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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조선 초기의 고성군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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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조선초기의 고성군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오늘의 고성군은 조선초기에는 고성군과 간성군으로 되어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寶錄地理志)》에 의하면 고성군의 호구는 375호에 871명이 거주하였으며 속현(屬縣)으로 안창현(安昌縣)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46호 134명이 거주하였다. 조선초기 고성군(高城郡)에는 속현까지 합치면 421호에 1,005명의 인구가 거주하였으며, 시위군(侍衛軍)이 37명, 홍군(舡軍)이 70명 등 107명의 군사가 주둔하였다. 간성군(杆城郡)에는 지군사(知軍事)가 있었는데 첨절제사(僉飾制使)를 겸임하였고 아울러 고성군(高城郡)의 업무를 겸임하였으며 호구는 227호, 313명이 거주하였으며 속현으로 열산현(烈山縣)이 있었는데 여기의 호구는 105호, 254명이 거주하였다. 속현의 호구를 합하면 조선초기 간성군에는 332호, 567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시위군(侍衛軍)은 72명, 홍군(舡軍)은 140명, 진군(鎭軍) 11명 등 223명의 군인이 주둔하였다. 호구를 보면 고성군이 훨씬 많았으나 군사(軍士)는 간성군이 고성군의 배이상 주둔하였다. 조선초기 고성군보다 간성군에 군사가 더 많이 주둔하였던 것은 군(郡)의 책임자인 지군사(知郡事)가 간성군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며 호구가 적은 간성군에 지군사가 있었던 것은 주민통치나 국방전략 또는 군의 관할이 간성이 편리하고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성군에는 없는 진군(鎭軍)이 간성군에만 있었던 것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간성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초기의 지방제도는 주민의 관할보다는 전략적인 국방차원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이니 진관제도(鎭管制度)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조선초기 간성군이나 고성군은 강릉의 진관(鎭管)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진관체제는 지방제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진관(鎭管)이란 조선전기 군사조직의 하나이다. 세조 1년(1456)에 평안도와 함경도에 설치되었던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를 전국적으로 확장하였는데 이것이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선구가 되었다. 즉 전국의 지방제도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그 주변의 여러 고을을 거진에 분속시킨 것이다. 즉 각도를 몇개의 군익도(軍翼道)로 나누고 각 군익도는 다시 중익 좌익 우익의 3익으로 편제하였다. 세조 2년(1457)에는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하여 전국적인 군사조직을 갖추고 각도와 각 군(那) 현(縣)을 진관체제하에 두게 되었다. 군익도(軍翼道)를 진관(鎭管)으로 개칭하게 된 것은 일방행정체제인 도체제(道體制)와 구분하기 위하여 진관(鎭管)체제로 하였다. 진관체제는 행정체제인 각도에 1개 또는 몇개의 주진(主鎭)을 두고 그 밑에 부(府) 군(郡) 현(縣) 중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몇개씩 선정하여 거진을 두었으며 거진(巨鎭)의 하부조직으로 제진(諸鎭)을 두었는데 제진(諸鎭)은 대체로 지방 각부(府) 군(郡) 현(縣) 마다 하나씩 두었으며 수군의 제진(諸鎭)을 부(府) 군(那) 현(縣)과는 관계없이 중요한 포구에 설치하였다. 강원도의 경우에는 원주(原州)에 주진(主鎭)을 설치하고 원주(原州) 강릉(江陵) 삼척(三陟) 등 4곳에 거진(巨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삼척 양양 평해 간성 고성 통천 춘천 정선 영월 평창 철원 안인포 고성포 울진포 월송포 울진 흡곡 인제 횡성 홍천 양구 낭천 금성 이천 편강 김화 안협 등 27곳에 제진(諸鎭)을 설치하였다. 고성과 간성에는 고성제진(高城諸鎭) 간성제진(杆城諸鎭) 고성포제진(高城浦諸鎭)이 있었는데 고성이나 간성의 제진은 강릉의 거진(巨鎭) 관할에 있었으나 고성포의 제진은 삼척포(三陟浦) 거진(巨鎭)의 소속으로 수군(水軍)이 주둔하였다.
그런데 강원도(江原道)는 주진을 관할하는 절도사(節度使)가 별도로 없었고, 관찰사가 겸임하였으므로 거진이나 제진의 군사는 강원관찰사가 관할하였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군사 주둔지가 변동이 있었는데 철원(鐵原)에 방어령을 두고 춘천(春川)에 좌영(左營), 횡성(橫城)에 중영(中營), 삼척(三陟)에 우영(右營)을 두고 여기의 장은 부사(府使)나 군수(郡守) 또는 현감(縣監)이 겸임하였다.
