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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금강산의 전설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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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산의 전설
금강산은 그 곳곳마다 얽힌 전설과 신화가 많지만 금강산 전체를 통하여 공상적인 혹은 우화적으로 창작되어 전해 오는 설화도 적지 않다. 금강산은 천국에 있던 석가산(石假山)을 인간세상에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옛날 옛적에 천당옥경(天堂玉京)에 한 선관(仙官)이 있었는데 옥황상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상제의 총애를 믿고 너무도 건방지고 방자하게 버릇없이 굴다가 다시는 천상에 살수 없는 범죄를 범하였다. 이에 상제께서 진노하여 이 선관을 인간세상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선관이 귀양을 내려올 때에 상제께 가서 눈물을 흘리고 하직을 고하였더니 이 선관을 즉은하게 여기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여 주고 싶으나 여러 신하와 함께 결정한 이상 다시 이것을 고칠수가 없구나. 그러니 그리알고 섭섭하게 여기말고 가거라. 그런데 내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내 앞에 있는 보배 가운데 무엇이든 하나만 너에게 선물로 하사하고자 하니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고 가거라." 선관은 이러한 분부를 받고 퍽 감축하게 생각하며 두루 골라보다가 천국에 둘도 없는 보물인 석가산을 보고는 "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이 석가산이오니 이것을 주시옵소서."라고 여쭈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그것은 안된다고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앞서 "네 마음대로 골라가라."고 분부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지만 할수없이 머리를 끄덕이니 선관은 이것을 가지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내려오자면 불가불 구멍을 뚫어서 줄로 꿰어 가지고 와야 되었다. 그때 뚫은 구멍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혈망봉의 구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천궁에 있는 제석보살이 인간의 산천을 창조할 때에 여러가지 산천을 만들었지만 금강산처럼 훌륭하게 만들어진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석보살은 무엇보다도 금강산을 사랑하였는데 몇억년 뒤에 지구가 파괴된다면 금강산만은 구하여야겠다고 해서 그때 꿰어서 천상으로 올라가려고 미리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 혈망봉이라 한다. 금강의 봉오리마다 금강의 골짜기마다 금강의 폭포, 나무, 돌, 흙마다 조상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기 아름다운 이야기가 서려 있고 거기 희한한 전설이 깃들여 있고 있는 설화가 숨쉬고 있다. 금강산은 살아있는 산, 살아있는 냇물, 살아있는 폭포가 되어 우리들 가슴에 와 닿는다.
"용(龍)과 사자바위' '피흘린 산삼(山蔘)' '나못꾼과 선녀' '화(禍)를 입은 삼일포 신필(神筆)' '불정암(佛頂岩)과 용녀' '부정 탄 장안사의 재목' '울소의 유래' '단발령과 마의태자' '승천한 양사언의 비(飛)자' '황천강과 명경대' '보덕굴의 전설' '십왕봉의 치죄소리' '유점사 창건 전설' '서산과 사명당' '장기국수 지암회상'등의 15편은 금강설화의 한부분에 불과하다. 그 많은 설화들을 우리 가슴에 간직하면서 전설편을 엮는다.
가. 용(龍)과 사자바위
금강산 용연(龍淵)옆 화룡당 앞에 사자자위가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어느것 하나 범연한 것이 없겠지만 이 사자바위의 모습 역시 사자 그대로의 형상이기는 하나 뒷다리가 없는 사자상이다. 그 이유는 용연에 용 한마리가 살고 근처에 사자 한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웃에 같이 살면서도 사이가 퍽 나빴다. 사자는 사자대로 내가 산중 왕이라고 하고 용은 용대로 날 빼놓고 사자따위가 어떻게 산중왕이 되겠는가 하며 서로 으르렁 거렸다. 오랜 반목끝에 마침내 실력 대결로 자웅을 겨루기로 하여 격투를 시작하였다. 사자와 용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소리를 찌릉 찌릉 지르면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그런데 사자는 그만 용에게 두 다리를 잘리우고 말았다. 사자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용연앞 바위에 나머지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용에게 복수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용은 좀처럼 사자에게 틈을 주지 아니하였다. 분이 풀리지 아니한 사자는 잠도 안자고 꿋꿋이 서서 용연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런 사자의 모습을 본 법기보살은 사자와 용을 화해 시키려고 사자의 두 다리를 돌리주고 화해토록 했다. 그뒤 얼마안가 사자는 죽고 말았으며 사자의 시체는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나. 피흘린 산삼
이조 초엽 태조가 등극한 뒤 고려의 유신중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초야에 파묻힐때의 일이다. 고려유신 중에 젊은이 한 사람이 세상이 싫어 부인과 함께 깊은 산중 금강산으로 찾아와 움막을 치고 살기 시작하자 백발노인이 막대기를 이끌고 찾아와 "이곳은 자고이래로 속인이 오지않는 곳인데다 동구(洞口)안은 내 영주(領主)인데 어디서 왔기에 남의 땅을 어지럽히느냐." 하면서 산을 떠나도록 하기에 사연을 말한즉 이로운 것이 없다면서 사라졌다. 두 부부가 하루는 약초를 캐러갔다. 산삼 한 뿌리를 발견하여 캘려고 할때 아내는 노인의 말을 생각하고 남편이 산삼캐는 것을 만류 하였으나 산삼을 캐다가 잘못하여 뿌리하나를 끊었더니 이상하게도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언제왔는지 전의 노인이 와서 "그대들은 왜 가라는데 안가고 끝내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말았느냐."고 책망하였다. 두 부부가 엎드려서 용서를 빌었더니 "그 산삼을 그대로 심어 20년 후 꽃이 피면 그대들에게 경사가 있을 것이다. "하고 사라졌다. 두 부부는 20년간 온갖 정성을 다해 계곡의 물을 퍼다준 결과 마침내 꽃이 피고 50이 념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부인에게 태기가 있더니 달이 차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는 기골이 비범하고 정신이 맑아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고 후세에 이름을 떨친 훌릉한 사람이 되었다.
다. 나뭇꾼과 선녀
옛날 금강산에 마음씨 착한 나뭇꾼 한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나무하러 산에 갔더니 사냥꾼에게 쫓긴 사슴 한 마리가 총각에게 와서 "사냥꾼에게 쫓기어 갈곳이 없으니 나를 숨겨주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 "고 애걸하였다. 마음착한 나뭇꾼은 나무짐밑에 숨겨주었다. 잠시후 사냥꾼들이 달려와 "사슴 한마리 못보았느냐?"고 묻기에 사슴이 앞산고개를 넘어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사슴은 나와서 고맙다고 하며 소원이 무었이냐고 묻기에 나뭇꾼은 "나는 집이 가난하여 이 나이에 이작 장가를 못가고 있는데 장가가는것이 소원이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슴은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선녀탕(仙女湯)이란 못이 있는데 이번 보름날밤 선녀들이 목욕하러 하늘에서 내려올것이니 그늘에 숨어있다가 선녀의 옷 한벌을 감추시오. 그러면 옷이 없어 하늘로 가지 못할것이니 그렇게 하면 장가를 들 수 있소. 그런데 장가든 후에라도 선녀의 옷을 감추었다 아이셋을 낳기전에는 내주지 마시오. 옷만 입으면 하늘로 올라가니까."라고 일러주고는 사라졌다. 나뭇꾼은 사슴이 일러준대로 보름날 달밤에 선녀탕으로 가서보니 과연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뭇꾼은 선녀의 옷 한벌을 훔쳐들고 바위틈에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은 못속에서 나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옷을 잃은 선녀만 물가에서 울고 있었다. 나뭇꾼은 선녀를 붙잡고 "인연이 있어 이렇게 되었으니 같이 살자."고 사정을 하니 선녀는 옷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으나 끝내 주지않고 결혼하여 살며 아이 형제를 낳게 었다. 하루는 "부부간의 정도 깊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선녀옷을 돌려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나뭇꾼은 사습의 말을 잊지않고 거부하였으나 선녀가 날이면 날마다 조르므로 설마하고 옷을 내어 주었다. 선녀는 옷을 바꾸어 입고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은 나뭇꾼은 슬픔에 젖어 있다가 혹시나 선녀탕에 목욕을 하러 오지 않을까하여 매일 그곳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선녀들은 내려오지 않고 두레물을 퍼다 목욕을 하였다. 하루는 선녀탕 옆에 앉아 있다가 하늘에서 커다란 두레박이 내려오자 "두레박을 타고 올라가면 아내와 자식을 만날 수 있겠지."하고 두레박에 앉아 하늘로 올라가 다시 아내와 자식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라. 화(禍)를 입은 삼일포(三日浦)의 신필(神筆)
삼일포는 고성에 있는 탓으로 고성삼일포라고도 하고 금장산속에 있는 탓으로 금강산 삼일포라고도 한다. 삼일포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치가 좋아 신라의 신선 영랑등이 이곳을 찾아와 3일간 놀다 갔다하여 삼일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다. 삼일포 호반에는 36봉이 들러서 있는데 그중 남안봉의 바위에 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고 새겨져 있고 글자에 붉은 칠을 하였다하여 단서(丹書)라고 하며 6자중 4자는 자획이 획연하나 아래 2자는 자획이 떨어져 글자를 잘 볼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이곳이 풍경도 좋으려니와 삼일포에 신선의 글자가 있다는 풍문으로 글자를 보러 많은 사람이 찾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들게 되니 삼일포 인근 사람들이 자연히 큰 폐를 입게 되어 관원의 행차가 있을때마다 피해를 입게 되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모여서 삼일포에 사람이 안오게 하는 묘책을 숙의한 끝에 징으로 글씨 획을 쪼아 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삼일포에 새겨 놓은 글씨는 신선이 쓴 글씨인 탓으로 중병에 걸렸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을때 글씨를 쪼은 돌조각을 지니고 다니거나 그 물을 끓여 마시면 병도 낫고 환난(患難)도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이 비방으로 쓰려고 몰려와 글씨 획을 쪼아 갔으므로 지금은 자획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 불정암(佛頂岩)과 용녀(龍女)
금강산 동쪽에 불정암이라는 바위산이 있고 그 옆에 불정암(佛頂庵)이 있었다. 이 암자에는 불정화상이라는 스님 한분이 살고 있었는데 늘 제자들을 데리고 불정암상(佛頂岩上)에서 불법을 설하였다. 이 불정암 바위산 바로 한가운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큰 못이 하나 있었고 이 못속에는 용녀가 살고 있었다. 못 가운데 있던 용녀는 때때로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여자의 몸으로 남자와 같이 설법을 들을 수 없어 고민 하던중 달밤에 지형을 살피러 불정암에 올랐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불정스님이 강(講)하는 뒷편 갈라진 바위틈을 발견하여 다음날부터 여자로 변하여 바위틈에서 설법을 들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듣다보니 어느덧 바위가 달아 여자의 엉덩이와 같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이 불정암에는 여자 한 사람이 걸터앉기에 알맞게 파여있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바로 용녀가 숨어서 설법을 듣고 있던 바위라 전해진다.
