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 공양왕의 비사
작성일
2025-07-26
조회
15
제 5절 공양왕 비사
공양왕의 문신(文臣)이었던 함부열(咸傅說)씨와 이성계를 도와 3등 개국공신이 된 함부림(咸傅霖)씨는 형제로서 혈육의 정을 끊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조선개국의 흔란기에 형 함부림은 개국공신으로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후 영의정에 올랐다. 아우 함부열은 고려말에 예부상서와 홍문관 수사를 지냈으나 조선개국 동참을 거부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아우 함부열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 공양왕이 원주로 유배되자 은밀히 수행하며 2년간 모시다가 왕이 다시 간성(杆城)으로 유배되자 운명을 같이하다 삼척으로 또다시 왕이 도피되어 살상 비사사건이 될 때까지 보필하다 간성에서 여생을 보낸 후 세상을 떠났다.
공양왕 일행은 2년간 고성군 간성읍 금장동(金章洞) 수타사(壽陀寺)를 근거지로 머무르는 동안 부족국가 왕권 형태를 갖춘 지사(志士)와 무사(武士)가 삼백여명에 이르렀으나 이성계의 감시와 압력에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어서 1394년 4월 17일 공양왕과 그 추종자들은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 고돌산(古突山) 살해치(殺害峙)에서 중추부사 정남진(鄭南晋) 형조의랑 부하들에 의해 피살 되었다. 공양왕도 이때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우 함부열이 형 함부림에게 간청하여 공양왕을 간신히 피신 시킬 기회를 얻었고 왕족시신만 거두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정남진과 함부림은 고심하다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심복자객을 간성으로 보내 1394년 4월 25일 공양왕 을 시해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함부열 야사기) 함부열은 공양왕이 숨을 거둔 고성산 서록을 원정동(元政洞)이라 명명하고 암매장한 후 후손에게 자기도 그 밑에 장사(葬事)하여 시왕(侍王)케 하고 무고축으로 제사(祭祀)하라는 유언을 남겨 지금도 후손들은 이를 지키고 있다.
공양왕이 피살된지 만 22년이 지난 1416년에 태종은 강봉된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추봉하고 삼척에 있다고 생각한 왕과 왕비의 시신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왕릉골로 이장(移葬)하였으나 그것은 세자 석(奭)의 부부이고 삼척에 있다는 공양왕릉은 공양왕비와 종사자들의 산소라는 설이 함부열 야사에 전해오고 있는데 이 비사(秘史)가 유지되어 온 것은 형 함부럼의 세도 덕분이라고 한다. 형 함부림은 아우 함부열의 직언(直言)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뜨거운 형제애를 나누었다고 한다. 함부열이 간성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남겼다는 시(誥)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간성에서 은둔생활을 한 것은 왕을 추종하던 풍수지리학자와 지관(地官)들의 선견지명에 의한 간곡한 권유에서 였다고 한다. 서슬이 시퍼렇딘 조선 개국초기에 풍수지리학자들은 간성(杆城)에서 기거해야만 반드시 왕권(王權)을 회복할 수 있다는 천기(天氣)와 지기(地氣)에 대해 간언했다는 이야기의 구전(口傳)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이성계 일파에게 알려져 결국 공양왕은 삼척으로 또다시 유치, 도피되어 궁촌리(宮村里)에서 감금생활을 하다 살해치(殺害峙) 고개에서 피살되어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었다고 하나 여기에 미궁에 빠진 비사 정사가 있다. 이 궁촌리(宮村里)의 지명은 왕이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며 살해치(殺害峙) 고개는 왕이 피살된 고개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말 세력자가 된 이성계가 공양왕(恭讓王)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찬탈한 역사적 사건은 함(咸)씨 가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형과 아우가 조선왕조의 개국으로 충신으로 역적으로 나뉘면서 본관(本貫)도 달리하게 되었다. 형 함부림계는 강릉(江陵)을, 아우 함부열계는 본래의 양근(楊根)을 쓰게 되었다.
1983년 8월 20일 함씨의 자손들이 함부열 묘소의 대대적인 복원사업중에 공양왕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하였는데 공양왕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부장품은 발견치 못하였다고 한다.
