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전봉상(全鳳祥)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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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각위치: 江原道 高城郡 杆城邑 校洞里
바로 이곳에 자손 대대로 정선전씨(旌善全氏) 가문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입구에 조선조 선조(宣祖) 때(1567~1608)사람으로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하던 전씨 문중의 46대 조상인 봉상(鳳祥) 51대 조상인 공순(孔淳) 54대 조상인 재후(載厚) 세 분의 효자비가 모셔진 8각 지붕의 효자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전 조선조 선조시대 간성 교동리(杆城 校洞里)에는 할아버지는 심도부위(尋刀副尉)요 아버지는 참봉(參奉)벼슬을 한 순신(당시 참봉 1540~1586, 중종~선조)이라는 분이 아들 형제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형은 봉걸(鳳傑)이요 동생은 봉상(鳳祥)이라 이름하였다.
그 형제 중에서도 동생인 봉상은 아주 영명하여 등화가친하여 독서삼매경에 묻힐 정도로 공부만 하는 소년으로 항상 웃어른들에게는 공손하며 부모에게는 효행이 극진한 아이로 어릴때 부터 어진 친성을 지닌 소년으로 소문나 있었다.
봉상(鳳祥)이 일곱 살 되던 어린 소년에게는 몹시도 춥게 느껴지는 겨울철이였었다. 아버님 순신(順信)이 여러날 동안 다리가 몹시 쑤시고 아파 누워만 계셨기에 그때만 하여도 별로 신통한 치료 약이나 의원이 있는 시절도 아니라 다만 하늘님께 기도 드리며 비는 수 밖에 없는 어느 날 어른들 말씀에 잉어를 고아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워낙 가세가 빈곤하여 쇠고기 한번 잡수어 본 일이 없는 아버님께서 잉어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는 일곱 살밖에 되지 않는 소년 봉상(鳳祥)은 온통 산과 들이 눈으로 뒤덮힌 하만 길을 헤치며 잉어를 구해보려고 찾아 나선 것이다.
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눈 아래 사방을 굽어 살펴 보았으나 어디가서 잉어를 잡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고 눈 앞이 캄캄하였으나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잉어에 대한 생각만 머리속에 꽉 차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한생각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호리 호수가 얼른 떠올랐다.
새벽 찬바람에 동호리까지 깊은 눈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정말 어런 소년에게는 힘겨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효성이 극진한 봉상(鳳祥)에게는 곰곰히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버님의 병환을 염려하여 정월 추위에 얼어죽지 않은 것만 감지덕지 천행으로 여기고 무작정 걸어만 갔다. 그리하여 동호리 호수가에 거의 가까이 왔을 무렵 홀연히 겨울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뇌성벽력으로 온통 천지를 뒤덮어 놓을 듯이 바람이 세차게 불고 난데없이 팔뚝만한 잉어 두 마리가 봉상(鳳祥)의 눈 앞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효자는 하늘이 알아준다 하더니 착한 어린 아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복함인지 봉상(鳳祥) 소년의 반가움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있겠읍니까?
눈 덮힌 겨울철에 얻은 귀한 잉어를 아버님께 봉양할 수 있는 봉상(鳳祥)의 기뿐 마음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그의 어질고 착한 성품이 훗날에도 그 아버님 순신(順信)이 위독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7일 동안이나 곤히 잠들다 다시 깨어나 병세를 회복하여 3년이나 더 사시게 하였다. 이는 그의 효심이 얼마나 깊고 깊었나 하늘 것은 오늘에 사는 후손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후대인 51대손 공순(孔淳)과 54대손인 재후(載厚) 같은 분도 병든 아버님에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할 정도로 효심이 극진하였다는 것은 그 효행의 뜻이 얼마나 전씨 문중 후 손들에게 깊이 새겨졌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후 후대 자손들이 이 거룩한 조상의 뜻을 받들어 1610년에 정, 축 1칸에 8각 지붕의 효자각을 짖고 봉상(鳳祥), 공순(孔淳), 재후(載厚) 세 분의 효자석비를 세웠는데 그 후대에도 많은 효자가 배출되었다 한다.
지금도 정선전씨(旌善全氏) 문중에서는 음력 4월1일과 추석날 선조의 뜻을 되새기며 유덕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