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1.향수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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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절 금강의 향수
1. 향수
지금 우리로서는 금강산을 수식할 수 가 없다. 어떤 언어로도 또 어떤 수단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때 그때마다의 대문장가들이 많은 명문들로 이미 다 상찬해 버렸기 때문이다.
선령(仙靈)의 이적(異蹟)에 의한 천하의 명산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우리의 크나큰 자랑거리 였던 그 천하의 명산이 이제는 그림의 떡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어졌기 때문
이다.

옛사람들이 네계절의 풍랑에 의해 명명한 별칭「춘 금강산(春 金剛山), 하 봉래산(夏 蓮萊山), 추 풍악산(秋 楓嶽山), 동 개골산(冬 皆骨山)」만을 우리는 그냥 따라 부를 수 있을 뿐이다.
그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치도 범할 수가 없게 된 땅 저쪽의 선경을 지켜보며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바퀴수만을 헤아리는 일인 것이다.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구경을 간절하게 원했던(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이는 송나라의蘇東坡였지만 이제 그것은 옛시인의 경우가 아니라 바로 우리 겨례의 간절한 소원이 되고 말
았다. 산을 그곳에 두고도 그 산을 오를수가 없게된 어처구니가 없는 우리의 슬픔은 크다.
가. 오직 하나뿐인 南
강원도 각(各) 고을마다 하천(河川)이 많으나 「江」이라 이름붙은 곳은 드물다. 강(江)은 하천(河川)보다 큰 것인데 이곳 지세(地勢)가 준령(峻嶺) 동해(東海)에 바짝 다가 있는 탓으로
큰 강이 있을 수도 없고 또 강의 유유(悠悠)한 맛을 주는 물줄도 없어 거의가 하천(河川)이요 계류(溪流)이다.
영동지방(嶺東地方)의 큰 내만 골라 쳐 보면 오십천(五十川), 남천(南川), 남대천(南大川), 명천(明川), 연곡천(連谷川) 등 모두가 천(川)으로 되어 있고 고문전(古文典)에 「강(江)」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은 고성(高城)의 남강(南江) 하나 뿐이다.
명주군(溟州郡) 강동면(江東面)에도 군선강(郡仙江)이라는 강(江)이 있기는 하나 고문전(古文與)에 기록(記錄)되어 있지는 않고 따라서 문헌상(文獻上)의 명칭(名稱)으로 강(江)이 붙은 것은 이 남강(南江)이 유일의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지도(古地圖)중에는 영동지방하천(嶺東地方河川)을 하나도 그려넣지는 않았으나 유독 남강만은 그려넣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남강이 영동지방 강하(江河)의 대표적 존재
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남강은 외금강(外金剛) 일대(一帶)석 계류(溪流)가 합수(合水)하여 이룩된 것으로 금강산(金剛山)에서 발원(發源)하여 계동(溪洞)을 따라 남쪽으로 남류하여 사천근처에서 누엿하게 굽어 다시 북류(北流)하고 고성근교에서 동류(東流)하여 동해(東海)에 이른다. 외금강(外金剛)의 수려강산(秀麗江山)의 반은 이 남강의 덕(德)이다.
계곡물 없는 금강을 상상해 보면 남강(南江)의 역할에 짐작이 간다.
나. 구룡폭포(九龍瀑布)와 구룡연(九龍淵)
구룡폭포(九龍瀑布)의 절승(絶勝)에서 물을 뺄수 없고 구룡연(九龍淵)의 전설(傳證)도 물로 인(因)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남강(南江) 상류(上流)에 구룡연이란 못이 있다.
이 못에 용(龍) 아홉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 용은 본래(本來) 구룡연(九龍淵)에서 산 것이 아니고 본래(本來) 유점사(楡帖寺) 있는 곳에 살고 있다가 유점사(楡帖寺)를 짓던 때에 쫓겨서 이곳 구룡연(九龍淵)에 와서 살고 있다고 전(傳)한다.
여기 구룡연(九龍淵)가의 반석(磐石)에 정치적(政治的)으로는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요 학문적으로는 율곡(栗谷)의 학통(學統)을 이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主流)인 우암(尤
庵) 송시열(宋時烈)「怒濤中瀉使人眩轉」<노(怒)한 물결이 굽이쳐 사람을 아찔하게 한다>는 각자(刻字)가 있다. 이 구룡연(九龍淵)물이 동남(東南)으로 흘러 단연(丹淵)이란 못을 만들었고 여기서 다시 남(南)쪽으로 흘러 흑(黑)이라고 부르는 소(沼)를 이룩하였으며 이 물이 다시 북쪽으로 흘러 전탄(前瀧)을 지나 동해에 이른다.
이 남강(南江) 맑은 물은 예사 강물과는 다르다. 강(江)물에 이 강(江)물,저 강(江)물이 다른가 마는 남강(南江)물은 그 걸어온 역정(歷程)이 유별난 데가 있기 때문이다. 외금강(外金剛)의 수려(秀麗)한 그림자를 담았던 물이요 수천(數千)길 폭포(瀑布)를 한숨에 뛰어 내리며 포말(泡流)을 일으켰던 물이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푸른 못에서 솟구쳐 온 물이요, 선녀(仙女)가 내려와서 목욕(沐浴)하던 물이다.
다. 양사언(楊士彦)의 정기(精氣)「飛」
청화산인(靑華山人)의 글에 의하면 이 남강(南江)의 상류(上流)에 발연사(鉢淵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옆에 감호(鑑湖)라고 하는 못이 있었다. 경색(景色)이 좋아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 감호(鑑湖) 위에다 정자(亭子)를 짓고「비래정(飛來亭)」이라 세자(字)를 써서 정자(亭子)에다 붙여 놓았다. 그뒤 얼마 지난 어느날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더니「飛」자
한자만을 휘몰아 하늘로 날아 갔다.
이「飛」자가 어디로 갔는지 다시는 찾지 못했다 한다. 이「飛」자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바로 그 시각이 알고 보니 양봉래(楊蓬萊)가 운명(運命)하던 시간(時間)과 일치(一致)하더라는 것이다.
이 고사(故事)가 있은 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이「飛」자에다 정신(精神)을 쏟았기에 봉래(蓬萊)의 정기(精氣)가 마지막 가던날 같이 날아 가겠느냐고들 감탄(感嘆)하여 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이곳에 전(傳)한다
라. 송강(松江)은 그저 감탄(感嘆)
중국 사람들의 옛부터 내려오는 소원(所願) 가운데「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원컨데 고려국에 태어나 한번 금강산을 보고 싶다」이 었다.
중국천하의 승지(勝地)로서 자주 시문에 오르내리는 곳이 여산이다.
이백(李白)이 여기서

三千尺 瀑布물줄 곧게 쏟아져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
이라 읊었고 당(唐)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이 여산의 경치가 하도 좋아서「尋陽晩泊望廬峰」이라는 글을 읊고는 나머지 구(句)를 채우지 못했다는 곳이 바로 여산(廬山)이다.
송강(松江)은 그의 글에서 이백이가 금강(金剛)을 보지 못했으니 여산이 천하의 절승(絶勝)이라고 떠들었지 만약 여기를 보았으면 여기보다 낫단 말을 못했을 것이라고 千尋絶壁을 半空에 셔여두고 銀河水 한 구배를 촌초히 베어내어, 실같이 풀터이서 베같이 거려시니 圖經 열두 구배 내 보매는 여러히라.
李諦仙이 이제 있어 고쳐 의논 하게 되면 여산이 여기두곤 낫단 말 못하려니 <李白이가 본시 신선이었는데 잘못되어 인간 세상에 귀양 왔다하여 李諦仙이라 부른다>라하여 중국의 승지를 어찌 하여 감히 우리 금강에다 비기겠느냐고 말하였다.
송강과 같은 문재(文才)도 금강에 와서는어와 造化論이 헌사로 헌사 할사 날거던 뛰지 마라 뛰거던 날지 마라
부용을 꼬자난듯 白玉을 못 건난 듯 어와 너여이고 너 같아니 또 있는가 開心臺 고쳐 올라 衆香城 바라보며 萬二千峰을 歷歷히 헤여하니 峰마다 매쳐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던 좋지마라 좋거든 맑지마라.라 하여 그저 감탄의 연발을 했을 뿐이다.
금강(金剛)을 말함에 있어서 내금강(內金剛)의 대부분은 淮陽郡에 속하고 있으므로 회양(淮陽)의 산하(山下)편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순서(順序)일지 모르나 그렇게 되면 중복(重複)이나 누락의 우려가 있으므로 여기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효과적(效果的)일 것 같다.
마. 초속비경(超俗秘境)의 이름
금강(金剛)을 옛날에는「사리매」또는「서리뫼」즉(卽)「霜峰」이란 뜻으로 불러오던 것을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화암경(華岩經)에「東海의 보살이 사는 金剛山이 있다」한 구절(句節)에 연유하여 해동에 보살이 살만한 곳을 찾아보니 산정수정(山精水精) 일점(一點)의 속기(俗氣)가 없어 불교적 도장(道場)으로는 가장 알맞는 불계(佛界)이니 이곳이 바로 화암경(華岩經)에 나오는 금강산이라 하여 이때 부터 금강(金剛)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의 이름은 이것 외에도 개골(皆骨), 황반(湟槃), 풍악(楓岳), 봉래(蓬萊) 등의 여러가지로 불리우며 분수령(分水嶺)을 중심으로 회양(淮陽)쪽을 내금강, 高域쪽을 외금강이라 하며
내외금강이 정취(情趣)를 달리하고 있다.
