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노상언(盧象彦)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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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공(蘚宰公) 12대손 노상언(臺象彦)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행실이 바르고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여 의로운일을 행하여 부모에 극진한 효도는 물론 웃어른을 공경하는 등 선비다운 행실과 선행을 다 하였다고 하여 효자칙지(孝子勅旨)를 받은 후 140년전 노씨 문중에서 이 문을 건립하였으나 전쟁으로 여기 저기 옮겨 지었다가 현재의 용촌2리에 재건하였다.
칙지등(勅旨等)은 분실되었으나 효행에 대한 것은 동국 명현록(車國名賢錄)에 기록되어 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 2리(江原道 高城郡 土成面 龍材 2里)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효자각은 1892년에 세워졌으며 현판에는 "효자학생 노상인지문(孝子學生 盧象彦之門)"이라 쓰
여 있다.
100여년전 포의한사(布衣寒士)로 한평생을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 간 노선비의 넋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어렀을때부터 부모를 도와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썩긴 아까운 인물이였으며 벼슬길에 나가도록 부모나 주위 사람들이 권고하였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에 지극한 그는 한치도 부모님 곁을 떠난 일이 없었으며 학문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누구나 해야 할 뿐 벼슬을 위해 닦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신념이 흙이 생명을 발하는 것은 농부의 손에서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제 마음에 학문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지 않는다면 불효가 되며 생명을 잃은 흙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노선비가 마흔이 넘은 해였다. 가뭄이 극심해 마을 앞 냇가는 먼지가 일고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 가뭄 탓으로 농사는 흉작이었다. 곡간의 곡식은 금새 바닥이 났으므로 盧선비는 늙은 부모님께 쌀밥을 드리기 위해 겨울 동안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였고 봄눈이 녹을 즈음 노선비의 부친께서 갑자기 몸져 누워 아버님의 수척한 얼굴을 더 이상 결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노선비가 벽장 문을 열고 논문서를 꺼내는 것을 본 그의 아내는 "여보 그건 우리 식구의 명줄입니다"라고 만류하였으나 "땅이야 돈을 벌어 다시 살 수 있어도 아버님의 생명은 천금을 주고도 다시 살 수 없지 않소"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떨구고 울먹였다.
그날부터 노씨 부부는 정성껏 약을 드린 후 정한수를 떠 놓고 병환이 빨리 완쾌되길 빌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부친의 병환이 완쾌되자 마을 뿐만이 아니라 온 고을이 노상언(盧象彦)효자 이야기로 떠들썩하였다.
그는 이렇듯 효심이 극진하였고 학문도 인격과 자아 완성을 위해서만 평생을 닦았으며 벼슬길에 미련도 없이 오직 자연에 묻혀 욕심없이 고고하게 학처럼 살다 간 선비 중 선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