공양왕의 문신(文臣)이었던 함부열(咸傅說)씨와 이성계를 도와 3등 개국공신이 된 함부림(咸傅霖)씨는 형제로서 혈육의 정을 끊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조선개국의 흔란기에 형 함부림은 개국공신으로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후 영의정에 올랐다. 아우 함부열은 고려말에 예부상서와 홍문관 수사를 지냈으나 조선개국 동참을 거부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아우 함부열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 공양왕이 원주로 유배되자 은밀히 수행하며 2년간 모시다가 왕이 다시 간성(杆城)으로 유배되자 운명을 같이하다 삼척으로 또다시 왕이 도피되어 살상 비사사건이 될 때까지 보필하다 간성에서 여생을 보낸 후 세상을 떠났다.
공양왕 일행은 2년간 고성군 간성읍 금장동(金章洞) 수타사(壽陀寺)를 근거지로 머무르는 동안 부족국가 왕권 형태를 갖춘 지사(志士)와 무사(武士)가 삼백여명에 이르렀으나 이성계의 감시와 압력에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어서 1394년 4월 17일 공양왕과 그 추종자들은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 고돌산(古突山) 살해치(殺害峙)에서 중추부사 정남진(鄭南晋) 형조의랑 부하들에 의해 피살 되었다. 공양왕도 이때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우 함부열이 형 함부림에게 간청하여 공양왕을 간신히 피신 시킬 기회를 얻었고 왕족시신만 거두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정남진과 함부림은 고심하다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심복자객을 간성으로 보내 1394년 4월 25일 공양왕 을 시해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함부열 야사기) 함부열은 공양왕이 숨을 거둔 고성산 서록을 원정동(元政洞)이라 명명하고 암매장한 후 후손에게 자기도 그 밑에 장사(葬事)하여 시왕(侍王)케 하고 무고축으로 제사(祭祀)하라는 유언을 남겨 지금도 후손들은 이를 지키고 있다.
공양왕이 피살된지 만 22년이 지난 1416년에 태종은 강봉된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추봉하고 삼척에 있다고 생각한 왕과 왕비의 시신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왕릉골로 이장(移葬)하였으나 그것은 세자 석(奭)의 부부이고 삼척에 있다는 공양왕릉은 공양왕비와 종사자들의 산소라는 설이 함부열 야사에 전해오고 있는데 이 비사(秘史)가 유지되어 온 것은 형 함부럼의 세도 덕분이라고 한다. 형 함부림은 아우 함부열의 직언(直言)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뜨거운 형제애를 나누었다고 한다. 함부열이 간성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남겼다는 시(誥)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간성에서 은둔생활을 한 것은 왕을 추종하던 풍수지리학자와 지관(地官)들의 선견지명에 의한 간곡한 권유에서 였다고 한다. 서슬이 시퍼렇딘 조선 개국초기에 풍수지리학자들은 간성(杆城)에서 기거해야만 반드시 왕권(王權)을 회복할 수 있다는 천기(天氣)와 지기(地氣)에 대해 간언했다는 이야기의 구전(口傳)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이성계 일파에게 알려져 결국 공양왕은 삼척으로 또다시 유치, 도피되어 궁촌리(宮村里)에서 감금생활을 하다 살해치(殺害峙) 고개에서 피살되어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었다고 하나 여기에 미궁에 빠진 비사 정사가 있다. 이 궁촌리(宮村里)의 지명은 왕이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며 살해치(殺害峙) 고개는 왕이 피살된 고개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말 세력자가 된 이성계가 공양왕(恭讓王)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찬탈한 역사적 사건은 함(咸)씨 가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형과 아우가 조선왕조의 개국으로 충신으로 역적으로 나뉘면서 본관(本貫)도 달리하게 되었다. 형 함부림계는 강릉(江陵)을, 아우 함부열계는 본래의 양근(楊根)을 쓰게 되었다.
1983년 8월 20일 함씨의 자손들이 함부열 묘소의 대대적인 복원사업중에 공양왕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하였는데 공양왕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부장품은 발견치 못하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