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제1절 개 설>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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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는 민족의 혈연적 표상으로 우리 나라에서의 성(姓)제도는 그 역사가 오래되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그 신하에게 극씨 중실씨 소실씨 등의 사성을 하였다는 기록이 사서에 있고 신라의 박, 석, 김, 삼성이 전설로 전하여지고 있으며 유리왕때에 육부, 즉 양부(閼川楊山村)에 이씨, 사양부(突山高墟村)에 최씨, 점양부(茂山大樹村)에 손씨, 본퍼촌에 정씨, 한저부(金山加利村)에 배씨, 습북부(明法山高耶村)에 설씨를 사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나라의 성씨가 외부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순수한 우리의 창안이었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중국 문화와의 교관관계로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성씨제도가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은 삼국시대의 일이다. 성씨의 고찰에서 뺄 수 없는 것이 본이고 본은 본이라는 말 외에도 본관, 관향, 본향이라는 말로도 쓰이며 이 본은 시조의 발상지의 지명을 쓰는 것이 종례로 되어 있으나 역사상 그 시발은 신라의 육부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에서는 육부에 육성을 사성하는 과정에서 부명 즉 촌명을 밝혀 그 본향지를 명시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 혈연을 밝히는데 있어 성만으로는 그 뜻이 없고 반드시 본을 밝혀야 혈연관계가 명확해 진라는 점에서 본다면 본향은 씨족의 혈연관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과 같은 산업사회에 있어서는 씨족의 혈연적 기능 보다는 지연적 동질 생활권 즉 직장․종교․사회단체 등이 생활현실에 크게 작용하고 있으나 지난날의 농경문화권에 있어서는 혈연적 씨족 기능이 생활의 중요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씨족은 그 고장의 주인임으로 모든 문화활동의 모체이기 때문에 지리지 또는 읍지에는 씨족의 조항이 들어 있는 것이 항례이다. 이러한 서적이 한결같이 그 명칭을 성씨로 하고 있지는 아니하여 동국여지승람에는 씨족에 관한 기사의 표제를〔성씨〕라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서는〔씨족〕이라 하였고 혹 어떤 읍지에는〔世居氏族〕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근래 씨족이나 가문 중심의 사회에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점차 개인이나 지연중심의 사회로 변하고 있어 확대혈연의 가족 구조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사회현상 속에서도 지역마다 씨족의 종친회나 화수회(花樹會)가 성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족보의 발행도 예나 다름 없이 속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는 산업사회로 변모하여 간다 할지라도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겨 있는 씨족관념은 그 뿌리가 깊어 실제로서 보다는 관념으로서 심의에 잔존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고성군도 예외는 아니다.
읍지에서 성씨를 주민으로 표기한데가 더러 있으나 여기서는 주민과 성씨의 개념을 달리하였다. 주민의 개념 속에는 직업․인구통계․인구동태 등의 통계처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성씨는 이러한 통계처리가 아니고 혈연적 의미에서의 성씨를 다루었다. 더우기 본지 제4편 인문환경 중에 주민에 관한 조항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순수한 성씨만을 다루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고성은 행정구역의 이변이 많았던 곳으로 여기에서의 성씨는 고성과 구간성을 같이 다루었다.
1940년에 발간한 강원도지 성씨조에도 고성과 간성이 따로 되어 있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고성과 간성은 따로 되어 있으나 오늘적 고성군은 이 두 고을을 합한것이기에 함께 다루
기로 하였다.
강원도내의 시군중에는 성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는 곳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강릉(江陵)은 최, 김, 박, 성, 곽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고 삼척(三陟)은 김, 심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고 원주(原州)는 원, 변, 김, 이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성(高城0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는 없다. 대개 한 고을의 이른바 대성이라고 불리우는 성씨는 그 고을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三陟 김씨, 江陵김씨, 江陵최씨, 江陵박씨가 다 그 고장에서는 동족의 수가 많은 대성들이다.
고성에는 고성(高城)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가 없어 본관피 대성은 없으나 杆城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간성 이씨가 있다. 1940년에 발간한 강원도피 권 1의 성씨조 통천란(通川欄)구흡곡항에 간성이씨가 들어 있으나 동서(同書) 고성이나 간성조에는 간성이씨가 빠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고성군에서의 고성이나 간성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유일한 성이 간성이씨 이기는 하나 194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간성이씨는 고성이나 간성에서는 그 족세가 많지
아니하었던 것으로 추찰되어진다. 이러고 보면 현재 본군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주민은 외래성씨로 오래된 성씨는 이미 수백년 전에 여기에 입향한 씨족도 있고 가까이는 최근에 여기에
입향한 씨족도 없다.
