城郡)으로 통합되었고 면(面) 리(里)도 통합되어 9개면(面), 124리(里), 동(洞)이 되었다. 간성군은 1919년 5월 15일 고성군(高城郡)으로 개칭되고, 이때 죽왕면(竹旺面)과 토성면(土城面)은 양양군(裏陽郡)으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