바. 울소의 유래
내금강 배재령밑에 깎아진 석벽을 따라 올라가면 맞은편에 천구봉과 송라봉이 솟아있고 백천(百川)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은 사천왕암(四天王岩)아래의 절벽계곡을 따라 빠른 물살을 이룬다. 그 물살이 철책을 한 비탈진 바위밑에 소용돌이 치는곳이 바로 오연담(嗚淵漂) 또는 "울소"라고 이르는 소(沼)이다. 항상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경(神秘境)을 느끼게 하는 못이다. 이 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담겨져 있다. 옛날 내금강 표훈사(表訓寺)에 금동거사(金同居士)와 나상조사(情淵祖師)가 함께 불도를 닦고 있었다. 나상조사는 학식과 덕행이 높아 전국에서 많은 승려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으리고 구름같이 찾아 들었으나 금동거사는 학력이 부족한데다가 소견이 좁아 나상조사의 학덕 높음을 시기하였다. 그는 나상조사만 없으면 여기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인데하고 내심 늘 나상조사를 미워하고 있었으면서 곁으로는 "나는 학식과 덕행이 모자라니 어찌 나상조사를 따르겠는가?"라며 겸손한체 하였다. 겉으로는 늘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기회만 있으면 그를 해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던 어느날 나상조사가 암석에 불상을 조각할 계획을 세우고 "나는 저기 우뚝솟은 암석에 부처님상을 세개 조각 할 작정이오."하고 그의 결심을 말했다. 금동거사는 이 기회야말로 나상조사를 없앨 수 있는 천재일과(千載一過)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야심어린 엉뚱한 제안을 하였다. "참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저 암벽에 세 불상을 조각하는 동안 소승은 그 암벽반대방향에 예순두 불상을 조각하겠습니다. 기왕에 한 암석의 양면에다가 불상을 조각하게 되었으니 우리 서로 내기를 합시다. 만일 기일내에 완성치 못하거나 또한 조각한 솜씨가 좋지 못하면 피차 불도를 닦는 몸으로 거짓을 한 결과가 되니 부처님께 거짓한 죄로 이 아래 소(沼)에 빠져 죽기로 합시다." 이러한 제안을 들은 나상조사는 그 내심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심성을 간파하고 "피차 불심에 의하여 자기 나름대로 불상을 조각하면 그만이지 내기는 무슨 내기 이겠는가?"하고 극구 내기를 말렸다. 그러나 금동거사는 "지금 내말은 거짓없는 참말이오. 두고 보십시오. 내가 기일내 완성치 못하거나 그 솜씨가 스님것 만큼 좋지 못하면 나는 내 스스로 저 소에 빠져 죽을 것이니 만일 스님이 나만 못하면 그때는 스님이 빠져 죽어야 합니다."고 결정을 하여 버렀다. 두사람은 매일아침 이른새벽부터 바위를 깎기 시작하였다. 조사는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정성껏 조각을 하여 보은사의 세 불상을 기일내에 훌륭히 완성 하였다. 그러나 거사는 조각에 인과의 법리가 역력히 작용하여 불상의 모양이 조잡한데다가 그나마도 기한이 지나서야 겨우 완성하였다. 자기입으로 약속을 하고도 거사는 그 약속을 지
키지 아니한채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던 어느날 뇌성벽력이 일어 금동거사는 마침내 소에 빠져 죽고 그의 시신은 바위가 되어 소 한가운데 그 형체를 드러냈다. 금동거사는 속세에 삼형제의 아들이 있었는데 금동거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있던 표훈사를 찾아왔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슬픈 내력을 듣고 통곡을 하며 "우리 아버지는 벌을 받아 돌아가셨으니 정말 불쌍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세형제가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들이 물속에 뛰어들어 죽자 그들의 시체도 똑같이 바위로 변해 버렸다. 지금도 금강산 오연담(嗚淵潭)에는 큰 바위 하나와 그 옆에 작은 바위 세개가 있는데 그 큰 바위는 금동거사의 화석이고 작은 바위들은 아들 삼형제의 화석이라 하며 소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죄를 받고 죽은 금동거사의 울음 소리라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를 '울소' 또는 오연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 단발령(斷髮領)과 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말기 국운이 쇠약하여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敬順王)이 북에서 고려국을 세운 왕건의 세력을 당할 도리가 없어 신라 사직을 싸움한번 하지 않고 그대로 왕건에게 바치는 것을 극력 반대했던 태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뜻있는 측근 몇 사람만을 데리고 속세를 멀리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그는 금강산의 연봉을 바라보고 그 신비함에 감동되어 망국(亡國)의 태자로서의 서글픔에 느낀바가 있어 다시는 속세에 나가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하고 이 영(嶺)마루에서 머리를 잘랐다. 그리하여 이 고개를 단발령(斷髮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그는 그뒤 금강산에서 몸에는 삼베조각을 걸치고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였다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이르게 되었다. 그는 금강산에 입산한 뒤로는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여진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초라한 무덤 하나가 있어 등산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사실을 고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오랜 세월동안 마의태자의 무덤이라 알려지고 있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발길을 멈추어 천년전 옛일을 되세기게 하고 있다. 철원, 금화에서 내금강으로 가자면 단발령을 넘게 된다. 단발령은 내금강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금강을 찾자면 누구나 넘어야 할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수많은 내금강의 연봉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이곳을 넘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서 한번은 경탄한다는 곳이기에 이 단발령에는 많은 전설이 서려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단발령에 처음 올라 금강산의 신비에 접하였을 때 속세에 들어갈 생각을 버리게 된다는데서 이름을 단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가 마의태자 이야기고 마의태자가 이곳에서 머리를 잘랐다하여 단발령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아. 황천강(黃泉江)과 명경대(明鏡台)
아득한 옛날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의 12사자를 시켜 죽은 사람의 혼을 명부로 불러 들이도록 하였다. 생전의 업과를 살펴 그 결과에 따라 죄많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은 그에 해당할 만한 극락에 골라 보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생겼다. 염라대왕앞에 불려나온 사람들은 지옥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지라 약속이나 한듯 생전에 지은 죄를 모두 감추고 착한 일만했다고 주장하였다. 바른대로 대라고 심문하기도 번거롭거니와 심문만으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판(誤判)을 할 염려가 있었다. 오판으로 당연히 지옥에 보내야할 사람을 극락에 보내는 잘못을 범하면 명부의 권위와 공정성을 잃을 염려가 있게되어 염라대왕은 할 수 없이 죽은 사람에게 비치면 그 사람의 생전 일이 기록영화와 같이 환하게 들여다 보이는 거울 하나를 만들었다. 이 거울을 만든 뒤로는 죽은 사람들이 염라대왕 앞에서 자기적 과거를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염라대왕은 과거와 같은 심문의 번거로움 없이 공정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염라대왕앞에 여승 한 사람이 심문을 받기 위하여 불려나왔다. 그런데 여승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한 벌거숭이였다. 이 괴이한 모습을 본 대왕이 "그대는 이 무슨 해
괴한 짓이냐?"고 물었더니 여승은 묵묵부답이었고 고개를 수그린채 염주만을 굴리고 있었다. 대왕이 이 광경을 보다못해 "왜 대답을 못하고 염주만 굴리고 있는가? 속히 대답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때서야 여승은 머리를 다시 들고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소승이 살아생전 게을렀던 탓으로 이렇게 몸을 가릴만한 옷 한벌이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염라대왕은 이말을 듣고 아무리 게으르다한들 여자가 제몸 가리울것 하나 마련하지 못했을리가 없는데 저렇게 알몸으로 있으니 반드시 거기에는 곡절이 있을것 같아 판관을 불러 "저 여승에게는 무언가 말못할 곡절이 있어 바른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는것 같으니 방금만든 명경앞에 세워놓고 그의 과거를 살펴보라."하므로 판관은 그 여승을 금강산 명경대앞에 세워 놓았다. 그러자 거울에는 한여자가 옷깃을 펄럭거리며 나타나더니 여승을 붙잡고 "스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장차 어찌 갚으오리까."하며 바람에 옷깃을 감싸쥐며 눈물을 흘리었다. 그 거지여자가 입은 옷이 바로 그 여승의 승복이었다. 이 광경을 본 염라대왕은 옆에 있는 판관에게 "어찌하여 이거지는 승복차림으로 이다지 슬피 우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판관은 같이 보고 있다가 "여승이 생전에 적선을 많이 하고 공덕을 쌓던 중 어느 추운 겨울날 여자거지를 만나 승복을 벗어 주었는데 그게 고마운지 저 여자거지가 여승에게 치하를 하고 있는 광경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왕은 "내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생전의 죄과를 숨기려들며 없는 선행도 꾸며 대는데 이 여승은 선행을 오히려 감추고 죄과가 있는양 꾸며댔으니 참으로 보기드문 도인이다."하며 시녀들을 불러 "이분은 극락세계에 오르실 분인데 적선하느라 옷이 없으니 비단옷 한벌을 입혀 극락세계로 고이 안내하여라."고 분부하였다. 여승은 곧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염라대왕앞에서 물러나와 비단옷을 입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금강산 황천강에 모습을 비치며 극락세계로 올라갔다고 한다. 금강산은 불교의 도장으로 널리 알려진대다 명경대 황천강등 불교적 전설이 나올만한 곳이 갖추어있기에 이곳 명경대에는 저승길에 올라있는 사람들의 전설이 퍽 많다. 앞서의 전설은 승려의 것이지만 속인들이 저승길에 올라 이곳 명경대를 거쳐간 이야기도 있다. 하루는 염라대왕이 명경대앞 대왕봉에 앉아 있었더니 12사자들이 금강산에서 멀지않은 고성군 안창이란 고장에서 제일간다는 부자를 잡아왔다. 대왕은 명경대에 비치기전에 그 부자의 용모며 차림새를 자세히 살피면서 "그대가 안창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는가?"고 물었더니 '예 다들 그렇다고 합니다."고 대답하였다. 대왕은 이어 "부자였기에 착한 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대는 부자인 탓으로 몹시 악한 일을 많이 하였겠구나!"하고 덜미를 쳐 보았다. 부자는 펄펄뛰면서 평생 살면서 남을 위해 적선을 하였을지언정 악한 일을 한바는 없다고 잡아떼었다. 대왕은 그 모습을 물끄리미 바라보다가 "그대가 평생을 통하여 남에게 못할 일을 한바가 없으면 평생 착한 일만 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대가 했다는 착한 일을 일일이 들어보자."고 짐짓 속는 체 하고 그의 선행을 듣고자 하였다. 그는 떠들썩하게 자기자랑을 늘어 놓기 시작하였다. "제가 일생동안 먹은 쌀알을 헤아리라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그 하구많은 저의 선행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러니 그중 대표적인 것만 몇개 들자면 제 인심이 후했다는 것은 조선팔도의 거지란 거지는 다 제 문간에 몰려와 그 행렬이 자그만치 12리가 넘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대왕은 침이 마르도록 거짓 자랑을 하는것을 들으면서 "명경대앞에 세우면 금시 판가름 날것을 저녀석이 장광설을 늘어 놓는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그대의 한말은 전부 사실이렸다?"하고 물으니 "어느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숨김없는 사실입니다."라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대왕은 그 사실여부를 알기 위하여 판관을 불려 "이 부자가 생전에 굉장한 선행을 했다하니 그게 사실인가 명경대앞에 세워보라."고 분부하였다. 명을 받은 판관은 부자를 명경대앞에 세웠다. 그랬더니 우선 거울속에는 거지 두사람이 꽉잠긴 소슬대문을 두드리며 "한푼이 아까와 못 보태주면 그만이지 이 부자놈아, 왜 사람을 두들겨 패서 내 쫓느냐?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하고 한 거지가 외치고 나니 다른 한거지는 "빌어도 못먹을놈아 밥한술 안주면 안주었지, 왜 남의 쪽박을 깨뜨려 버리느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라고 분노를 터트려 사뭇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같이 바라보던 부자는 그 도도하던 기세는 간곳없고 풀이죽어 맥을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판관이 염라대왕에게 "이자의 진술은 모두가 거짓말인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알렸다. 