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4. 고성군의 문화 유적
작성일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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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성군의 문화 유적
◇간성 읍성(杆城邑城)
【지정사히】〈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 (읍성)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하리, 상리 일원
【시 대】조선시대
【유적내용】
옛 간성군의 치소성(治所城) 역할을 했던 읍성으로 동문과 서문지역은 7번 국도가 지나고 있고 내부에는 군청 건물과 간성읍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 군의 주요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성벽은 동벽 지역, 즉 간성교회 지역에서 북쪽으로 간성시장 뒷편 주차장까지의 부분 약 200m가량이 절단되어 사라졌다. 간성교회 부근의 단애부에서 보이는 성벽의 모습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성토, 보축하여 이용하였으며, 외곽 쪽으로는 일부 석축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성의 높이는 6~7m정도이다. 이 단애부에서 현재 간성읍사무소 뒷편까지의 남벽잔존부에 대한 길이를 실측한 결과, 일부가 도로로 멸실되긴 하였지만 약 250m 가량은 그런대로 성벽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남벽의 정상부에는 간성 제일교회와 민가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고성군에서 건립한 '간성읍성'이라는 표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일부는 마사토 채취를 위해 인위적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남벽은 서벽 쪽으로 돌아 현재 고성 천주교회 있는 곳에서 끝나고 있다. 이 성당과 민가들이 정상부를 평탄화시키고 있어 고성군청 뒷부분은 주차장 공사로 인해 훼손되었는데 일부 단애부에서 토석혼축의 판축흔이 매우 잘 남아 있다. 판축은 자연의 구릉위에 약 2m 높이로 이루어졌다. 성벽의 윗부분은 모두 기와 조각과 흙으로 쌓여 있는데 보축시에 기와의 흙을 혼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북벽 일부와 동벽의 일부에는 외벽과 정상부가 lOOm가량 잘 남아 있다. 동벽 일부 즉 평지 쪽으로 내려오는 부위에는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화강암류의 암괴로 치석하지 않고 외벽 쪽으로 평평한 면이 나오도록 하여 쌓았는데 길이 약 lOm, 높이 약 2m정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車國與地勝覽≫에는 둘레 2,565척(777m), 높이 13척(3m), 의석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번 조사결과 둘레 길이는 대체로 유사하였으나, 석축 뿐 아니라 토축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상: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세종대왕실록≫권153: ≪신동국여지승람≫권45
◇고성 건봉사 포교당(高城乾鳳寺布敎堂)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찰(현존 고사찰 및 부속기관)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신안리 363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현재 건봉사의 포교당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봉사가 소실되고, 이후 이 지역이 민간의 출입통제지역이 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건봉사의 법맥을 이었다고 한다. 대웅정과 요사체 2동 및 수마제원이 있는데 속초 보광사에 계신 노보살께서 대웅전을 지었다고 한다. 건봉사의 입구에는 근래에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는 문이 있는데 기둥은 시멘트로 하였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으며 맞배지붕이다. 이 문 좌우로 담을 둘렀고 왼편기둥에는 '건봉사 조제암 포교당"이라는 입간판이, 오른쪽 기둥에는 "대한불교 조계종"이라는 입간판이 걸려 있다. 대웅전은정면 3칸(213cm×320cm×213cm), 측면 3칸(213cm×213cm×213cm) 크기이며,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덤범주초와 약간의 치석을 가한 4각 초석을 사용하였다. 법당내에는 근년에 조성된 석가여래 1구와 탱화 6점이 있는데, 본존불의 후탱불에는 "불기이구팔팔연신축십이월일 강원도고성군건봉사후불성신중정 면각일점안잉이봉안(佛紀二九八八年辛丑十二月日江原道高城郡乾鳳寺後佛星神衆幀面各一點眼仍以奉安)의 묵서가 있다.
그리고 지름 49cm, 두께 35cm의 불과 근년에 조성한 높이 72cm의 소형 1구가 있다. 입구에는 51cm×30cm×29cm 크기의 석주가 1기 있는데, 지름 16cm의 '만(卍)'자와 자경 86cm의 금강저가 양각되어 있다. 후불탱화가 1961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건물도 그 해를 전후하여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동호리 유물산포지 ①(高城 東湖里 遺物散布址 ①)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선사유적 (선사유적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동호 1리
【시 대】신석기 시대
【유적내용】
유물 산포지는 간성읍내에서 동호리 마을로 들어가는 두개의 도로 중 북편의 도로를 따라 약 1.9km 들어가면 민가들이 집락(윗갈벌)이 시작되는데 바로 이 마을 입구 민가와 텃밭 지역으로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산재하여 있다. 유적의 주변 환경은 남쪽으로는 넓은 뜰과 남천이, 북으로는 북풍과 서풍을 막아줄 수 있는 해발 약 40m 높이의 야산과 북천이, 동쪽으로는 약 500m거리에 동해가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 동호리 유적역시 죽왕면 문암리 신석기유적과 같이 야산을 등지고 있어 이 지역 신석기인들의 생활양식의 일면을 찾을 수 있는 좋은 증거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동호리 신석기 유적은 아쉽게도 민가들의 재건축 등으로 그 원형이 훼손되어 가고 있어 시급한 보존대책이 아쉬운 곳이다. 이 유적에서 수습한 유물은 벗살무되 토기 조각들과 어망추 1점, 돌도끼 1점이 있다. 토기 조각의 문양은 어골문, 격자문, 압인문 등이 있다. 특히 어골문은 횡으로 시문한 것인데 깊이가 lcm정도로 깊어 그 문양이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동호리 유물산포지 ②(高城 東湖里 遺物散布址 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사유적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동호리 1리 (야산남록)
【시 대】청동기 시대
【유적내용】
유물산포지는 간성읍내에서 북면 약 1.9km거리에 있는 해발 60m야산의 남쪽 경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이 위치한 곳은 남쪽으로는 남천이, 북쪽으로는 진부령에서 발원하여 간성읍의 북편을 따라 흐르는 북천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약 500m거리를 두고 동해 바다가 있어 동호리 남쪽의 넓은 들을 합한다면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수습된 유물은 현재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 자연적인 현상변경이 심하지 않기 때문인지 무문토기의 구연부편, 저부편, 동제편등 토기편 수 점만이 수습되였다. 하지만 이 유적과 연관하여 동남쪽에 늦은 시기의 신석기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 앞서 말한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충분히 청동기시대인들의 주거지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간성읍 상1리 선정비군(杆城邑 上1里 善政碑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상1리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고성군
【유적내용】
춘천지법 고성등기소 동편 언덕에 위치한 충혼탑 앞에 고성군 일대에 산재하여 각종 개발 등으로 훼손의 염려가 있거나 민가에서 빨래판 등으로 사용되던 비석을 이곳에 모아 놓았다. 총 18기가 있는데 대부분 1900년대를 전후하여 세운 것이다. 그중 숭정연간(崇禎年間)(1628―1644)에 건립한 2기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군수 김시보(郡守金時保)의 불망비(不忘碑)이고, 다른 하나는 군수 김상복(郡守金尙宓)의 선정비(善政碑)이다. 전자는 화강암재를 사용하였으며, 갓석이 없고, 크기는 116cm×56cm×25cm이다. 비 전면에 "군수김공시보 대사권학 영세 불망비(郡守金公時保待士勸學永世不忘碑)"라 하였고, 뒷면에는 "숭정후삼월일립(崇禎后三月日立)"이라 하였다. 후자의 비석도 화강암재를 사용하였는데, 고깔형태의 갓석을 비신과 일체로 조식하였다. 크기는 112cm×52cm×23cm이며, 비의 전면에 "군수김공상복선정비(郡守金公尙宓善正碑)"라 하였고, 후면에는 "숭정이년기사오월초삼일립(崇禎二年己巳五月
初三日立)"이라 적었다. 고성군 역대 군수 선생안에 따르면 김시보는 1712―1713년간에, 김상복은 1624―1329년 간에 각기 고성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간촌리 사지 (高城 艮村里 寺址)
【지정사힝】〈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간촌리(속칭 부처바위골)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약 3,000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을 지닌 사지로, 전역이 논으로 되어 있고, 논둑과 산록에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을 뿐 사찰과 관련된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1991년 객토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기와 조각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사지에는 석불이 있었다는 기록이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언급되어 있으나,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다만 간촌리 21번지에 거주하는 전봉택씨(71세)와 전봉학(80세)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까지 좌불상이 있었고, 약 30년 전에 없어졌다고한다. 사지의 산중턱에는 문관석 2기와 부도의 대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묻혀있다. 문관석은 2기 중 1기는 반파되었으나, 또 다른 1기는 코에 약간 손상을 입었을 뿐 완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문관석은 양손을 가슴에 모아 홀을 잡고 있는데, 높이 1m의 크기이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간성향교 (杆城鄕校)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104호(1985년 1월 17일)
【유적종류】향교(향교 및 부속건물)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664
【시 대】조선시대(세종 2년)
【관 리 자】향교채단
【유적내용】
조선조의 행정 편제는 간성군과 고성군의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어 운영되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로 편제하면서 통합되어 1919년 고을의 명칭이 고성군으로 확정됨에 따라 이곳에는 간성군과 고성군의 향교가 각각 건립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휴전선을 이북의 고성군에 보존될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고성군 향교조에서"고을 서쪽 10리에 있다." 하여 고성 향교의 위치를 밝히고 있으며, ≪관동읍지≫의 고성군 사례대개에서 향교의 규모를 살필 수 있다. 간성 향교는 세종 2년(1420년)에 창건된 것으로 파악되며, 그 위치는 성북 용연동으로 확인된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이전되어 왔고, 선조 13년(1580년)에는 규봉산 기슭으로 이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향교의 건물은 다시 소실되었다가 1954―1956년에 이르는 기에 대성전과 동․서재, 그리고 대성문이 건립되었으며, 1960년에 명륜당과 1966년에 동서무가 재건되었고, 1982년 외삼문이 건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향교의 건물은 소실되거나 퇴락하여 중건 또는 이건되었지만, 창건 당시에 조성된 위패는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 현재 간성 향교는 외삼문을 중심으로 토담벽이 둘러져 있고, 명륜당 앞에는 1987년 대성전 중건을 기념하는 "공부자 묘정비(孔夫子廟庭碑)"가 건립되어 있으며, 건물 배치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동․서재․대성전, 동․서무로 구성된 문묘가 전후로 배치되어 있다. 1961년 건립된 명륜당의 대공은 김구선․최광수․최주열이며, 전면 4칸 규모의 명륜당은 내에는 3개의 기문, 즉 "간성 향교 외삼문 창건기(杆城鄕校外三門創建記)", "중수기", "전무 중창기"가 게판되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신증동국
여지승람≫ : ≪관동읍지≫
◇군수 이찬규 거사비 (郡守 李讚奎 去思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통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거사비의 전면에는 "군수이공찬규사비(郡守 李公讚奎 去思碑)"로 각자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이곳 유림에서 건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친】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군수 최승호 거사비(郡守 崔乘虎 去思碑)