세상에서 흔히들 금강산(金剛山)을 일만이천봉이라 하는데 대소 헤아릴 수 없는 봉 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중 비로봉(飛盧峰)을 주봉으로 수량(水良), 일출(日出), 월출(月出), 집산
(集山), 오봉(五峰), 세지(勢地) 등 표고(標高) l.OOOm를 넘는 웅봉(雄峰) 거산들은 하늘에 솟구쳐 행여 점호(點呼)에 빠질세라 그 준수한 위세(威勢)를 자랑하여 천하의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어 송장은 이것을 萬二千峰을 歷歷히 헤여하니 峰마다 매쳐있고 끝마다 서린 氣運 맑거든 좋지마라 좋거든 맑지마라 저 기운 흐터내여 人傑을 만들고자形容도 그지없고 體勢도 하도할사 라고 읊었다. 봉이 이미 이러하니 계곡(溪谷)인들 헛될리 없다.
범상(凡常)치 아니한 산허리와 계곡마다에는 전설(傳說)이 얽혀있고 유심한 동구(洞口) 마다에는 사찰(寺刹)이 자리잡아 유점(楡帖), 표훈(表訓), 장안(長安), 신계(神溪), 정양(正陽),
마사연(摩詞桁), 보덕(普德)등 대소의 사암(寺庵)이 점철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池勝覽)에는 내외(內外) 금강(金剛)에 산재(散在)한 사찰(寺刹)의 총수(總數)가 108이라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 고증(考證) 여부는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거니와 이 108이라는 수자(數字)가 실수(實數)이건 허수(虛數)이건 혹은 또 불교(佛敎)의 108경뇌에서 따온 공념적(空念的) 수자(數字)이든 간에 고려(高麗)이후 여기가 보살의 처식처(悽息處)로 알려졌고 청정(淸淨)의 비경(秘境)으로 초속(超俗)한 영지(靈地)로 이름이 있었으니 수도(修道)하는 사람이면 평생(平生)에 여기 오기가 소원(所願)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속인(一般俗人)도 생전(生前)에 금강산(金剛山)을 가보면 사후(死後)에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전설(傳證)이 떠돌 정도였으니 사찰(寺刹)의 수가 자연 많을 수 밖에 없다.
바. 세속(世俗)과 극락(極樂)의 경계(境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외금강(外金剛) 쪽으로 단발령(斷髮令)을 통하는 길이 있는데 단발령(斷髮令)은 내금강(內金剛)의 관문(關門)이다. 승람(勝覽)에는 속인(俗人)이 금강산에 가다가 이 단발령(斷髮令)에 올라 한눈에 내금강(內金剛)의 연봉을 바라보고는 세속(世俗)에 뜻이 없어 다시는 세간(世間)에 나가지 않겠다고 단속(斷讀)하기 위하여 이 단발령(斷業令)고개 마루에서 머리를 잘랐다 하여 단발령(斷業令)이란 이름이 생겠다고 한다.
또 어떤 책에는 신라(新羅)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敬順王)이 신흥(新興) 고려(高麗)와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고려에 항복하려 하니 그의 태자(太子)가 부왕 경순왕에게「나라의 존망(存
亡)이 천명(天命)에 달렸거늘 충신의사(忠臣義士)와 합심(合心)하고 민심(民心)을 수습하여 마지막 존망(存亡)의 전쟁(戰爭)도 하지 않고 천년사직(千年社稷)을 하루 아침에 경경(輕輕)
히 내놓는 법(法)이 어디 있습니까?」하였더니 경순왕이「나라의 운명(運命)이 이미 이꼴이 되었으니 싸워 봤자 승산(勝算)이 없을 뿐만아니라 헛되어 무고산 백성(百姓)의 피만 흘릴 것이니 내 차마 그것을 볼수 없어 나라를 내어 놓는다」라고 하였다.
부자중(父子中) 어느 생각이 올고 그르다는 것을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겠으나 보위(寶位)를 눈앞에 두고 천년사직(千年社程)을 남의 손에 넘겨야 했던 태자의 심경 에는 동정이 간다.
나라가 이 꼴이되니 태자는 표연히 서울을 버리고 이곳 금강에 입산하다가 이 단발령에서 머리를 깎았으므로 단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亡國의 태자로 우수유전(憂愁流轉)하다가 마침내 이 고갯 마루에 서서 금강의 연봉을 한 눈에 바라보며 단속의 뜻이 굳었던가 보다. 이 고개는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오고간 곳이요, 수 많은 사람이 머리를 자른 곳이다.
태자석 머리카락도 흩어졌을 곳이고 실연(失戀)한 아가씨의 머리카락도 흩어 졌을 곳이며 세속에서 시름에 잠들어 하던 사람들이 꿈결에 망상하던 곳이기도 하다.
화담(流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시문과 초서 잘 쓰기로 널리 알려졌으며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동기(銅器)를 만들어 왔다는 시은수계(市隱舜繼)는 이곳 단발령에 올라,
初登斷髮嶺 仰視評玉峰
萬景在雙陵 何勞遍雨足
<처음 斷髮嶺에 올라 금강의 連峯을 우러러 본다.
金剛의 景致가 이 곳에서 다 뵈는데 무엇하러 수고롭게 찾아다니노.>
하고 읊어 단발령에서 금강산이 한눈에 보인다고 했고 시인 남기로는 여기서,
机林一徑長蒼苔 夕照含山倦鳥廻
寒碧隔雲知有寺 肩興催渡石橋床
<숲속으로 뚫린 길 이끼 끼었고, 저녁볕에 새들은 깃을 찾는다.
푸른 계곡 저쪽엔 절이 있겠지, 징검다리 건너서 어서들 가세.>
머리를 끊어 버리던 嶺이니 그 옛날 이곳에 인가가 있었을리 없었고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 이라고는 절간 뿐이었다.
해지기 전에 어서 절을 찾아 들자는 뜻으로 단발령상에서 읊은 시구이다.
사. 성지금강(聖地金剛)
금강(金剛)은 천하(天下)의 승지(勝地)인 탓으로 옛부터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墨客)이 많았고 그들은 그들 나름 대로의 시문을 남기고 있지만 붓이나 혀끝으로 이 천하의 비경을 그대
로 그린다는 것은 헛된 수고다.
그 수많은 무슨동, 무슨대, 무슨암, 무슨문, 무슨봉, 무슨계의 절묘를 그릴만치 사람의 말이나 글은 틔어있지 않으니 여기서는 고인(古人)의 시문(誇文)과 더불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만 몇 개 들추어 금장(金剛)의 현모나마 살펴 보기로 한다.
아. 절경속의 만폭동(萬瀑洞)
만폭동(萬爆洞)은 금강대의 북방에 있는 동곡에 내금강 입답(入潭)이 있어 一萬瀑布가 쏟아지는 곳이다. 그러기에 송강은 여기서
百川洞 곁에 두고 萬瀑洞 들어가니 섯돌며 뿜은 소리,
十里에 자잣어니 들을제는 우뢰러니 보니난 눈일러라!
라하여 이곳 동곡(洞谷) 절승(絶勝)을 노래했고 퇴계(退溪)와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쌍벽이 라고 이르는 율곡 이이는 여기서,
石遲高低入洞門 洞中飛瀑怒雷奔
岩橫萬古難消雷 山聳千秋不散雲
<돌길 오르내려 洞門에 드니 怒한 물결이 번개처럼 달린다.
億萬年 누운 바위 우뢰소리 못끄고 千秋에 솟은峰 구름을 못쓰네>
라고 이곳 동곡(洞谷) 경색(景色)의 위용을 그렸다. 이 동구에 저 유명한 팔담이 있고 이 팔담을 고인의 시에
溪流曲曲不同奇 潭下有潭上知
過了入潭絡一水一詩還是入潭詩
<溪流는 꼬불꼬불 서로 다르고 못 밑에 못있음을 못위에서 알겠다.
팔담이 이 모두 한 溪流로 되었으니 팔담詩도 도리어 詩 한句 일세>
라고 팔딤경색(八漂景色)의 절묘(絶妙)함을 재치있게 노래하였다.
이곳 석벽(石壁)에 봉래 양사연(陽士彦)이 전에 잠깐 언급한 바 있는「蓮萊楓岳羽化洞天」의대서 팔자를 써서 각자한 것이 있다. 초선(草仙) 봉래가 이 승경에 필흥(筆興)을 느껴 쓴 글씨
라 자획마다 생동한 다른 글씨로 청화산인(靑華山人)은 그의 저서에서 이 글씨를「글자의 획마다 꿈틀거려 살아 있는 용과도 같고 뛰고 있는 범과도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숱한 사람들의 글씨가 이곳에 새겨져 있지마는 여기서 뺄 수 없는 것은 매월당(滴月堂)의 글이다.