부자는 그래도 그렇지 않다고 극구 변명하려 들었다. 대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여기가 어딘줄 알고 앙탈이야. 네놈의 비행은 저것말고도 또 있을 것이니 다시 망경대 앞에 반영시켜보라."고 명하여 판관은 다시 그를 명경대앞에 세웠다. 이번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거울앞에 나타났는데 그 여인들은 머리카락을 흐트려 뜨린채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대왕이 그것을 보고 "어찌된 영문이냐?"고 판관에게 물으니 판관은 "이자에게 겁탈을 당한 여자들입니다. 이자는 돈의 힘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울렸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 장면은 소와 말이 거울속에 나타나 눈물을 줄줄 흘리며 구슬피 울고 있었다. 이것을 본 대왕은 다시 판관에게 물으니 "이짐승은 저 자의 집에서 기르던 가축으로 부릴때에는 겨우 풀죽을 쑤어 먹이고 일 없을 때에는 아무것도 주지아니하여 저런꼴이 된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미친 염라대왕은 사자를 불러 "이 자에게는 더 물을 것이 없으니 당장 지옥에 끌어다 넣어라."고 하여 이 안창부자는 지옥의 불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심판에 공정한 집행이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는 것은 대왕으로서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대왕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때 선행을 하여 지옥에 가지 않도록 경각심을 고취해 줄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사람은 죽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거울앞에 서면 일생의 선악이 숨김없이 나타난다는것을 미리 알면 죽은 후 지옥이 무서워서 선행을 하게 될것이라는데 착상을 하였다. 대왕은 이 생각을 백관들앞에 피력하고 거울앞에서 심판받는 형상을 바위에 조각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금강산의 명경대와 그 근처에 있는 염라대왕봉, 사자봉(使考峰), 우두봉(牛頭峰)등이라한다. 염라대왕은 사람의 선행을 권장하기 위하여 금강산에 심판대를 만들어 놓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광경을 보아야만 선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는 사람들을 모을 방법으로 "금강산 명경대앞 황천강에서 한번 목욕을 한 사람이면 죽어서 황천길이 순탄할 것이다."라고 선전 하였다. 이리하여 죽은후의 황천길이 순탄할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게 되었고 여기온 사람이면 이 명경대 근처에 있는 사후 심판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선심을 유발시켜 선행을 하게 되어 지옥가는 숫자가 줄어 들었다고 한다. 여기 염라대왕을 비록하여 판관, 사자, 죄인등의 상외에 동물의 상으로 소머리상 하나를 만들어 놓은 것은 고성안창 부자가 소를 학대했던 것에서 유래한것이라 한다. 비록 동물이라 할지라도 학대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5리쯤 가면 황천강이라 부르는 맑은 강이 있다. 이 강물은 유별나게 맑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형형색색의 기암산봉(奇岩山峰)들이 마치 거울처럼 비쳐 보인다. 이 황천강옆에 명경대라 불리우는 큰 절벽 하나가 있어 늘 황천강에 그 모습을 비치고 있다. 이 명경대 부근에 염라대왕의 형상을 한 염라대왕봉, 소머리형상을 한 우두봉, 좌인봉, 사자봉들이 줄지어 서있다. 사람이 죽으면 생전의 업보에 따라 이곳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 십왕봉(十王峰)의 치죄(治罪)소리
내금강에 십왕봉이라고 부르는 봉이 있다. 이 십왕봉은 생전의 업보에 의한 심판을 받을때 염라대왕을 중심한 판관 10명을 이르는 말이며 이들은 인간의 사후 심판을하는 절대권자들이다. 이 십왕봉밑에 신라시대 영원조사(靈源祖師)라는 스님이 구원암(灸源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살면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주위가 정적한 밤 영원조사가 홀로 앉아 있자니 십왕봉에 나인 다스리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는 깊은 산중 깊은 밤에 이상한 소리로 치죄하는 말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심판의 진행에 따라 어떤 사람은 극락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던중 치최의 주재자인 듯한 사람이 사자를 부르더니 "너는 지금 곧 경상도로 가서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중 명학이란 놈을 잡아 대령하라"고 소리쳤다. 이소리를 듣고 영원조사는 깜짝놀랐다. 명학이란 스님은 영원조사가 어려서 불문에 들어왔을때 범어사에서 모시던 스님이었다. 염라대왕이 언성을 높혀 '명학이란 놈'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고 죄를 지었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을 생각하니 남의 일이기는 하지만은 젊어서 모시던 사람이라서 측은 하였다. 영원조사는 명학이 어떻게 되나 자세히 들어봐야 하겠다고 정신을 바싹 차리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한동안 주변에는 밤의 고요만이 감돌뿐 아무소리도 나지 않더니 고요가 흐른뒤에 "범어사 명학이 잡아 대령이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치죄의 주재자인 염라대왕이 "명학은 생전의 네죄를 알렸다. 너는 네가 지은 죄의 인과업보(因果業報)로 말미암아 흑사굴에 가둠이 마땅하다. 너는 생전에 불도에 몸답고 있었으므로 인과업보에 용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것이니라.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는가?"고 하니 "아무 할말이 없습니다. 지은죄의
차. 유점사(楡岾寺)의 창건(創建)전설
옛날 유점사가 창건되기 얼마전 월씨국(月氏國)에서 오십삼불이 철종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그들이 오랜 항해끝에 닿은 곳이 안창현(安昌縣)에 있는 조그마한 포구였다. 포구에 닿은 일행의 목적지는 불법의 도장인 금강산이었기에 그곳에 머물지 않고 즉시 금강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안창의 책임자 노춘이라는 사람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들고 부하들에게"우리 고을에 먼 나라에서 부처님 53명이 찾아왔다 한다. 이 귀한 손님들을 모른체 할 수 없어 지금부터 그들을 영접하러 갈터이니 부하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일러 부하들을 거느리고 찾아갔다. 노춘일행이 포구에 다아보니 제불이 다녀간 자취가 진흙밭에 남아 있을 뿐 제불은 이미 보이지 아니하고 근처의 모든 나뭇가지가 이상하게 서쪽을 향하여 있었다. 진흙밭에는 그들이 타고왔던 종을 걸어놓고 쉬어간 자취가 있었다. 이것을 본 노출은 한발 늦어 귀한 손님들을 영접하지는 못했을망정 자기 고을에 온 제불에 문안을 안할 수 없어 그들의 뒤를 쫓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행적을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아까 나뭇가지가 이상하게 전부 서쪽을 향하였던것을 생각하고 필시 서쪽으로 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길을 떠났다. 제불은 포구에 올라와서 금강으로 가던중 처음으로 산밑에서 쉬었다. 이들이 쉬던 곳을 그 뒤로 부터는 그들이 여기에 잠시 쉬었다하여 휴방(休房)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들이 잠시 쉬었다 하여「소방(逡房)」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바로 지금의 경고(京庫)라고 한다. 이 경고를 지나 금강으로 가는 다음 지점이 지금의 문수촌이다. 이 문수촌은 제불을 배알하려고 노춘일행이 부지런히 제불의 뒤를 따라와 이곳에 와보니 길이 두 갈래로 갈려 있었다. 어느길을 택할것인가 망설이고 있던차 비구니 한분이 지나가기에 "여기 53불이 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라고 물었더니 그 비구니는 "내가 오던길로 53불이 갑디다."라고 대답하기에 그 길을 따라갔다. 이때 길을 가르쳐준 비구니는 비구니가 아니라 문수보살이 길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비구니로 화하여 나타났던 곳이라 하여 그곳이 곧「문수(文殊)」라는 마을 이름이 되고 말았다. 길을 재촉한 일행은 얼마가서 영마루에 이르렀으나 53불의 행적이 묘연하며 곤경에 빠져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니 멀리 산허리에 비구니 한분이 꿇어 엎드려 절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에 "옳지 저 비구니가 있는 저산 모퉁이를 지났나보다."하고 생각하고 그 비구니 있는 곳으로 일행이 가까이 가서 엎드려 있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살아있는 비구니가 아니라 바위 모습이 마치 비구니가 엎드려 절하고 있는듯이 보였다하여 이곳을「이유암(尼遊岩)」혹은「이대(尼臺)」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행은 여기서 이유암이 있는 방향으로 얼마쯤 가니 또 길이 갈라져 어디로 가면 좋을지 통 알수가 없어서 또 망설이게 되었는데 이때 난데 없는 황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강아지는 일행앞에 오더니 반가운 듯 꼬리를 살랄 살랑 흔들어대며 앞장서시 졸랑 졸랑 걸어가기에 일행도 그 강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아지가 나타나 인도하였다하여 이곳을「구령(狗嶺)」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행이 53불을 찾아 개재를 넘으니 모두 목이 몹시 말랐다. 고갯길이어서 계루나 샘물이 있을리 없어 일행 모두가 갈증에 허덕이게 되었다. 노춘은 지세를 한참 살피더니 부하들에게 한곳을 가르키며 파라고 일렀고 그곳을 얼마 파지않아 많은 물이 솟아나와 목을 축일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샘을 노춘이 팠다하여 노춘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샘에서 목을 축이고 얼마를 가다보니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졸랑거리며 가던 강아지도 온데 간데 없어졌고 일행은 다시 길을 몰라 헤메고 있을때 노루 한 마리가 나타나서 또 길을 인도하였다. 이리하여 노루를 따라가던 길을「노루목」이라 이르게 되었다.「노루목」을 지나고 나니 멀리서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행은 종소리를 듣고 "이제 53불이 멀지않은 곳에 있구나.'하고 하도 반갑고 기뻐서 모두 환호성을 올리면서 좋아하였다. 이들이 종소리를 듣고 환호성을 올린곳을 환희령(歡喜嶺)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일행이 종소리를 따라 동구안에 들어가보니 거기엔 큰 못이 있고 못 옆에 몇백년 묵은지 알 수 없는 큰 느릅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53불이 타고 온 철종은 그 느릅나무가지에 걸려 있었고 53불은 느릅나무 그늘에 열을 짓고 앉아 있었다. 유점사의 '유(楡)'(느릅나무) 자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노춘일행은 53불에 배래하고 돌아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이름을 유점사(楡粘寺)라 하라."하여 유점사를 창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곳 동구의 지령으로 보아 절을 짓자면 느릅나무 옆의 못을 메워야 하는데 못을 메
우느 것은 토사를 넣으면 되지만 이 못속에는 용 아홉마리가 도사리고 살고 있어 아무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함부로 용을 건드렸다가는 화를 입을 것이 뻔한 노릇이고 그렇다하여 이 못을 그대로 두고는 절을 지을수 없어 아주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에 생각다 못해 역사(役事)를 맡은 사람들은 이곳에 53불이 거처할 곳으로 이미 하늘이 정하여 바다를 건너온 바에야 53불의 불력(佛力)을 빌어 용을 몰아내자고 하였다. 그들은 그날부터 53불에게 "부처님들이 먼바다를 건너와 이곳에 정주하기 위하여 오셨으니 여기에 부처님을 모실 큰 절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동구의 대부분이 못으로 되어있어 못을 메워 절터를 닦아야 하겠습니다. 이 못에는 용 아홉마리가 있어 우리들 사람의 힘으로는 내쫓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들의 불력으로 이들을 내쫓아 주시면 곧 절을 지을것이니 하루속히 이 용들을 몰아내어 주십시오."기도하니 53불은 이 기도를 듣고 용을 내쫓기는 하여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필연코 피비리내 나는 싸움이 한바탕 벌어져야 할터인데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으로서 피비린내를 풍길수도 없거니와 새 절터에서 불상사를 일으킨다는 것도 불상사를 일으키는 것도 불길한 일이어서 난처하게 되었다
