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포(廣浦)의 열녀(烈女)
작성일
2025-07-26
조회
7
조선조 중엽 때 봉포리(鳳浦里)에 속칭 광포(廣浦)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경상도에서 이사 온 부부가 고기잡이로 생활하며 살았는데 이들 부부는 이웃이 부러울만치 정다운생활을 하며 살았다.
오늘도 남편이 평상시와 같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
저백 해질 무렵 부인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부두가로 남편을 마중 나갔으나 다른 어부들은 모두 돌아 오는데 남편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아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남편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어부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말을 하려들지 않았다.
부인은 한 어부를 붙들고 애원하듯 남편의 소식을 물으니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하다 실수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쓸쓸한 밤부두가에 홀로 앉아 남편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 슬픈 마음으로 길고 긴 가을 밤을 뜬 눈으로 세우고 다음날 아침 일찍 부두가에 나가 알고 있는 어부에게 간청하듯『나를배에 태워 남편이 죽은 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여 어부들과 함께 육지를 떠났다.
여인은『나의 남편이 물에 빠진 곳에 나를 내려 주시오.』
어부들은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지만 여인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였다.
남핀이 물에 빠진 곳에 당도하자 여인은 배에서 뛰어내려 물 한가운데 똑바로 서서 어부들에게『당신들은 어서 배를 돌려 일을 보시오.』하고는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간성동헌(杆城車軒)에 이상하게도 서기가 들어오기에 당시 원님은 황급히 길을 재측하여 서기를 따라 가니 봉포 앞 바닷가 백사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근거렀다.
원님이 살펴본 즉 한 여인이 남편을 치마폭에 안고 죽은 채로 누워 있었다. 이 시체는 바로 전날 봉포리(鳳浦里) 바닷가에 물에 뛰어 내린 여인의 시체였다
이 고을 원님은 그 후에 이 여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열녀문을 짓고 매년 한번씩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후 점차로 제사도 없어지고 비각(碑閣)도 훼손되어 지금은 위치 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오늘도 남편이 평상시와 같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
저백 해질 무렵 부인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부두가로 남편을 마중 나갔으나 다른 어부들은 모두 돌아 오는데 남편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아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남편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어부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말을 하려들지 않았다.
부인은 한 어부를 붙들고 애원하듯 남편의 소식을 물으니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하다 실수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쓸쓸한 밤부두가에 홀로 앉아 남편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 슬픈 마음으로 길고 긴 가을 밤을 뜬 눈으로 세우고 다음날 아침 일찍 부두가에 나가 알고 있는 어부에게 간청하듯『나를배에 태워 남편이 죽은 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여 어부들과 함께 육지를 떠났다.
여인은『나의 남편이 물에 빠진 곳에 나를 내려 주시오.』
어부들은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지만 여인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였다.
남핀이 물에 빠진 곳에 당도하자 여인은 배에서 뛰어내려 물 한가운데 똑바로 서서 어부들에게『당신들은 어서 배를 돌려 일을 보시오.』하고는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간성동헌(杆城車軒)에 이상하게도 서기가 들어오기에 당시 원님은 황급히 길을 재측하여 서기를 따라 가니 봉포 앞 바닷가 백사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근거렀다.
원님이 살펴본 즉 한 여인이 남편을 치마폭에 안고 죽은 채로 누워 있었다. 이 시체는 바로 전날 봉포리(鳳浦里) 바닷가에 물에 뛰어 내린 여인의 시체였다
이 고을 원님은 그 후에 이 여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열녀문을 짓고 매년 한번씩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후 점차로 제사도 없어지고 비각(碑閣)도 훼손되어 지금은 위치 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