매월당(海月堂) 김시습(金時習)은 강릉(江陵) 김씨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재주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세종(世宗)께서 그의 재주가 뛰어남을 듣고 대관내로 불러들여 그의 재주를 시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종(世宗)께서 매월당(海月堂)에게「내가 지금 곧 글을 한句 지을 터이니 너는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내글에 대귀를 지어야 한다. 만약 지체없이 잘 지으면 상을 줄것이나, 시간을 지체한다거나 글이 대가 잘되지 아니하면 벌을 줄 것이니 그리 알라」하고 세종께서
童子文學白鶴舞於靑松文末
「童子의 學問이 白鶴끼 靑松끝에서 춤추는 것 같다」
고 했더니 매월당(梅月堂)이 지체없이 이어 받아
聖至文德黃龍飜碧海之中
「聖主의 德이 賁龍이 碧海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하여 세종의 극찬을 받고 후일 나라를 위하여 크에 일하라는 당부를 받고 공부하던중, 세조의 찬탈을 당하여 세속에 뜻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표연히 산사를 오락 거리다가 이곳 關東地方
의 산수가 마음에 들어서 금강 설악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비록 머리는 깎았으되 수염은 그대로 남겨두고
「消業避塵世 留髥表丈夫」
<머리는 티끌 세상을 피하기 위하여 깎았고
수염은 大丈夫를 나타내기 위하여 남겨 두었다.>
라 부르는 그 수염을 내려 찍는 폭포바람에 나부끼며 이곳에 이르러 이곳 석벽(石壁)에다
「人碧樂山樂水 我獨登山而哭 臨水而哭」
<사람은 다 산과 물을 즐기나 나는 산에 올라서 울고 물에 임해서도 운다.>
는 단장의 글귀를 써서 진나라의 은자(隱者) 원적(阮籍)이 등산임수(登山臨水)에 매양 울었고 우리나라의 단제(丹齋) 신채호(申彩浩)호도 나라가 일제에 망하고 난 다음에「최한산궁수진처 임정가곡역란위(最恨山窮水盡處 任情歌哭亦難爲)」라는 상기 매월당(梅月堂)과 같은 비슷한 시구를 남기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으니 충신열사(忠臣烈士)의 마음에는 시간의 고금이 없나 보다.
자. 금강(金剛)의 영봉(靈峰) 비로봉(毘盧峰)
금강산(金剛山)의 주봉(主峰)은 비로봉(毘盧峰)이다. 표고(標高) 1638m로 막하(幕下)에 내노라 소리치며 할거하고 있는 대소무수(大小無數)의 산웅(山雄)을 거느리고 만천가닥의 동
곡(洞谷)을 어루만지고 있으며 수다한 본말사(本末寺)를 품안에 품고 있다.
이 곳에서는 삼차(參差)한 봉란(峰辯)을 조감 할 수 있고 내외 금강이 한 눈에 드는 곳이다.
여기 정상에 배바위라고 부르는 큰바위가 놓여 있다. 이 바위는 그 모양이 배처럼 생겨서 배바위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동해를 항해하는 배가 항로를 잃었을 때에 멀리서도 이 배바위의 모
양을 보면 곧 자기배의 위치를 알 수 있다하여 항해의 지표가 됨으로 배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고산(高山)인 탓으로 이곳은 일기의 변화가 심한 곳이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이다가도 삽시간에 구름리 몰려와서 빗발이 내리치는가 하면 이러다가도 금시에 씻은듯이 맑게 개이기도 하며 때로는 몽롱한 구름으로 운해의 장막이 벽역(碧
域)을 덮어 씌워 비로봉두(毘盧峰頭)는 햇살이 빛나는데 면하(眠下)의 만이천봉은 자취도 없어 지는 수가 비일비재하다. 여기는 영봉중(靈峰中)의 영봉(靈峰)이라 하계(下界)에서 부정한
사람이 올라오면 산영(山靈)이 노하여 날씨도 그의 진로를 막으려고 때로는 비, 때로는 구름, 심하면 우박을 퍼붓는다고 하여 고인(古人)들은 이산을 두렵게 생각하고 경건하게 대하여 왔
다.
요즈음 등산하는 사람들이 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는 것이 예사로되어 있지마는 금강의 운봉 성역에서는 심히 소란을 피우면 날씨가 험하여진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설사 이런 전설이 없다 하더라도 이 초속(超情)한 성역내의 금강에 수많은 연봉의 머리위에 서서 감히 띠들석하기는 커념 옷깃이 여며지는 곳이다.
차.백이십간(百二十間)의 거찰 장안사(巨刹長安寺)
내금강(內金剛)의 어귀의 첫 거찰(巨刹)은 장안사(長安寺)이다. 장안사는 신라 법흥왕(法與王)께서 창건한 절로 법흥왕은 호불의 대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왕이다. 법흥왕 때에 공주 병들어 백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때마침 고구려에서 묵호자(墨胡子)라는 중이 와서「공주의 병을 고치려면 불사를 일으켜 그에 기도하면 나을 것입니다.」하기에 그 말에 따라 그대로 했더니 공주의 병이 나았다. 왕은 불법이 영이(靈異)한 데가 있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신봉이 두터웠으며 장안사도 이 때에 진표율사에게 명하여 짓게 한 것이라 한다. 그 후 여러번 중수(重修)하여 이조 때에는 120여간(餘間)의 대찰(大剡) 이었다고 승람(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장안사의 건물도 건물이려니와 장안사 근처의 소나무와 잣나무의 숲도 유명하다. 궁기 없이 귀공자처럼 하늘에 치솟은 모양은 속기(浴氣)가 없어 신계(仙界)의 운치를 돕는다. 이 잣나무
숲에서 1년에 잣 2백석(百石)을 거둔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장안사를 중건(重建)할 때의 이야기 한토박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0간의 사찰이고 보니 소요되는 재목(材木)도 많았다. 도편수 한 사람이 먹줄을 쳐서 큰 재목은 그 밑에 쓰고 있는 목수에게 다듬게하고 자기는 수백개의 목침(木枕)을 정성들여 깎고 있었다.
하도 많은 목침을 정성들여 깎고 있기에 주지가 이상히 여겨「도편수는 집을 짓지 않고 허구한날 목침만 깎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요.」하고 물으니「이 목침을 깎는 것이 다 집짓는 일이
요.」라고 대답하고는 계속하여 목침만 깎기에 저 수많은 목침을 과연 다 쓰나 안쓰나 한번 시험해 보고자 그중 한개를 슬쩍 가져다 감추어 놓았다.
재목 다듬는 일이 다끝나 거창한 절을 세워놓고 난뒤 도편수는 자기가 깎아놓은 목침을 가져다가 일일이 도리위에 끼우기 시작하였다.
절간 온 건물의 도리 위에다 끼우고 마지막으로 법당건물에 끼우다 보니까 한개가 모자랐다. 도편수는「그럴리가 없는데.」하고 머리를 갸우뚱 거리고 있기에 이것을 본 주지가 한개를
감추었다가 내놓으며 「하도 많은 목침을 허구한날 깎고 있기에 과연 저 많은 목침을 다 쓰겠는가 하고 의심스러워 그중 한개를 내가 감추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다 필요가 있어 그 정성을
드렀군요.」라고 하며 토편수에게 목침을 내밀었다.
도편수는 손을 내저으며 「절은 먹줄과 쟁기와 손재주로 짓는 것이 아니고 온갖 정성을 그곳에다 바쳐서 짓는 것이요. 내가 깎은 목침 하나가 부정한 생각에 의하여 부정을 탓으니 차라리
빠진대로 그대로 두지 그 부정한 것은 쓸 수 없오.」하고 그 한곳만 빼 놓았으므로 그곳 한곳만이 이가 빠졌다고 전하여 온다.
정성은 고사하고 부정을 일삼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오늘의 업자들은 고인의 이 성력을 거울삼을 일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영상(領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병란때에는 김상헌(金尙憲)과 같이 척화(斥和)를 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 갔다가 돌아와서 이종을 도와 북벌계획(北伐計劃)을 하던 중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계획이 탄로되자 전책임을 지고 잡혀가 백마성에 감금을 당했던, 글 잘하고 글씨 잘쓰기로 유명한 이경석(李景奭)이 이곳 금강탐승(金剛
探勝)에 왔다. 장안사에서 하룻방을 자며,
春州一面夢依然 伴宿禪房亦宿緣
枕上寒泉聲似雨 起看明月滿山前
<春州一面의 꿈은 依然하고 하룻밤 僧房도 因緣이 있었다.
머리맡 계곡물은 빗소리 같은데 달빛은 산천에 가득하구나.>
고 하룻밤 승방(僧房)의 감회를 읊었고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비의 친정조카로 민씨와 더불어 대윈군의 세력을 몰아내려고 하던 소하(小荷) 조성하(趙成夏)는 장안사에서
長安人夢幾年秋 今日長生寺裏遊
誰道長安日遺遠 長安還近此回頭
<꿈속에서 장안 그린지 몇해 이던고 오늘사 장안사에 서서 노리게 되다
장안길 멀다고 뉘가 일렀노, 장안이 돌아 들어 바로 여길세.>
라 읊었다. 이 외에도 이곡(李穀)의 글을 비록하여 이명한(李明漢)의 시 등 많은 시문이 있다.
카. 전설(傳說)의 고장 금강(金剛)
금강은 우리 나라에서 으뜸가는 불교의 도장이 있었기에 득도하려는 수많은 승려가 오고 갔다.
그 중에서 특히 이조 불교의 명맥을 발윤(發潤)시킨 서산대사(西山大師)도 이것과 인연(因緣)이 있을 뿐 아니라 여기서 재미있는 전설까지 낳게 하였다.
타.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당(泗溟堂)
서산대사는 종교적으로는 득도한 도인으로 묘오후(妙悟後)의 대사의 심경을 그린
主人夢設客. 客夢設主人.
令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주인은 나그네에게 꿈이야기하고 나그네는 주인에게 꿈이야기 한다.