【지정사체】〈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거사비의 전면에는 "군수 최공승호 거사비 (郡守 崔公乘虎 去思碑)"로 각자되어 있으며, 그 후면에는 간성 유림에서 건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전봉상 효자각(全鳳祥 孝子閣)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각(효자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산62번지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전씨 종증
【유적내용】
간성 향교에서 간성읍 쪽으로 46번 국도를 따라 약 300m정도 거리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비각은 정면, 측면 각 1칸(245cm×248cm)이며 팔작기와지붕이다. 효자각의 내부를 살문으로 양분하여 그 안쪽에 효자비 3기를 배치하였고 그 바깥쪽은 쪽마루로 놓았다. 3기의 효자비중 중앙의 것은 전씨 문중 46대손 전봉상의 것으로 "효자전봉상려(孝子全鳳祥閭)"라 새겼다. 우측(동편)은 51대손 전공순(全孔淳)의 것으로 "효자전공순려(孝子全孔淳閭)", 그 맞은편의 것은 54대손 전재후(全載厚)의 것으로 "효자전재후려(孝子全載厚誾)"라 새겼다. 모두 경오년 시월(庚午年十月)에 중건(重建)하였다. 비는 모두 화강암을 사용하였으며, 비의 크기를 위의 순서대로 살피면 112cm×48cm×l8cm, 115cm×48cm×l6cm, 115cm×44.5cm×l1.5cm이다. 비각의 뒷편에도 1기의 비가 뒤집어져 있는데 누구의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관동읍지≫와 ≪고성군지≫에 의하면 전봉상이 7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잉어가 특효라는 소문을 듣고 추운 겨울에 동호리 호수에서 잉어를 구해 간병하였고, 후일 다시 아버님이 병석에 눕자 단지하여 간병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아 정려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 효자각에는 전봉상 뿐만 아니라 전씨 문중의 46대손 전종상과 51대손 전공순, 그리고 54대손 전재후의 효자비가 함께 모셔져 있으며, 매년 4월1일과 추석날에 그 유덕을 추모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비각이 우측으로 기울어 있고, 앞쪽의 배수로도 막혀 있어 역류로 비각이 잠긴 흔적도 남아있는 등 주변의 정리가 시급한 형편이다. 이에 따라 1997년 11월 사업비 3천만원을 들여 현재 위치로 새롭게 이전했다
【참고문체】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관동읍지≫ : ≪고성군지≫
◇현감 택당선생 거사비(縣監 滓堂先生 去思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시 대】조선시대
【유적내용】
택당 이식은 인조 9년부터 10년(1631―1632)까지 간성 현감을 역임한 인물로, 재임 동안 고성군 최초의 읍지로 평가받는 ≪수성지≫를 편찬하여 고을의 역사를 정리하였으며, 인재 양성과 지역 개발을 위한 공적을 쌓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거사비는 택당 이식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그 건립 시기는 현종 2년(1661년)으로 추정된다. 택당 이식의 거사비는 1981년 3월 진부령 도로 확장공사시 배수로에 매몰된 채 발견되었는데, 이는 1922년경 진부령 도로를 건설할 당시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림에 의해 향교 앞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고, 1985년에는 고성군 문화원을 중심으로 지방의 인사들로부터 수집된 시문으로 거사비 중건을 기념하는 시집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거사비는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비갓을 씌우지 않은 거사비는 철망으로 보호망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간성군읍지≫ : ≪관동읍지≫ : ≪택당선생간성정록≫ : ≪고성군지≫
◇간성 향교 기적비(杆城 鄕校 紀蹟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념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 2리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향교재단
【유적내용】
해상 2리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 건너편에 서 있는 세그루의 소나무 고목 사이 비각 내에 위치한다. 비각은 정면, 측면, 각 1칸(305cm×276cm)이며, 맞배지붕이고 약 70cm 높이의 초석위에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 기적비를 두고 홍살을 둘렀다. 비대좌와 개석은 화강암 재질로, 개석의 앞뒤로는 당초문과 꽃봉우리가 조식되어 있다. 섬록 화강암 재질의 비신은 142cm×60cm×22cm 크기이며, 주칠이 되어 있는 비문은 영의정 이병모(李秉摸)가 찬(撰)하고, 형조판서성여보(徐榮輔)의 사(書)와 유한지(兪漢芝)의 전(篆)으로 되어 있다. 건립 연대는 순조5년(1805)이다. 기적비의 비문 내용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향교를 점거한 왜군에 맞서 향교의 재임(齋任)이었던 김자발(金自撥)과 박응열(朴應烈)등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성인의 위패를 거두어 정결한 곳에 봉안하였고, 이어 왜군에 의해 전소된 향교를 두공의 발의로 1592년 10월에 중건을 시작하여 다음해 2월 초에 낙성을 하여 제례를 봉행할 수 있었다. 이후 관찰사 정술(鄭述)의 상주로 공이 많은 두 사람에게 포상이 내려지게 되었으며, 1592년 10월에 중건을 시작하여 다음 해 2월 초에 낙성하여 제례를 종행할 수 있었다. 순조 5년에 간성 향교 유림의 공의로 김,박(金, 朴)등 제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기적비가 건립되게 되었다 한다, 1997년 12월 15일 퇴락한 비각을 3천만원의 군비를 들여 기와고르기와
부식목재 교체, 단청등으로 새롭게 정비됐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간성향교지≫
◇고성 탑동 사지(高城 塔洞 寺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동리 2반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약 2,000평 규모의 사지로, 50여년된 송림이 울창하고, 북동쪽으로 남천(탑동천)이 흐르고 있다. 이석탑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다가 1950―1953년 사이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국전쟁시 인민군들이 석탑 앞에서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현재의 석탑은 모두 파괴되어 형체를 알 수 없다. 탑이 있었던 위치에는 탑재로 보이는 4개의 부재가 남아있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금수리 사지(高城 金水里 寺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시 대】고려시대
【유적내용】
사지는 간성읍 서남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성산 정북편 계곡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현재 사지 주변은 아카시아, 밤나무, 소나무, 잣나무등이 서식하고 있고 지형이 계단식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작지로 사용된 것 같다. 주변에서 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으나 건물과 관련된 초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재 탑의 동편 20여m 지점에 1기가 보이는데 크기는 106×88×20cm이다. ≪조선보물고적자료≫에 의하면 사지의 이름은 수타사(水徐寺)로 3층 석탑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찰의 명칭을 확인 할 수 있는 근거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다만 1기의 석탑이 남아 있어서 이 곳이 사찰이 조영되었던 곳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 석탑은 4층 옥재석까지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본래는 5층석탑이었는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본시 2층기단에 5층 탑신을올린 평면 방형의 석탑으로 생각된다. 현재 기단부는 상층부(상대갑석, 상대중석)와 하층기단 갑석만이 남아 있다. 상대갑석부는 옥석괴임 받침을 조출하여 갑석과 일체로 처리 하였다. 많은 부분(주로 낙수면)이 박리되었다. 상대중석부는 탱주와 우주를 양각으로 조출하였다. 하층 기단갑석에는 4면에 모두 안상이 남아있다. 탑신부는 현재 옥신 1개와 4개의 옥개석이 남아 있다. 현 1층 옥신은 옥석 받침부의 4면에서 모두 5cm정도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초건립의 옥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황으로 보아 제2층의 옥신으로 추정된다. 현재 M1 소총의 총알이 그대로 박혀 있고 또 탄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1층 옥개석은 현재 남아 있는 옥신과 같은 짝임을 확인하였다. 옥개석부는 현재 4개가 남아 있는데 현재 복원된 비율이 맞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현 탑신 1층부가 1층이 아니고 2층정도 임을 감안 할 때 없어진 옥신 및 개석 부분은 1층 부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4개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옥개석의 대부분은 모서리 부분이 깨어져 나갔다. 상륜부는 모두 멸실되었다. 탑의 현존 높이는 2.6m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금수리 고성산성(金水里 高城山城)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산성)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고성산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이 산성유적은 간성읍 서남쪽 약 2km거리에 있는 고성산(297m)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르는 길은 읍내에서 서남쪽으로 나있는 313번 군도를 따라 탑동마을로 진입하다가 예비군 동원 훈련장에서 우측의 고성산으로 오르면 된다. 현재는 군사도로로 해발 약 250m정도까지는 차량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성에 대한 문헌기록으로는 일제시대 자료민 ≪조선보물고적자
료≫에 '高城郡郡內面 金水里 國有 金水里部落의 西南 約三十町의 古城山頂에 있음. 高城山城址 周圍約三百十六間(574m) 일부에 石築이어도 대부분 土築不完全' 이라 하였다. ≪문화유적총람≫상에는 '일명 고성산성이며 자연석 난층쌓기로 되었는데 "고성군 수성지"에 고려초 축성으로 주위 2565척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석축이 많이 남아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성은 정상부(9부능성)에 축성되에 있는 퇴뫼식 산성이다. 성 안쪽에는 동서길이 약 150m, 남북길이 약 200m 정도의 부정형의 넓은 평탄지가 있다. 넓이 약 10.000평에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잔존 성벽은 20~50cm의 현무반암 할석을 이용하여 亂層쌓기로 길이 60―7Ocm의 장대석을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다음, 작은 돌로 뒤채움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쌓은 것이 일부 지역에 서 확인되고 있으나, 현재 산성의 거의 전부가 군작전지역 시설로 인해 대부분 파괴된 상태로 사용된 석재들이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려 있다. 성의 남남서 지역에 높이 160cm. 길이가 10m 정도의 벽체가 남아있고, 성벽앞에는 기단부가 계단식으로 3단이 쌓여 있음이 확인된다. 성 동북쪽에도 성벽일부가 잔존하여 있는데, 길이 약 llm, 높이 4m이다. 또한 단면상으로 본 기단부의 넓이는 6.2m정도 된다. 아마도 동문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안쪽으로는 우물터도 남아있다. 산성 내부와 성벽 바깥에는 지금도 상당히 많은 양의 기와조각과 토기편, 자기편이 흩어져 있어서 이곳의 용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산불방지용으로 설치되어있는 망루에 오르면 간성읍과 동해안 등 사방이 관조되는데 성과 주변정황으로 볼때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능히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조사에서 산성에 대해 새로이 확인된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남쪽에는 문지에 활용되었던 암괴왼 돌저구, 면석등이 남아 있다. 특히, 돌저구, 면석등은, 이 지역이 현무암지대이고 축성시 사용될 돌이 대부분 현무암인데 비해 이 문지에 사용된 암석재는 모두 화강암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 옮겨 왔음을 증명하여 준다. 방향으로 보았을 때 '남문지'라 생각된다. 또한 성의 남남서 지역에는 자연 암벽을 치석하여 호성을 만들고. 화강암을 치석하여 기단부를 조성한 유구들이 잘 남아있다. 특징은 기단부를 10―20m씩 들여 쌓면서 축성하였고 쐐기돌들을 활용하였다,(서문지역에서도 화강암 쐐기돌과 장대석이 기단이 확인된다) 이는 고구려 시대의 전형적인 축성방법이다. 이 유구 윗쪽에 있는 현재의 잔존 성벽은 고려시대에 보축한 것으로 사료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구 건봉사지 능허당대선사 기념비(舊 報鳳寺址 凌虛堂大禪師 紀念碑)
【지정사진】〈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념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근대(1928)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 139cm×51.5cm×21.5cm이며 1928년에 세운 것인데 건봉사 사적에 1919년 극락전도량 축석과 1920년 불이문 건립, 문수교 가설, 산영교 개수 때 힘쓴 공을 기념한 것이
다. 1928년에 세웠다.