교통 통신의 기능을 맡은 역마제(驛馬制)와 조운(漕運) 봉수(烽燧)제도는 대략 다음과 같은 계통을 이루었다. 관용(官用) 교통수단인 역마제를 보면 고성 간성군은 영동지방을 관할하는 상운도(祥雲道)에 속했는데 간성 관내에는 원암(元岩) 청간(淸澗) 죽포(竹泡) 운근(雲混) 명파(明波), 고성 관내에는 대강(大康) 고잠(高岑) 양진(養珍) 등의 역(驛)을 두었다. 조운(漕運) 및 조창(漕倉)은 고성(高減) 간성(杆城) 양양(衰陽) 통천(通川) 등 양양 이북지방은 경창(京倉) 직할구역으로서 대부분 군사용으로 충당하거나 수송할때는 해로(海路)를 이용하였다. 또 통신수단인 봉수제(烽燧制)를 보면 고성 간성은 영서지방과 연결, 안동(安東) 충주(忠州)를 거쳐 서울 남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통천의 금란성(金欄域)에 이르러 서울의 남산이나 함경도지방에 전달되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시대 고성지방 사람들의 생활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토지에 기초를 두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작농업이나 양반과 중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생활하였고 전시에는 사병으로 전장에 나가 병역을 담당하였다. 농민들은 공(公) 사전(私田)을 막론하고 모든 토지를 경작하여 세금을 내거나 소작료를 바치고 남는 양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사회의 혼란과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대지주의 농노로 전락하거나 유랑의 길을 떠나는 신세가 된 농민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이후 1592년 임진왜란때까지 약 200여년간은 의적의 큰 침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발전적인 역사의 흐름이 있었고, 특히 세종대(世宗代)에는 부국강병의 시대를 맞이하여 백성들도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세종대의 세종지리지에 기록된 간성군과 고성군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조선전기 고성군과 간성군의 호구를 합하면 602호(간성 227+고성 375), 1,184명(간성 313+고성 871)이었으며, 세종 10년 (1428)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강원도 26개 부․목․군․현의 전체호가 11,084호, 29,009명이었으니 당시 군․현별로 보면 호수나 호구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오늘의 고성군은 조선초기에는 고성군과 간성군으로 되어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寶錄地理志)》에 의하면 고성군의 호구는 375호에 871명이 거주하였으며 속현(屬縣)으로 안창현(安昌縣)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46호 134명이 거주하였다. 조선초기 고성군(高城郡)에는 속현까지 합치면 421호에 1,005명의 인구가 거주하였으며, 시위군(侍衛軍)이 37명, 홍군(舡軍)이 70명 등 107명의 군사가 주둔하였다. 간성군(杆城郡)에는 지군사(知軍事)가 있었는데 첨절제사(僉飾制使)를 겸임하였고 아울러 고성군(高城郡)의 업무를 겸임하였으며 호구는 227호, 313명이 거주하였으며 속현으로 열산현(烈山縣)이 있었는데 여기의 호구는 105호, 254명이 거주하였다. 속현의 호구를 합하면 조선초기 간성군에는 332호, 567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시위군(侍衛軍)은 72명, 홍군(舡軍)은 140명, 진군(鎭軍) 11명 등 223명의 군인이 주둔하였다. 호구를 보면 고성군이 훨씬 많았으나 군사(軍士)는 간성군이 고성군의 배이상 주둔하였다. 조선초기 고성군보다 간성군에 군사가 더 많이 주둔하였던 것은 군(郡)의 책임자인 지군사(知郡事)가 간성군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며 호구가 적은 간성군에 지군사가 있었던 것은 주민통치나 국방전략 또는 군의 관할이 간성이 편리하고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성군에는 없는 진군(鎭軍)이 간성군에만 있었던 것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간성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초기의 지방제도는 주민의 관할보다는 전략적인 국방차원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이니 진관제도(鎭管制度)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조선초기 간성군이나 고성군은 강릉의 진관(鎭管)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진관체제는 지방제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진관(鎭管)이란 조선전기 군사조직의 하나이다. 