두 꿈이야기 하는 두 나그네, 그들은 다 꿈속의 사람이다.>
이는 다 종교인으로서의 대사의 색즉공(色則空)이요 공즉생(空則色)의 경지를 말하고 있으
나 그는 신앙인으로서 그친것이 아니요, 우국의사(憂國義士)이기고 했다.
愛國憂宗杜. 山僧亦一臣.
長安何處是. 同望淚沾中.
<나라를 사랑하고 종사를 걱정함엔 산승도 신하인데 다르겠는가.
임금 계신곳 그 어디메인고 돌이켜 바라보니 눈물만 하염없네.>
국녹(國綠)을 먹고 있는 충신의 심경인들 이에서 더 할 수 없다. 사(師)는 득도(得道)의 인
이요, 애국의 인(人)인 동시에 범속(凡俗)치 아니한 시가(詩家)이기도 했다. 사(師)의 시(誇),
梨花千萬片. 飛入淸虛院.
收笛過前山. 人件俱不見.
<배꽃 천만 조각 떨어져 고요한 밤에 든다.
피리소리 앞을 지나는데 목동도 소도 보이지 않네.>
주객(主客)이 구공(俱空)한 이 선(禪)의 경지(境地)를 옳은 그 문재(文才)는 족히 가견(家見)이 있는 시가(誇家)의 글이다. 이렇듯 각 방면(方面)에 구족(俱足)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장승군(將僧軍)으로 73세의 고령임에도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난후(亂後) 서산(西山)과 사명당만치 개인적 전설을 남긴이도 드물다.
무관(武官)으로서는 충무공(忠武公)이나 권율(權慄)장군 같은 분의 이야기가 많고 문관으로는 백사(白沙)나 서애(西崖) 같은이의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다 무용담이거나 혹은 어떤 실
전기이지마는 서산과 사명당은 실재의 인물이면서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부도는 외금강(外金剛) 유점사(楡岾寺)에 있지만 서산은 장안사에서도 오래 있었으며
그가 장안사에 있을때 사명당과 읽힌 전설이 있다.
파. 만폭동(萬瀑洞)의 보덕굴(普德震)
만폭동(萬瀑洞) 동곡중(洞谷中)에 보덕굴(普德窟)이라는 암자(庵子)가 있다. 이 보덕굴(普德窟)은 절벽에 굴을 파고 판자를 걸고 구리기둥을 세워 철사로 얽어매 놓았으므로 방안에 암아 몸을 일렁거리면 굴이 흔들거린다는 절묘(絶妙)한 곳이다.
흥지 승람(興地勝覽)에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중보덕(中普德)이가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쓰여 있다. 이제현(李齋賢)이 여기와서 지은시(詩)에, 陰風生岩曲 溪水深更緣
倚柱望層嶺 飛詹雲上掛 <음산한 바람이 바위 틈에서 나고 계곡수 깊고 깊어 다시 푸르다.
막대에 기대여 뫼뿌리 바라보니 처마는 허공에 떠 구름위에 걸렸다.>
금강산 만폭동 동구에 보덕굴이라고 하는 암자 하나가 있다.
이 보덕굴은 절벽에 뚫린 굴에다 판자를 받쳐 만든 암자이다. 그 형태 자체가 세상에 흔치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보덕굴의 전설이 또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설이다.
금강산 송라봉 밑에 송라봉이라는 불리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에는 회정선사(懷正禪師)라는 스님이 천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가 정성껏 기도하여 이제 천일이 가까와진 어느
날이다. 막바지 정진을 다하느라고 피곤하여 잠깐 눈을 붙였더니 꿈에 법기(法起)보살이 나타나시어 이르는말이 "그대가 여기서 도를 얻기 위하여 천일이라는 긴 세월을 온갖 고초를 다
참아가면서 기도에 정진하고 있는 모습이 가긍하구나. 내 한마디 일깨워 주기 위하여 왔으니 내 말을 잘듣고 그대로 행하면 도를 깨칠 수 있을 것이니 이제 그대의 천일 기도가 막바지에
다 다른것 같은데 개안은 수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그 마지막 개안을 해줄 사람을 일러 줄터이니 내일로 그 사람을 찾아가도록 하여라.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몰골옹처사(處士)라 이르는 사람이다. 그는 양구군 해안면 방부동에 살고 있으니 곧 그를 찾아가면 득도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릴것이다."라고 일러주고서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회정은 즘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있어 법기보살을 뒤쫓아 가려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날 회정은 "이상한 일이다. 법기보살이 거짓말을 할리없으니 그의 말을 따라야 하겠는데 천일의 마지막 날을 눈앞에 두고 마치지 못한채 내일 떠난다는 것도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하여 법기보살이 분명 내일 떠나가라고 했는데 그말을 듣지 않을수도 없으니 난처하게 되었구나"하고 혼자 이리 저리 생각하다가 '마지막의 개안을 깨우쳐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상기하고 천일 기도를 다시 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덕고 기도를 중단하고 내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금강산 송라암을 떠나 양구로 가면서 법기보살이 가르쳐준 곳에 몰골옹처사라는 분이 있기만을 바랬다. 회정은 이 꿈이 들어맞으면 그곳에서 득도할 수 있겠지만 천일 가까웠던 기도가 다 허사로 돌아갈것이니 그곳에 몰골옹처사라는 사람이 있어주기를 심축하며 길을 재촉 하였다.
회정이해질무렵 몰골옹처사의 집에 이르러 보니 집은 가시덩굴에 초라하기가 이를데 없었고 묘령의 아름다운 처녀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다. 회정은 그 처녀를 보고 하도 아름다와 온뜻도 알리지 못한채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의식을 되찾고 비로서 "이 집이 몰골옹처사의 집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처녀는 "예 그렇습니다. 선사는 어떻게 여기를 찾아 오셨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회정은 "소승은 금강상 송라암에서 도를 닦던 회정이라는 중인데 법기보살의 교시(敎示)를 듣고 몰골옹처사에게 도를 배우려고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몰골옹처사를 만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처녀는 그말을 듣더니 "그렇습니까? 몰골옹처사인 저의 아버지는 남에게 도를 가르칠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아마도 잘못듣고 오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회정은 속으로 법기보살이 거짓말을 할리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여 "그럴리가 없으니 몰골옹처사를 한번 만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니 처녀는 "우리 아버지는 성질이 흉악하여 어떤 사람이든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해를 입히고 맙니다. 해도 저물어 곧 집에 돌아 올 시간이 되었으니 스님은 우리 아버지 오시기전에 이곳을 떠나시는 것이 신상에 좋으실 것 입니다. 길을 재촉하여 여기를 떠나주시기를 바람니다."라고 하였다. 회정은 첫눈에 마음에 든 처녀에게 사랑을 느껴 구도(求道)하기 보다는 오히려 곁을 떠나기 싫어 "법기보살이 거짓말을 할리도 없고 해도 저물어 갈수도 없으니 나중에 여하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후회하지 아니할 것이니 그대로 이곳에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처녀는 회정의 마음속을 짐작하고 "사정이 그러시다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며 앞으로 부부가 되기를 언약한 사이라고 꾸며 기회를 보아 아버지께 말씀 올리면 우리 아버지도 해를 끼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 기회가 올때까지 우리집에 숨어 계십시오."라고 한다. 회정은 처녀와 같이 있게된 것이 좋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왕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어 은혜를 입었으니 이름이나 가르쳐 주시오."라고 했더니 처녀는 자기 이름은 보덕(普德)이라 하였다.
이렇게 몇일을 그곳에 머무는 동인 회정은 더욱 보덕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사랑을 고백할 기회는 고사하고 숨어 사느라하고 만날 틈도 별로 갖지 못하며 지냈다. 날마다 보덕만을 생각하며 지내다보니 수도할 생각도 아예 없어지고 생각은 보덕의 모습으로 꽉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잠에서 깨어보니 보덕은 온데 간데없고 보덕의 모습같은 바위하나만이 집안에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놀란 회정은 그 바위를 어루만지고 살펴보아도 그는 역시 바위였지 사람이 아니었다. 이에 실망한 회정은 하는수 없이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길을 재촉하였다. 회정이 슬픈 마음으로 금강산 만폭동 어귀에 와서 동구로 막 들어서니 길일 개울가에서 처녀 한 사람이 머리를 감고 있었다. 어디서 본 모습같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뜻밖에도 보덕이었다. 그는 하도 반가와 허둥 지둥 보덕이 머리 감는 곳으로 쫓아갔다. 회정이 온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보덕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계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
였다. 회정도 놓칠세라 보덕을 뒤쫓았으나 얼마를 가다보니 맑은 물이 괴어 있는 못에 다 다랐다. 그 거울같이 맑은 못속에 보덕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기에 회정은 보덕의 참모습을 보려고
고개를 들어 못위 벼랑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보덕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관음보살님이 서서 회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정은 그 모습을 보고야 정신이 들어 그만 자리에 꿇어 엎드려 자
기 잘못을 뉘우쳤다. 그는 천일기도를 했지만 도가 부족하여 망상(忘想)이 생겨 관음이 처녀로 보였던 것을 깨달았다.
그는 후에 본격적인 수도를 하려고 관음보살을 본 법기봉(法起峰) 중턱 벼랑에 보덕굴을 짓고 수도에 힘써 득도하였다고 한다. 금강산의 보덕굴이 도저히 암자가 들어 앉을 수 없는 벼랑
에 제비집모양으로 들어서게 된것은 관음보살을 거기서 보았으므로 득도의 도장으로는 가장 길지(吉地)라 하여 만란을 무릅쓰고 그곳에 짓게되었고 이름을 보덕암이라 한것은 보덕과의
이러한 사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1. 향수
지금 우리로서는 금강산을 수식할 수 가 없다. 어떤 언어로도 또 어떤 수단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때 그때마다의 대문장가들이 많은 명문들로 이미 다 상찬해 버렸기 때문이다.