【참고문헌】문화재 관리국, 1977,≪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만화당대선사비(舊 乾鳳寺址 萬化堂大禪師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근대(1924)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 183cm×61.5cm×34.5cm, 비개(碑蓋)의 크기 47cm×99cm×70cm이며 윤희구(1867―1926) 찬(撰), 김돈희(1871―1936)서(書) 및 전(篆)이다. 1924년 6월에 세운 것이
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목양당영안대사비(舊 乾鳳寺址 牧羊堂靈眼大師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조선시대(영조 7년)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는 185cm×81cm×34cm로서 이덕수(1673―1744) 찬(撰), 서명균(1680-1745) 서(書), 이징하 전(篆)인데, 비좌(碑座)는 묻혀 있다. 조선 영조 7년(1731)에 세운 것 이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랑≫상
◇구 건봉사지 벽오대종사비(舊 乾鳳寺沚 碧梧大宗師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근대(1904)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 184cm×58cm×27.5cm이며 여규(1849―1922) 찬(撰), 이시영(1882―1919) 서(書) 및 전(篆)으로 광무 8년(1904) 7월에 세웠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부도군(舊 乾鳳寺址浮屠群)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시대미상>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일부는 사찰 경내에서 떨어진 탑현리 쪽에 있다. 거의 도굴되어 계곡에 떨어져 있기도 하는데 건봉사 스님의 말로는 100여기라 한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연회비(舊 乾鳳寺址 蓮書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근대(1904)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는 183cm×58.5cm×26cm, 비개(碑盖) 크기 42.5cm×l10cm×68c이며 비좌는 땅에 묻혀 크기를 알 수 없다. 조병필(1835―1908) 찬(撰), 김가진(1846―1922) 서(書), 정학
교(1832―1914) 전(篆)이고 광무 8년(1904) 3월에 세웠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운파대사비(舊 乾鳳寺址 雲坡大師碑)
【지정사진】〈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조선시대 (영조 6년)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 180cm×78cm×27.5cm, 귀부 길이 2.26m, 비두(碑頭) 크기 192cm×133cm×58cm인데 이의현(1669―1745) 찬(撰), 홍득복(1691―1767) 서(書), 유탁기(1691―1767) 전
(篆)으로 조선 영조 6년(1730) 4월에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상
◇구 건봉사지 일암대사비(舊 乾鳳寺沚 日庵大師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탑현리
【시 대】조선시대(영조 46년)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 152cm×59.5cm×18cm이고 김상숙(조선 영조 때의 인물) 서(書)인데 찬(撰)과 전(篆)을 한 사람의 성명을 고의로 깎아버려 알 수 없는데 "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치사봉조하 '○○○' 찬병전(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致仕奉朝賀 '○○○'撰幷篆)"으로 볼때 사화(士禍)에 희생된 인물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영조 46년(1770)에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김치원 자혜 불망비(金致元 慈惠 不忘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불망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홀 1리
【시 대】근대(1932)
【유적내용】
면장 함동석과 함께 1931년 흉년으로 인한 마을의 식량난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홀리 구장으로서 주민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1932년에 주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비의 전면에는 "구장김공치원자혜불망비(區長金公致元慈惠不忘碑)"라 새겼고, 그 좌우에는 "십재근무 승상은하 채금선세 금화권업 신시황년 구기문한 가락군자 활아천구(十載動務承上恩下採金先稅禁火勸業 是荒年救飢問寒嘉樂君子活我千口)"라 적었다. 화강암을 사용한 이 비의 크기는 106cm×45cm×l6cm이며 비갓은 없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고성군지≫
◇나병규 선생 공덕비(羅炳奎 先生 功德碑)
【지정사템】<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홀 1리
【시 대】근대(1939)
【유적내용】
진부령 정상에서 알프스 리조트 방향으로 들어서 가다 콘도와 박물관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자리하였다. 화강암 재질에 비갓 없이 세운 이 비의 크기는 116cm×44cm×l4cm이다. 일제치하에서 이 지역의 청장년들에게 구학문과 신학문을 교육하므로서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컸던 나병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 제자인 한도성(韓道成)을 비롯한 9인이 1939년에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나선생병규기념비(羅先生炳奎記念婢)"라 새겼고, 이 좌우에"적심교육 딘심성○(赤心敎育丹誠○)"이라 하였으며, 비문 아래로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고성군지≫
◇함동석 공덕비(咸東錫 功德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홀 1리
【시 대】근대(1932)
【유적내용】
1907년경 천재로 홀리마을에 흉년이 들어 온 마을이 식량난을 극심하게 겪게 되자, 이 에 당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구호 양곡을 요청하였다. 이로서 구호미가 지원됨으로써 극심한 식량난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면장 함동석의 적극적인 활동을 높이 평가한 마을 주민들에 의해 공덕비가 건립되었다. 비 전면에는 "면장함공동석시은비(面長咸公東錫施恩碑)"라 새겼고, 그 좌우로 "한곡춘회 은산택해 구아궁민 모금이율(寒谷春回恩山澤海口我窮民募金移栗)"이라 명기되어 있다. 임신(壬申)(1932) 10월에 설립한 것을 밝히고 있다. 비갓 없이 화강석을 사용하였고, 크기는99cm×216c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고성군지≫
◇간성 진부리 사지(杆城 陳富里 寺粃)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 66―2
【시 대】고려시대
【유적내용】
마을 주민 김재하씨에 의하면 수년 전에 입으로 글씨를 스는 스님이 이곳에서 사찰을 건립할 목적으로 장명등 및 근년에 조성된 4사자 3층석탑 1기를 옮겨 놓았다고 하나, 스님이 돌아가신 후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다고 한다, 연화문 대석(蓮花紋臺石)은 도괴된 장명등의 하부에 놓여 있으며, 대석은 직경 95cm, 높이 22cm의 8각형 규모로 전면에 판이 넓은 복엽 8판의 복연이 조식되어 있다. 상면에 직경 66cm의 8각형 홈을 마련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부도나 불상의 하대석으로 추정된다. 조성시기는 연화문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장명등(長明橙)은 전체적으로 8각형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는데, 도괴되어 있지만 간주석, 희사석 및 옥개석을 모두 갖추고 있어 바로 세우면 완형으로 복원될 수 있다. 하대석에서 화사석과 옥개석이 각 1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전체 높이는 144cm이다. 장명등은 원 위치를 파악할 수 없으나 각부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4사자 3층석탑은 근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3.6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고성군지≫
◇고성 자산리 고인돌(高城 慈山里 支石墓)
【지정사체】<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자산리
【시 대】청동기시대
【유적내용】
자산리 고인돌은 거진초등학교 뒷산에 남―북 방향으로 위치한 것으로, 자산리 주민들은 성황당으로 신성시하여 담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자산리 마을은 앞쪽은 건봉산에서 발원한 자산천이 바다로 흐르고, 뒤편으로는 화진포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해 바다가에 위치하여 선사인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덮개돌의 형태는 장타원형이고 단면은 부정형으로, 덮개돌의 일부는 잘려 나가고 현재 남은 부분의 크기는 장축 240cm, 폭 160cm, 두께 lOOcm이다. 하부 구조는 잘려 나가 절반밖에 남지 않았지만 현존하는 받침돌의 크기는 높이 80cm, 길이 60cm, 폭 50―80cm정도 크기의 덩이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무덤방의 크기는 길이 80cm, 폭 70cm, 높이 8Ocm정도 남아 있다. 바닥 시설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변형된 북방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고성군지≫
◇전참봉 김의종 동부인 우귀녀 기념비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념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자산리
【시 대】근대(1924)
【유적내용】
이 기념비는 전참봉 김의종과 그 부인 우귀녀가 거진초등학교를 건립할 당시 건립 부지를기증한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건립 시기는 1924년으로 확인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고성군지≫
◇고성 화포리 유물산포지(高城 花浦里 遺物散布地)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사유물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차골
【시 대】청동기 시대
【유적내용】
유물산포지는 화진포 호수 남남동편의 차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점인 호반 저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남쪽으로 내만되어 있는 넓은 골짜기로 현재 계단식 밭과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해안 대부분의 청동기유적은 야산 능선이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반해 호숫가의 저지대에서 유물들이 확인된다는 특이한 점이 있다. 이 유적은 이미 1960년대에 지석묘와 함께 많은 양의 유물이 채집되었다고 보고된 바 있는데, (최숙경 1966) 이번 조사에서도 석촉, 반달돌칼, 방추차, 돌도끼편 등의 석기 다수와 공열토기편들이 일부 수습되었다. 이 곳에서 수습된 유물은 대부분 작은 조각들인데 이는 산포된 지역이 밭으로 경작됨으로써 트랙터등의 농기구가 흙을 파쇄하면서 토기 및 석기유물들도 잘게 부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최숙경, 1966,〈화진포주변의 토기․석기 ․지석묘〉,≪한국문화연구원농촌≫제7집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지≫
◇고성 화포리 유적(高城 花浦里 遺蹟)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사유물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시 대】철기시대
【유적내용】
화포리 철기시대 유적은 군 휴양시설인 화진포 콘도내에 위치한다. 콘도 지역내 PX물품 집하장으로부터 서남측 방향으로 약 200―250m 정도 들어가 송림이 화진포 호수와 접하면서
끝나가는 해발 약 4―5m 높이의 모래언덕에서 철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범위는 대략 폭 lOm 정도, 길이 남북 방향(화진포해수욕장 위병소→사단장 휴양소 방향)으로 50―60m정도에 이른다. 이곳은 이미 강릉대학교에 의해 민무늬토기 조각, 타날문토기 조각, 붉은 간토기 조각 등의 수습 사례와 그밖에 철기시대의 집자리로 보이는 진흙층 및 검게 탄 재층과 함께 불맞은 붉은 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금번 조사에서 일단 수습한 유물도 무문양 토기 저부 조각, 동체부 조각 등 20여점에 이른다. 또 화포리 지석묘 V 부근의 송립에서 철제도끼 1점도 수습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화포리 고인돌군 ①(高城 花浦里 支石墓群 ①)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7번 국도를 따라 거진을 지나 화진포 호수와 접하기전 대관령 아파트를 우측으로 끼고 화포리 마을로 진입하여 약 lOOm가면 다섯갈래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이 중 서편으로 있는 야산아fot길로 약 200m 정도 더 올라가 왼편 야산 능선상에 위치한다. 총 5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고 있는데, 1호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쪽에 각각 1기씩 4기가 배치되어있다. 사방에 배치된판석은 모두 크기가 비슷하고 장타원 형태를 띠었다. 이 고인돌군이 위치한 능선의 동편 사면에는 '파평윤씨성집지묘' 등 민묘 2기가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8.4m지점에 4호가 있어 배총관계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고인돌은 지금도 마을에서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덮개돌의 모양은 장타원형으로 단면 판석형이며 크기는 장축 370cm×26Qcm×25cm―30cm이다. 하부구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주변에 할석들이 많이 놓여 있어 석관형 하부가 파괴된 것으로 생각된다. 덮개돌 남쪽 밑으로는 경사가 져서 조금 들린 상태이고 상면에는 남서쪽에 치우친 곳에 지름 7cm, 깊이 2cm의 성혈이 있다. 2호 고인돌은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다. 덮개돌의 모양은 원형에 가깝고 단면 판석형이며 덮개돌 크기는 장축 130cmXl00cm×10―30cm이다. 하부 구조는 알수 없다. 3호 고인돌은 남북방향으로 위치하며 편서 30℃정도 기울어져 있고 기울기가 심하여 밑으로 밀린 것 같다. 덮개돌의 형태는 장방향이며 단면은 판석형이다. 크기는 장축 140cm×100cm×30cm이다. 하부 구조는 알 수 없다. 4호 고인돌은 남북 방향으로 위치하며 덮개돌의 형태는 부정형이다. 단면 형태는 가운데가 볼록한 사다리꼴에 가깝고, 크기는 130cm×100cm×10cm―26cm의 변성암제이다. 5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 남쪽 4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장축이 동서향을 이루고 있으며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면서 판석이다. 단면은 렌즈형인데 크기는 115cm×90cm×15cm―20cm이다. 지성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지≫
