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 서 론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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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지방(高城池方)의 문물은 택당(澤垈) 이식(李液)이 간성현감(杆城縣監)으로 서기 1631년 부임하여「수성지(氷城誌)」를 편찬하는 등의 문운(文韻)을 일으키면서 크게 떨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 일류의 문장가였던 이식(李植)은 간성(杆城)지역 개척에도 힘써 지금의 진부령(陳富嶺)길을 열기도 하였었다. 선조(宣祖) 이후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고성지방(高城地方)은 우리 나라의 변방(邊方)이면서도 문운(文韻)이 싹터 왔었다. 고성지방(高城地方)의 근대 인물도 이같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중앙의 관리와 이름 있는 선비들이 금강산(金剛山)을 중심으로 고성지방(高城地方)을 유람(遊覽)할 때 그들의 행적이 고성지방(高城地方)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지적인 풍토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 또한 고성지방(高城地方)의 문물이 싹터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근대의 개항(開港)이 시작되었을 때 고성지방(高城地方)의 삼일포(三日浦)와 장전(長箭)은 부산(釜山)과 원산(元山)으로 사람들이 왕래(往來)하는 관문(關門)이 되었다. 일찍부터 새로운 문물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신소설(新小說)「세검정」에 첫 장면부터 고성(高珹)의 삼일포를 무대로 부산(釜山)과 원산(元山)으로 떠나는 여객선이 등장하는 것도 개항시대 고성지
방(高城池方)의 관문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이상 세 가지 바탕이 고성(高城)의 근대인물(近代人物) 탄생의 배경이 된다. 고성지방(高城地方)은 3․1 운동때 간성군(杆城郡)이었으나 직후 행정구역(行政區域)을 변경하면서 고성군(高城那)으로 명칭을 바꾸고 군청소재지도 간성(枰城)에서 고성(高城)으로 옮겼다. 통천군(通川郡)의 장전지방(長箭地方)을 고성군(高城郡)으로 편입시켰고, 고성군(高城郡)의 죽왕면(竹旺面), 토성면(土城面)을 양양군(襄陽郡)에 이관시켰으며 6․26동란 이후 죽왕면(竹旺面)과 토성면(土城面)이 다시 고성군(高城那)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성(高城)의 근대인물은 장전지방(長箭池方)에서 고성지방(高珹地方)까지의 실존했던 인물을 그 대상으로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 일류의 문장가였던 이식(李植)은 간성(杆城)지역 개척에도 힘써 지금의 진부령(陳富嶺)길을 열기도 하였었다. 선조(宣祖) 이후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고성지방(高城地方)은 우리 나라의 변방(邊方)이면서도 문운(文韻)이 싹터 왔었다. 고성지방(高城地方)의 근대 인물도 이같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중앙의 관리와 이름 있는 선비들이 금강산(金剛山)을 중심으로 고성지방(高城地方)을 유람(遊覽)할 때 그들의 행적이 고성지방(高城地方)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지적인 풍토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 또한 고성지방(高城地方)의 문물이 싹터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근대의 개항(開港)이 시작되었을 때 고성지방(高城地方)의 삼일포(三日浦)와 장전(長箭)은 부산(釜山)과 원산(元山)으로 사람들이 왕래(往來)하는 관문(關門)이 되었다. 일찍부터 새로운 문물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신소설(新小說)「세검정」에 첫 장면부터 고성(高珹)의 삼일포를 무대로 부산(釜山)과 원산(元山)으로 떠나는 여객선이 등장하는 것도 개항시대 고성지
방(高城池方)의 관문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이상 세 가지 바탕이 고성(高城)의 근대인물(近代人物) 탄생의 배경이 된다. 고성지방(高城地方)은 3․1 운동때 간성군(杆城郡)이었으나 직후 행정구역(行政區域)을 변경하면서 고성군(高城那)으로 명칭을 바꾸고 군청소재지도 간성(枰城)에서 고성(高城)으로 옮겼다. 통천군(通川郡)의 장전지방(長箭地方)을 고성군(高城郡)으로 편입시켰고, 고성군(高城郡)의 죽왕면(竹旺面), 토성면(土城面)을 양양군(襄陽郡)에 이관시켰으며 6․26동란 이후 죽왕면(竹旺面)과 토성면(土城面)이 다시 고성군(高城那)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성(高城)의 근대인물은 장전지방(長箭池方)에서 고성지방(高珹地方)까지의 실존했던 인물을 그 대상으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