선령(仙靈)의 이적(異蹟)에 의한 천하의 명산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우리의 크나큰 자랑거리 였던 그 천하의 명산이 이제는 그림의 떡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어졌기 때문
이다.

옛사람들이 네계절의 풍랑에 의해 명명한 별칭「춘 금강산(春 金剛山), 하 봉래산(夏 蓮萊山), 추 풍악산(秋 楓嶽山), 동 개골산(冬 皆骨山)」만을 우리는 그냥 따라 부를 수 있을 뿐이다.
그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치도 범할 수가 없게 된 땅 저쪽의 선경을 지켜보며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바퀴수만을 헤아리는 일인 것이다.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 구경을 간절하게 원했던(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이는 송나라의蘇東坡였지만 이제 그것은 옛시인의 경우가 아니라 바로 우리 겨례의 간절한 소원이 되고 말
았다. 산을 그곳에 두고도 그 산을 오를수가 없게된 어처구니가 없는 우리의 슬픔은 크다.
가. 오직 하나뿐인 南
강원도 각(各) 고을마다 하천(河川)이 많으나 「江」이라 이름붙은 곳은 드물다. 강(江)은 하천(河川)보다 큰 것인데 이곳 지세(地勢)가 준령(峻嶺) 동해(東海)에 바짝 다가 있는 탓으로
큰 강이 있을 수도 없고 또 강의 유유(悠悠)한 맛을 주는 물줄도 없어 거의가 하천(河川)이요 계류(溪流)이다.
영동지방(嶺東地方)의 큰 내만 골라 쳐 보면 오십천(五十川), 남천(南川), 남대천(南大川), 명천(明川), 연곡천(連谷川) 등 모두가 천(川)으로 되어 있고 고문전(古文典)에 「강(江)」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은 고성(高城)의 남강(南江) 하나 뿐이다.
명주군(溟州郡) 강동면(江東面)에도 군선강(郡仙江)이라는 강(江)이 있기는 하나 고문전(古文與)에 기록(記錄)되어 있지는 않고 따라서 문헌상(文獻上)의 명칭(名稱)으로 강(江)이 붙은 것은 이 남강(南江)이 유일의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지도(古地圖)중에는 영동지방하천(嶺東地方河川)을 하나도 그려넣지는 않았으나 유독 남강만은 그려넣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남강이 영동지방 강하(江河)의 대표적 존재
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남강은 외금강(外金剛) 일대(一帶)석 계류(溪流)가 합수(合水)하여 이룩된 것으로 금강산(金剛山)에서 발원(發源)하여 계동(溪洞)을 따라 남쪽으로 남류하여 사천근처에서 누엿하게 굽어 다시 북류(北流)하고 고성근교에서 동류(東流)하여 동해(東海)에 이른다. 외금강(外金剛)의 수려강산(秀麗江山)의 반은 이 남강의 덕(德)이다.
계곡물 없는 금강을 상상해 보면 남강(南江)의 역할에 짐작이 간다.
나. 구룡폭포(九龍瀑布)와 구룡연(九龍淵)
구룡폭포(九龍瀑布)의 절승(絶勝)에서 물을 뺄수 없고 구룡연(九龍淵)의 전설(傳證)도 물로 인(因)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남강(南江) 상류(上流)에 구룡연이란 못이 있다.
이 못에 용(龍) 아홉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 용은 본래(本來) 구룡연(九龍淵)에서 산 것이 아니고 본래(本來) 유점사(楡帖寺) 있는 곳에 살고 있다가 유점사(楡帖寺)를 짓던 때에 쫓겨서 이곳 구룡연(九龍淵)에 와서 살고 있다고 전(傳)한다.
여기 구룡연(九龍淵)가의 반석(磐石)에 정치적(政治的)으로는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요 학문적으로는 율곡(栗谷)의 학통(學統)을 이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主流)인 우암(尤
庵) 송시열(宋時烈)「怒濤中瀉使人眩轉」<노(怒)한 물결이 굽이쳐 사람을 아찔하게 한다>는 각자(刻字)가 있다. 이 구룡연(九龍淵)물이 동남(東南)으로 흘러 단연(丹淵)이란 못을 만들었고 여기서 다시 남(南)쪽으로 흘러 흑(黑)이라고 부르는 소(沼)를 이룩하였으며 이 물이 다시 북쪽으로 흘러 전탄(前瀧)을 지나 동해에 이른다.
이 남강(南江) 맑은 물은 예사 강물과는 다르다. 강(江)물에 이 강(江)물,저 강(江)물이 다른가 마는 남강(南江)물은 그 걸어온 역정(歷程)이 유별난 데가 있기 때문이다. 외금강(外金剛)의 수려(秀麗)한 그림자를 담았던 물이요 수천(數千)길 폭포(瀑布)를 한숨에 뛰어 내리며 포말(泡流)을 일으켰던 물이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푸른 못에서 솟구쳐 온 물이요, 선녀(仙女)가 내려와서 목욕(沐浴)하던 물이다.
다. 양사언(楊士彦)의 정기(精氣)「飛」
청화산인(靑華山人)의 글에 의하면 이 남강(南江)의 상류(上流)에 발연사(鉢淵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옆에 감호(鑑湖)라고 하는 못이 있었다. 경색(景色)이 좋아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 감호(鑑湖) 위에다 정자(亭子)를 짓고「비래정(飛來亭)」이라 세자(字)를 써서 정자(亭子)에다 붙여 놓았다. 그뒤 얼마 지난 어느날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더니「飛」자
한자만을 휘몰아 하늘로 날아 갔다.
이「飛」자가 어디로 갔는지 다시는 찾지 못했다 한다. 이「飛」자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바로 그 시각이 알고 보니 양봉래(楊蓬萊)가 운명(運命)하던 시간(時間)과 일치(一致)하더라는 것이다.
이 고사(故事)가 있은 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이「飛」자에다 정신(精神)을 쏟았기에 봉래(蓬萊)의 정기(精氣)가 마지막 가던날 같이 날아 가겠느냐고들 감탄(感嘆)하여 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이곳에 전(傳)한다
라. 송강(松江)은 그저 감탄(感嘆)
중국 사람들의 옛부터 내려오는 소원(所願) 가운데「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원컨데 고려국에 태어나 한번 금강산을 보고 싶다」이 었다.
중국천하의 승지(勝地)로서 자주 시문에 오르내리는 곳이 여산이다.
이백(李白)이 여기서

三千尺 瀑布물줄 곧게 쏟아져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
이라 읊었고 당(唐)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이 여산의 경치가 하도 좋아서「尋陽晩泊望廬峰」이라는 글을 읊고는 나머지 구(句)를 채우지 못했다는 곳이 바로 여산(廬山)이다.
송강(松江)은 그의 글에서 이백이가 금강(金剛)을 보지 못했으니 여산이 천하의 절승(絶勝)이라고 떠들었지 만약 여기를 보았으면 여기보다 낫단 말을 못했을 것이라고 千尋絶壁을 半空에 셔여두고 銀河水 한 구배를 촌초히 베어내어, 실같이 풀터이서 베같이 거려시니 圖經 열두 구배 내 보매는 여러히라.
李諦仙이 이제 있어 고쳐 의논 하게 되면 여산이 여기두곤 낫단 말 못하려니 <李白이가 본시 신선이었는데 잘못되어 인간 세상에 귀양 왔다하여 李諦仙이라 부른다>라하여 중국의 승지를 어찌 하여 감히 우리 금강에다 비기겠느냐고 말하였다.
송강과 같은 문재(文才)도 금강에 와서는어와 造化論이 헌사로 헌사 할사 날거던 뛰지 마라 뛰거던 날지 마라
부용을 꼬자난듯 白玉을 못 건난 듯 어와 너여이고 너 같아니 또 있는가 開心臺 고쳐 올라 衆香城 바라보며 萬二千峰을 歷歷히 헤여하니 峰마다 매쳐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던 좋지마라 좋거든 맑지마라.라 하여 그저 감탄의 연발을 했을 뿐이다.
금강(金剛)을 말함에 있어서 내금강(內金剛)의 대부분은 淮陽郡에 속하고 있으므로 회양(淮陽)의 산하(山下)편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순서(順序)일지 모르나 그렇게 되면 중복(重複)이나 누락의 우려가 있으므로 여기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효과적(效果的)일 것 같다.
마. 초속비경(超俗秘境)의 이름
금강(金剛)을 옛날에는「사리매」또는「서리뫼」즉(卽)「霜峰」이란 뜻으로 불러오던 것을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화암경(華岩經)에「東海의 보살이 사는 金剛山이 있다」한 구절(句節)에 연유하여 해동에 보살이 살만한 곳을 찾아보니 산정수정(山精水精) 일점(一點)의 속기(俗氣)가 없어 불교적 도장(道場)으로는 가장 알맞는 불계(佛界)이니 이곳이 바로 화암경(華岩經)에 나오는 금강산이라 하여 이때 부터 금강(金剛)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의 이름은 이것 외에도 개골(皆骨), 황반(湟槃), 풍악(楓岳), 봉래(蓬萊) 등의 여러가지로 불리우며 분수령(分水嶺)을 중심으로 회양(淮陽)쪽을 내금강, 高域쪽을 외금강이라 하며
내외금강이 정취(情趣)를 달리하고 있다.