◇고성 화포리 고인돌군 ②(高城 花浦里 支石墓群 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화포리 철길 사거리에서 금강삼사 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약 600m정도 가면 오른쪽 구릉의 남사면 윤인상씨묘(尹仁相氏墓)앞에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덮개돌은 같은 크기의 큰판석이 2개가 포개져 있는데 이 지역이 경사가 심하고 땅이 모두 생토층만이 보이므로 윗쪽의 다른 고인돌 덮개돌이 밀려와 밑의 덮개돌을 덮은 것으로 판단된다. 윗쪽 덮개돌의 형태는 장방형이며 단면은 판석형이고, 크기는 장축(남북방향)180cm×90cm×30cm―35cm이다. 아래쪽 덮개돌의 형태는 장방형과 판석형이고 덮개돌의 크기는 장측 195cm×125cm×40cm이다. 윗쪽의 덮개돌 밑으로는 흙이 파여나가 들린상태이고, 윗쪽 덮개돌 동쪽으로는 할석이 몇개 보이나 하부 구조는 전혀 알 수 없다. 모두 화강암재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화포리 고인돌군 ③(高城 花浦里 支石墓群 ③)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이 고인돌군에 이르기 위해서는 화포리 철길 5거리에서 금강사로 가는, 즉 화포리 고인돌군 ①에서 화포리 고인돌군②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200m정도 가다가 좌측 능선으로 가는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약 300m정도 가면 서편 골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바로 북서편 야산의 남사면에 2기가 위치한다. 1호는 민묘 뒤에 북서―남동 방향으로 놓여있다. 덮개돌은 장축 210cm×l20cm×20cm―35cm이며 덮개돌의 형태는 부정형이다. 덮개돌 밑에는 하부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데 동쪽 단벽이 열려 없어졌다. 남쪽 받침돌의 크기는 140cm×60cm×30cm이고, 북쪽 받침돌의 크기는 150cm×70cm×l4cm인데 안쪽으로 약간 경사져 있다. 이 지석묘의 지형은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경사져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흙이 덮개돌 가까이 쌓여 있고 남서쪽의 받침돌은 거의 노출되어 있다. 현재 이 지석묘 석관의 내부 크기는 장축 150cm×50cm×56cm이다. 남쪽에는 민묘가 남쪽 지석을 받치고 있어 도괴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2호는 1호의 북편 약 20m거리에 있다. 2개의 판석이 포개져 있다. 장축은 북북서―남남동향을 하고 있다. 큰 판석은 오각 형태를 띠고 있으며 단면은 장대석 형태이다. 서편으로 기울어져 있고, 윗편(북동편)판성 아래에 일부가 올려져 있다. 크기는 장축 250cm×l00cm×33cm이다. 작은 판석은 북편으로 큰 판석 아래에 일부가 깔려 있는 형태이다. 전체적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단면은 역시 장대석과 같은 방형을 보여주고 있다. 최대길이는 140cm, 현재 폭 85cm, 두께 33cm이다. 큰 판석과 작은 판석의 두께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1개의 덮개돌이 분리된 것 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화포리 고인돌군 ④(高城 花浦里 支石墓群 ④)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거진읍에서 7번 국도를 통해 화진포 방향으로 진행하다 '차골들림'이라는 작은 음식점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화포리 철길을 가로질러 포장길을 따라 약 800m정도가면 가는 화진포 호수와 접한 차골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뒷편 최종렬씨 부모 합장묘에 1호 고인돌이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다. 덮개돌은 하부 구조로 보이는 판석을 베고 동쪽으로 20˚ 가량 기울어져 있다. 덮개돌의 모양은 부정 5각형으로 단면도 역시 부정형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동서 276cm, 남북장축 288cm 두께 30―60cm이다. 덮개돌 밑에는 장축 190cm, 폭 lOOcm, 두께 10cm―50cm정도의 판석이 2개 보이며 덮개돌 주변으로는 냇돌이 여러개 보인다, 이 1호 고인돌로부터,남쪽, 즉 차골마을로는 남동편 골짜기 안의 밭 가운데 2호 고인돌군이 위치한다. 총 3기가 동서로 나란하게 있다. 동편부터 a,b,c의 순서를 부여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a의 크기는 212cm×142cm×20cm―30cm이다. 평면상 방형이며 단면은 가운데가 볼록한 형태로 큰 관석이다. 경사면에 있기 때문에 기울어져 있다. 화강암제로 지석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b는 a와 약 2m거리에 있다. 크기는 220cm×160cm×22cm이다. 대부분이 흙속에 묻혀 있어서 전체적인 형태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평면상 타원형이고 단면은 장대석형으로 추정된다. 판석으로 화강암제인데 역시 지석의 흔적은 알 수 없다. c는 b와 1m거리에 있다. 대부분이 흙속에 묻혀 있어 그 구조는 알 수 없다. 대략 230cm×현재 폭 80cm정도이고 판석일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제이며 지석의 흔적은 알 수 없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화포리 고인돌군 ⑤(高城 花浦里 支石墓群 ⑤)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화진포 콘도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가 위치한다. 이 지석묘의 덮개들은 오각형이고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장축 250cm×240cm×30cm―40cm이며 남북 방향이다.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 있고 북벽의 지석은소실되어 없어졌다. 석실의 크기는 장축 190cm×l20cm이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 고인돌이 모래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석실주변의 돌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이 지상에 노출되어 북방식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문화유적총람≫에 장평리 유적으로 보고 되었으나 현 행정 지도상 화포리에 속하므로 화포리 유적으로 분류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화진포 (花津浦)
【지정사항】기념물 제10호(1971.12.16)
【유적종류】기타유적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산 24―1의 7필지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에 위치하며, 주위가 16km, 수심이 1.5―2km의 기수호(汽水湖)이다. 해안선에 따라 바다와 호수 송림과 백사장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특히 백사장이 좋아서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며, 피서객이 많이 찾아 든다. 호수 주변의 식물로는 적송(赤松), 곰솔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수중식물로는 가래과에 가래, 줄말, 나자스말, 실말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희기 조류는 큰고니, 민물 가마우지 그리고 군집을 형성하는 것으로는 검둥오리, 괭이 갈매기, 쇠오리, 흰죽지검둥오리, 기러기 등이 있다. 어족으로는 도미, 숭어, 연어 등이 잡히고 낚시터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강원도, 1993. ≪강원문화재대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원당리 유물산포지(高城 源塘里 散布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사유물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원당리
【시 대】청동기 시대
【유적내용】
유물산포지는 화진포 호수 남남서쪽에 있는 원당리 월안마을의 서편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야산(해발 20~40m)의 동편끝자락의 정상부에 해당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철로와 7번국도적 건설로 인해 능선이 절리된 상태이긴 하지만 동편으로는 화진포 호수에 면하고, 서편으로는 해발 150m 정도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남․북쪽은 트여 있는 곳이 어서 선사인들이 생활근거지로 삶기에 알맞은 곳이었으리라 판단된다. 현재 야산에는 2~30년된 소나무와 오리나무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민묘들이 여기 저기 자리하고 있다. 유물은 정상부의 한 민묘 옆에서 집중채집되었다. 주변지역이 나무숲과 갈잎으로 덮혀있는 곳이어서 전체적인 정황을 가늠하기 어려운 곳이었으나 다행이도 자연적으로 유수에 삭토된 채 드러나 있는 곳에 유물이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 가능하였다. 이곳에서, 반달돌칼, 어망추, 빗살문토기 편 등을 수 점 수습하였다. 특히 유적 입지로 볼 때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판단되는 유적이나벗살무늬가 채집됨으로 써 이른 시기의 연대를 갖는 청동기시대유적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성 정양산 봉수지(高城 正湯山 烽燧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봉수(봉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반암리 마을의 서남방 800m지점에 있는 해발 약 170m높이의 정양산 정상에 있다. 해안에 면해 있으면서 남쪽과 북쪽 모두가 트여 있어 봉수시설 입지로 알맞은 곳이라 생각되는 곳이다. 이 봉수지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寶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의 고지리지 외에 조선후기의 각종 지리지에 계속 언급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13km 떨어진 술산(戌山―현내면 마차진리)과 남쪽으로 11km거리인 죽도(竹島―죽왕면 오호리)사이에 위치하여 신호 전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봉수지 오대면 반암리 반암리부락(烽燧逃 梧垈面 般岩里 般岩里部落)의 서약 삼백간(西約三百間)의 산정(山頂)에 있음. 약 삼백간 사방석총 불완전(約三百間四方石塚不完全)'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에도 원형을 유지해오다 약 40년 전에 봉수지가 있던 정상부에 군사시설이 들어오면서 방형의 봉수지는 완전 파괴되었다 한다(고성군청 문화재전문위원 황광률씨 증언). 이번에 현지 조사한 결과, 그 유지에는 소량의 석재와 토기편만 수습될 뿐 폐쇄된 군 대공진지가 자리하고 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완전 멸실된 상태였다. 이 산의 정상부에서는 여지도서 간성군 봉수조(與地圖書 杆城郡 烽燧條)에 '정양산 봉수 재군북 십리 남응 죽도봉 북응 술산봉(正陽山烽燧在郡北十里南應竹島烽北應戌山峰)'이라 한 것과 같이 거진읍 및 죽도봉수, 마차진 봉수가 한 눈에 들어 오고 있어 기록대로 이곳에 봉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성군 문화공보실 황광률 전문위원도 약 40년전에는 이 곳에 마차진봉수대보다 더 확실하게 방형의 석축이 남아 있었다.(앞서 언급한≪조선보물고적조사자로≫의 내용과 일치)고 하여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이 곳에 군사 시설이 들어서면서 봉수대를 완전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성 봉평리 고인돌(高城 蓬坪里 支石墓)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봉평리 산 6
【시 대】청동기 시대
【유적내용】
거진읍 봉평리 3반 뒷산 최준배가에서 10m정도 떨어져 있는데 지면에 개석(蓋石)만 보이고 하부 구조는 알 수 없다. 동리에서 '고려장'이라 전해오며 임씨 종중 무덤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개석의 크기 160cm×l60cm×35cm이다.
【참고문헌】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건봉사 불이문(乾鳳寺 不二門)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35호(1984년 6월2일)
【유적종류】사찰(현존 고사찰 및 부속건물)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근대(1920)
【관 리 자】건봉사
【유적내용】
불이문은 1920년 건립된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지녔다. 익공계 건물로 지붕의 4모통이에 용두(龍頭)가 있으며, 정면의 처마 밑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불이문" 현관이 달려 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사방을 돌렀고, 초석은 한변 길이 62cm, 높이 26cm의 정방형인데, 사반에 모를 죽였다. 초석간 거리는 정면 308cm, 측면246cm이다. 기둥은 석주(石柱)와 목주(木柱)가 혼용되어 있으며, 석주는 높이 155cm로 하단은 방형으로 치석하고, 상면은 배흘림수법이 가미된 원통형이다. 이 부분에는 길이 94cm의 금강저가 조식되어 있고, 상면에 원형의 돌출대를 마련하여 석주를 받고 있다. 천정에는 "불이문 중건 단청 대시주(不二門重建丹靑大施主)", "설암당봉흔(雪巖堂奉欣)", "불기 2955년 무진 4월일(佛紀二九五五年戊辰圖月日)"라 묵서된 현관이 있다. 불이문 주변에는 나무아미타불석주, 불이문, 능파교비가 있다.
【참고문헌】아세아문화사, 1977, ≪건봉사본말사적유점사본말사지≫ : 고성군․강릉대학 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능파교 신창비(乾鳳寺 凌派橋 新創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석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번지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불이문 입구 좌편에 있는 능파교 신창비는 비좌, 비신, 이수를 구비한 석비이다, 모두 화강암재로 사용하였으며 대좌는 장방형으로 105cm×63cm×28cm의 크기로 상면에는 1단의 받침을 조출하였다. 비신은 140cm×62cm×28cm의 크기로, 전면 상단에는 자경 13cm의 전서(篆書)로 능파교기(凌派橋記)라 쓰여 있다. 2면비로 비문의 자경은 3cm이다. 이수는 90cm×100cm×48cm로 전면에 2마리의 용이 양각되어 있다. 배면에는 운문이 조각되어 있고 측면에는 삼태극문이 조각되어 있다. 정사에는 보주가 있다. 비석 전체의 높이는 2.68m이다. 비문의 내용은 강릉대박물관의 보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보림암지(乾鳳寺 普林庵祉)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보림암은 菩林禪師가 533년 창건한 후 1523년, 1878년 중수하였으며 1880년 화재로 전소되어 1881년 碧梧, 幻應스님이 중건하였다. 1897년 鶴林, 龍成 스님이 중수 하였다. 보림암은 민통선 지역내에 위치하여 일제때 이후로 실제 확인된 예가 없었으나 금번 조사에서 옛 기록대로 건봉사 서쪽 1.5km 지점에 실재했음이 확인 되었다. 건봉사의 적별보궁 서편으로 있는 계곡을 따라 1.5km올라가면 두 갈래의 계곡이 나오는데 바로 좌편(남쪽) 계곡으로 lOOm정도 위쪽의 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암자터는 현재 기단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남북향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고, 북편지역으로 일부 기단벽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암자 건물이 있던 앞에는 크고 작은 기둥형태의 초석 4기가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편 지역은 10여m높이의 낭떠러지이고 그 아래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암자터에는 현재기와가 깨어지지 않은채 겹겹이 쌓여 있고 기둥으로 쓰였던 목재가 불에 타 있거나 씩어가고 있다. 정황으로 볼 때 아마도 자연적으로 내려 았다가 산불이 나면서 일부 목재가 불에 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암자터 남서쪽으로는 당시 모습 그대로의 굴뚝이 남아 있다. 현 규모는 100×100×190cm정도이다. 주초석 및 건물터로 볼 때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굴뚝에서 남서쪽 11.5m 거리에 산신각터와 암자터에서 위쪽 30m거리에 암벽에 172×219cm 크기로 방형의 음각선을 구획하고 그 안에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적인 내용을 120자 정도로 음각한 글과 대형의 제단이 잘 남아 있다. 보림암지 암각문 1(칠성단)의 자경은 13cm×9cm, 8cm×8.5cm이다. 이십팔숙주천열○○강성군중 중성○○공북극진군자징대군 북두제육복덕구족무곡성군 북두제사소구개득문곡성군 북두제이장난원리거문성군 북두제일자손만덕탐랑성군북두제삼업장소제록존성군 북두제오백장○○멸염정성군 북두제칠수명장원파성군 좌보우필삼태육성제성군군중(二十八宿周天列○○講星君衆衆星○○洪北極眞君紫徵大君北斗第六福德具足武曲星君北斗第四所求皆得文曲星君北斗第二障難遠離巨門星君北斗第一子孫萬德貪狼星君北斗第三業障消除祿存星君北斗第五百障○○滅廉貞星君北斗第七壽命長遠破星君左補右弼三台六星諸星君君衆)<하단명문>탁자시주 장국진 자석준 병준 질익준 경자칠월일 화주석대현 석수이○○수송○○(卓子施主 張國鎭 子奭債 秉俊 怪翊愷 庚子七月日化主釋大賢石手李○○壽宋○○)암각문(산신단)은 남무산왕대신위(南無山王大神位)로 오른 쪽에 똑같은 암각문이 있다. 암각문은3은 칠성계원 이재호 김종수 김인수 임운학 탁계명 조병완 함병수 최경무 김계진 황임현 임술사월일(七星契員李在浩金鐘洙金麟壽林雲鶴卓桂明趙秉完咸炳守崔景無金戒眞黃壬炫壬戌四月日)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불이문 앞 당간지주(乾鳳寺 不二門 幢竿支柱)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찰(현존 고사찰 및 부속건물)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건봉사
【유적내용】
