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제1절 고려의 한반도 통일과 강원도
작성일
2025-07-2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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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중세사
제 1절 고려의 한반도 통일과 강원도
신라(新羅)는 하대(下代) 이후 중앙에서 전개된 귀족(貴族)간의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으로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다. 이로인해 호족(豪族)이라 불리는 세력가들이 지방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함으로써 점차 국가통치질서는 붕괴되어 갔다. 더욱이 왕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은 농민들의 생활을 무겁게 짓눌렀고 게다가 호족들마저 농민들에게 세를 부과하여 이 시기동안 지속적으로 발생된 재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농민들의 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현상은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이후에 더욱 심각하였다. 농민들은 신라정부의 가혹한 조세(租稅), 역역(力役)의 징발을 견디다 못해 유민(流民)이 된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호족들의 보호 밑에서 사병화되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농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니 지방의 제군현(諸郡縣)에서는 납세를 거부하면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으며 , 강원도 지역은 어느 곳보다도 거센 반란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가운데 두드러진 반란세력은 사벌주(沙伐州 尙州)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 安城의 竹山)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原州)의 양길(梁吉), 완산주(完山州 全州)의 견훤(甄萱), 철원(鐵圓 鐵原)의 궁예(弓裔)가 있었다. 이들 중 견훤과 궁예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왕(王)을 칭하고 각기 후백제(後百濟)와 후고구려(後高句麗. 뒤에 泰封)를 건국하여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가 성립되었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정권다품에 희생당함을 면하고 영월에 숨어 지내다가 세달사(世達寺)의 중이 있었는데, 큰 뜻을 품고 절에서 나와 진성여왕 5년(891)에 죽주(竹州)에 있던 기원의 부하가 되었다가 후에 북원의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그의 휘하에서 장군이 되어 강원도 일대
의 주천(酒泉). 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등 군현을 점령하고 진성여왕 8년(894)에는 명주(溟州)에 들어갔다. 다시 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각 군현을 빼앗고 영서(嶺西)로 넘어와 인제․화천․금화․철원 등을 점령하였다. 이때 고성이 궁예의 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895),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궁예는 적극적으로 옛 고구려 지역의 지방세력과 제휴를 도모하여 폐서지방(浿西地方)의 세력을 수용하고 진성여왕 10년(896)에 송악(松嶽)의 대호족(大豪族)인 왕건부자(王建父子)가 귀부해 오자 왕건에게 철원태수(鐵圓太守)를 제수하였다. 이어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겨 옛 고구려지역의 지방세력과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후 궁예는 양길의 군대를 격파하고 여러 군현을 장악하여 강원 ․경기 ․황해 ․충청북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901년에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면서 마침내 공식적으로 왕을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로 정하였다.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하고,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壽德萬歲)로, 914년에는 연호를 정개(政開)로 고쳤다.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遷都)를 한 것은 나말여초에 풍미하였던 풍수지리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까닭도 있지만, 외적을 방비하는데 지리적으로 유리했고 그 지방이 풍부한 식량을 제공 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궁에는 궁궐과 전각을 수리하는데 사치를 다하여 민심이 멀어져 갔다. 이것은 결국 고구려의 부흥이라는 국가적인 이상을 버리고 궁예가 자신의 명예라는 개인적인 욕망을 나타낸 것으로서 일종의 영웅주의적 발로였다. 그리고 이 영웅주의가 심해지면서 자신을 미륵불(漏勒佛)이라 칭하여 교만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 반대세력 간에 대립이 심화되어 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궁예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마침내 918년 홍유(洪濡)․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등이 모의하여 왕건을 추대하고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였다. 궁예는 도망가다가 평강(平廉) 사람들에게 잡혀 죽었다. 궁예가 892년에 원주에 들어와 평강군민에게 피살될 때까지 25년간 강원도 지방전역을 휩쓸었던 당대의 풍운아로 한때 백성의 환심도 샀으나 후에 사치하고 교만하여 죽으니, 강원도 백성에 의해서 출세하여 강원도 백성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또한 그는 강원도 지역을 근거지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을 칭한 지 18년 만에 몰락하였으니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
로 강원도내에 도읍을 정한 나라인 태봉(泰討)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 왕으로 추대된 왕건(王建)은 국호를 다시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援)라 하였으며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옮겨 정치․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고려가 강력하게 후삼국 통일사업에 나서 935년에 신라의 항복을 받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
시키면서 한반도를 재통일하게 되어 고성은 고려의 영토로 흡수되 었다. 리고 다른 왕자(王子)가 고려로 향할 때 홀로 고성군에 소재하고 있던 금강산(金剛山)의 심산유곡을 찾아 떠났고 그곳에 묻혔다.