세상에서 흔히들 금강산(金剛山)을 일만이천봉이라 하는데 대소 헤아릴 수 없는 봉 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중 비로봉(飛盧峰)을 주봉으로 수량(水良), 일출(日出), 월출(月出), 집산
(集山), 오봉(五峰), 세지(勢地) 등 표고(標高) l.OOOm를 넘는 웅봉(雄峰) 거산들은 하늘에 솟구쳐 행여 점호(點呼)에 빠질세라 그 준수한 위세(威勢)를 자랑하여 천하의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어 송장은 이것을 萬二千峰을 歷歷히 헤여하니 峰마다 매쳐있고 끝마다 서린 氣運 맑거든 좋지마라 좋거든 맑지마라 저 기운 흐터내여 人傑을 만들고자形容도 그지없고 體勢도 하도할사 라고 읊었다. 봉이 이미 이러하니 계곡(溪谷)인들 헛될리 없다.
범상(凡常)치 아니한 산허리와 계곡마다에는 전설(傳說)이 얽혀있고 유심한 동구(洞口) 마다에는 사찰(寺刹)이 자리잡아 유점(楡帖), 표훈(表訓), 장안(長安), 신계(神溪), 정양(正陽),
마사연(摩詞桁), 보덕(普德)등 대소의 사암(寺庵)이 점철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池勝覽)에는 내외(內外) 금강(金剛)에 산재(散在)한 사찰(寺刹)의 총수(總數)가 108이라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 고증(考證) 여부는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거니와 이 108이라는 수자(數字)가 실수(實數)이건 허수(虛數)이건 혹은 또 불교(佛敎)의 108경뇌에서 따온 공념적(空念的) 수자(數字)이든 간에 고려(高麗)이후 여기가 보살의 처식처(悽息處)로 알려졌고 청정(淸淨)의 비경(秘境)으로 초속(超俗)한 영지(靈地)로 이름이 있었으니 수도(修道)하는 사람이면 평생(平生)에 여기 오기가 소원(所願)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속인(一般俗人)도 생전(生前)에 금강산(金剛山)을 가보면 사후(死後)에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전설(傳證)이 떠돌 정도였으니 사찰(寺刹)의 수가 자연 많을 수 밖에 없다.
바. 세속(世俗)과 극락(極樂)의 경계(境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외금강(外金剛) 쪽으로 단발령(斷髮令)을 통하는 길이 있는데 단발령(斷髮令)은 내금강(內金剛)의 관문(關門)이다. 승람(勝覽)에는 속인(俗人)이 금강산에 가다가 이 단발령(斷髮令)에 올라 한눈에 내금강(內金剛)의 연봉을 바라보고는 세속(世俗)에 뜻이 없어 다시는 세간(世間)에 나가지 않겠다고 단속(斷讀)하기 위하여 이 단발령(斷業令)고개 마루에서 머리를 잘랐다 하여 단발령(斷業令)이란 이름이 생겠다고 한다.
또 어떤 책에는 신라(新羅)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敬順王)이 신흥(新興) 고려(高麗)와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고려에 항복하려 하니 그의 태자(太子)가 부왕 경순왕에게「나라의 존망(存
亡)이 천명(天命)에 달렸거늘 충신의사(忠臣義士)와 합심(合心)하고 민심(民心)을 수습하여 마지막 존망(存亡)의 전쟁(戰爭)도 하지 않고 천년사직(千年社稷)을 하루 아침에 경경(輕輕)
히 내놓는 법(法)이 어디 있습니까?」하였더니 경순왕이「나라의 운명(運命)이 이미 이꼴이 되었으니 싸워 봤자 승산(勝算)이 없을 뿐만아니라 헛되어 무고산 백성(百姓)의 피만 흘릴 것이니 내 차마 그것을 볼수 없어 나라를 내어 놓는다」라고 하였다.
부자중(父子中) 어느 생각이 올고 그르다는 것을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겠으나 보위(寶位)를 눈앞에 두고 천년사직(千年社程)을 남의 손에 넘겨야 했던 태자의 심경 에는 동정이 간다.
나라가 이 꼴이되니 태자는 표연히 서울을 버리고 이곳 금강에 입산하다가 이 단발령에서 머리를 깎았으므로 단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亡國의 태자로 우수유전(憂愁流轉)하다가 마침내 이 고갯 마루에 서서 금강의 연봉을 한 눈에 바라보며 단속의 뜻이 굳었던가 보다. 이 고개는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오고간 곳이요, 수 많은 사람이 머리를 자른 곳이다.
태자석 머리카락도 흩어졌을 곳이고 실연(失戀)한 아가씨의 머리카락도 흩어 졌을 곳이며 세속에서 시름에 잠들어 하던 사람들이 꿈결에 망상하던 곳이기도 하다.
화담(流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시문과 초서 잘 쓰기로 널리 알려졌으며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동기(銅器)를 만들어 왔다는 시은수계(市隱舜繼)는 이곳 단발령에 올라,
初登斷髮嶺 仰視評玉峰
萬景在雙陵 何勞遍雨足
<처음 斷髮嶺에 올라 금강의 連峯을 우러러 본다.
金剛의 景致가 이 곳에서 다 뵈는데 무엇하러 수고롭게 찾아다니노.>
하고 읊어 단발령에서 금강산이 한눈에 보인다고 했고 시인 남기로는 여기서,
机林一徑長蒼苔 夕照含山倦鳥廻
寒碧隔雲知有寺 肩興催渡石橋床
<숲속으로 뚫린 길 이끼 끼었고, 저녁볕에 새들은 깃을 찾는다.
푸른 계곡 저쪽엔 절이 있겠지, 징검다리 건너서 어서들 가세.>
머리를 끊어 버리던 嶺이니 그 옛날 이곳에 인가가 있었을리 없었고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 이라고는 절간 뿐이었다.
해지기 전에 어서 절을 찾아 들자는 뜻으로 단발령상에서 읊은 시구이다.
사. 성지금강(聖地金剛)
금강(金剛)은 천하(天下)의 승지(勝地)인 탓으로 옛부터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墨客)이 많았고 그들은 그들 나름 대로의 시문을 남기고 있지만 붓이나 혀끝으로 이 천하의 비경을 그대
로 그린다는 것은 헛된 수고다.
그 수많은 무슨동, 무슨대, 무슨암, 무슨문, 무슨봉, 무슨계의 절묘를 그릴만치 사람의 말이나 글은 틔어있지 않으니 여기서는 고인(古人)의 시문(誇文)과 더불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만 몇 개 들추어 금장(金剛)의 현모나마 살펴 보기로 한다.
아. 절경속의 만폭동(萬瀑洞)
만폭동(萬爆洞)은 금강대의 북방에 있는 동곡에 내금강 입답(入潭)이 있어 一萬瀑布가 쏟아지는 곳이다. 그러기에 송강은 여기서
百川洞 곁에 두고 萬瀑洞 들어가니 섯돌며 뿜은 소리,
十里에 자잣어니 들을제는 우뢰러니 보니난 눈일러라!
라하여 이곳 동곡(洞谷) 절승(絶勝)을 노래했고 퇴계(退溪)와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쌍벽이 라고 이르는 율곡 이이는 여기서,
石遲高低入洞門 洞中飛瀑怒雷奔
岩橫萬古難消雷 山聳千秋不散雲
<돌길 오르내려 洞門에 드니 怒한 물결이 번개처럼 달린다.
億萬年 누운 바위 우뢰소리 못끄고 千秋에 솟은峰 구름을 못쓰네>
라고 이곳 동곡(洞谷) 경색(景色)의 위용을 그렸다. 이 동구에 저 유명한 팔담이 있고 이 팔담을 고인의 시에
溪流曲曲不同奇 潭下有潭上知
過了入潭絡一水一詩還是入潭詩
<溪流는 꼬불꼬불 서로 다르고 못 밑에 못있음을 못위에서 알겠다.
팔담이 이 모두 한 溪流로 되었으니 팔담詩도 도리어 詩 한句 일세>
라고 팔딤경색(八漂景色)의 절묘(絶妙)함을 재치있게 노래하였다.
이곳 석벽(石壁)에 봉래 양사연(陽士彦)이 전에 잠깐 언급한 바 있는「蓮萊楓岳羽化洞天」의대서 팔자를 써서 각자한 것이 있다. 초선(草仙) 봉래가 이 승경에 필흥(筆興)을 느껴 쓴 글씨
라 자획마다 생동한 다른 글씨로 청화산인(靑華山人)은 그의 저서에서 이 글씨를「글자의 획마다 꿈틀거려 살아 있는 용과도 같고 뛰고 있는 범과도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숱한 사람들의 글씨가 이곳에 새겨져 있지마는 여기서 뺄 수 없는 것은 매월당(滴月堂)의 글이다.