53불은 생각다 못해 우선 용들에게 다른 곳으로 물러가라고 타일러 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용들에게 "우리는 이곳에 정주하기 위하여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 터를 우리에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라. 그러면 우리도 좋고 그대들도 좋을 것이니 고집쓰지 말고 순순히 타이를때 옮겨 가랄라."라고 하였다. 용들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마시오 이곳은 우리 집인데 당신들이 무엇이기에 내쫓으려는거요. 폐일언(弊一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이곳을 떠날 수 없오."하고 강경히 버터기에 협상은 결렬되고 실력을 행사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실력행사를 한다하여 살생은 할 수 없는 처지이고보니 문제는 아주 어려웠다. 일이 이렇게되어 53불이 한자리에 모여 중지를 짜낼것이 못의 물을 끓이기로 하였다. 갑자기 물을 끓이면 용들이 미쳐 피신할 사이가 없어 죽고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큰 살생을 하게될 것이니 갑자기 물을 끓이지 말고 서서히 물을 끓이면 더운물에 견디기 어렵게 되어 용이 달아날 것이라고 보고 물을 끓이기로 한 것이다. 53불이 이 못의 물을 끊이기 시작하자 아홉 마리의 용은 뜨거운 물에 견디다 못해 못속에서 꿈틀거리다가 못을 뛰쳐나와 물을 찾아 옮겨갔다. 이곳이 지금의 외금강 구룡폭포(九龍瀑布)가 떨어지는 구룡연(九龍淵)이다. 이 구룡연의 이름도 유점사의 못이 아홉용이 이주한데서 생겼다고 한다. 싸움에 패하여 유점사 못을 떠난 용들은 분함을 참지못하여 곱게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이 못을 메운다 하니 이 동구안에 물이라고는 이 못과 샘한곳밖에 없다. 못을 메우면 저절로 물이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물은 샘물 한군데 밖에 없을 것이니 저 샘만 메우면 이동구에는 식수할 물도 없을터이니 어디 한번견디어 보라."고 달아나면서 그 분풀이로 유점 사동구의 샘을 막아 버렸다. 용들이 떠딘뒤 못을 메워 유점사를 짓고 스넘들이 입주하려 하였으나 식수가 없어 스님들은 백방으로 동구안에 샘물을 찾았으나 샘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절이 거의 폐사(廢寺)상태의 운명에 이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여러 마리의 새가 한곳에 모여 땅을 쪼고 있기에 스님이 보니 그곳에 샘이 터져 맑은 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이리하여 유점사는 폐사직전에서 크게 번창하여 대본산(大本山)이 되었고 이 샘을 새가 찾았다하여 지금도 조탁정(鳥啄幷)이라고 한다. 유점사를 짓고 53불을 이곳에 봉안하였으나 그뒤 53불은 그중 몇 분이 도난을 당하는등 수난이 많았는데 이는 쫓겨난 용의 장난이라고 한다. 외금강에 있는 거찰 유점사는 본산 사찰의 하나로써 금강산중에 있는 대사찰은 말할나위도 없고 멀리 철원, 평강, 이천(伊川)등지의 모든 사찰의 총본산이었다. 이 절에 본당인 용인산영승방루(龍仁山映僧房樓)등을 합하면 2백칸이 넘는 대사찰로서 규모도 크지만 창건 전설 또한 재미있다. 웬만한 절 치고 창건유래나 전설없는 것이 없지만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 구전되어 왔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그 절의 사적기(寺蹟記)에 약간 삽입되어 있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이 유점사의 창건전설은 고려에 들어가 일본 정복의 불가함을 역설했고 원에서 한림직학(輪林直學) 조열대부(朝烈大夫)의 벼슬을 받은바 있는 민지(閔淸)의 문집에 실려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카. 서산과 사명당(泗明堂)
금강산 장안사는 신라 범흥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그 창건동기는 법흥왕의 공주가 병을 앓고 있을때 백약을 써도 효과가 없던중 스님 한 사람이 궁중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법사를 크게 일으키면 공주의 병이 나을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깨닫고 금강산에 장안사를 짓게 하였다는 창건 전설을 비롯한 중창(重創)전설도 있다. 또 이곳은 내금강의 현관인 탓으로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사이에 이룩된 전설도 많다. 특히 장안사는 금강산에서도 알려진 명찰(名刹)인 탓으로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많아 이들로 인해 생긴 전설도 많다. 서산대사는 유교사회인 이조에서 불교의 도맥을 발윤시킨 고승이기도 하자만 임진왜란때 승병을 이끌고 국란을 타개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절의(節義)의 사람이다. 그는 금강산 장안사에 오래 거주하였다.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득도하여 신통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에 퍼졌다. 그때 평안도 묘향산에서 도를 닦고 있던 사명당은 그의 도가 어느경지에 이르고 있는가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아무도 몰래 채비를 하고 묘향산을 띠나 금강산 장안사로 향하였다. 이때 서산대사는 이미 사명당이 자기와 도술내기를 하러 금강산에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사명당이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 계곡 어귀에 다다랐을때 서산대사는 제자 한 사람을 불러"너 지금 장안사 계곡을 따라 동구밖까지 갔다 오너라. 동구에 나가면 묘향산에서 오는 귀한 스님 한분이 있을터이니 그 스님을 모시고 오너라."라고 분부하였다. 제자가 생각해보니 스님의 왕래가 많은 곳이기에 묘향산스님을 가려낼 수가 없을것 같아 "스님. 아시다시피 장안사 동구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스님들의 내방이 있는데 아무 표적도 없이 어떻게 묘향산 스님을 가려낼 수가 있겠습니까. 묘향산에서 온다는 그 귀한 스님은 무슨 표적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더니 서산대사는 "그 스님은 별다른 표적은 없지만 묘향산에서 오는 스님이 계곡을 끼고 올라올때 그 스님 옆 계곡물이 네 눈에는 거꾸로 거슬러 흘러 보일 것이다. 그 스님이 바로 묘향산스님이다. 그리알고 내가 모셔 오라고 하여 왔다고 하면된다."라고 일러 주었다. 제자는 그 분부를 듣고 '원 세상에 계곡물을 역류시킬 수 있는 사람이 다 있나."하고 의아해 하면서도 득도한 스님의 분부니 그대로 믿고 계곡을 따라 동구로 향하였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장안사로 올라오는 여러명의 스님을 만났으나 옆의 계곡물을 역류시키는 사람은 없었기에 혹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어 의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산대사의 분부이니 그대로 믿고 동구밖까지 가기로 하였다. 거의 동구에 가까웠을 때 동구밖에서 스님 한 분이 오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스님을 따라 계곡물이 역류하고 있었다. 제자는 '옳지 이사람이구나'하고 사명당 앞에 이르러 "묘향산에서 오시는 스님이시죠. 서산대사께서 모셔오라 하시기에 이곳까지 모시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명당은 이 소리를 듣고 '내가 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사람을 보냈을까. 소문에 듣던바와 같이 그도 만만치 않구나.'고 속으로 놀라며 겉으로는 태연하게 "아 그렇소. 내가 바로 묘향산에서 오는 사람이요. 일부러 마중까지 나오느라고 수고가 많소."하고 같이 장안사로 들어갔다. 장안사 뜰에서 마중나온 서산대사를 만난 사명당은 서산의 도술이 만만치 않으니 처음부터 꼼짝 못하게 하여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명당은 때마침 절간위로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를 도술로 자기 손아귀에 잡아넣고 보란듯이 그 술(術)을 뽐내며 "하늘을 날던 새가 지금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데 새가 죽었겠는가 살았겠는가?"고 서산대사에게 물었다. 때마침 대사는 사명당을 안내하여 막 승방에 들려고 한쪽다리는 문밖에 있고 한쪽 다리는 문안에 있던 찰라였다. 서산대사는 문지방 사이에 다리를 걸친채 "내가 지금 방으로 들어가겠는가, 밖으로 나가겠는가?"라고 반문하니 사명당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서산대사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제 수중에 있는 것은 제 마음 나름이지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웃으며 승방에 안내하여 인사를 치렀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자리를 같이하고 마주 앉았다. 서산대사는 옆에 있는 어항의 고기를 가르키며 "스님께선 먼길을 오시느라 시장하실터이니 날것이지만 우선 이 고기를 먹어 요기나 하십시다. "라고 말하며 어항을 두 사람앞으로 끌어당겼다. 사명당이 의아해하며 "불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어찌 살생을 할 수 있겠오. 스님은 살생을 하려 하는것을 보니 아직도 도를 터득하지 못했군요."하고 받아 넘겼다. 서산대사가 그말을 듣고 "날것을 먹는다하여 다 살생은 아니오. 먹어서 요기가 된 뒤에 다시 토하여 살려 놓으면 될 것이니 우선 요기 합시다.."라고 하며 사명당에게 권하여 같이 어항의 산 고기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 난뒤 얼마 있다가 "이제는 요기가 되었을 것이니 다시 토해 놓으십시다."라고 하며 서산대사는 먹었던 고기를 전부 토해 놓으니 한 마리도 죽은것이 없었다. 그 뒤를 이어 사명당도 먹었던 고기를 토하기는 하였으나 그가 토한 고기는 한 마리도 산것이 없고 전부 죽어 있었다. 첫 내기에서 패한 사명당은 설분(雪憤)하려고 서산대사에게 계란 수십개를 가져오라 하여'이 계란을 외줄로 치쌓을터이니 대사도 그렇게 해보시오."하고 방바박에서 시작하여 외줄로 치쌓아 올라갔다. 사명당은 다 쌓고나서 보란듯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때 서산대사는 그 계란을 방바닥에서 시작하여 쌓는것이 아니라 허공(虛空)에다 외줄로 쌓아갔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사명당은 어이가 없어 더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마침 점심상이 들어왔다. 서산대사는 상을 받아놓고 사명당에게 "점심은 국수를 했으니 사양말고 많이 잡수시오."하기에 그릇을 보니 국수가 아니라 수천개의 바늘이 물에 잠겨있었다. 서산대사는 그 바늘을 맛있게 먹고 있었으나 사명당은 절도 대지못한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산대사가 맛있에 한 그릇을 치우고 나니 사명당은 그제서야 꿇어 엎드려 "소승이 도인을 못알아보고 외람된 짓을 했으니 용서하시고 소승을 제자로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제자로 받아주기를 공손히 간청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국란을 구하기에 서로 협조하여 온갖 힘을 다하였다 한다.
타. 장기국수(國手) 지암화상(智岩和尙)
내금강에 백전암(白田庵)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 암자에는 지암화상이라는 스님이 혼자 수도를 하고 있었다. 이 지암화상은 불도에도 열심이었지만 장기에도 당대에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만큼 명수였다. 이조왕실의 종신으로 서천현령(西川縣令)을 지낸바 있는 서천령(西川令)도 장기의 명수로서 당시 속가(俗家)에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장기의 국수였다. 이 서천령이 벼슬을 그만두고 한 세월을 보내다가 하루는 금강산 구경을 떠났다. 내금강을 두루보고 백전암에 들러 하루를 쉬게 되었다. 절을 둘러보니 지암회상 한분이 있을뿐 아무것도 없고 다만 장기 한틀이 있을 뿐이데 언제 사람의 손이 닿았던지 먼지가 한치나 쌓여 있었다. 서천령은 지암화상과 인사를 마친 뒤 장기판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먼저 수작을 걸었다. "이 절에는 아무도 없는데 다만 장기 한들이 눈에 띄니 스님은 장기를 잘 두시오?"했더니 지암화상은 장기틀을 가리키며 "보시다시피 이 절에는 소승 혼자 있어 둘래야 둘 사람도 없으려니와 저 장기는 30년간 소승이 여기서 한 두번만 두었을 뿐이요. 그 뒤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아니하여 저렇게 먼지가 한치를 쌓여있지 않습니까. 30년전에 두고는 한번도 두지 아니하여 제 자신의 장기실력을 가름하기가 어렵습니다."하고 대답한다. 서천정은 "나는 속가에서 장기깨나 둔다고 알려진 사람이오. 어디 심심한 판에 한수 가르쳐 줄터이니 한판 둡시다."하고 사뭇 그 기세가 도도하다. 지암화상은 짐짓 사양을 했으나 듣지 아니하기에 "절간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아무것도대접할 것이 없어 송구스러운데 손님께서 원하시니 장기마저 대국을 안해 드리면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부러 져주면 뜻도 없고 재미도 없으니 둘다 힘껏 두기로 하면 대국을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서천령은 동감이라면서 서로 사양없는 승부를 하기로 하고 장기를 두기 시작하였다. 장기를 두다보니 지암화상의 장기에 포(包) 한쪽이 없었다. 서천령이 그것을 보고 "그쪽 장기에 포 한쪽이 없으니 찾아놓든지 다른 것으로 대치하여 장기를 둘 것이 아니요."라고 한다. 화상은 "이 장기에는 본시 포 한쪽이 없으니 그대로 둡시다."라고 대답하였다. 서천령이 이말을 듣고 "포 한쪽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 대치라도 하여 맞놓고 두어야지 내가 그래도 속가에서는 천하국수라고 하는데 포 한쪽 접히고 둘수야 없지않소. 그러니 다른 나무조각으로라도 포를 대치하고 시작합시다."하고 우겨대었다. 지암화상은 장기를 슬금슬금 거두며 "장기도 하나의 도(道)인데 아무 나무조각이나 놓고야 아이들 장난처럼 둘 수 있겠오. 정 그러시다면 그만 둘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을하니 서천령도 할 수 없이 포 한쪽을 접은채 그대로 대국하였다. 서천령은 "제아무리 장기에 천재적 소질이 있다할지라도 30년동안 장기를 두지 아니한 데다 포 한쪽 없는 장기를 두는데 몇 수안에 지고 말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두었으나 첫판은 서친령이 어이없이 지고 말았다. 지고 난 서친령은 다시 간청하여 둘째판을 두었는데 그 판도 지고 마지막 더 두자하여 세째판도 지고 말았다. 속가에서는 천하의 국수라고 하는 서천령이 그나마 맞둔것도 아닌 포 한쪽을 접히고 쳤으니 분하기는 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장기를 마친 뒤 서천령은 장기를 거두어 장기주머니에 넣으면서 혼잣말로 "장기도 도속(道俗)이 다르나보다.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한다.
