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제1절 동예인의 유래
작성일
2025-07-26
조회
26
제2장 고성지방의 고대사
제 1절 동예인의 유래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망하고 그 자리인 한반도 서북지방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으며 동해 연변의 고성(高城), 강릉(江陵)지방 일원에는 예(濊)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발간된 문헌을 보면 영동지방을 예(濊)라고 부르고 춘천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멕(貊)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고 전한다. 그것이 근세 조선에 들어와서 구역도 영동(嶺東). 영서(嶺西)가 통합되어 강원도(江原道)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사서(史書)들도 예(濊)와 맥(貊)을 고려시대처럼 나누지 않고 행정구역의 단일화와 함께 강원도 지방의 고칭(古稱)을 예맥(濊貊)으로 통틀어 부르는 경우가 늘어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호칭되고 있다.
그러면 이 예맥(濊貊)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어디서 왔는지 살펴보면 한족(漢族)이 아시아 대륙 중원을 차지하고 그의 변방민족을 얕잡아 보는 뜻에서 주변 민족을 사이(四夷) 즉 사방의 오랑캐라고 일컬어 동쪽에는 동이(東夷), 남쪽에는 남만(南蠻), 서쪽에는 서융(西戎), 북쪽에는 북적(北狄)이라고 자기들 멋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동이(東夷)로서 지리적으로도 이들 중원과 가까운 만주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수렵 부족으로서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 부족명칭을 다시 분할하여 부를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데 이로써 예(濊)나 맥(貊)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예맥(濊貊)은 어디까지나 대륙의 한족(漢族)이 그들의 한족과 이민족을 구별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인 것으로 보이는데 예맥족(濊貊族) 자신들은 이 비하된 이름을 스스로 썼을리가 만무하며 이들의 한족(韓族) 선인사회의 문화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부여(扶餘)라든가 조선, 또는 고구려 같은 자타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이 단계에서 원시사회가 비로소 권력조직을 제도화하며 문자를 사용하고 금속문화가 도입되어 고대국가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濊)에 속해 있던 고성지방은 부여계(扶餘系)의 성장과정과 그들의 상호접촉 과정에서 발달하였다. 이 부여계(拉餘系)는 한(韓)의 조선계(朝鮮系)와 함께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동이계(東夷系) 종족에 속한다. 예(濊)는 맥(貊)과 함께 발해안(渤海岸)에서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이동하기도 하였고 뒤에 남삼한(南三韓)이 각각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로 성장하는데는 철기문화를 가지고 북에서 남하한 예(濊)와 맥(貊), 또는 한계(韓系)에게 크게 힘입었고 뒤에 신라가 고구려를 흡수함으로써 예(濊)는 맥(貊), 한계(韓系)와 다시한번 크게 결합되게 되었다. 한사군(漢四郡)이 성립되게 됨으로써 고성지방은 임둔군(臨屯郡)의 관할이 되었다.
제 1절 동예인의 유래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망하고 그 자리인 한반도 서북지방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으며 동해 연변의 고성(高城), 강릉(江陵)지방 일원에는 예(濊)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발간된 문헌을 보면 영동지방을 예(濊)라고 부르고 춘천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멕(貊)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고 전한다. 그것이 근세 조선에 들어와서 구역도 영동(嶺東). 영서(嶺西)가 통합되어 강원도(江原道)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사서(史書)들도 예(濊)와 맥(貊)을 고려시대처럼 나누지 않고 행정구역의 단일화와 함께 강원도 지방의 고칭(古稱)을 예맥(濊貊)으로 통틀어 부르는 경우가 늘어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호칭되고 있다.
그러면 이 예맥(濊貊)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어디서 왔는지 살펴보면 한족(漢族)이 아시아 대륙 중원을 차지하고 그의 변방민족을 얕잡아 보는 뜻에서 주변 민족을 사이(四夷) 즉 사방의 오랑캐라고 일컬어 동쪽에는 동이(東夷), 남쪽에는 남만(南蠻), 서쪽에는 서융(西戎), 북쪽에는 북적(北狄)이라고 자기들 멋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동이(東夷)로서 지리적으로도 이들 중원과 가까운 만주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수렵 부족으로서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 부족명칭을 다시 분할하여 부를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데 이로써 예(濊)나 맥(貊)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예맥(濊貊)은 어디까지나 대륙의 한족(漢族)이 그들의 한족과 이민족을 구별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인 것으로 보이는데 예맥족(濊貊族) 자신들은 이 비하된 이름을 스스로 썼을리가 만무하며 이들의 한족(韓族) 선인사회의 문화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부여(扶餘)라든가 조선, 또는 고구려 같은 자타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이 단계에서 원시사회가 비로소 권력조직을 제도화하며 문자를 사용하고 금속문화가 도입되어 고대국가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濊)에 속해 있던 고성지방은 부여계(扶餘系)의 성장과정과 그들의 상호접촉 과정에서 발달하였다. 이 부여계(拉餘系)는 한(韓)의 조선계(朝鮮系)와 함께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동이계(東夷系) 종족에 속한다. 예(濊)는 맥(貊)과 함께 발해안(渤海岸)에서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이동하기도 하였고 뒤에 남삼한(南三韓)이 각각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로 성장하는데는 철기문화를 가지고 북에서 남하한 예(濊)와 맥(貊), 또는 한계(韓系)에게 크게 힘입었고 뒤에 신라가 고구려를 흡수함으로써 예(濊)는 맥(貊), 한계(韓系)와 다시한번 크게 결합되게 되었다. 한사군(漢四郡)이 성립되게 됨으로써 고성지방은 임둔군(臨屯郡)의 관할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