매월당(海月堂) 김시습(金時習)은 강릉(江陵) 김씨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재주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세종(世宗)께서 그의 재주가 뛰어남을 듣고 대관내로 불러들여 그의 재주를 시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종(世宗)께서 매월당(海月堂)에게「내가 지금 곧 글을 한句 지을 터이니 너는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내글에 대귀를 지어야 한다. 만약 지체없이 잘 지으면 상을 줄것이나, 시간을 지체한다거나 글이 대가 잘되지 아니하면 벌을 줄 것이니 그리 알라」하고 세종께서
童子文學白鶴舞於靑松文末
「童子의 學問이 白鶴끼 靑松끝에서 춤추는 것 같다」
고 했더니 매월당(梅月堂)이 지체없이 이어 받아
聖至文德黃龍飜碧海之中
「聖主의 德이 賁龍이 碧海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하여 세종의 극찬을 받고 후일 나라를 위하여 크에 일하라는 당부를 받고 공부하던중, 세조의 찬탈을 당하여 세속에 뜻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표연히 산사를 오락 거리다가 이곳 關東地方
의 산수가 마음에 들어서 금강 설악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비록 머리는 깎았으되 수염은 그대로 남겨두고
「消業避塵世 留髥表丈夫」
<머리는 티끌 세상을 피하기 위하여 깎았고
수염은 大丈夫를 나타내기 위하여 남겨 두었다.>
라 부르는 그 수염을 내려 찍는 폭포바람에 나부끼며 이곳에 이르러 이곳 석벽(石壁)에다
「人碧樂山樂水 我獨登山而哭 臨水而哭」
<사람은 다 산과 물을 즐기나 나는 산에 올라서 울고 물에 임해서도 운다.>
는 단장의 글귀를 써서 진나라의 은자(隱者) 원적(阮籍)이 등산임수(登山臨水)에 매양 울었고 우리나라의 단제(丹齋) 신채호(申彩浩)호도 나라가 일제에 망하고 난 다음에「최한산궁수진처 임정가곡역란위(最恨山窮水盡處 任情歌哭亦難爲)」라는 상기 매월당(梅月堂)과 같은 비슷한 시구를 남기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으니 충신열사(忠臣烈士)의 마음에는 시간의 고금이 없나 보다.
자. 금강(金剛)의 영봉(靈峰) 비로봉(毘盧峰)
금강산(金剛山)의 주봉(主峰)은 비로봉(毘盧峰)이다. 표고(標高) 1638m로 막하(幕下)에 내노라 소리치며 할거하고 있는 대소무수(大小無數)의 산웅(山雄)을 거느리고 만천가닥의 동
곡(洞谷)을 어루만지고 있으며 수다한 본말사(本末寺)를 품안에 품고 있다.
이 곳에서는 삼차(參差)한 봉란(峰辯)을 조감 할 수 있고 내외 금강이 한 눈에 드는 곳이다.
여기 정상에 배바위라고 부르는 큰바위가 놓여 있다. 이 바위는 그 모양이 배처럼 생겨서 배바위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동해를 항해하는 배가 항로를 잃었을 때에 멀리서도 이 배바위의 모
양을 보면 곧 자기배의 위치를 알 수 있다하여 항해의 지표가 됨으로 배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고산(高山)인 탓으로 이곳은 일기의 변화가 심한 곳이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이다가도 삽시간에 구름리 몰려와서 빗발이 내리치는가 하면 이러다가도 금시에 씻은듯이 맑게 개이기도 하며 때로는 몽롱한 구름으로 운해의 장막이 벽역(碧
域)을 덮어 씌워 비로봉두(毘盧峰頭)는 햇살이 빛나는데 면하(眠下)의 만이천봉은 자취도 없어 지는 수가 비일비재하다. 여기는 영봉중(靈峰中)의 영봉(靈峰)이라 하계(下界)에서 부정한
사람이 올라오면 산영(山靈)이 노하여 날씨도 그의 진로를 막으려고 때로는 비, 때로는 구름, 심하면 우박을 퍼붓는다고 하여 고인(古人)들은 이산을 두렵게 생각하고 경건하게 대하여 왔
다.
요즈음 등산하는 사람들이 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는 것이 예사로되어 있지마는 금강의 운봉 성역에서는 심히 소란을 피우면 날씨가 험하여진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설사 이런 전설이 없다 하더라도 이 초속(超情)한 성역내의 금강에 수많은 연봉의 머리위에 서서 감히 띠들석하기는 커념 옷깃이 여며지는 곳이다.
차.백이십간(百二十間)의 거찰 장안사(巨刹長安寺)
내금강(內金剛)의 어귀의 첫 거찰(巨刹)은 장안사(長安寺)이다. 장안사는 신라 법흥왕(法與王)께서 창건한 절로 법흥왕은 호불의 대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왕이다. 법흥왕 때에 공주 병들어 백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때마침 고구려에서 묵호자(墨胡子)라는 중이 와서「공주의 병을 고치려면 불사를 일으켜 그에 기도하면 나을 것입니다.」하기에 그 말에 따라 그대로 했더니 공주의 병이 나았다. 왕은 불법이 영이(靈異)한 데가 있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신봉이 두터웠으며 장안사도 이 때에 진표율사에게 명하여 짓게 한 것이라 한다. 그 후 여러번 중수(重修)하여 이조 때에는 120여간(餘間)의 대찰(大剡) 이었다고 승람(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장안사의 건물도 건물이려니와 장안사 근처의 소나무와 잣나무의 숲도 유명하다. 궁기 없이 귀공자처럼 하늘에 치솟은 모양은 속기(浴氣)가 없어 신계(仙界)의 운치를 돕는다. 이 잣나무
숲에서 1년에 잣 2백석(百石)을 거둔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장안사를 중건(重建)할 때의 이야기 한토박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0간의 사찰이고 보니 소요되는 재목(材木)도 많았다. 도편수 한 사람이 먹줄을 쳐서 큰 재목은 그 밑에 쓰고 있는 목수에게 다듬게하고 자기는 수백개의 목침(木枕)을 정성들여 깎고 있었다.
하도 많은 목침을 정성들여 깎고 있기에 주지가 이상히 여겨「도편수는 집을 짓지 않고 허구한날 목침만 깎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요.」하고 물으니「이 목침을 깎는 것이 다 집짓는 일이
요.」라고 대답하고는 계속하여 목침만 깎기에 저 수많은 목침을 과연 다 쓰나 안쓰나 한번 시험해 보고자 그중 한개를 슬쩍 가져다 감추어 놓았다.
재목 다듬는 일이 다끝나 거창한 절을 세워놓고 난뒤 도편수는 자기가 깎아놓은 목침을 가져다가 일일이 도리위에 끼우기 시작하였다.
절간 온 건물의 도리 위에다 끼우고 마지막으로 법당건물에 끼우다 보니까 한개가 모자랐다. 도편수는「그럴리가 없는데.」하고 머리를 갸우뚱 거리고 있기에 이것을 본 주지가 한개를
감추었다가 내놓으며 「하도 많은 목침을 허구한날 깎고 있기에 과연 저 많은 목침을 다 쓰겠는가 하고 의심스러워 그중 한개를 내가 감추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다 필요가 있어 그 정성을
드렀군요.」라고 하며 토편수에게 목침을 내밀었다.
도편수는 손을 내저으며 「절은 먹줄과 쟁기와 손재주로 짓는 것이 아니고 온갖 정성을 그곳에다 바쳐서 짓는 것이요. 내가 깎은 목침 하나가 부정한 생각에 의하여 부정을 탓으니 차라리
빠진대로 그대로 두지 그 부정한 것은 쓸 수 없오.」하고 그 한곳만 빼 놓았으므로 그곳 한곳만이 이가 빠졌다고 전하여 온다.
정성은 고사하고 부정을 일삼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오늘의 업자들은 고인의 이 성력을 거울삼을 일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영상(領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병란때에는 김상헌(金尙憲)과 같이 척화(斥和)를 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 갔다가 돌아와서 이종을 도와 북벌계획(北伐計劃)을 하던 중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계획이 탄로되자 전책임을 지고 잡혀가 백마성에 감금을 당했던, 글 잘하고 글씨 잘쓰기로 유명한 이경석(李景奭)이 이곳 금강탐승(金剛
探勝)에 왔다. 장안사에서 하룻방을 자며,
春州一面夢依然 伴宿禪房亦宿緣
枕上寒泉聲似雨 起看明月滿山前
<春州一面의 꿈은 依然하고 하룻밤 僧房도 因緣이 있었다.
머리맡 계곡물은 빗소리 같은데 달빛은 산천에 가득하구나.>
고 하룻밤 승방(僧房)의 감회를 읊었고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비의 친정조카로 민씨와 더불어 대윈군의 세력을 몰아내려고 하던 소하(小荷) 조성하(趙成夏)는 장안사에서
長安人夢幾年秋 今日長生寺裏遊
誰道長安日遺遠 長安還近此回頭
<꿈속에서 장안 그린지 몇해 이던고 오늘사 장안사에 서서 노리게 되다
장안길 멀다고 뉘가 일렀노, 장안이 돌아 들어 바로 여길세.>
라 읊었다. 이 외에도 이곡(李穀)의 글을 비록하여 이명한(李明漢)의 시 등 많은 시문이 있다.
카. 전설(傳說)의 고장 금강(金剛)
금강은 우리 나라에서 으뜸가는 불교의 도장이 있었기에 득도하려는 수많은 승려가 오고 갔다.
그 중에서 특히 이조 불교의 명맥을 발윤(發潤)시킨 서산대사(西山大師)도 이것과 인연(因緣)이 있을 뿐 아니라 여기서 재미있는 전설까지 낳게 하였다.
타.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당(泗溟堂)
서산대사는 종교적으로는 득도한 도인으로 묘오후(妙悟後)의 대사의 심경을 그린
主人夢設客. 客夢設主人.
令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주인은 나그네에게 꿈이야기하고 나그네는 주인에게 꿈이야기 한다.
두 꿈이야기 하는 두 나그네, 그들은 다 꿈속의 사람이다.>
이는 다 종교인으로서의 대사의 색즉공(色則空)이요 공즉생(空則色)의 경지를 말하고 있으
나 그는 신앙인으로서 그친것이 아니요, 우국의사(憂國義士)이기고 했다.