제 1절 고려의 한반도 통일과 강원도
신라(新羅)는 하대(下代) 이후 중앙에서 전개된 귀족(貴族)간의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으로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다. 이로인해 호족(豪族)이라 불리는 세력가들이 지방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함으로써 점차 국가통치질서는 붕괴되어 갔다. 더욱이 왕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은 농민들의 생활을 무겁게 짓눌렀고 게다가 호족들마저 농민들에게 세를 부과하여 이 시기동안 지속적으로 발생된 재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농민들의 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현상은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7)이후에 더욱 심각하였다. 농민들은 신라정부의 가혹한 조세(租稅), 역역(力役)의 징발을 견디다 못해 유민(流民)이 된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호족들의 보호 밑에서 사병화되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농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니 지방의 제군현(諸郡縣)에서는 납세를 거부하면서 반란이 계속 일어났으며 , 강원도 지역은 어느 곳보다도 거센 반란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가운데 두드러진 반란세력은 사벌주(沙伐州 尙州)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 安城의 竹山)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原州)의 양길(梁吉), 완산주(完山州 全州)의 견훤(甄萱), 철원(鐵圓 鐵原)의 궁예(弓裔)가 있었다. 이들 중 견훤과 궁예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왕(王)을 칭하고 각기 후백제(後百濟)와 후고구려(後高句麗. 뒤에 泰封)를 건국하여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가 성립되었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정권다품에 희생당함을 면하고 영월에 숨어 지내다가 세달사(世達寺)의 중이 있었는데, 큰 뜻을 품고 절에서 나와 진성여왕 5년(891)에 죽주(竹州)에 있던 기원의 부하가 되었다가 후에 북원의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그의 휘하에서 장군이 되어 강원도 일대
의 주천(酒泉). 영월(寧越)․평창(平昌)․정선(旌善)등 군현을 점령하고 진성여왕 8년(894)에는 명주(溟州)에 들어갔다. 다시 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각 군현을 빼앗고 영서(嶺西)로 넘어와 인제․화천․금화․철원 등을 점령하였다. 이때 고성이 궁예의 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895),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궁예는 적극적으로 옛 고구려 지역의 지방세력과 제휴를 도모하여 폐서지방(浿西地方)의 세력을 수용하고 진성여왕 10년(896)에 송악(松嶽)의 대호족(大豪族)인 왕건부자(王建父子)가 귀부해 오자 왕건에게 철원태수(鐵圓太守)를 제수하였다. 이어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겨 옛 고구려지역의 지방세력과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후 궁예는 양길의 군대를 격파하고 여러 군현을 장악하여 강원 ․경기 ․황해 ․충청북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901년에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면서 마침내 공식적으로 왕을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로 정하였다.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하고, 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壽德萬歲)로, 914년에는 연호를 정개(政開)로 고쳤다.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遷都)를 한 것은 나말여초에 풍미하였던 풍수지리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까닭도 있지만, 외적을 방비하는데 지리적으로 유리했고 그 지방이 풍부한 식량을 제공 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궁에는 궁궐과 전각을 수리하는데 사치를 다하여 민심이 멀어져 갔다. 이것은 결국 고구려의 부흥이라는 국가적인 이상을 버리고 궁예가 자신의 명예라는 개인적인 욕망을 나타낸 것으로서 일종의 영웅주의적 발로였다. 그리고 이 영웅주의가 심해지면서 자신을 미륵불(漏勒佛)이라 칭하여 교만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 반대세력 간에 대립이 심화되어 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궁예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마침내 918년 홍유(洪濡)․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등이 모의하여 왕건을 추대하고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였다. 궁예는 도망가다가 평강(平廉) 사람들에게 잡혀 죽었다. 궁예가 892년에 원주에 들어와 평강군민에게 피살될 때까지 25년간 강원도 지방전역을 휩쓸었던 당대의 풍운아로 한때 백성의 환심도 샀으나 후에 사치하고 교만하여 죽으니, 강원도 백성에 의해서 출세하여 강원도 백성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또한 그는 강원도 지역을 근거지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을 칭한 지 18년 만에 몰락하였으니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
로 강원도내에 도읍을 정한 나라인 태봉(泰討)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 왕으로 추대된 왕건(王建)은 국호를 다시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援)라 하였으며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옮겨 정치․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고려가 강력하게 후삼국 통일사업에 나서 935년에 신라의 항복을 받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
시키면서 한반도를 재통일하게 되어 고성은 고려의 영토로 흡수되 었다. 리고 다른 왕자(王子)가 고려로 향할 때 홀로 고성군에 소재하고 있던 금강산(金剛山)의 심산유곡을 찾아 떠났고 그곳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