세조 1년(1456)에 평안도와 함경도에 설치되었던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를 전국적으로 확장하였는데 이것이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선구가 되었다. 즉 전국의 지방제도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그 주변의 여러 고을을 거진에 분속시킨 것이다. 즉 각도를 몇개의 군익도(軍翼道)로 나누고 각 군익도는 다시 중익 좌익 우익의 3익으로 편제하였다. 세조 2년(1457)에는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하여 전국적인 군사조직을 갖추고 각도와 각 군(那) 현(縣)을 진관체제하에 두게 되었다. 군익도(軍翼道)를 진관(鎭管)으로 개칭하게 된 것은 일방행정체제인 도체제(道體制)와 구분하기 위하여 진관(鎭管)체제로 하였다. 진관체제는 행정체제인 각도에 1개 또는 몇개의 주진(主鎭)을 두고 그 밑에 부(府) 군(郡) 현(縣) 중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몇개씩 선정하여 거진을 두었으며 거진(巨鎭)의 하부조직으로 제진(諸鎭)을 두었는데 제진(諸鎭)은 대체로 지방 각부(府) 군(郡) 현(縣) 마다 하나씩 두었으며 수군의 제진(諸鎭)을 부(府) 군(那) 현(縣)과는 관계없이 중요한 포구에 설치하였다. 강원도의 경우에는 원주(原州)에 주진(主鎭)을 설치하고 원주(原州) 강릉(江陵) 삼척(三陟) 등 4곳에 거진(巨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삼척 양양 평해 간성 고성 통천 춘천 정선 영월 평창 철원 안인포 고성포 울진포 월송포 울진 흡곡 인제 횡성 홍천 양구 낭천 금성 이천 편강 김화 안협 등 27곳에 제진(諸鎭)을 설치하였다. 고성과 간성에는 고성제진(高城諸鎭) 간성제진(杆城諸鎭) 고성포제진(高城浦諸鎭)이 있었는데 고성이나 간성의 제진은 강릉의 거진(巨鎭) 관할에 있었으나 고성포의 제진은 삼척포(三陟浦) 거진(巨鎭)의 소속으로 수군(水軍)이 주둔하였다.
그런데 강원도(江原道)는 주진을 관할하는 절도사(節度使)가 별도로 없었고, 관찰사가 겸임하였으므로 거진이나 제진의 군사는 강원관찰사가 관할하였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군사 주둔지가 변동이 있었는데 철원(鐵原)에 방어령을 두고 춘천(春川)에 좌영(左營), 횡성(橫城)에 중영(中營), 삼척(三陟)에 우영(右營)을 두고 여기의 장은 부사(府使)나 군수(郡守) 또는 현감(縣監)이 겸임하였다.
교통 통신의 기능을 맡은 역마제(驛馬制)와 조운(漕運) 봉수(烽燧)제도는 대략 다음과 같은 계통을 이루었다. 관용(官用) 교통수단인 역마제를 보면 고성 간성군은 영동지방을 관할하는 상운도(祥雲道)에 속했는데 간성 관내에는 원암(元岩) 청간(淸澗) 죽포(竹泡) 운근(雲混) 명파(明波), 고성 관내에는 대강(大康) 고잠(高岑) 양진(養珍) 등의 역(驛)을 두었다. 조운(漕運) 및 조창(漕倉)은 고성(高減) 간성(杆城) 양양(衰陽) 통천(通川) 등 양양 이북지방은 경창(京倉) 직할구역으로서 대부분 군사용으로 충당하거나 수송할때는 해로(海路)를 이용하였다. 또 통신수단인 봉수제(烽燧制)를 보면 고성 간성은 영서지방과 연결, 안동(安東) 충주(忠州)를 거쳐 서울 남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통천의 금란성(金欄域)에 이르러 서울의 남산이나 함경도지방에 전달되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시대 고성지방 사람들의 생활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토지에 기초를 두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작농업이나 양반과 중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생활하였고 전시에는 사병으로 전장에 나가 병역을 담당하였다. 농민들은 공(公) 사전(私田)을 막론하고 모든 토지를 경작하여 세금을 내거나 소작료를 바치고 남는 양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사회의 혼란과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대지주의 농노로 전락하거나 유랑의 길을 떠나는 신세가 된 농민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이후 1592년 임진왜란때까지 약 200여년간은 의적의 큰 침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발전적인 역사의 흐름이 있었고, 특히 세종대(世宗代)에는 부국강병의 시대를 맞이하여 백성들도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세종대의 세종지리지에 기록된 간성군과 고성군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조선전기 고성군과 간성군의 호구를 합하면 602호(간성 227+고성 375), 1,184명(간성 313+고성 871)이었으며, 세종 10년 (1428)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강원도 26개 부․목․군․현의 전체호가 11,084호, 29,009명이었으니 당시 군․현별로 보면 호수나 호구는 적은 편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