愛國憂宗杜. 山僧亦一臣.
長安何處是. 同望淚沾中.
<나라를 사랑하고 종사를 걱정함엔 산승도 신하인데 다르겠는가.
임금 계신곳 그 어디메인고 돌이켜 바라보니 눈물만 하염없네.>
국녹(國綠)을 먹고 있는 충신의 심경인들 이에서 더 할 수 없다. 사(師)는 득도(得道)의 인
이요, 애국의 인(人)인 동시에 범속(凡俗)치 아니한 시가(詩家)이기도 했다. 사(師)의 시(誇),
梨花千萬片. 飛入淸虛院.
收笛過前山. 人件俱不見.
<배꽃 천만 조각 떨어져 고요한 밤에 든다.
피리소리 앞을 지나는데 목동도 소도 보이지 않네.>
주객(主客)이 구공(俱空)한 이 선(禪)의 경지(境地)를 옳은 그 문재(文才)는 족히 가견(家見)이 있는 시가(誇家)의 글이다. 이렇듯 각 방면(方面)에 구족(俱足)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장승군(將僧軍)으로 73세의 고령임에도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난후(亂後) 서산(西山)과 사명당만치 개인적 전설을 남긴이도 드물다.
무관(武官)으로서는 충무공(忠武公)이나 권율(權慄)장군 같은 분의 이야기가 많고 문관으로는 백사(白沙)나 서애(西崖) 같은이의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다 무용담이거나 혹은 어떤 실
전기이지마는 서산과 사명당은 실재의 인물이면서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부도는 외금강(外金剛) 유점사(楡岾寺)에 있지만 서산은 장안사에서도 오래 있었으며
그가 장안사에 있을때 사명당과 읽힌 전설이 있다.
파. 만폭동(萬瀑洞)의 보덕굴(普德震)
만폭동(萬瀑洞) 동곡중(洞谷中)에 보덕굴(普德窟)이라는 암자(庵子)가 있다. 이 보덕굴(普德窟)은 절벽에 굴을 파고 판자를 걸고 구리기둥을 세워 철사로 얽어매 놓았으므로 방안에 암아 몸을 일렁거리면 굴이 흔들거린다는 절묘(絶妙)한 곳이다.
흥지 승람(興地勝覽)에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중보덕(中普德)이가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쓰여 있다. 이제현(李齋賢)이 여기와서 지은시(詩)에, 陰風生岩曲 溪水深更緣
倚柱望層嶺 飛詹雲上掛 <음산한 바람이 바위 틈에서 나고 계곡수 깊고 깊어 다시 푸르다.
막대에 기대여 뫼뿌리 바라보니 처마는 허공에 떠 구름위에 걸렸다.>
금강산 만폭동 동구에 보덕굴이라고 하는 암자 하나가 있다.
이 보덕굴은 절벽에 뚫린 굴에다 판자를 받쳐 만든 암자이다. 그 형태 자체가 세상에 흔치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보덕굴의 전설이 또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설이다.
금강산 송라봉 밑에 송라봉이라는 불리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에는 회정선사(懷正禪師)라는 스님이 천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가 정성껏 기도하여 이제 천일이 가까와진 어느
날이다. 막바지 정진을 다하느라고 피곤하여 잠깐 눈을 붙였더니 꿈에 법기(法起)보살이 나타나시어 이르는말이 "그대가 여기서 도를 얻기 위하여 천일이라는 긴 세월을 온갖 고초를 다
참아가면서 기도에 정진하고 있는 모습이 가긍하구나. 내 한마디 일깨워 주기 위하여 왔으니 내 말을 잘듣고 그대로 행하면 도를 깨칠 수 있을 것이니 이제 그대의 천일 기도가 막바지에
다 다른것 같은데 개안은 수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그 마지막 개안을 해줄 사람을 일러 줄터이니 내일로 그 사람을 찾아가도록 하여라.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몰골옹처사(處士)라 이르는 사람이다. 그는 양구군 해안면 방부동에 살고 있으니 곧 그를 찾아가면 득도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릴것이다."라고 일러주고서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회정은 즘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있어 법기보살을 뒤쫓아 가려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날 회정은 "이상한 일이다. 법기보살이 거짓말을 할리없으니 그의 말을 따라야 하겠는데 천일의 마지막 날을 눈앞에 두고 마치지 못한채 내일 떠난다는 것도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하여 법기보살이 분명 내일 떠나가라고 했는데 그말을 듣지 않을수도 없으니 난처하게 되었구나"하고 혼자 이리 저리 생각하다가 '마지막의 개안을 깨우쳐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상기하고 천일 기도를 다시 하는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덕고 기도를 중단하고 내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금강산 송라암을 떠나 양구로 가면서 법기보살이 가르쳐준 곳에 몰골옹처사라는 분이 있기만을 바랬다. 회정은 이 꿈이 들어맞으면 그곳에서 득도할 수 있겠지만 천일 가까웠던 기도가 다 허사로 돌아갈것이니 그곳에 몰골옹처사라는 사람이 있어주기를 심축하며 길을 재촉 하였다.
회정이해질무렵 몰골옹처사의 집에 이르러 보니 집은 가시덩굴에 초라하기가 이를데 없었고 묘령의 아름다운 처녀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다. 회정은 그 처녀를 보고 하도 아름다와 온뜻도 알리지 못한채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의식을 되찾고 비로서 "이 집이 몰골옹처사의 집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처녀는 "예 그렇습니다. 선사는 어떻게 여기를 찾아 오셨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회정은 "소승은 금강상 송라암에서 도를 닦던 회정이라는 중인데 법기보살의 교시(敎示)를 듣고 몰골옹처사에게 도를 배우려고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몰골옹처사를 만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처녀는 그말을 듣더니 "그렇습니까? 몰골옹처사인 저의 아버지는 남에게 도를 가르칠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아마도 잘못듣고 오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회정은 속으로 법기보살이 거짓말을 할리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여 "그럴리가 없으니 몰골옹처사를 한번 만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니 처녀는 "우리 아버지는 성질이 흉악하여 어떤 사람이든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해를 입히고 맙니다. 해도 저물어 곧 집에 돌아 올 시간이 되었으니 스님은 우리 아버지 오시기전에 이곳을 떠나시는 것이 신상에 좋으실 것 입니다. 길을 재촉하여 여기를 떠나주시기를 바람니다."라고 하였다. 회정은 첫눈에 마음에 든 처녀에게 사랑을 느껴 구도(求道)하기 보다는 오히려 곁을 떠나기 싫어 "법기보살이 거짓말을 할리도 없고 해도 저물어 갈수도 없으니 나중에 여하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후회하지 아니할 것이니 그대로 이곳에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처녀는 회정의 마음속을 짐작하고 "사정이 그러시다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며 앞으로 부부가 되기를 언약한 사이라고 꾸며 기회를 보아 아버지께 말씀 올리면 우리 아버지도 해를 끼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 기회가 올때까지 우리집에 숨어 계십시오."라고 한다. 회정은 처녀와 같이 있게된 것이 좋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왕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어 은혜를 입었으니 이름이나 가르쳐 주시오."라고 했더니 처녀는 자기 이름은 보덕(普德)이라 하였다.
이렇게 몇일을 그곳에 머무는 동인 회정은 더욱 보덕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사랑을 고백할 기회는 고사하고 숨어 사느라하고 만날 틈도 별로 갖지 못하며 지냈다. 날마다 보덕만을 생각하며 지내다보니 수도할 생각도 아예 없어지고 생각은 보덕의 모습으로 꽉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잠에서 깨어보니 보덕은 온데 간데없고 보덕의 모습같은 바위하나만이 집안에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놀란 회정은 그 바위를 어루만지고 살펴보아도 그는 역시 바위였지 사람이 아니었다. 이에 실망한 회정은 하는수 없이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길을 재촉하였다. 회정이 슬픈 마음으로 금강산 만폭동 어귀에 와서 동구로 막 들어서니 길일 개울가에서 처녀 한 사람이 머리를 감고 있었다. 어디서 본 모습같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뜻밖에도 보덕이었다. 그는 하도 반가와 허둥 지둥 보덕이 머리 감는 곳으로 쫓아갔다. 회정이 온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보덕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계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
였다. 회정도 놓칠세라 보덕을 뒤쫓았으나 얼마를 가다보니 맑은 물이 괴어 있는 못에 다 다랐다. 그 거울같이 맑은 못속에 보덕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기에 회정은 보덕의 참모습을 보려고
고개를 들어 못위 벼랑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보덕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관음보살님이 서서 회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정은 그 모습을 보고야 정신이 들어 그만 자리에 꿇어 엎드려 자
기 잘못을 뉘우쳤다. 그는 천일기도를 했지만 도가 부족하여 망상(忘想)이 생겨 관음이 처녀로 보였던 것을 깨달았다.
그는 후에 본격적인 수도를 하려고 관음보살을 본 법기봉(法起峰) 중턱 벼랑에 보덕굴을 짓고 수도에 힘써 득도하였다고 한다. 금강산의 보덕굴이 도저히 암자가 들어 앉을 수 없는 벼랑
에 제비집모양으로 들어서게 된것은 관음보살을 거기서 보았으므로 득도의 도장으로는 가장 길지(吉地)라 하여 만란을 무릅쓰고 그곳에 짓게되었고 이름을 보덕암이라 한것은 보덕과의
이러한 사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