불이문 앞 약 70m거리의 길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좌지주(남편)의 크기 현고 123cm× 폭 45cm × 두께 19cm이다. 2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남남동향을 하고 있다.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이다. 고성군 보고서에는 없던 아래쪽 구멍이 드러나 있는데 지름은 9cm이고 윗구멍과의 간격은 64cm이다. 우지주(북편)는 왼편 것보다 크기가 작고 지형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재를 사용했으며 안정감있게 아래부분으로 내려갈수록 두께가 두텁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1―①(乾鳳寺 入口 浮屠群1―①)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모두 23기의 부도가 3열을 이루고 있다. 이들 부도는 대부분 사찰 경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도의 탑신과 지대석(또는 받침)의 대부분이 제짝이 아닌 임시적으로 맞추어 놓은 것이다. 강릉대학교의 조사 순서에 의해 설명한다. 정원당탑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1석으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89cm×84cm×5cm의 크기로 상면에는 지대석과 일체인 원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부 중 하단에는 방형 지대석 상면에 2단의 받침이 있다. 하단에는 복엽 14판의 복연을 조식하였고, 상면은 1단의 받침을 조출하였다. 석종형 부도는 높이 97cm로 상단에는 2단의 돌출대를 마련한 후 부도를 조출하였다. 탑신에는 자경 5cm의 크기로 정원당 면홀종(井原堂 勉○鐘)의 명문이 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2m이다. 용봉당탑(龍峯堂塔)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1석으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일변 길이 lOOcm, 높이 llcm의 크기로 상면에 3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의 하단부에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중단은 8각형의 받침이, 상단에는 1단의 받침 원형 받침이 조출되었다. 석종형 부도는 높이 1.2m로 상단에는 1단의 돌기 위에 보주를 놓았다. 탑신에는 자경 15cm의 크기로 용봉당서진종(龍峯堂舒眞鍾)의 명문이 있다. 전체 높이는 1.5m이다. 심연당탑(湛然堂塔)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1석으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일변 길이 103cm, 높이 llcm의 크기로 상면에 원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의 하단부에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상면에는 1단의 8각형 받침이 조출되었다. 탑신은 높이 1.2m로 상단에는 1단의 돌기 상면에 탑신과 일체로 연봉형 보주를 놓았다. 탑신에는 자경 9cm의 크기로 심연당 재민종(湛燕堂載敏鍾)의 명문이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45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 1―②)(乾鳳寺 入口 浮屠群1―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포운당탑(抱雲堂塔)은 장방향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111cm×95cm×41cm의 크기로 상면에 원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지대석의 전면에는 100cm×25cm 크기의 장방향 액내의 초화문이 약각되었고, 측면에도 41cm×21cm 크기의 액(안상)을 1개소식 마련하고 내부에 범어를 새겨 놓았다. 원형의 받침부에는 단엽 26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돌려져 있으며 간지에 간엽이 새겨겠다. 탑신은 높이 90cm로 상단에는 옥개석 및 보주가 놓여있다. 탑신에는 자경 12.5cm의 크기로 포운당(抱雲堂)의 명문이 있다. 탑신의 상면에는 7곳의 판내에 화문이 새겨진 보산화문이배치되어 있다. 8각형의 옥개석은 상륜과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낙수면의 합각성은 두툼하게 처리하였다. 낙수면 위에는 U자형의 파상문이 양각되어 마치 옥개석의 상면을 덮고 있는 듯하다. 상면에는 연주문대가 있고, 이어 상하에 U자형(초생달형)5개교가 교차 시문되어 유려한 곡선미를 보이고 있다. 상면에는 1단의 돌대 위에 연봉형 보주를 마련하였다. 탑신부와 옥개석 하부 밑면에 조식된 탑신연벽부 지름이 13cm차이를 보이고 있다. 부도 전체의 높이는 2.1m이다. 법해당탑(法海堂塔)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1석으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일변 길이 lOlcm, 높이 llcm의 크기로 상면에 원형의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의 하단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상단에는 1단의 원형 받침대가조출되어 있다. 탑신은 높이 104cm로 상단에는 4개소에 궐수문이 양각된 낮은 보주가 조출되어 있다. 탑신의 표면에는 자경 lOcm의 크기로 "법해당최씨 생사리지탑(法海堂崔氏生含利之塔)"이란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부도전체의 높이는 115cm이다. 용안당탑(龍岸堂塔)은 4각의 지대석 상면에 지대석과 일체로 된 8각의 하대석(받침석)을 만들고 위에 탑시와 옥개가 1석으로 조성된 부재를 놓았다. 하대석은 지름 75cm, 높이 46cm로 8각의 상다리 모양으로 각면을 구성하였다. 상면에는 8각형의 1단 받침 위에 낮은 원형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상․하면이 평평한 항아리 모양으로 전면에 자경 9cm의 크기로 용안당탑(龍岸堂塔)이란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4모 지붕에다 낙수면 중심부에 '팔(八)'각 지붕형상을 조식하였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34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 1―③(乾鳳寺 入口 浮屠群1―③)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일암당탑(日應堂塔)은 장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하대석 및 탑신과 옥개석을 놓았다. 지대석은123cm×120cm×8.5cm의 크기로 상면에 8각형의 2단 받침을 지대석과 일체로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 하단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받침 상단에는 각면의 내부에 안상이 1구씩 조식된 29cm×8cm의 장방형 액이 모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지름 62cm의 음각 원문을 돌린 후 탑신을 안치하였다. 탑신은 상․하가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높이 89cm인데, 전면에는 자경 lOcm의 크기으로 일암당(日庵堂)이란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민공을 알 수 있다.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된 옥개석은 낙수면의 합각선에 두툼한 우동선이 표현되어 있고, 경사가 급하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으며, 상면에는 각면 1개씩의 연속되는 U자형의 파상문이 양각되어 마치 개석의 상면을 덮고 있는 듯하다. 상면에는 연주문대, 상․하 교차되는 U자형의 파상문대 상면에 연봉형 보조가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2.07m이다. 석봉당탑(石峯堂塔)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각 1석으로 조성된 하대석과 탑신 및 옥개석을 놓았다. 지대석은 일변길이 lllcm, 높이 23cm의 크기로 상면에 높이 26cm의 원형 2단 받침대 마련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의 하단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8판의 복연이 조식되었으며, 간지에는 간엽이 있다. 이 상면에 1단의 낮은 월형받침대는 양각으로 조식하고 받침의 상단에는 연판의 중앙에 세로선이 있는 단엽 18판의 양연이 조식되어 있는데, 간지에는 간엽이 표현되어 있다. 탑신은 상․하가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높이 75cm인데, 전면에 16cm×3cm, 11cm×30cm의 2중으로 음각한 장방형 액내에 석봉당(石峯堂)의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8각형으로 낙수면의 합각성에 두툼한 우동선이 표현되었고, 각면의 상단에 1구색의 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면에는 부등변 8각형의 부재를 놓았는데, 넓은 면에는 범자문(梵字文)이, 좁은면에는 U자형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연봉형의 보주를 놓았다. 부도전체의 높이는 1.85m이다. 해운당탑(海雲堂培)은 정방형의 지대석과 상면에 1석으로 조성된 받침에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지대석은 일변 길이 124cm, 높이 21cm의 크기로 상면에는 1단의 8각형 받침대를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상․하면이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높이 76cm인데, 전면에 자경 lOcm 크기로 해운당(海雲堂)이란 명문이 있다. 옥개석은 8각형으로 낙수면의 합각선이 두툼하고, 상면은 8각형 평면으로 처리하였는데, 지대석과 부도의 하면이 비례가 맞지 않은 곳으로 보아, 다른 부도의 부재와 혼합되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부도 전체의 높이는 133c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1―④(乾鳳寺 入口 浮屠群1―④)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진곡당탑(震谷堂塔)은 방향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한변의 길이 108cm, 높이 25cm의 크기로, 상면에 2단의 8각형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하단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어 있고, 상단에는 8각형의 1단 받침이 조출되어 탑신을 받고 있다. 석종형의 탑신은 높이 76cm로 전면에 음각으로 세겨 16cm×44cm, 13.5cm×42cm의 2중 장방형액내에 자경 14cm의 크기로 진곡단(震咎堂)이란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탑신의 상면에는 판이 넓은 8엽의 화문이 배치되어 있으며, 화문의 사이는 형으로 파였다. 상면에 넓고 낮은 원형의 1단의 받침이 있으며, 1단의 돌대 위에 연봉형 보주가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74m이다. 보주에는 하단에 단엽 5판의 양연이 있고, 이 양연의 사이에도 양연을 조식하여 연꽃봉오리 형태를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부도대석은 81cm×83cm×l3cm 크기의 지대석 상면에 원형 2단 받침이 조출되어 있는데, 파손이 심하다. 하단에는 복엽 18판의 복연이 조식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면에는 1단의 원형 받침이 있다. 비석좌대 및 부도개석은 66cm×58cm×21cm 크기의 장병형 비석좌대와 상면에 높이 40cm의 옥개석이 놓여있다. 좌대 윗면에는 비를 세울 수 있는 37cm×18cm×6cm 홈이 남아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낙수면의 합각선이 낮게 묘사되어 있다. 상면에는 1단의 원형받침위에 연봉형 보주가 놓여 있다. 청담당탑(淸潭堂塔)은 장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각 1석으로 조성된 탑신과 옥개석을 놓았다. 지대석은 일변 길이 80cm, 높이 24cm의 크기로 상면에 깊이 2cm, 크기 35cm×44cm의 장방형 홈이 있다. 탑신은 상․하면이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높이 67cm인데, 측면에 횡서로 자경 11cm 청당당(淸潭堂)의 명문이 있고, 뒷면에도 자경 15cm의 크기로 청담당(淸潭堂)의 명문이 종서로 음각되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8각형으로 처마가 넓고,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여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낙수면의 상면에는 U자형의 연속된 화문이 있어 마치 개석을 덮고 있는 듯하다. 1단의 돌대 위에 연봉형 보주가 있다. 정황으로 보아 지대석(또는 받침석), 탑신, 개석 모두 서로 다른 부재들을 모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전체 높이는 1.36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1―⑤(乾鳳寺 入口 浮屠群1―⑤)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건봉사
【유적내용】
용은당탑(龍垠堂塔)은 원형의 지대작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지름 97cm, 높이 27cm이다. 받침석을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탑신은 높이 113cm 전면에 자경 13cm의 크기로 "용은당○○종(龍塤堂○○鍾)"이라는 명문이 있다. 상면에는 연봉형 보주가 있다. 부도의 높이는 140cm이다. 청신대범화탑(淸信大梵華塔)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일변 길이 92cm, 높이 8cm의 크기로 상면에 2단의 원형 받침대를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의 하단에는 복엽 17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상단에는 낮은 원형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높이 155cm로 전면에 자경 lOcm의 크기로 청신대범화(淸信大梵華)의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수 있다. 탑신의 상면에는 탑신과 일체로 1단의 돌단위에 연봉형 보주가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82m이다. 무명부도(無名浮屠)는 장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91×88×33cm의 크기로 각 모서리의 모를 죽였다. 탑신은 높이 131cm로 상면에 연봉형 보주가 있다. 보주는 상면으로부터 완전한 S자형을 그리며 10엽의 화문이 음각되어 있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64m이다. 연하당외(蓮河堂外) 3인탑(人塔)은 원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지름 116cm, 높이 27cm의 크기로 상면에 1단의 원형 받침대가 조출되어 있다. 탑신은 높이 13Ocm로 전면에 자경 7cm의 크기로 "연하당윤선 연지당영수이 만일회동시생사리탑 연주당윤익이 연호당금윤 을묘구월(蓮河堂閏宣 蓮池堂永守二萬日會同時生舍利塔 蓮舟堂允益二 蓮湖堂錦允乙卯九月日)"의 명문이 있다. 탑신과 일체로 연봉형 보주를 올렸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57cm이다. 해월당탑(海月堂塔)은 원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지름 72cm, 높이 13cm의 크기로 부등변 8각형에 가까운 원형 지대석이다. 탑신은 높이 110cm로 전면에 자경 10cm크기로 해월당 생사리탑(海月堂生舍利塔)의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수 있다. 정상에는 연봉형 보주를 올렸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57c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1―⑥(乾鳳奇 入口 浮屠群1―⑥)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정파당탑(井波堂塔)은 8각형의 기단부에 항아리형의 탑신 및 옥개석을 구비한 부도이다. 기단은 높이 55cm로 하대․중대․상대석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석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어 있다. 하대석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의 복연이 조식되어 있다.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동자수가 표현되어 있는데, 각면에는 지름 13cm의 원내에 범자문이 양각되어 있다. 상대석은 8각형인데 하단에 2중 단엽 16판의 양연이 조식 되었는데, 간지에는 간엽이 표현되어 있다. 상단의 각면에는 12.5cm×8cm의 장방형 액내에 2구씩의 안상이 조식되어 있다. 탑신은 상․하면이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높이 67cm인데, 전면에 자경 lOcm의 크기로 정파당(井波堂)의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수 있다.