금강산은 그 곳곳마다 얽힌 전설과 신화가 많지만 금강산 전체를 통하여 공상적인 혹은 우화적으로 창작되어 전해 오는 설화도 적지 않다. 금강산은 천국에 있던 석가산(石假山)을 인간세상에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옛날 옛적에 천당옥경(天堂玉京)에 한 선관(仙官)이 있었는데 옥황상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상제의 총애를 믿고 너무도 건방지고 방자하게 버릇없이 굴다가 다시는 천상에 살수 없는 범죄를 범하였다. 이에 상제께서 진노하여 이 선관을 인간세상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선관이 귀양을 내려올 때에 상제께 가서 눈물을 흘리고 하직을 고하였더니 이 선관을 즉은하게 여기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여 주고 싶으나 여러 신하와 함께 결정한 이상 다시 이것을 고칠수가 없구나. 그러니 그리알고 섭섭하게 여기말고 가거라. 그런데 내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내 앞에 있는 보배 가운데 무엇이든 하나만 너에게 선물로 하사하고자 하니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고 가거라." 선관은 이러한 분부를 받고 퍽 감축하게 생각하며 두루 골라보다가 천국에 둘도 없는 보물인 석가산을 보고는 "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이 석가산이오니 이것을 주시옵소서."라고 여쭈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그것은 안된다고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앞서 "네 마음대로 골라가라."고 분부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지만 할수없이 머리를 끄덕이니 선관은 이것을 가지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내려오자면 불가불 구멍을 뚫어서 줄로 꿰어 가지고 와야 되었다. 그때 뚫은 구멍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혈망봉의 구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천궁에 있는 제석보살이 인간의 산천을 창조할 때에 여러가지 산천을 만들었지만 금강산처럼 훌륭하게 만들어진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석보살은 무엇보다도 금강산을 사랑하였는데 몇억년 뒤에 지구가 파괴된다면 금강산만은 구하여야겠다고 해서 그때 꿰어서 천상으로 올라가려고 미리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 혈망봉이라 한다. 금강의 봉오리마다 금강의 골짜기마다 금강의 폭포, 나무, 돌, 흙마다 조상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기 아름다운 이야기가 서려 있고 거기 희한한 전설이 깃들여 있고 있는 설화가 숨쉬고 있다. 금강산은 살아있는 산, 살아있는 냇물, 살아있는 폭포가 되어 우리들 가슴에 와 닿는다.
"용(龍)과 사자바위' '피흘린 산삼(山蔘)' '나못꾼과 선녀' '화(禍)를 입은 삼일포 신필(神筆)' '불정암(佛頂岩)과 용녀' '부정 탄 장안사의 재목' '울소의 유래' '단발령과 마의태자' '승천한 양사언의 비(飛)자' '황천강과 명경대' '보덕굴의 전설' '십왕봉의 치죄소리' '유점사 창건 전설' '서산과 사명당' '장기국수 지암회상'등의 15편은 금강설화의 한부분에 불과하다. 그 많은 설화들을 우리 가슴에 간직하면서 전설편을 엮는다.
가. 용(龍)과 사자바위
금강산 용연(龍淵)옆 화룡당 앞에 사자자위가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어느것 하나 범연한 것이 없겠지만 이 사자바위의 모습 역시 사자 그대로의 형상이기는 하나 뒷다리가 없는 사자상이다. 그 이유는 용연에 용 한마리가 살고 근처에 사자 한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웃에 같이 살면서도 사이가 퍽 나빴다. 사자는 사자대로 내가 산중 왕이라고 하고 용은 용대로 날 빼놓고 사자따위가 어떻게 산중왕이 되겠는가 하며 서로 으르렁 거렸다. 오랜 반목끝에 마침내 실력 대결로 자웅을 겨루기로 하여 격투를 시작하였다. 사자와 용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소리를 찌릉 찌릉 지르면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그런데 사자는 그만 용에게 두 다리를 잘리우고 말았다. 사자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용연앞 바위에 나머지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용에게 복수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용은 좀처럼 사자에게 틈을 주지 아니하였다. 분이 풀리지 아니한 사자는 잠도 안자고 꿋꿋이 서서 용연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런 사자의 모습을 본 법기보살은 사자와 용을 화해 시키려고 사자의 두 다리를 돌리주고 화해토록 했다. 그뒤 얼마안가 사자는 죽고 말았으며 사자의 시체는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나. 피흘린 산삼
이조 초엽 태조가 등극한 뒤 고려의 유신중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초야에 파묻힐때의 일이다. 고려유신 중에 젊은이 한 사람이 세상이 싫어 부인과 함께 깊은 산중 금강산으로 찾아와 움막을 치고 살기 시작하자 백발노인이 막대기를 이끌고 찾아와 "이곳은 자고이래로 속인이 오지않는 곳인데다 동구(洞口)안은 내 영주(領主)인데 어디서 왔기에 남의 땅을 어지럽히느냐." 하면서 산을 떠나도록 하기에 사연을 말한즉 이로운 것이 없다면서 사라졌다. 두 부부가 하루는 약초를 캐러갔다. 산삼 한 뿌리를 발견하여 캘려고 할때 아내는 노인의 말을 생각하고 남편이 산삼캐는 것을 만류 하였으나 산삼을 캐다가 잘못하여 뿌리하나를 끊었더니 이상하게도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언제왔는지 전의 노인이 와서 "그대들은 왜 가라는데 안가고 끝내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말았느냐."고 책망하였다. 두 부부가 엎드려서 용서를 빌었더니 "그 산삼을 그대로 심어 20년 후 꽃이 피면 그대들에게 경사가 있을 것이다. "하고 사라졌다. 두 부부는 20년간 온갖 정성을 다해 계곡의 물을 퍼다준 결과 마침내 꽃이 피고 50이 념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부인에게 태기가 있더니 달이 차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는 기골이 비범하고 정신이 맑아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고 후세에 이름을 떨친 훌릉한 사람이 되었다.
다. 나뭇꾼과 선녀
옛날 금강산에 마음씨 착한 나뭇꾼 한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나무하러 산에 갔더니 사냥꾼에게 쫓긴 사슴 한 마리가 총각에게 와서 "사냥꾼에게 쫓기어 갈곳이 없으니 나를 숨겨주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 "고 애걸하였다. 마음착한 나뭇꾼은 나무짐밑에 숨겨주었다. 잠시후 사냥꾼들이 달려와 "사슴 한마리 못보았느냐?"고 묻기에 사슴이 앞산고개를 넘어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사슴은 나와서 고맙다고 하며 소원이 무었이냐고 묻기에 나뭇꾼은 "나는 집이 가난하여 이 나이에 이작 장가를 못가고 있는데 장가가는것이 소원이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슴은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선녀탕(仙女湯)이란 못이 있는데 이번 보름날밤 선녀들이 목욕하러 하늘에서 내려올것이니 그늘에 숨어있다가 선녀의 옷 한벌을 감추시오. 그러면 옷이 없어 하늘로 가지 못할것이니 그렇게 하면 장가를 들 수 있소. 그런데 장가든 후에라도 선녀의 옷을 감추었다 아이셋을 낳기전에는 내주지 마시오. 옷만 입으면 하늘로 올라가니까."라고 일러주고는 사라졌다. 나뭇꾼은 사슴이 일러준대로 보름날 달밤에 선녀탕으로 가서보니 과연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뭇꾼은 선녀의 옷 한벌을 훔쳐들고 바위틈에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은 못속에서 나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옷을 잃은 선녀만 물가에서 울고 있었다. 나뭇꾼은 선녀를 붙잡고 "인연이 있어 이렇게 되었으니 같이 살자."고 사정을 하니 선녀는 옷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으나 끝내 주지않고 결혼하여 살며 아이 형제를 낳게 었다. 하루는 "부부간의 정도 깊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선녀옷을 돌려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나뭇꾼은 사습의 말을 잊지않고 거부하였으나 선녀가 날이면 날마다 조르므로 설마하고 옷을 내어 주었다. 선녀는 옷을 바꾸어 입고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은 나뭇꾼은 슬픔에 젖어 있다가 혹시나 선녀탕에 목욕을 하러 오지 않을까하여 매일 그곳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선녀들은 내려오지 않고 두레물을 퍼다 목욕을 하였다. 하루는 선녀탕 옆에 앉아 있다가 하늘에서 커다란 두레박이 내려오자 "두레박을 타고 올라가면 아내와 자식을 만날 수 있겠지."하고 두레박에 앉아 하늘로 올라가 다시 아내와 자식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라. 화(禍)를 입은 삼일포(三日浦)의 신필(神筆)
삼일포는 고성에 있는 탓으로 고성삼일포라고도 하고 금장산속에 있는 탓으로 금강산 삼일포라고도 한다. 삼일포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치가 좋아 신라의 신선 영랑등이 이곳을 찾아와 3일간 놀다 갔다하여 삼일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다. 삼일포 호반에는 36봉이 들러서 있는데 그중 남안봉의 바위에 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고 새겨져 있고 글자에 붉은 칠을 하였다하여 단서(丹書)라고 하며 6자중 4자는 자획이 획연하나 아래 2자는 자획이 떨어져 글자를 잘 볼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이곳이 풍경도 좋으려니와 삼일포에 신선의 글자가 있다는 풍문으로 글자를 보러 많은 사람이 찾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들게 되니 삼일포 인근 사람들이 자연히 큰 폐를 입게 되어 관원의 행차가 있을때마다 피해를 입게 되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모여서 삼일포에 사람이 안오게 하는 묘책을 숙의한 끝에 징으로 글씨 획을 쪼아 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삼일포에 새겨 놓은 글씨는 신선이 쓴 글씨인 탓으로 중병에 걸렸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을때 글씨를 쪼은 돌조각을 지니고 다니거나 그 물을 끓여 마시면 병도 낫고 환난(患難)도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이 비방으로 쓰려고 몰려와 글씨 획을 쪼아 갔으므로 지금은 자획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 불정암(佛頂岩)과 용녀(龍女)
금강산 동쪽에 불정암이라는 바위산이 있고 그 옆에 불정암(佛頂庵)이 있었다. 이 암자에는 불정화상이라는 스님 한분이 살고 있었는데 늘 제자들을 데리고 불정암상(佛頂岩上)에서 불법을 설하였다. 이 불정암 바위산 바로 한가운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큰 못이 하나 있었고 이 못속에는 용녀가 살고 있었다. 못 가운데 있던 용녀는 때때로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여자의 몸으로 남자와 같이 설법을 들을 수 없어 고민 하던중 달밤에 지형을 살피러 불정암에 올랐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불정스님이 강(講)하는 뒷편 갈라진 바위틈을 발견하여 다음날부터 여자로 변하여 바위틈에서 설법을 들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듣다보니 어느덧 바위가 달아 여자의 엉덩이와 같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이 불정암에는 여자 한 사람이 걸터앉기에 알맞게 파여있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바로 용녀가 숨어서 설법을 듣고 있던 바위라 전해진다.
