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3. 건봉사지를 집필한 한용운(韓龍雲)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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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乾鳳寺)의 주지 이대연(李大蓮)스님이 건봉사지(乾鳳寺誌)를 편찬하는 사업을 착수, 독려하여 정신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세웠다면 건봉사지(乾鳳寺誌)를 실제로 집필한 것은 한용운스님이었다.
3․1운동 대표의 1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한용운스님은 건봉사지(乾鳳寺誌)의 편찬으로 고성지방(高城地方)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건봉사급 건봉사말사 사적」의 서문에도 한용운의 의도는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본 사적을 편찬하게 된 것은 다만 건봉사 본말사 각위의 간곡한 위촉에 종(從)함이요 조금도 편찬할 만한 자신이 있어서 붓을 잡게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불행히 조선 각 사찰의 사적 기록은 완벽히 소할 뿐 아니라 단편적으로 보존된 기록도 너무나 기적을 초월하야 황탄(荒誕)에 근(近)하고 문식(文飾)에 경(傾)하고 사실을 알아야 실로 사적 가치를 가진 자 근소한 것은 많은 유감이다.
그러나 지금에 사찰의 역사를 편찬코자 하는 자는 불완전하나마 사찰의 고기록을 참고하는 외에 타도(他道)가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그러한 고기록을 참고하여 편찬하게 되었으나 기적 보다 상사(常事)를 중히 하고 문식(文飾)을 폐하고 사실만을 기록하여 역사적 본질에 치중하였은 즉 편찬의 선부(善否)는 별문제이고 사찰의 역사에 진면목을 개전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기록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또한 엄연한 사실이 될 것인고로 각 기록을 본문의 후에 부하야 참고에 공하노라 2천9백 5십 5년 6월 10일』편찬의 머릿말에 보이는 기적 보다 상사에 치중하고 문식을 버리고 사실만을 기록하고 고기록을 침부해서 참고 자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는 것은 곧 건봉사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추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봉사 사적 편찬의 정신이 고성지방(高城地方)에 있어서는 근대 정신의 정립이라 볼 수 있다.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지만 승려로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수도와 학문을 닦은 곳은 강원도(江原道)에서였다. 특히 건봉사의 본말사에서 청장년기를 보냈다.
1896년 백담사(건봉사의 말사였다)에서 연곡(連谷)스님에게 중이되는 입문을 하고 만화(萬和)스님에게 법을 받았다.
「불교 유신록」과「님의 침묵」을 백담사에서 썼다. 1908년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圖宗宗務院(원종종무원)을 설립했으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개혁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 유심(唯心)지를 발간하였고 신간회(新幹會)에 가입, 중앙집 행위원이 되기도 하였었다. 조선 불교청년회 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를 위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일단체인 불당사건(佛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기도 하였다.「건봉사급건봉사말사적목록」을 보면 건봉사 사적, 건봉사 속암일람, 건봉사의 건
물 토지 임야, 건봉사의 보물, 건봉사의 탑부도 비, 건봉사의 진영, 건봉사의 명소, 건봉사 고 기록 등과 백담사, 신흥사, 낙산사, 화암사, 명주사, 영혈사, 수타사 등에도 사적에서부터 고기
록에 이르기까지의 항목을 사실에 임각해서 기록하였다
『조선불교만은 고요히 아무 소리가 없으니 과연 무슨 징조인가. 조선불교는 과연 유신할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냐, 또한 유신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이냐, 한 두번 생각해 보아도 그 까
닭을 알 수가 없다. 아! 이것 역시 알만하다. 그 책임이 나에게 있을 뿐이다. 불교 유신에 뜻을 두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는 것은 어찌된 이유인갸.
첫째는 친운에 맡기고 둘째는 남에게 미루는 그것이 즉 원인일 것이다. 나는 성사는 하늘에 있다는 말에 의혹이 없은 후, 조선불교를 유신하는 책임이 친운에도 있지 않으며, 타인에게도 있지 않고 오직 나에게 있음을 비로소 알았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유신할 생각을 한나머지 이 논문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며 아울러 승려 동료들에게 알린됐』「조선불교유신론(朝鮮偏敎維新論)」의 서론에서 한용운이 밝힌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건봉사의 말사인 백담사에서 1910년 한용운이 제신한 불교 유신은 고성지방(高城地方)의 근대 지향에
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