옥개석의 8각형으로 낙수면이 짧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다. 상면에는 U자형의 화문이 파상문을 그리며 각면에 1구씩 조식되어 있다. 상면에는 원통형의 받침대가 있고, 그위에 연봉형 보주가 있다. 전체 높이는 1.82m이다. 금계화탑(金桂花塔)은 방형의 지대석 탑신과 옥개석이 1석으로 조성된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76cm×74cm의 크기로 상면에 8각형의 2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받침하단은 연엽이 조식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마모가심하다. 탑신은 상․하가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60cm인데, 전면에 자경 10.5cm의 크기로 두자씩 종서하여 좌행으로 "처사김계화사리탑(處士金桂花舍利塔)"의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탑신과 1석으로 조성된 옥개석은 탑신의 상면만을 덮을 정도로 작다. 낙수면이 짧고. 합각성에는 우동선이 두툼하다. 상면에는 U자형의 파상문이 화문을 구성하고 있고, 상면에는 양각선 동대 위에 연봉형 보주가 있다.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전체높이는 115cm이다. 비좌(碑座)는 74cm×56cm×21cm의 크기의 장방형 비좌 상면에 56cm×28cm, 깊이 6cm의 비공이 있다. 하운당탑(河雲堂塔)은 비좌 상면에 탑신과 옥계석이 1석으로 조성된 부도를 놓았다. 비좌는 장방형으로 70×56×31cm인데, 상면에 장방형 비공이 있다. 탑신은 상․하가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높이 53cm인데, 전면에 자경 lOcm의 크기로 하운당(河雲堂)이란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8각형으로 낙수면이 짧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상면에는 연속된 U자문이 파상문을 그리며 각면 1구씩의 화문을 구성하고 있다. 상면에 보주를 받기 위한 낮은 받침대가 있다. 전체 높이는 108cm이다. 비석부재(碑石部材)는 73cm×62cm×27cm 크기의 장방형 비좌 상면에 일변 80cm, 높이 44cm의 옥개석이 놓여 있다. 옥개석은 4모 지붕형으로 낙수면 합각선이 두툼하고, 상면은 장방형의 형태이다. 낙수면에는 상부로부터 흘러내린 U자형 음각선이 화문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2―①(乾鳳寺 入口 浮屠群2―①)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이 곳에는 모두 46점의 비석, 부도, 대석등이 들어서 있다. 고성군․강릉대학교에서는 이를 4개군으로 나누어 조사 서술하였는데, 아래 서술도 이를 따르고자 한다. 자세한 배치도는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에서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을 참고하기 바란다. 대운당비(大雲堂碑)는 장방형의 비좌 상단에 옥개석을 놓았다. 비좌는 115cm×94cm×21cm의 크기로 상면에 높은 호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하였다. 비신은 너비 46cm, 높이 86cm, 두께 41cm 크기의 비신을 세웠다. 2면비로 전면의 상단에 자경 3cm의 전서(業書)로 대운당비(大雲當碑)라고 쓰고 주칠을 하였다. 이수는 4모 지붕형으로 낙수면의 합각선이 두툼하고, 추녀가 넓다. 각 낙수면의 상단에는 넓은 화문이 1구씩 조식되어 있다. 이수의 상면은 방형의 형태로 정상에는 단엽 8판 양연이 조식된 원구형 석재가 있다. 이 비석의 말미에 "가경사년기미육월립치관서(嘉慶四年已未六月立致寬書)"라 쓰여 있어 1799년(정조 23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대운당비명병서후학영송태활찬근철전(大雲堂碑銘幷書橋學永松太活撰近喆篆)"으로 시작되는 비문의 내용은≪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史蹟)≫에 소개되어 있다. 전체높이 2.1m 무명부도(無名浮屠)는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1석으로 8각형의 받침이 조성되었고, 그 위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일변길이 156cm, 높이 23cm의 크기로 상면에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 복연이 조식된 8각형의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은 높이 163cm이며 정상부는 1조의 깊은 음각선을 둘러 연봉형 보주와 구별하고 있다. 보주의 하단에는 단엽 7판의 양연이 조식되어 있다. 부도 전체의 높이는 2m이다. 몽월당탑(夢月堂塔)은 부등변 팔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121×128×8cm의 크기로 상면에 높이 13cm의 8각형 탑신 받침부가 지대석과 일체로 조출하였다. 탑신 받침부 상면이 8각으로 음각되어 있고. 현 탑신하부로 8각으로 조형되어 있긴 하나 크기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현 탑신과 관계없는 기단부로 생각된다. 탑신은 높이 123cm로 하단은 탑신보다 작은 8각형의 중대석이 마련되었고 상면에 원형에 가까운 8각형 상대석과 받침이 있다. 이로부터 탑신부로 올라가면서 호형으로 1조의 돌대가 있고, 안쪽으로 2조의 음각선을 돌리며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다. 탑신부는 종형이며, 전면에 자경 14cm로 몽월당(夢月堂)이란 명문이 있다. 탑신의 상면에는 복엽 15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상면은 평평하다. 낮은 보주에는 정상으로부터 음각선이 완만한 바람개비 모양의 S자형을 그리며 5엽의 화문을 구성, 연봉을 표현하고 있다. 전체높이는 140cm이다. '대한제국금강산건봉사제이미타회연기비(大韓帝國金剛山乾鳳寺第二彌陀會緣起碑)'는 장방형의 비좌 상면에 비신과 이수를 놓았다. 비좌는 96cm×67cm×20cm의 크기이다. 비신은 55cm×155cm×23cm로 4면에 모를 죽였다. 1면비로 자경 4cm크기의 명문이 있다. 이수는 화형(花形)으로 너비 87cm, 두께 48cm, 높이 63cm이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4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2―②(乾鳳寺 入口 浮履群2―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용허당석민대선사비(聳虛堂碩旻大禪師碑)는 장방형의 비좌 상면에 비신과 이수를 놓았다. 비좌는 80cm×55cm×7cm의 크기로 각면의 모를 죽였다. 비신은 138cm×50cm×19cm의 크기이다. 1면비로 자경 3cm 크기의 명문이 있다. 이수는 화형으로 너비 87cm, 두께 14cm, 높이 54cm이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05m로 1908년(순종 2년)에 건립한 비석이다. "건봉사제삼백련결사화주 전불심인대각등계용허당석민대선사 가경임슬하창도광기축추종 속성봉화정씨본군간성차동 융희이년술신맹추립감동만화(乾鳳寺第三白蓮結社化主 傳倂心印大覺登階聳虛堂碩旻大禪師 嘉慶壬戌夏創道光己丑秋終 俗姓奉化鄭氏本郡杆城差同 隆熙二年戌申孟秋立監臺萬化)"군수 이용학선정비(郡守 李容學善政碑)는 장방형의 비좌에 1석으로 조성된 비신과 이수를 꼽았다. 비좌는 85×35×20cm로 자경은 6cm이며 전면에 "군수이공용학선정비(郡守李公容學善政碑)"라 새겼다. 이수는 전면에 초화문이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1.37m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으나 건립연대는 불여하가. "번역동보아반공덕 군수이공용학선정비사역역감 영세송축(番役銅補我伴功德郡守李公容學善政碑寺役亦減永世頌祝)" 풍곡당탑(楓谷堂塔)은 기단부와 탑신 및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기단부는 기단석이 없이 8각원당형으로 하대․중대․상대석이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대석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16판의 복연이 보식되어 있다. 중대석의 각면에는 지층 12cm의 원내의 범자(梵字)가 1구씩 양각되어 있는데, 각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상․하에 각형 1단의 받침대를 조출하고 있다. 상대석은 하면에 종선이 뚜렷한 단엽 16판의 양연이 조식되어 있다. 상대석의 각면에는 24×8cm의 장방형 액내에 안상이 1구씩 있다. 상․하단이 평평한 항아리형으로 전면에 자경 18cm의 크기로 풍곡당(楓谷堂)이란 명문이 있다. 옥개는 탑신과 일체로 8각형으로 낙수면이 짧고,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상면에는 U자형의 파상문을 그렸으며 각면에 1구씩의 화문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연봉형 보주가 있다. 전체 높이는 1.5m이다. 금월당탑(錦月堂塔)은 장방형의 기단부 상면에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100cm×88cm×42cm의 크기로 상면에 원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에는 간지에 간엽이 있는 단엽 34판의 양면이 조식되였고, 상면에 2단의 원형 받침대가 조출되었다. 탑신은 높이 130cm로 전면에 자경 11cm 크기의 금월당(錦月堂)이란 명문이 있다. 상면에는 판이 넓은 단엽 10판의 복연이 조식되었고, 이 위에 연주문대와 단엽 16판의 양연이 선각된 돌대가 있다. 상면에는 보주가 있는데, 측면에는 파상문을 그리며 4엽의 화문이 형성되어 있다. 전체의 높이는 1.83m이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2―③ (乾鳳寺 入口 浮屠群2―③)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송악당탑(松岳堂塔)은 장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각 1석으로 조성된 탑신과 옥개석을 놓았다. 지대석은 100cm×92cm×13cm의 크기로 상면에 부등변 8각형의 1단 받침을 조출하였다. 탑신은 높이 44cm로 상하단이 평평한 원구형인데, 전면에는 자경 12cm 크기의 횡서로 송악당(松岳堂)의 명문이 있다. 옥개석은 탑신에 비해 높고 넓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며 합각선이 두툼한데, 상면에는 U자형의 파상문이 화문을 그리며 각 낙수면을 덮고 있다. 상면에는 별석으로 조성된 받침과 보주가 있다. 전체 높이는 1.47m이다. 재봉당탑(雲峯堂塔)은 부등변 8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1석으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93cm×l00cm×l1cm의 크기로 상면의 1단 받침에는 단엽 27판의 복연을 조식하고 있다. 탑신은 높이 120cm로, 15cm의 크기로 재봉당(雲峯堂)의 명문이 있다. 상면에는 판이 넓은 단엽 8판 복엽이 조식되었고, 정상에는 낮은 2단의 원형 받침 위에 연봉형 보주가 탑신과 일체로 돌려져 있다. 전체 높이는 1.4m이다. 진각당탑(眞覺堂塔)은 부등변 8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1석으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70cm×80cm×l3cm로 상면에 1단의 낮은 원형의 받침대가 조출되어 있다. 탑신은 높이 ll7cm로 전면에 자경 12cm의 크기로 진각당(眞覺堂)의 명문이 있다. 상면에는 단엽 16판 복연이 조식되어 있고, 정상에는 낮은 1단 받침과 1조의 돌대 상면에 연봉형 보주가 있다. 보주의 측면에는 간지에 간엽이 있는 단엽 6판의 양연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의 높이는 1.3m이다. 능허당비(凌虛堂碑)는 장방형의 비좌와 비신, 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103cm×70cm×32cm로 각변의 모를 죽였다. 탑신은 52cm×l38cm×21.5cm의 크기로 각변의 모를 죽였으며, 전면에는 3행이 기록되어 있는데, 중방에 자경 lOcm의 크기로 "대공덕주능허당대선사기념비(大功德主凌虛堂大禪師記念碑)"라 새겼고, 후면에는 자경 4cm의 크기로 "불기이구삼오년무진삼월일립(佛紀二九三五年戊辰三月日立)"의 비문이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은 1924년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8작지붕의 형태이다. 비석전체의 높이는 1.93m이다. 능허당비 전면과 배면의 내용은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지≫에 상세하다. 만화당비(萬化堂碑)는 장방형의 비좌와 비신, 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 105×88×46cm의 크기로 각면의 모를 죽였다. 비신은 62cm×183cm×35cm의 크기로 2면비이다. 전면의 상단에는 자경 8cm 크기의 전서(篆書) 만화당대선사비(萬化堂大禪師碑)라 쓰여 있다. "부종수교전불심인대각등대존자전수호오대산적멸보궁겸팔도승풍규정도원장만화당대선사비명병서(扶宗樹敎傳佛心印大覺登大尊者前守護五大山寂滅寶宮兼八道僧風糾正都院長萬化堂大禪師碑銘幷書)"로 시작되는 비문은 자경 3cm의 크기로 내용은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에 소개되어 있다. 옥개석은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비석 전체의 높이는 2.72m로 1940년에 건립되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교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2―④(乾鳳奇 入口 浮屠端2―④)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일암당대성사비(日庵堂大禪師碑)는 장방형의 비좌와 비신, 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 98cm×54cm×35cm의 크기로 각변의 모를 죽였다. 변성암인 비신은 61cm×l45cm×18cm의 크기로 4면비이다. 전면상단에 자경 lOcm 크기의 전서(篆書)로 "일암대사지비(日底大師之碑)"라고 쓰여 있으며, 나머지 "유조선국일암대사탑비명 병서(有朝鮮國日庵大師塔碑銘幷書)"로 시작되는 비문의 자경은 2cm로 내용은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에 소개되어 있다. 옥개는 팔작지붕의 형태로 일부가 파손되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1.5cm로 1830년(순조30)에 건립되었다. 벽오대종사비(碧梧大宗師碑)는 장방형의 비좌와 비신,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 106cm×74cm×40cm의 크기로 각변의 모를 죽였다. 비신은 58cm×182cm×27cm의 크기로 3면비이다. 전면의 상단에 자경 12cm 크기의 전서로 "벽오대종사비"라고 쓰여 있다. "대한국강원도간성건봉사설제사연회벽오대선사유적비 통정대부전승정원우부승지지제 교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양 여규형찬 전승정원우승지 월성이여영서병전(大韓國江原道杆城乾鳳寺設第四蓮會碧梧大禪師遺鑛碑通政大夫前承政情右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官修撰官○○陽呂圭亨撰前承政流右承旨月城李如營書幷篆"라 시작되는 비문은 전면 57자 20행으로 자경은 2.5cm인데, 내용은 ≪건봉사본말사적≫에 소개되어 있다. 옥개석은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64cm이고, 광무갑진(光武甲辰)(1904년)칠월에 건립되었다. 벽오대종사비 음기(碧梧大宗師碑陰記) 산중 시원장서념묘윤 강주인담명선 희주고봉금용입승현응법장 노덕포련장익 완봉보유 쌍월창신보운본엽 청암영책 시승통설암봉흔 서기 수천수승 승찰 승족 완허형순 운당의하 금암의훈 상좌 사림의환 계산환주 보원 선 월산우상 보응정기 의룡취연 서파급우 계 풍계혜명 동곡현호 혜운재천 청월축언 남명선조 혜곡이화 구연대인 연하계창 해연보경 손운파도념 성해도삼 증보산민휴 경월병운 금호탄문 민협 철현 별좌대허종원 도감금선탄법 월암성욱 화주만화관준 사 청호학밀 각 송악재욱 읍연