바. 울소의 유래
내금강 배재령밑에 깎아진 석벽을 따라 올라가면 맞은편에 천구봉과 송라봉이 솟아있고 백천(百川)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은 사천왕암(四天王岩)아래의 절벽계곡을 따라 빠른 물살을 이룬다. 그 물살이 철책을 한 비탈진 바위밑에 소용돌이 치는곳이 바로 오연담(嗚淵漂) 또는 "울소"라고 이르는 소(沼)이다. 항상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경(神秘境)을 느끼게 하는 못이다. 이 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담겨져 있다. 옛날 내금강 표훈사(表訓寺)에 금동거사(金同居士)와 나상조사(情淵祖師)가 함께 불도를 닦고 있었다. 나상조사는 학식과 덕행이 높아 전국에서 많은 승려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으리고 구름같이 찾아 들었으나 금동거사는 학력이 부족한데다가 소견이 좁아 나상조사의 학덕 높음을 시기하였다. 그는 나상조사만 없으면 여기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인데하고 내심 늘 나상조사를 미워하고 있었으면서 곁으로는 "나는 학식과 덕행이 모자라니 어찌 나상조사를 따르겠는가?"라며 겸손한체 하였다. 겉으로는 늘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기회만 있으면 그를 해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던 어느날 나상조사가 암석에 불상을 조각할 계획을 세우고 "나는 저기 우뚝솟은 암석에 부처님상을 세개 조각 할 작정이오."하고 그의 결심을 말했다. 금동거사는 이 기회야말로 나상조사를 없앨 수 있는 천재일과(千載一過)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야심어린 엉뚱한 제안을 하였다. "참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저 암벽에 세 불상을 조각하는 동안 소승은 그 암벽반대방향에 예순두 불상을 조각하겠습니다. 기왕에 한 암석의 양면에다가 불상을 조각하게 되었으니 우리 서로 내기를 합시다. 만일 기일내에 완성치 못하거나 또한 조각한 솜씨가 좋지 못하면 피차 불도를 닦는 몸으로 거짓을 한 결과가 되니 부처님께 거짓한 죄로 이 아래 소(沼)에 빠져 죽기로 합시다." 이러한 제안을 들은 나상조사는 그 내심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심성을 간파하고 "피차 불심에 의하여 자기 나름대로 불상을 조각하면 그만이지 내기는 무슨 내기 이겠는가?"하고 극구 내기를 말렸다. 그러나 금동거사는 "지금 내말은 거짓없는 참말이오. 두고 보십시오. 내가 기일내 완성치 못하거나 그 솜씨가 스님것 만큼 좋지 못하면 나는 내 스스로 저 소에 빠져 죽을 것이니 만일 스님이 나만 못하면 그때는 스님이 빠져 죽어야 합니다."고 결정을 하여 버렀다. 두사람은 매일아침 이른새벽부터 바위를 깎기 시작하였다. 조사는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정성껏 조각을 하여 보은사의 세 불상을 기일내에 훌륭히 완성 하였다. 그러나 거사는 조각에 인과의 법리가 역력히 작용하여 불상의 모양이 조잡한데다가 그나마도 기한이 지나서야 겨우 완성하였다. 자기입으로 약속을 하고도 거사는 그 약속을 지
키지 아니한채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던 어느날 뇌성벽력이 일어 금동거사는 마침내 소에 빠져 죽고 그의 시신은 바위가 되어 소 한가운데 그 형체를 드러냈다. 금동거사는 속세에 삼형제의 아들이 있었는데 금동거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있던 표훈사를 찾아왔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슬픈 내력을 듣고 통곡을 하며 "우리 아버지는 벌을 받아 돌아가셨으니 정말 불쌍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세형제가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들이 물속에 뛰어들어 죽자 그들의 시체도 똑같이 바위로 변해 버렸다. 지금도 금강산 오연담(嗚淵潭)에는 큰 바위 하나와 그 옆에 작은 바위 세개가 있는데 그 큰 바위는 금동거사의 화석이고 작은 바위들은 아들 삼형제의 화석이라 하며 소에 떨어지는 물소리는 죄를 받고 죽은 금동거사의 울음 소리라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를 '울소' 또는 오연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 단발령(斷髮領)과 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말기 국운이 쇠약하여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敬順王)이 북에서 고려국을 세운 왕건의 세력을 당할 도리가 없어 신라 사직을 싸움한번 하지 않고 그대로 왕건에게 바치는 것을 극력 반대했던 태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뜻있는 측근 몇 사람만을 데리고 속세를 멀리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그는 금강산의 연봉을 바라보고 그 신비함에 감동되어 망국(亡國)의 태자로서의 서글픔에 느낀바가 있어 다시는 속세에 나가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하고 이 영(嶺)마루에서 머리를 잘랐다. 그리하여 이 고개를 단발령(斷髮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그는 그뒤 금강산에서 몸에는 삼베조각을 걸치고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였다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이르게 되었다. 그는 금강산에 입산한 뒤로는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여진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초라한 무덤 하나가 있어 등산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사실을 고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오랜 세월동안 마의태자의 무덤이라 알려지고 있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발길을 멈추어 천년전 옛일을 되세기게 하고 있다. 철원, 금화에서 내금강으로 가자면 단발령을 넘게 된다. 단발령은 내금강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금강을 찾자면 누구나 넘어야 할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수많은 내금강의 연봉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이곳을 넘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서 한번은 경탄한다는 곳이기에 이 단발령에는 많은 전설이 서려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단발령에 처음 올라 금강산의 신비에 접하였을 때 속세에 들어갈 생각을 버리게 된다는데서 이름을 단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가 마의태자 이야기고 마의태자가 이곳에서 머리를 잘랐다하여 단발령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아. 황천강(黃泉江)과 명경대(明鏡台)
아득한 옛날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의 12사자를 시켜 죽은 사람의 혼을 명부로 불러 들이도록 하였다. 생전의 업과를 살펴 그 결과에 따라 죄많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은 그에 해당할 만한 극락에 골라 보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생겼다. 염라대왕앞에 불려나온 사람들은 지옥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지라 약속이나 한듯 생전에 지은 죄를 모두 감추고 착한 일만했다고 주장하였다. 바른대로 대라고 심문하기도 번거롭거니와 심문만으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판(誤判)을 할 염려가 있었다. 오판으로 당연히 지옥에 보내야할 사람을 극락에 보내는 잘못을 범하면 명부의 권위와 공정성을 잃을 염려가 있게되어 염라대왕은 할 수 없이 죽은 사람에게 비치면 그 사람의 생전 일이 기록영화와 같이 환하게 들여다 보이는 거울 하나를 만들었다. 이 거울을 만든 뒤로는 죽은 사람들이 염라대왕 앞에서 자기적 과거를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염라대왕은 과거와 같은 심문의 번거로움 없이 공정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염라대왕앞에 여승 한 사람이 심문을 받기 위하여 불려나왔다. 그런데 여승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한 벌거숭이였다. 이 괴이한 모습을 본 대왕이 "그대는 이 무슨 해
괴한 짓이냐?"고 물었더니 여승은 묵묵부답이었고 고개를 수그린채 염주만을 굴리고 있었다. 대왕이 이 광경을 보다못해 "왜 대답을 못하고 염주만 굴리고 있는가? 속히 대답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때서야 여승은 머리를 다시 들고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소승이 살아생전 게을렀던 탓으로 이렇게 몸을 가릴만한 옷 한벌이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염라대왕은 이말을 듣고 아무리 게으르다한들 여자가 제몸 가리울것 하나 마련하지 못했을리가 없는데 저렇게 알몸으로 있으니 반드시 거기에는 곡절이 있을것 같아 판관을 불러 "저 여승에게는 무언가 말못할 곡절이 있어 바른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는것 같으니 방금만든 명경앞에 세워놓고 그의 과거를 살펴보라."하므로 판관은 그 여승을 금강산 명경대앞에 세워 놓았다. 그러자 거울에는 한여자가 옷깃을 펄럭거리며 나타나더니 여승을 붙잡고 "스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장차 어찌 갚으오리까."하며 바람에 옷깃을 감싸쥐며 눈물을 흘리었다. 그 거지여자가 입은 옷이 바로 그 여승의 승복이었다. 이 광경을 본 염라대왕은 옆에 있는 판관에게 "어찌하여 이거지는 승복차림으로 이다지 슬피 우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판관은 같이 보고 있다가 "여승이 생전에 적선을 많이 하고 공덕을 쌓던 중 어느 추운 겨울날 여자거지를 만나 승복을 벗어 주었는데 그게 고마운지 저 여자거지가 여승에게 치하를 하고 있는 광경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왕은 "내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생전의 죄과를 숨기려들며 없는 선행도 꾸며 대는데 이 여승은 선행을 오히려 감추고 죄과가 있는양 꾸며댔으니 참으로 보기드문 도인이다."하며 시녀들을 불러 "이분은 극락세계에 오르실 분인데 적선하느라 옷이 없으니 비단옷 한벌을 입혀 극락세계로 고이 안내하여라."고 분부하였다. 여승은 곧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염라대왕앞에서 물러나와 비단옷을 입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금강산 황천강에 모습을 비치며 극락세계로 올라갔다고 한다. 금강산은 불교의 도장으로 널리 알려진대다 명경대 황천강등 불교적 전설이 나올만한 곳이 갖추어있기에 이곳 명경대에는 저승길에 올라있는 사람들의 전설이 퍽 많다. 앞서의 전설은 승려의 것이지만 속인들이 저승길에 올라 이곳 명경대를 거쳐간 이야기도 있다. 하루는 염라대왕이 명경대앞 대왕봉에 앉아 있었더니 12사자들이 금강산에서 멀지않은 고성군 안창이란 고장에서 제일간다는 부자를 잡아왔다. 대왕은 명경대에 비치기전에 그 부자의 용모며 차림새를 자세히 살피면서 "그대가 안창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는가?"고 물었더니 '예 다들 그렇다고 합니다."고 대답하였다. 대왕은 이어 "부자였기에 착한 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대는 부자인 탓으로 몹시 악한 일을 많이 하였겠구나!"하고 덜미를 쳐 보았다. 부자는 펄펄뛰면서 평생 살면서 남을 위해 적선을 하였을지언정 악한 일을 한바는 없다고 잡아떼었다. 대왕은 그 모습을 물끄리미 바라보다가 "그대가 평생을 통하여 남에게 못할 일을 한바가 없으면 평생 착한 일만 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대가 했다는 착한 일을 일일이 들어보자."고 짐짓 속는 체 하고 그의 선행을 듣고자 하였다. 그는 떠들썩하게 자기자랑을 늘어 놓기 시작하였다. "제가 일생동안 먹은 쌀알을 헤아리라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그 하구많은 저의 선행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러니 그중 대표적인 것만 몇개 들자면 제 인심이 후했다는 것은 조선팔도의 거지란 거지는 다 제 문간에 몰려와 그 행렬이 자그만치 12리가 넘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대왕은 침이 마르도록 거짓 자랑을 하는것을 들으면서 "명경대앞에 세우면 금시 판가름 날것을 저녀석이 장광설을 늘어 놓는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그대의 한말은 전부 사실이렸다?"하고 물으니 "어느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숨김없는 사실입니다."라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대왕은 그 사실여부를 알기 위하여 판관을 불려 "이 부자가 생전에 굉장한 선행을 했다하니 그게 사실인가 명경대앞에 세워보라."고 분부하였다. 명을 받은 판관은 부자를 명경대앞에 세웠다. 그랬더니 우선 거울속에는 거지 두사람이 꽉잠긴 소슬대문을 두드리며 "한푼이 아까와 못 보태주면 그만이지 이 부자놈아, 왜 사람을 두들겨 패서 내 쫓느냐?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하고 한 거지가 외치고 나니 다른 한거지는 "빌어도 못먹을놈아 밥한술 안주면 안주었지, 왜 남의 쪽박을 깨뜨려 버리느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라고 분노를 터트려 사뭇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같이 바라보던 부자는 그 도도하던 기세는 간곳없고 풀이죽어 맥을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판관이 염라대왕에게 "이자의 진술은 모두가 거짓말인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알렸다. 