입향의 년대가 오래된 씨족은 이곳이 본시 본관지가 아니나 그 연대가 오래되어 그 족세가 번성하다보니 세거씨족(世曆氏族)이 되었다. 반면에 간성이씨는 이 고장을 본관지로 하고 있
으나 이 고장 세거씨족에서 빠져 있고 다른 고장의 세거씨족란에 들어 있는 것은 여기가 본관지이기는 하나 족제(族勢)가 약했던데 연유한 것으로 보이고 더우기 한국 성씨대관 이씨란의
주요 본관에 간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간성 이씨가 이씨 중에서도 족세가 번성하지 아니하였던 것이 틀림이 없다. 이렇게 족세가 영세했던 탓으로 강원도지 성씨란에 본관지의 세거씨족으로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간성이씨가 고성과 간성을 통털어 유일한 이곳 본관성이고 흡곡의 간성이씨조에「文判官 慶承后 居星峴里」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가계가 뚜렷한 성현리(星峴里)에서는 대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씨족은 그 고장의 주인임으로 모든 문화활동의 모체이기 때문에 지리지 또는 읍지에는 씨족의 조항이 들어 있는 것이 항례이다. 이러한 서적이 한결같이 그 명칭을 성씨로 하고 있지는 아니하여 동국여지승람에는 씨족에 관한 기사의 표제를〔성씨〕라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서는〔씨족〕이라 하였고 혹 어떤 읍지에는〔世居氏族〕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근래 씨족이나 가문 중심의 사회에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점차 개인이나 지연중심의 사회로 변하고 있어 확대혈연의 가족 구조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사회현상 속에서도 지역마다 씨족의 종친회나 화수회(花樹會)가 성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족보의 발행도 예나 다름 없이 속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는 산업사회로 변모하여 간다 할지라도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겨 있는 씨족관념은 그 뿌리가 깊어 실제로서 보다는 관념으로서 심의에 잔존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고성군도 예외는 아니다.
읍지에서 성씨를 주민으로 표기한데가 더러 있으나 여기서는 주민과 성씨의 개념을 달리하였다. 주민의 개념 속에는 직업․인구통계․인구동태 등의 통계처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성씨는 이러한 통계처리가 아니고 혈연적 의미에서의 성씨를 다루었다. 더우기 본지 제4편 인문환경 중에 주민에 관한 조항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순수한 성씨만을 다루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고성은 행정구역의 이변이 많았던 곳으로 여기에서의 성씨는 고성과 구간성을 같이 다루었다.
1940년에 발간한 강원도지 성씨조에도 고성과 간성이 따로 되어 있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고성과 간성은 따로 되어 있으나 오늘적 고성군은 이 두 고을을 합한것이기에 함께 다루
기로 하였다.
강원도내의 시군중에는 성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는 곳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강릉(江陵)은 최, 김, 박, 성, 곽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고 삼척(三陟)은 김, 심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고 원주(原州)는 원, 변, 김, 이씨의 본관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성(高城0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는 없다. 대개 한 고을의 이른바 대성이라고 불리우는 성씨는 그 고을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三陟 김씨, 江陵김씨, 江陵최씨, 江陵박씨가 다 그 고장에서는 동족의 수가 많은 대성들이다.
고성에는 고성(高城)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가 없어 본관피 대성은 없으나 杆城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간성 이씨가 있다. 1940년에 발간한 강원도피 권 1의 성씨조 통천란(通川欄)구흡곡항에 간성이씨가 들어 있으나 동서(同書) 고성이나 간성조에는 간성이씨가 빠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고성군에서의 고성이나 간성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유일한 성이 간성이씨 이기는 하나 194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간성이씨는 고성이나 간성에서는 그 족세가 많지
아니하었던 것으로 추찰되어진다. 이러고 보면 현재 본군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주민은 외래성씨로 오래된 성씨는 이미 수백년 전에 여기에 입향한 씨족도 있고 가까이는 최근에 여기에
입향한 씨족도 없다.
입향의 년대가 오래된 씨족은 이곳이 본시 본관지가 아니나 그 연대가 오래되어 그 족세가 번성하다보니 세거씨족(世曆氏族)이 되었다. 반면에 간성이씨는 이 고장을 본관지로 하고 있
으나 이 고장 세거씨족에서 빠져 있고 다른 고장의 세거씨족란에 들어 있는 것은 여기가 본관지이기는 하나 족제(族勢)가 약했던데 연유한 것으로 보이고 더우기 한국 성씨대관 이씨란의
주요 본관에 간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간성 이씨가 이씨 중에서도 족세가 번성하지 아니하였던 것이 틀림이 없다. 이렇게 족세가 영세했던 탓으로 강원도지 성씨란에 본관지의 세거씨족으로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간성이씨가 고성과 간성을 통털어 유일한 이곳 본관성이고 흡곡의 간성이씨조에「文判官 慶承后 居星峴里」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가계가 뚜렷한 성현리(星峴里)에서는 대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