(山中時院長西念妙允 講主印潭明禪會主高峰金容立繩玄應法藏老德浦蓮壯翊 玩峰普有雙月昌信寶雲本葉靑岩永策時僧統雪岩奉欣書記 壽天 首僧 升察僧族 玩臺亭淳雲潭宜荷錦岩宜熏 上佐寫林宜還 桂山幻周 寶元 禪月山愚上 普應定基義龍取淵西坡及右 戒楓桂惠明東谷玄昊惠雲在天靑月竺彦南溟亘祖惠谷理和九蓮大仁連荷啓昌海蓮寶鏡孫雲坡道念性海道三會寶山玟休鏡月丙云錦湖坦文政協喆玄別座大虛宗元都監錦仙坦法月岩性旭化主萬化寬俊寫靑胡學密剖松岳在郁泣連)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입구 부도군 2―⑤(乾鳳奇 入口 浮屠群2―⑤)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의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건봉사만일연회기비(乾鳳寺萬日蓮會緣起碑)는 장방형의 비좌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좌는 112cm×74cm×32cm의 크기로 각변의 모를 죽였다. 비신은 58.5cm×l83cm×25.5cm의 크기로 3면비이다. 전면이 상단에 자경 13cm 크기의 (篆書)로 "건봉사연회비(乾鳳寺蓮會碑)"라고 쓰여져 있다. "대한국간주건봉사만일연회연기비명 승록대부석정부찬정내부대신겸흥문관학사 조병필찬 승정대부의정부찬정농상공부대신 김가진서 통정대부전행대구판관 정학교전(大韓國杆州乾鳳寺萬日蓮會緣起碑銘崇祿大夫議政府贊政內部大臣兼弘文館學士趙秉弼撰崇政大夫證政府贊政農商工部大臣金嘉鎭書通政大夫前行大邱判官丁學敎篆)"으로 시작되는 비문은 전면 59자 20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경은 3cm이다. 내용은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에 소개되어 있다. 본문내용은 모두에 주칠을 하였으나 대부분이 박리되어 그 흔적만이 조금씩 남아 있다. 이수는 팔작비붕의 형태이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55m로 "광무팔년 갑진산월(光武八年甲辰三月)"에 건립하였다. 건봉사만일연회기비 음기(乾鳳寺萬日蓮會緣起碑陰記) 청호학밀 혜암처인 언암영책응호도잡무경영대영 동파보일 ○봉일호 서륜두삼 지연 석○ 개협 효원 계윤 수천 대○ 재○ 벽담대규 부여○○ 선화대○ 금선탄법 지○ 무법 보륜지유 백○선명 민휴 해전 동흔 축인 금완수찬 현조 일삼 한월창규 사럼의환 공암포○○ 학암무준 능허계명 사송효열 연봉우선 구근 능효지윤 축잠 응기 흥운 정선 수갑 경담본일 현응법장 용답태영 송수월오 성해도삼 대수법문 운답의하 태화 보상 적관학기 금흔 병근 지종 기환 포수장익 성당법념 운파도념 회명일승 고○○○ 능운재예 율암천석 ○○훈 동예삼명 학근 응완 형완 응책 보형 서념묘윤 월송종섭 벽응무오월암성욱 경월병운 사은법안 용운봉안 ○○위재책 입찰 각민 근우 재근 학의 성옥 재영장행운 쌍월창신 보응정기 설암동혼 태응처원 영암석조 인응방향 고봉금용 ○○응 지영 철현 응민 계상 ○○학 거
문 재순 선암천명 동림○○혜 응화인함 용성세윤 설위○○권 혼원세장(靑潔學密 慧庵處仁焉雇永策應潔○瓊無影大英東坡寶日○峰日昊西輪斗三智衍錯○改協孝源啓胤壽天大○在○碧潭大奎孚如○禪和大○錦仙坦法智○無法賓輪知柔白○宣冥玟沐海著東昕竺仁錦完壽粲玄照一三漢月昌奎寫林宜還空岩布○○學岩無俊凌虛桂明瀉松孝悅 蓮峰祜宣求根能孝智允竺岑應機興雲定禪秀甲鏡澤本日玄應法莊龍潭太英遂月○悟性海道三大遂法文雲澤宜荷泰華普祥的觀學紀錦昕 炳根智宗基煥浦遂壯翊性潭法念雲坡道念晦溟日升古○○○凌雲在藝栗庵千石○○薰東藝三暝學勤應完亨還應柵普洞西念竗允月松宗燮碧應與旿月庵性旭鏡月丙云寫隱法眼龍雲奉玩○○爲在柵立察覺敏勤祐在根學依性玉在英鏡幸芸雙月昌信普應定基雪岩東欣太應處源嘆庵錫祚印應昉亨高峰金容○○雄智瑩喆玹應旻桂祥○○學巨門在順禪庵天明東林○○惠應化仁含龍成世閏雪爲○○權混源世章)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팔상전지 부도군 ①(乾鳳촐 八相殿地 浮屠諦①)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적멸보궁 뒷편의 부도군은 '90년 조사보고 때는 보이지 않던 방형의 2중 기단 위에 놓인 석종형 부도가 안치되어 있다. 이 부도는 또 석제를 올타리를 둘러 놓았는데 통도사와 같은 양식을 보이는 현대의 구조물이다. 석종형 부도는 1은 부등변 팔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화강암제석종형 부도를 올려 놓았다. 지대석은 147cm×l57cm×21cm의 부등변 팔각형으로, 상면에는 높이 16cm의 받침부를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받침의 주위에는 단엽 복판의 32엽의 복엽이 조식되어 있고, 상면에는 1단의 돌출대를 중심으로 내면에 폭 3cm의 홈이 파여 있다. 탑신의 높이는 160cm인데, 상면에는 탑신과 1석으로 조상된 보주가 있다. 석종형 부도 2는 지대석 상면에 하대석 및 탑신과 옥개석이 일석으로 조성된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부등변 팔각형으로 116cm×l16cm, 높이 16cm의 크기이다.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1변의 길이 35cm, 높이 25cm의 크기이다. 탑신은 원통형으로 높이 80cm의 크기인데, 상면에는 7각형의 옥개석이 한돌로 조성되어 있다. 낙수면은 길이가 짧고 움푹 패인 형상인데 합각선은 우동이 두툼하다. 상면에 는 연봉형 보주 1석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팔상전지 부도군 ②(乾鳳寺 八相殷址 浮屠諦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부도(각종형식 부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치아사리탑은 방형의 지대석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구비한 팔각원당형의 부도이다. 지대석은 67cm×177cm, 높이 24cm의 크기인데 각 변은 모를 죽여 약간 경사지게 하였다.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다. 하대석은 일변 길이 48cm, 높이 37cm의 크기 인데,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에는 각면에 안상을 1구씩 조사하고 있는데, 이의 상단 좌우에는 고사리문을 1구씩 음각하고 있다. 상면에는 1단의 각형받침을 조출하여 상단과 구분을 하고 있다. 상단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을 복연을 조식하고 있는데, 판단에는 낮게 귀꽂이 표현되어 있다. 중대석은 팔각형으로 1변의 길이 25.5cm, 높이 30cm이다. 각면에는 16cm×l0cm크기의 장방형 액내에 지름 18cm의 원문(圓紋)을 새기고, 내면에는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상대석은 1변 길이 42cm, 높이 31cm의 크기로, 하면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의 양연이 음각된 I6cm×10cm 크기의 장방형 액을 2구씩 음각하였다. 탑신은 높이 53cm의 원구형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다. 옥개석은 팔각기와지붕형으로 낙수면과 상면이 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낙수면은 깊게 패여 있고, 처마는 U자형에 가까울 정도로 반전이 심하다. 각 낙수면을 연결하는 합각선은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다. 낙수면의 상부는 상륜부와 일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합각선을 사이에 두고 U자형문이 연속 표현되어 파상문을 이루고 있어 마치 옥개석을 덮고 있는듯하다. 1석으로 조상된 상륜부는 연주문대, 편구형 부재, 상단에는 여의두문이 하단에 화문이 조식된 부재가 있다. 이 위에 완만한 U자형이 상하에서 교차 시문된 부재 및 연봉형 보주가 하단에서 부터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리탑의 전체 높이는 1.6m이다. 세존영아탑비(世尊靈牙塔碑)는 비좌․비신․이수를 구비한 석비이다. 비좌는 125cm×63cm×45cm의 크기로 각변의 상단에 모를 죽인 장방형의 형태이다. 비신은 57cm×184cm×27cm의 크기로 3면비이다. 측면에는 "대한광무십년병오립(大韓光武十年丙午立)"이라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1906년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는폭 100cm×38cm, 높이 90cm의 크기로 여의두문의 형태이다. 전면에는 지름 47cm의 원문내에 태극문이 있는데, 좌우에도 이를 모본으로 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배면에는 상․하에 여의두문을 배치하고, 나머지 여백에는 안쪽으로 끝이 말린 호형(弧形)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이수의 상면에는 연봉형 보주가 놓여 있다. 전체 높이는 3.18m이다. 비문 내용은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讓)≫에 게재 되어 있다. 석가여래치상립탑비(釋迦如來齒相立塔碑)는 3조각으로 깨졌으나 세존영아탑비(世尊靈牙塔碑) 옆에 복원되어 있다. 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석의 전체 크기는 152cm×58cm×24cm이며 화강암제로 1726년 (영조 2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에 게재되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 홍예교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찰(현존 고사찰 및 부속건물)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제 1석교는 불이문으로부터 동남쪽 150m지점, 군부대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석교의 규모는 폭 3.8m 길이 4.7m, 중앙부의 높이는 1.8m이다. 형태는 중앙에 지름 3.4m, 너비 3.64m아치를 구성하고, 좌우에는 날개벽을 구성하고 있다. 홍예의 축조 수법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이위에 19개의 홍예석을 올렸는데 좌우에 9개색 배치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는 하천에 실려온 모래가 쌓이면서 18매만이 확인된다. 홍예를 구성하는 석재는 183cm×32cm, 96cm×34cm, 59cm×24cm 크기의 장대석으로, 하단으로 5번째 박혀 있는 214×33×40cm의 크기의 장대석에 자경 3.5cm 크기의 명문이 있는데, 마별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좌우날개벽의 축종형식(마름모꼴)이나 간지로 보아 1940년 경에 건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2석교는 건봉사 대형 주차장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현재는 상면에 콘크리트로 다시 건설하였다. 상면길이 9.6m, 높이 6m, 폭 3.6m로 하단은 콘크리트로 매몰되어 있다. 중앙에 지름 4.1m의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데, 현재 1단은 콘크리트 속에 대부분 묻혀 있고 28단이 확인된다. 장대석 3―5매로 쌓아 올렸다. 대형 버스 등 차량이 이곳을 통해 건봉사로 진입하고 있는데 벌써 중앙부 쪽은 균열과 틀어짐이 심하여 붕괴될 위험성이 높다. 제3석교는 건봉사의 가장 외곽, 해상리 서편에 위치하는데 건봉사와는 3.1km거리에 있다. 현재는 상면에 목교가 가설되어 있으나 통행이 폐쇄된 상태이다. 다리의 동편은 자연 암반 위에 2매로 1단의 기단을 삼고, 서편은 잘 치석되지 많은 장대석 암괴로 3단의 기초를 쌓았다. 그위에 2―3매의 장대석들로 22줄을 쌓아 홍예교로 완성시켰다. 홍예석열의 윗면에는 자연석 채움을 하고 양날개 부분은 현재 자연돌과 콘크리트로 쌓아 놓았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 6.2m, 폭 3m, 높이 5m(홍예밑까지는 3.7m)로 22개의 홍예석이 아치를 구성하고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건봉사지 ①(乾鳳寺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시 대】삼국 시대<신라>
【관 리 자】건봉사
【유적내용】