부자는 그래도 그렇지 않다고 극구 변명하려 들었다. 대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여기가 어딘줄 알고 앙탈이야. 네놈의 비행은 저것말고도 또 있을 것이니 다시 망경대 앞에 반영시켜보라."고 명하여 판관은 다시 그를 명경대앞에 세웠다. 이번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거울앞에 나타났는데 그 여인들은 머리카락을 흐트려 뜨린채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대왕이 그것을 보고 "어찌된 영문이냐?"고 판관에게 물으니 판관은 "이자에게 겁탈을 당한 여자들입니다. 이자는 돈의 힘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울렸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 장면은 소와 말이 거울속에 나타나 눈물을 줄줄 흘리며 구슬피 울고 있었다. 이것을 본 대왕은 다시 판관에게 물으니 "이짐승은 저 자의 집에서 기르던 가축으로 부릴때에는 겨우 풀죽을 쑤어 먹이고 일 없을 때에는 아무것도 주지아니하여 저런꼴이 된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미친 염라대왕은 사자를 불러 "이 자에게는 더 물을 것이 없으니 당장 지옥에 끌어다 넣어라."고 하여 이 안창부자는 지옥의 불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심판에 공정한 집행이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는 것은 대왕으로서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대왕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때 선행을 하여 지옥에 가지 않도록 경각심을 고취해 줄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사람은 죽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거울앞에 서면 일생의 선악이 숨김없이 나타난다는것을 미리 알면 죽은 후 지옥이 무서워서 선행을 하게 될것이라는데 착상을 하였다. 대왕은 이 생각을 백관들앞에 피력하고 거울앞에서 심판받는 형상을 바위에 조각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금강산의 명경대와 그 근처에 있는 염라대왕봉, 사자봉(使考峰), 우두봉(牛頭峰)등이라한다. 염라대왕은 사람의 선행을 권장하기 위하여 금강산에 심판대를 만들어 놓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광경을 보아야만 선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는 사람들을 모을 방법으로 "금강산 명경대앞 황천강에서 한번 목욕을 한 사람이면 죽어서 황천길이 순탄할 것이다."라고 선전 하였다. 이리하여 죽은후의 황천길이 순탄할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게 되었고 여기온 사람이면 이 명경대 근처에 있는 사후 심판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선심을 유발시켜 선행을 하게 되어 지옥가는 숫자가 줄어 들었다고 한다. 여기 염라대왕을 비록하여 판관, 사자, 죄인등의 상외에 동물의 상으로 소머리상 하나를 만들어 놓은 것은 고성안창 부자가 소를 학대했던 것에서 유래한것이라 한다. 비록 동물이라 할지라도 학대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5리쯤 가면 황천강이라 부르는 맑은 강이 있다. 이 강물은 유별나게 맑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형형색색의 기암산봉(奇岩山峰)들이 마치 거울처럼 비쳐 보인다. 이 황천강옆에 명경대라 불리우는 큰 절벽 하나가 있어 늘 황천강에 그 모습을 비치고 있다. 이 명경대 부근에 염라대왕의 형상을 한 염라대왕봉, 소머리형상을 한 우두봉, 좌인봉, 사자봉들이 줄지어 서있다. 사람이 죽으면 생전의 업보에 따라 이곳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 십왕봉(十王峰)의 치죄(治罪)소리
내금강에 십왕봉이라고 부르는 봉이 있다. 이 십왕봉은 생전의 업보에 의한 심판을 받을때 염라대왕을 중심한 판관 10명을 이르는 말이며 이들은 인간의 사후 심판을하는 절대권자들이다. 이 십왕봉밑에 신라시대 영원조사(靈源祖師)라는 스님이 구원암(灸源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살면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주위가 정적한 밤 영원조사가 홀로 앉아 있자니 십왕봉에 나인 다스리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는 깊은 산중 깊은 밤에 이상한 소리로 치죄하는 말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심판의 진행에 따라 어떤 사람은 극락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던중 치최의 주재자인 듯한 사람이 사자를 부르더니 "너는 지금 곧 경상도로 가서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중 명학이란 놈을 잡아 대령하라"고 소리쳤다. 이소리를 듣고 영원조사는 깜짝놀랐다. 명학이란 스님은 영원조사가 어려서 불문에 들어왔을때 범어사에서 모시던 스님이었다. 염라대왕이 언성을 높혀 '명학이란 놈'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필시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고 죄를 지었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을 생각하니 남의 일이기는 하지만은 젊어서 모시던 사람이라서 측은 하였다. 영원조사는 명학이 어떻게 되나 자세히 들어봐야 하겠다고 정신을 바싹 차리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한동안 주변에는 밤의 고요만이 감돌뿐 아무소리도 나지 않더니 고요가 흐른뒤에 "범어사 명학이 잡아 대령이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치죄의 주재자인 염라대왕이 "명학은 생전의 네죄를 알렸다. 너는 네가 지은 죄의 인과업보(因果業報)로 말미암아 흑사굴에 가둠이 마땅하다. 너는 생전에 불도에 몸답고 있었으므로 인과업보에 용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것이니라.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는가?"고 하니 "아무 할말이 없습니다. 지은죄의
차. 유점사(楡岾寺)의 창건(創建)전설
옛날 유점사가 창건되기 얼마전 월씨국(月氏國)에서 오십삼불이 철종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그들이 오랜 항해끝에 닿은 곳이 안창현(安昌縣)에 있는 조그마한 포구였다. 포구에 닿은 일행의 목적지는 불법의 도장인 금강산이었기에 그곳에 머물지 않고 즉시 금강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안창의 책임자 노춘이라는 사람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들고 부하들에게"우리 고을에 먼 나라에서 부처님 53명이 찾아왔다 한다. 이 귀한 손님들을 모른체 할 수 없어 지금부터 그들을 영접하러 갈터이니 부하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일러 부하들을 거느리고 찾아갔다. 노춘일행이 포구에 다아보니 제불이 다녀간 자취가 진흙밭에 남아 있을 뿐 제불은 이미 보이지 아니하고 근처의 모든 나뭇가지가 이상하게 서쪽을 향하여 있었다. 진흙밭에는 그들이 타고왔던 종을 걸어놓고 쉬어간 자취가 있었다. 이것을 본 노출은 한발 늦어 귀한 손님들을 영접하지는 못했을망정 자기 고을에 온 제불에 문안을 안할 수 없어 그들의 뒤를 쫓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행적을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아까 나뭇가지가 이상하게 전부 서쪽을 향하였던것을 생각하고 필시 서쪽으로 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길을 떠났다. 제불은 포구에 올라와서 금강으로 가던중 처음으로 산밑에서 쉬었다. 이들이 쉬던 곳을 그 뒤로 부터는 그들이 여기에 잠시 쉬었다하여 휴방(休房)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들이 잠시 쉬었다 하여「소방(逡房)」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바로 지금의 경고(京庫)라고 한다. 이 경고를 지나 금강으로 가는 다음 지점이 지금의 문수촌이다. 이 문수촌은 제불을 배알하려고 노춘일행이 부지런히 제불의 뒤를 따라와 이곳에 와보니 길이 두 갈래로 갈려 있었다. 어느길을 택할것인가 망설이고 있던차 비구니 한분이 지나가기에 "여기 53불이 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라고 물었더니 그 비구니는 "내가 오던길로 53불이 갑디다."라고 대답하기에 그 길을 따라갔다. 이때 길을 가르쳐준 비구니는 비구니가 아니라 문수보살이 길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비구니로 화하여 나타났던 곳이라 하여 그곳이 곧「문수(文殊)」라는 마을 이름이 되고 말았다. 길을 재촉한 일행은 얼마가서 영마루에 이르렀으나 53불의 행적이 묘연하며 곤경에 빠져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니 멀리 산허리에 비구니 한분이 꿇어 엎드려 절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에 "옳지 저 비구니가 있는 저산 모퉁이를 지났나보다."하고 생각하고 그 비구니 있는 곳으로 일행이 가까이 가서 엎드려 있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살아있는 비구니가 아니라 바위 모습이 마치 비구니가 엎드려 절하고 있는듯이 보였다하여 이곳을「이유암(尼遊岩)」혹은「이대(尼臺)」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행은 여기서 이유암이 있는 방향으로 얼마쯤 가니 또 길이 갈라져 어디로 가면 좋을지 통 알수가 없어서 또 망설이게 되었는데 이때 난데 없는 황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강아지는 일행앞에 오더니 반가운 듯 꼬리를 살랄 살랑 흔들어대며 앞장서시 졸랑 졸랑 걸어가기에 일행도 그 강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아지가 나타나 인도하였다하여 이곳을「구령(狗嶺)」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행이 53불을 찾아 개재를 넘으니 모두 목이 몹시 말랐다. 고갯길이어서 계루나 샘물이 있을리 없어 일행 모두가 갈증에 허덕이게 되었다. 노춘은 지세를 한참 살피더니 부하들에게 한곳을 가르키며 파라고 일렀고 그곳을 얼마 파지않아 많은 물이 솟아나와 목을 축일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샘을 노춘이 팠다하여 노춘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샘에서 목을 축이고 얼마를 가다보니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졸랑거리며 가던 강아지도 온데 간데 없어졌고 일행은 다시 길을 몰라 헤메고 있을때 노루 한 마리가 나타나서 또 길을 인도하였다. 이리하여 노루를 따라가던 길을「노루목」이라 이르게 되었다.「노루목」을 지나고 나니 멀리서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행은 종소리를 듣고 "이제 53불이 멀지않은 곳에 있구나.'하고 하도 반갑고 기뻐서 모두 환호성을 올리면서 좋아하였다. 이들이 종소리를 듣고 환호성을 올린곳을 환희령(歡喜嶺)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일행이 종소리를 따라 동구안에 들어가보니 거기엔 큰 못이 있고 못 옆에 몇백년 묵은지 알 수 없는 큰 느릅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53불이 타고 온 철종은 그 느릅나무가지에 걸려 있었고 53불은 느릅나무 그늘에 열을 짓고 앉아 있었다. 유점사의 '유(楡)'(느릅나무) 자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노춘일행은 53불에 배래하고 돌아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이름을 유점사(楡粘寺)라 하라."하여 유점사를 창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곳 동구의 지령으로 보아 절을 짓자면 느릅나무 옆의 못을 메워야 하는데 못을 메
우느 것은 토사를 넣으면 되지만 이 못속에는 용 아홉마리가 도사리고 살고 있어 아무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함부로 용을 건드렸다가는 화를 입을 것이 뻔한 노릇이고 그렇다하여 이 못을 그대로 두고는 절을 지을수 없어 아주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에 생각다 못해 역사(役事)를 맡은 사람들은 이곳에 53불이 거처할 곳으로 이미 하늘이 정하여 바다를 건너온 바에야 53불의 불력(佛力)을 빌어 용을 몰아내자고 하였다. 그들은 그날부터 53불에게 "부처님들이 먼바다를 건너와 이곳에 정주하기 위하여 오셨으니 여기에 부처님을 모실 큰 절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동구의 대부분이 못으로 되어있어 못을 메워 절터를 닦아야 하겠습니다. 이 못에는 용 아홉마리가 있어 우리들 사람의 힘으로는 내쫓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들의 불력으로 이들을 내쫓아 주시면 곧 절을 지을것이니 하루속히 이 용들을 몰아내어 주십시오."기도하니 53불은 이 기도를 듣고 용을 내쫓기는 하여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필연코 피비리내 나는 싸움이 한바탕 벌어져야 할터인데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으로서 피비린내를 풍길수도 없거니와 새 절터에서 불상사를 일으킨다는 것도 불상사를 일으키는 것도 불길한 일이어서 난처하게 되었다
