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김운봉(金雲鳳) 외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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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김운봉(金雲鳳)

1917. 1. 10~미상. 독립운동가. 고성군 고성출신이다. 1938년 4월 일본 동경소재중앙대학(中央大學) 예과(豫科) 2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는 1939년 3월 모교인 고성공립보통학교(高域公立普通學校)에 참석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측사를 하다가 고성경찰서에 10일간 구류된 바 있었다. 그 후 1942년 9월 일본 중앙대학 재학중에 한족인 유학생 고담룡(高湛龍) 등 5명과 함께 '고문(高文)그룹'으로 위장한 비밀결사를 조직한 후 동경(東京)시내에서 20여차레의 비밀회합을 갖고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의 앙양을 강조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피체되어 부산․대구․영주(榮州)․봉화(奉化)경찰서로 전전 이송되면서 1년여에 걸쳐 온갖고문을 받고 대구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마침내 1944년 10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정역 3년형을 선고 받은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광복을 맞이하였다.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論 8. 353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종화(金鍾和)

1889~미상. 독립운동가. 고성군 외금강면 온정동(外金剛面 溫井洞) 출신이다.
일찍이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톡(연해주)으로 이주하여 1918년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강국모(姜國模)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경 시베리아 거주 한국인으로부터 러시아 화폐(약 1만 루불)와 시금(일화 3천8백원 상당)을 모집하여 상해임정에 보고하고 독립단(獨立團)에게 사용토록 하였으며, 동년 11월부터 블라디보스톡에서 주홍익(朱鴻益)등과 함께 러시아인으로부터 권총 3천정․장총 40정 등을 구입하여 1920년 4월경 노령 연해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혈성단(血成誾)을 조직하고 단원(團員) 3천여명을 모집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또 동년 5월경 중국 간도(間島)의 광복단(光復圍)에게 체코군 장교로부터 구입한 권총 1천정을 공급하였고, 동년 7월경 간도의 독립군 신민단(新民團)에게도 체코군으로부터 1천정을 구입하여 보냈다. 그 후 10월경에는 김좌진(金佐鎭)의 의군단(義軍團)과 상호협조하였다. 그리고 1921년 6월경에 노령 연해주에서 설립한 노농군회(勞農軍會)와 혈성단(血成團)을 병합하여 한인사회당(韓國社會黨)을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체포되어 1922년 6월 19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國史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10. 1185~1187쪽 참조)

☞ 김형석(金亨錢)

1876~미상. 독립운동가,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리(土城面 我也津里)출신이다.
1919년 10월초 철원애국단 조종대(趙鍾大)와 양양군단의 김영학(金永鶴)으로부터 애국단(愛國團)의 취지와 목적을 듣고, 그들의 권유에 따라 양양군단(襄陽軍鬪)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鎔九)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애국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강원․충청․전라도 등지에 도단(道圍)을 설치한 상해임정의 지원단체로서, 양양군단은 그 산하조직이었다. 따라서 애국단의 주된 활동은 상해 임시정부의 선전,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의 조직망을 통한 상해임정의 연통제(聯通制)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김형석은 애국단의 입단과 동시에 동향인 이근옥(李根玉)을 애국단에 가입케하였고, 이근옥을 통하여 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문명섭(文明燮)등을 포섭하여 조직확대에 험을 쏟았다. 그러나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뤘다.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論 7. 399쪽 : 同編纂委員을, 獨立運動史資料集 9990~1018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문명섭(文命燮)

1890. 2. 7~1973. 6. 15. 독립운동가. 고성군 토성면 운봉리(土城面 雲峯里)출신이다. 그는 1919년 10월 중순 이근옥(李根玉)의 권유에 의해서 독립애국단 양양군단(襄陽軍圓)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결성한 애국단(愛國圍)은 강원․충청․전라도 등지에 도단(道圍)을 설치한 상해임정의 지원단체로서, 양양군단은 강원도단의 하부조직이었다.
이에 동년 10월 하순에 그는 이근옥․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등과 더불어 상해임정에 직접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서울 애국단 본부를 경유하여 상해로 향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끝내 귀향함으로씨 무산되었다. 그는 그 후 양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1920년 1월 동단 강원도단의 조직이 자금모집과정에서 들어남으로써 체포되어 1년여동안 고초를 치르다가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9. 990~1008쪽 참조)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박용덕(朴龍德)

1917년 7월 27~미상. 독립운동가. 고성군 고성출신이다. 1938년 3월 고성의 자기집에서 김종희(金宗熙)와 함께 독립정신을 앙양하여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을 협의하고, 동 9월에는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민족문학잡지사(民族文學雜誌社)를 설립․경영할 것을 협의한 후 자금모집을 하다가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그 후 민족문학지인 『문장(文章)』이 경영난에 처해 있을때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1941년 9월 폐간할 때까지 종사하였다.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錄 8. 393~394쪽)
정부에서는 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