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제1절 조선시대 강원도와 고성군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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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기에 이르러 국내적으로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고, 국외적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국내외가 혼란하였다. 이와같이 국가적으로 어려운시기에 외적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우고 군권(軍權)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는 1388년 명(明)나라 정벌을 위해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인 조민수(曺敏修)와 같이 위화도(威化島)까지 진군하였다. 처음부터 명나라 정벌을 반대하였던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開京)으로 돌아와서 명나라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최영(崔瑩) 장군을 척살하고 우왕(禑王)이 왕씨(王氏)가 아니라 신씨(辛氏)라는 이유로 폐위시킨 다음 창왕을 즉위시켰다.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였고, 비록 지위는 낮았으나 실질적으로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위화도회군에서 정치적 실권마저 장악한 이성계는 전제(田制)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러나 원로대신들은 물론 위화도에서 같이 회군한 조민수마저 반대함으로 일단 중지하였다가 창왕(昌王)을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킨 다음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전제를 개혁하여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군권과 정권, 그리고 경제적 실권마저 장악한 이성계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음모를 추진하였으나 쓰러져 가는 고려왕조를 끝까지 보전하려고 몸부림치는 고려의 애국지사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정몽주(鄭夢周)는 이성계(李成桂)와는 막역한 동지였으나 이성계의 야망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정음주는 변하지 않았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芳違)도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의 뜻을 물었으나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고려의 충신으로 죽음을 각오한 굳은 절개를 보였다. 방원은 정몽주를 회유하지 못하고 결국 선죽교에서 척살하였다. 모든 반대 세력을 제거한 이성계는 배극렴, 조준, 남은 등 50여명의 추대를 받아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장조 518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왕이된 이태조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원주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양양(襄陽)으로 이배하였으며, 다시 삼척으로 이배하였다가 결국 사사하였다.

이태조는 한상질(韓尙質)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화녕(和寧)〕이라는 국호와 〔조선(朝鮮)〕이라는 국호 중 어느 하나를 국호로 제정해 줄 것을 명나라 황제에게 건의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한상질이 명 나라에서 귀국한 1393년 2월 15일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 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몰고 즉위한 이성계는 수도 개경이 불안하였다. 국민정신을 일신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면 반드시 천도를 해야 한다는 구실을 붙여서 온갖 난관과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394년 11월 29일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이성계는 궁궐 종묘 사직 관아 문묘 문루 등 수도의 기본시설을 건설하였다.
1395년 6월 13일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행정구역을 확정하는 동시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태조(太祖)3년(1394) 6월 23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경기도(京畿道)를 좌(左) 우도(右遵)로 나누고 양광도(楊廣道)를 충청도(忠淸道)로 개칭하며, 강릉도(江陵進)와 교주도(交州道)를 합하여 강원도로 하자고 건의하였으나 그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만 1년 만인 태조 4년(1395) 6월 13일부로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을 개정하면서 강릉도(江陵道)와 교주도(交州道)를 합하여 강원도로 하였다. 이때 강원도의 수부(首府)는 원주(原州)에 두었고 그 관위(官衛)로 강원감영(江原監營)을 설치하였다. 이후 1895년 조선8도를 23부(府)로 고칠때까지 500년간 강원의 수부는 원주에 두었다.

강릉도(江陵遵)와 교주도(交州道)를 합하여 강원도(江原道)라고 한 것은 강원도내에서는 강릉(江陵)이 가장 큰 도시였으므로 '강(江)'자를 취하고 다음으로 큰 도시가 원주(原州)였으므로 '원(原)'자를 취하여 강원도(江原適)라고 하였다. 이 강원도(江原道)라는 명칭이 현종(顯宗) 7년(1666) 이추 원양도(原襄道) 강양도(江襄道) 강춘도(江春道) 원춘도(原春道) 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불효자나 반역자 등 강상죄인(綱常罪人)이 생기면 그 죄인의 처벌은 물론이고 그가 출생한 지방에까지 벌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강릉에서 불효자가 났다고 하면 정삼품관(正三品官)의 책임자인 강릉대도호(江陵大都護)가 종오품관(從五品官)이 책임자인 현(縣)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지방에서 중죄인이 생기면 그 지방의 관아가 강등하게 됨으로그 지방의 이름을 도명(道名)에 사용하지 못하였다. 현종 7년(1666)에는 강릉에서 중죄인이 생겨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가 현(縣)으로 강등하였으므로 '강(江)'자를 쓰지 못하고, 원주(原州)의 '원(原)'자와 양양(襄陽)의 '양(裏)'자를 취하여 원양도(原襄適)라고 하였다. 강양도(江襄道)나 강춘도(江春道) 원춘도(原春道) 등도 같은 이유에서 도명(道名)이 변경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지방행정구역의 명청 처벌을 받아 강등되었다 하더라도 그 형량은 최대가 10년이었으므로 10년내에 모두 원래대로 복구되어 강원도(江原適)가 되었다.

현재의 고성군은 조선왕조 건국초기부터 1914년까지 간성군과 고성군으로 되어 있었는데 1914년에 고성군(高城郡)과 간성군(杆城郡)을 합하여 간성군(杆城郡)이라고 하였다가 1919
년 고성군(高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고성군을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살펴보려면, 특히 행정체제에 있어서는 고성군과 간성군을 같이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강원도의 지방행정 조직은 시대에 따라서 약간의 변동은 있었으나 1895년 조선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府制)를 실시하여 강원도지방 하부행정구조를 일률적으로 26군으로 할때까지는 1대도호부(大都護府), 1목(牧), 5도호부(都護府), 7군(郡)(혹은 6개那), 12현(縣)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고성군과 간성군은 강원도 7개군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체로 간성군(杆城郡)은 종(從)4품(品) 군수(郡守)가 임명되었고 고성군(高城郡)은 정(正)5품(品) 군수(郡守)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때에 따라서는 대도호부가 현이 되기도 하고, 목이 군이 되기도 하였으며. 부가 현이되는 등의 변천이 있었으므로 부(府) 군(郡) 현(縣)의 수가 일정치는 않았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고성군과 간성군의 위치와 그 주위를 살펴보면 전면의 <지도 1,2>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