53불은 생각다 못해 우선 용들에게 다른 곳으로 물러가라고 타일러 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용들에게 "우리는 이곳에 정주하기 위하여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 터를 우리에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라. 그러면 우리도 좋고 그대들도 좋을 것이니 고집쓰지 말고 순순히 타이를때 옮겨 가랄라."라고 하였다. 용들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마시오 이곳은 우리 집인데 당신들이 무엇이기에 내쫓으려는거요. 폐일언(弊一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이곳을 떠날 수 없오."하고 강경히 버터기에 협상은 결렬되고 실력을 행사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실력행사를 한다하여 살생은 할 수 없는 처지이고보니 문제는 아주 어려웠다. 일이 이렇게되어 53불이 한자리에 모여 중지를 짜낼것이 못의 물을 끓이기로 하였다. 갑자기 물을 끓이면 용들이 미쳐 피신할 사이가 없어 죽고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큰 살생을 하게될 것이니 갑자기 물을 끓이지 말고 서서히 물을 끓이면 더운물에 견디기 어렵게 되어 용이 달아날 것이라고 보고 물을 끓이기로 한 것이다. 53불이 이 못의 물을 끊이기 시작하자 아홉 마리의 용은 뜨거운 물에 견디다 못해 못속에서 꿈틀거리다가 못을 뛰쳐나와 물을 찾아 옮겨갔다. 이곳이 지금의 외금강 구룡폭포(九龍瀑布)가 떨어지는 구룡연(九龍淵)이다. 이 구룡연의 이름도 유점사의 못이 아홉용이 이주한데서 생겼다고 한다. 싸움에 패하여 유점사 못을 떠난 용들은 분함을 참지못하여 곱게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이 못을 메운다 하니 이 동구안에 물이라고는 이 못과 샘한곳밖에 없다. 못을 메우면 저절로 물이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물은 샘물 한군데 밖에 없을 것이니 저 샘만 메우면 이동구에는 식수할 물도 없을터이니 어디 한번견디어 보라."고 달아나면서 그 분풀이로 유점 사동구의 샘을 막아 버렸다. 용들이 떠딘뒤 못을 메워 유점사를 짓고 스넘들이 입주하려 하였으나 식수가 없어 스님들은 백방으로 동구안에 샘물을 찾았으나 샘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절이 거의 폐사(廢寺)상태의 운명에 이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여러 마리의 새가 한곳에 모여 땅을 쪼고 있기에 스님이 보니 그곳에 샘이 터져 맑은 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이리하여 유점사는 폐사직전에서 크게 번창하여 대본산(大本山)이 되었고 이 샘을 새가 찾았다하여 지금도 조탁정(鳥啄幷)이라고 한다. 유점사를 짓고 53불을 이곳에 봉안하였으나 그뒤 53불은 그중 몇 분이 도난을 당하는등 수난이 많았는데 이는 쫓겨난 용의 장난이라고 한다. 외금강에 있는 거찰 유점사는 본산 사찰의 하나로써 금강산중에 있는 대사찰은 말할나위도 없고 멀리 철원, 평강, 이천(伊川)등지의 모든 사찰의 총본산이었다. 이 절에 본당인 용인산영승방루(龍仁山映僧房樓)등을 합하면 2백칸이 넘는 대사찰로서 규모도 크지만 창건 전설 또한 재미있다. 웬만한 절 치고 창건유래나 전설없는 것이 없지만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 구전되어 왔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그 절의 사적기(寺蹟記)에 약간 삽입되어 있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이 유점사의 창건전설은 고려에 들어가 일본 정복의 불가함을 역설했고 원에서 한림직학(輪林直學) 조열대부(朝烈大夫)의 벼슬을 받은바 있는 민지(閔淸)의 문집에 실려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카. 서산과 사명당(泗明堂)
금강산 장안사는 신라 범흥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그 창건동기는 법흥왕의 공주가 병을 앓고 있을때 백약을 써도 효과가 없던중 스님 한 사람이 궁중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법사를 크게 일으키면 공주의 병이 나을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깨닫고 금강산에 장안사를 짓게 하였다는 창건 전설을 비롯한 중창(重創)전설도 있다. 또 이곳은 내금강의 현관인 탓으로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사이에 이룩된 전설도 많다. 특히 장안사는 금강산에서도 알려진 명찰(名刹)인 탓으로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많아 이들로 인해 생긴 전설도 많다. 서산대사는 유교사회인 이조에서 불교의 도맥을 발윤시킨 고승이기도 하자만 임진왜란때 승병을 이끌고 국란을 타개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절의(節義)의 사람이다. 그는 금강산 장안사에 오래 거주하였다.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득도하여 신통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에 퍼졌다. 그때 평안도 묘향산에서 도를 닦고 있던 사명당은 그의 도가 어느경지에 이르고 있는가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아무도 몰래 채비를 하고 묘향산을 띠나 금강산 장안사로 향하였다. 이때 서산대사는 이미 사명당이 자기와 도술내기를 하러 금강산에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사명당이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 계곡 어귀에 다다랐을때 서산대사는 제자 한 사람을 불러"너 지금 장안사 계곡을 따라 동구밖까지 갔다 오너라. 동구에 나가면 묘향산에서 오는 귀한 스님 한분이 있을터이니 그 스님을 모시고 오너라."라고 분부하였다. 제자가 생각해보니 스님의 왕래가 많은 곳이기에 묘향산스님을 가려낼 수가 없을것 같아 "스님. 아시다시피 장안사 동구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스님들의 내방이 있는데 아무 표적도 없이 어떻게 묘향산 스님을 가려낼 수가 있겠습니까. 묘향산에서 온다는 그 귀한 스님은 무슨 표적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더니 서산대사는 "그 스님은 별다른 표적은 없지만 묘향산에서 오는 스님이 계곡을 끼고 올라올때 그 스님 옆 계곡물이 네 눈에는 거꾸로 거슬러 흘러 보일 것이다. 그 스님이 바로 묘향산스님이다. 그리알고 내가 모셔 오라고 하여 왔다고 하면된다."라고 일러 주었다. 제자는 그 분부를 듣고 '원 세상에 계곡물을 역류시킬 수 있는 사람이 다 있나."하고 의아해 하면서도 득도한 스님의 분부니 그대로 믿고 계곡을 따라 동구로 향하였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장안사로 올라오는 여러명의 스님을 만났으나 옆의 계곡물을 역류시키는 사람은 없었기에 혹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어 의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산대사의 분부이니 그대로 믿고 동구밖까지 가기로 하였다. 거의 동구에 가까웠을 때 동구밖에서 스님 한 분이 오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스님을 따라 계곡물이 역류하고 있었다. 제자는 '옳지 이사람이구나'하고 사명당 앞에 이르러 "묘향산에서 오시는 스님이시죠. 서산대사께서 모셔오라 하시기에 이곳까지 모시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명당은 이 소리를 듣고 '내가 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사람을 보냈을까. 소문에 듣던바와 같이 그도 만만치 않구나.'고 속으로 놀라며 겉으로는 태연하게 "아 그렇소. 내가 바로 묘향산에서 오는 사람이요. 일부러 마중까지 나오느라고 수고가 많소."하고 같이 장안사로 들어갔다. 장안사 뜰에서 마중나온 서산대사를 만난 사명당은 서산의 도술이 만만치 않으니 처음부터 꼼짝 못하게 하여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명당은 때마침 절간위로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를 도술로 자기 손아귀에 잡아넣고 보란듯이 그 술(術)을 뽐내며 "하늘을 날던 새가 지금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데 새가 죽었겠는가 살았겠는가?"고 서산대사에게 물었다. 때마침 대사는 사명당을 안내하여 막 승방에 들려고 한쪽다리는 문밖에 있고 한쪽 다리는 문안에 있던 찰라였다. 서산대사는 문지방 사이에 다리를 걸친채 "내가 지금 방으로 들어가겠는가, 밖으로 나가겠는가?"라고 반문하니 사명당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서산대사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제 수중에 있는 것은 제 마음 나름이지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웃으며 승방에 안내하여 인사를 치렀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자리를 같이하고 마주 앉았다. 서산대사는 옆에 있는 어항의 고기를 가르키며 "스님께선 먼길을 오시느라 시장하실터이니 날것이지만 우선 이 고기를 먹어 요기나 하십시다. "라고 말하며 어항을 두 사람앞으로 끌어당겼다. 사명당이 의아해하며 "불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어찌 살생을 할 수 있겠오. 스님은 살생을 하려 하는것을 보니 아직도 도를 터득하지 못했군요."하고 받아 넘겼다. 서산대사가 그말을 듣고 "날것을 먹는다하여 다 살생은 아니오. 먹어서 요기가 된 뒤에 다시 토하여 살려 놓으면 될 것이니 우선 요기 합시다.."라고 하며 사명당에게 권하여 같이 어항의 산 고기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 난뒤 얼마 있다가 "이제는 요기가 되었을 것이니 다시 토해 놓으십시다."라고 하며 서산대사는 먹었던 고기를 전부 토해 놓으니 한 마리도 죽은것이 없었다. 그 뒤를 이어 사명당도 먹었던 고기를 토하기는 하였으나 그가 토한 고기는 한 마리도 산것이 없고 전부 죽어 있었다. 첫 내기에서 패한 사명당은 설분(雪憤)하려고 서산대사에게 계란 수십개를 가져오라 하여'이 계란을 외줄로 치쌓을터이니 대사도 그렇게 해보시오."하고 방바박에서 시작하여 외줄로 치쌓아 올라갔다. 사명당은 다 쌓고나서 보란듯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때 서산대사는 그 계란을 방바닥에서 시작하여 쌓는것이 아니라 허공(虛空)에다 외줄로 쌓아갔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사명당은 어이가 없어 더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마침 점심상이 들어왔다. 서산대사는 상을 받아놓고 사명당에게 "점심은 국수를 했으니 사양말고 많이 잡수시오."하기에 그릇을 보니 국수가 아니라 수천개의 바늘이 물에 잠겨있었다. 서산대사는 그 바늘을 맛있게 먹고 있었으나 사명당은 절도 대지못한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산대사가 맛있에 한 그릇을 치우고 나니 사명당은 그제서야 꿇어 엎드려 "소승이 도인을 못알아보고 외람된 짓을 했으니 용서하시고 소승을 제자로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제자로 받아주기를 공손히 간청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국란을 구하기에 서로 협조하여 온갖 힘을 다하였다 한다.
타. 장기국수(國手) 지암화상(智岩和尙)
내금강에 백전암(白田庵)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 암자에는 지암화상이라는 스님이 혼자 수도를 하고 있었다. 이 지암화상은 불도에도 열심이었지만 장기에도 당대에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만큼 명수였다. 이조왕실의 종신으로 서천현령(西川縣令)을 지낸바 있는 서천령(西川令)도 장기의 명수로서 당시 속가(俗家)에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장기의 국수였다. 이 서천령이 벼슬을 그만두고 한 세월을 보내다가 하루는 금강산 구경을 떠났다. 내금강을 두루보고 백전암에 들러 하루를 쉬게 되었다. 절을 둘러보니 지암회상 한분이 있을뿐 아무것도 없고 다만 장기 한틀이 있을 뿐이데 언제 사람의 손이 닿았던지 먼지가 한치나 쌓여 있었다. 서천령은 지암화상과 인사를 마친 뒤 장기판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먼저 수작을 걸었다. "이 절에는 아무도 없는데 다만 장기 한들이 눈에 띄니 스님은 장기를 잘 두시오?"했더니 지암화상은 장기틀을 가리키며 "보시다시피 이 절에는 소승 혼자 있어 둘래야 둘 사람도 없으려니와 저 장기는 30년간 소승이 여기서 한 두번만 두었을 뿐이요. 그 뒤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아니하여 저렇게 먼지가 한치를 쌓여있지 않습니까. 30년전에 두고는 한번도 두지 아니하여 제 자신의 장기실력을 가름하기가 어렵습니다."하고 대답한다. 서천정은 "나는 속가에서 장기깨나 둔다고 알려진 사람이오. 어디 심심한 판에 한수 가르쳐 줄터이니 한판 둡시다."하고 사뭇 그 기세가 도도하다. 지암화상은 짐짓 사양을 했으나 듣지 아니하기에 "절간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아무것도대접할 것이 없어 송구스러운데 손님께서 원하시니 장기마저 대국을 안해 드리면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부러 져주면 뜻도 없고 재미도 없으니 둘다 힘껏 두기로 하면 대국을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서천령은 동감이라면서 서로 사양없는 승부를 하기로 하고 장기를 두기 시작하였다. 장기를 두다보니 지암화상의 장기에 포(包) 한쪽이 없었다. 서천령이 그것을 보고 "그쪽 장기에 포 한쪽이 없으니 찾아놓든지 다른 것으로 대치하여 장기를 둘 것이 아니요."라고 한다. 화상은 "이 장기에는 본시 포 한쪽이 없으니 그대로 둡시다."라고 대답하였다. 서천령이 이말을 듣고 "포 한쪽이 없으면 다른 것으로 대치라도 하여 맞놓고 두어야지 내가 그래도 속가에서는 천하국수라고 하는데 포 한쪽 접히고 둘수야 없지않소. 그러니 다른 나무조각으로라도 포를 대치하고 시작합시다."하고 우겨대었다. 지암화상은 장기를 슬금슬금 거두며 "장기도 하나의 도(道)인데 아무 나무조각이나 놓고야 아이들 장난처럼 둘 수 있겠오. 정 그러시다면 그만 둘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을하니 서천령도 할 수 없이 포 한쪽을 접은채 그대로 대국하였다. 서천령은 "제아무리 장기에 천재적 소질이 있다할지라도 30년동안 장기를 두지 아니한 데다 포 한쪽 없는 장기를 두는데 몇 수안에 지고 말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두었으나 첫판은 서친령이 어이없이 지고 말았다. 지고 난 서친령은 다시 간청하여 둘째판을 두었는데 그 판도 지고 마지막 더 두자하여 세째판도 지고 말았다. 속가에서는 천하의 국수라고 하는 서천령이 그나마 맞둔것도 아닌 포 한쪽을 접히고 쳤으니 분하기는 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장기를 마친 뒤 서천령은 장기를 거두어 장기주머니에 넣으면서 혼잣말로 "장기도 도속(道俗)이 다르나보다.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