건봉사는 금강산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원각사(圓覺寺)가 그 효시이다. 민통선 내에 있어서 세인의 출입이 없었으나. 지금은 많은 신도의 출입은 물론 불사 역시 한창이다. 건봉사에 대해서는 1977년도≪건봉사본말사적≫이 발간된 바 있다. 대웅전, 적별보궁, 산신각 등은 근년의 건축물이고, 적멸보궁 뒷편의 부도군, 능파교 주변, 불이문(不二門)주변, 주차장 주변, 입구의 부도군, 석교의 6부분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적별보궁의 뒷편에는 1단의 석축 상면에 3기의 부도 및 2기의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석종형 부도(石鐘形浮屠)①는 부등변 팔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석조형 부도를 놓았고, 탑신은 석종형으로 높이 160cm인데, 상면에는 탑신과 1석으로 조상된 보주가 있다. 석종형 부도 ②는 지대석 상면에 하대석 및 탑신과 옥개석이 일석으로 조성된 부도를 놓았다. 지대석은 부등변 팔각형이고,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1변의 길이 35cm, 높이 25cm의 크기이다. 탑신은 원통형으로 높이 80cm의 크기인데, 상면에는 7각형의 옥개석이 한돌로 조성되어 있고. 상면에는 연봉형 보주 1석이 있다. 전체 높이는 1.69cm이다. 치아사리탑(齒牙舍利塔)은 방형의 지대석에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구비한 팔각원당형의 부도이다.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으며, 하대석은 일변길이 48cm, 높이 37cm의 크기로,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대석은 팔각형으로 1변의 길이 25.5cm, 높이30cm이다. 상대석은 1변 길이 42cm, 높이 31cm의 크기로, 하면에는 판내에 화문이 있는 복엽 16판의 양연이 조식되어 있다. 탑신은 높이 53cm의 원구형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다.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낙수면과 상면이 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리탑의 전체 높이는 1.6m
이다. 세존영아탑비(世尊靈牙塔碑)는 비좌․비신․이수를 구비한 석비로, 1906년에 건립되었다. 이수는 여의두문의 형태로, 전면에 지름 47cm의 원문내에 태극문이 있고, 좌우에도 이를 모본으로 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이수의 상면에는 연봉형 보주가 놓여 있으며, 전체 높이는 3.18m이다. 석가여래 치상입탑비(釋迦如來齒相立塔碑)는 3조각으로 깨진 채 세존영아탑비 옆에 눕혀져 있다. 능파교 주변에는 귀부(龜趺), 십바라밀석주(十波羅密石柱), 석조(石漕), 절구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귀부는 현재 하단부는 매몰되어 있다. 길이 130cm, 폭 lOOcm의 크기로 상면에 장방형 구멍이 있으며, 얼굴은 평판적으로 전체가 하트형이고, 큰 눈과 코의 뚜렷하며 목이 짧
다. 십바라밀석주는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으로 오르는 좌․우측에 각1기씩 건립되어 있다. 석조는 요사채의 전면에 2기의 석조가 있는데, 1기는 전해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양 석조는 장방형으로 내부에 물을 받기 위한 장방형의 수조(水漕)가 마련되어 있고, 하면에는 수구가 형성되어 있다. 돌 절구는 대웅전의 전면 우측 3기가 있다. 모두 화강암으로 조성된 원통형의 절구로, 외부는 투박하지만. 내면은 곱게 치성하여 음식물을 잘 빻아지게 조성하였다. 불이문 주변에는 나무아미타불 석주(南無阿彌陀佛石柱), 불이문, 능파교비가 있다. 나무아미타불 석주는 길이 3.6m, 폭 2.1m높이 60cm의 자연석 기단에 홈을 파고 석주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45cm로 정복향이다. 1면에는 나무아미타불, 2면에는 불기 2955 무진하(佛紀二九五五戊辰夏), 3면에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4면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 음각되어 있고, 석주의 상면에는 봉황새 1마리를 놓았다. 이 석주는 불이문을 거쳐 사역(寺域)으로 진입하는 통로에 있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으므로 하나의 사지표석이 될 수 있으며, 신앙 의례상 경배의 대상물이 될 불상의 의미로 해석된다. 불이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팔작 지붕을 지녔으며, 익공계 건물로 지붕의 4모통이에 용두(龍頭)가 있고, 정면의 처마 밑에는 김규진이 쓴 "불이문"이란 현판이 달려 있다. 주차장 주변에는 사명대사비(泗溟大師碑)와 백화암법우경원비(白華庵法雨經院碑)가 새롭게 확인되었다. 사명대사 기적비는 건봉사 사명대사의 비석으로, 근래 발견되었다. 비록 파괴 되었지만, 문헌자료와 현상으로 볼때 비신 폭 8Ocm, 너비 33cm, 높이 약 190cm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현재 파악된 비편의 비좌와 이수를 포함할 때 294c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화암법우경원비는 사명대사비의 왼측 언덕에 반쯤 매몰되어 있딘 것을 조사한 것으로, 193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 비석은 비좌와 비신만이 남아 있다. 비신은 높이 175cm, 폭 61m, 두께 30cm의 크기로 3면비이다. 사찰 입구 부도군은 크게 2개의 군을 이루며 건립되어 있고, 이들 부도는 대부분이 사찰 경내의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이전했다. 부도군 ②는 건봉사의 부도전으로. 이곳에는 비석, 부도. 대석 등 모두 46점의 석조물이 건립되어 있다. 이 부도군에 대한 조사는 조형물의 양이 많은 관계로 모두 4개군으로 나누어 조사되었다. 건봉사의 석교는 4개가 있는데, 능교파(凌派橋)는 4개의 석교 중 가장 아름답고, 규모에 있어서도 가장 대형에 속하는 다리로, 조선 숙종 24년 (1708)에 세워진 것이다.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제1석교의 규모는 폭 3.8m, 길이 4.7m, 중앙부의
높이는 1.8m이고, 형태는 중앙에 지름 3.4m, 너비3.64m의 아치를 구성하고, 좌우에는 날개벽을 구성하고 있다. 제2석교는 현재 상면에 콘크리트로 다시 건설한 것으로, 상면 길이 9.6m, 높이 6m, 폭 3.6m로 하단은 콘크리트로 매몰되어 있다. 중앙에 지름 4.1m의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데, 현재는 27단만 남아 있다. 제3석교는 건봉사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석교로, 현재 상면에 목교(木橋)가 가설되어 있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 6.2, 폭 3m이다.
【참고문헌】아세아문화사, 1977, ≪건봉사본말사적유점사본말사지≫ : 고성군, 1990, <십바라밀쌍석주(十波羅密雙石柱)>, ≪건봉사지지표조사보고서≫ : 조선총독부, 1919,≪조선금석총람≫하, pp.1249―1251 : 조선총독부, 1911, ≪조선사찰자료≫, pp.1―5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구 건봉사지 나무아미타불 석주(舊 乾鳳寺沚 甫無阿彌陀佛石柱)
【지정사진】<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석조물(석주)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근대 (1928)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3cm×38cm×38cm의 방형 화강암 석주에 종서(縱書)로 ①나무아미타불 ②나무아미타불 ③불기 2955 무진하(戊辰夏) ④대방광불화엄경을 각면에 새기고 정상에 봉황 한 마리를 조각해서 올려 놓았다. 1928년에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문화채 관리국, 1977,≪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능파교(舊 乾鳳寺址 凌波橋)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석조물(석교)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시대미상>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건봉사에 있는 4개의 석교중 가장 아름답고,규모에 있어서도 가장 대형에 속하는 다리이다. 불이문 입구에 있는 능파교 신창기에 의하면 1708년(숙종 24)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석교의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형태는 중앙의 지름 7.8m, 높이 4m의 아치를 구성하고,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날개벽을 구성하고 있다. 홍예의 축조 수법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이 위에 29개의 홍예석을 올렸는데, 좌우에 14개씩 배치하고 있다. 홍예의 하단에는 길이 267m, 높이 49cm, 길이 300cm, 높이 50축의 장대석 2매를 사용하였는데, 이후로는 긴 장대석, 짧은 장대석을 교대로 하여 쌓아 올려 중심부에서 볼 때 좌우대칭 형태를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능파교비(舊 乾鳳寺址 凌波橋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조선시대 (숙종 34년)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비신의 크기 1.36m×63cm×23cm, 비개(碑蓋)의 크기 60cm×91cm×48cm이며 운파청안(雲坡淸眼) 찬(撰)․서(書)․전(篆)이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31인 등공탑(舊 乾鳳寺址 三十一人 騰空塔)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석탑(석탑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5
【시 대】삼국시대 (신라)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발진 화상이 정신․양순 화상 등 31명과 함께 염불 만일회를 만들고 향도 1828인이 자원하고 발신하여 신라 원성왕 3년(787) 도량 문밖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아미타불이 관음․세지 두 보살과 함께 자금연대를 타고 이르러 염불하는 대동을 맞아 극락세계로 돌아갔는데 이때 스님 31인은 육신등공(肉身騰空)하여 상품 상생하여 의복과 식량을 공급하고 염불향도 1828명 중 913인은 단정히 앉은 채 왕생하고 18인은 상품중생에 31인은 상품하생에 왕생하였다고 전해 오는데 이를 기념한 탑으로 높이 4m이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석가여래 치상탑(舊 乾鳳寺址 釋迦如來齒相塔)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석탑(석탑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높이 1.73m인데 지대석 위에 복연으로 덮힌 3각의 받침을 두어 아무린 조식(彫飾)이 없는 종형(鍾形) 탑신석을 올려 놓은 것인데 소박하면서도 무게 있게 보인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석가여래 치상탑비(舊 乾鳳寺址 釋迦如來館相塔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탑비(부도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조선시대(영조 2년)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파괴되어 쓰러져 묻혀 있는데 월봉선사 쌍식이 찬(撰)․서(書) 및 전(篆)한 것이다. 입비일은 조선 영조 2년(1726)이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석표(舊 乾鳳寺址 石標)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석조물(수표 등)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4각주형 화강암에 "용사활지(龍蛇活地)" "방생장계(放生場界)"라 새기고 여러가지 불교의 문양을 조각한 두개의 석표가 서있고 많은 건물의 축대가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세존영아탑(舊 乾鳳寺址 世尊靈牙塔)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석탑(석탑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조선시대(경종 4년)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높이 3.28m로서 기단은 8각을 기본형으로 하였는데 하대는 각면에 안상을 음각하고 상부에 복연을 양각하여 중석을 받았으며 하대는 양연으로 받치고 각면을 두개의 장방형으로 음각하여 나누고 그 안에 1개의 안상(眼象)을 음각하여 구형(球形)의 탑신을 받고 그 위에 8모의 옥개를 얹었는데 지붕은 물매가 몹시 급하며 상륜부가 옥개에 비해 뭉툭하고 높아 일반적인사리탑과는 다른 이형(異形)이다. 건탑일은 조선 경종 4년(1724)이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구 건봉사지 세존영아탑비(舊 乾鳳寺址 世尊靈牙塔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탑비(부도비 및 그 부재)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군유
【유적내용】
조선 선조 38년(1604)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부처의 치아와 사리등을 봉환하여 왔는데, 이는 자장법사가 당에 가서 부처의 치아와 사리를 봉래하여 통도사․월정사 등 각 절에 분봉하였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병이 통도사에 침입해서 강탈해 갔던 것이다. 비신 1.83m×57cm×27cm, 비좌 82cm×1.03m로서 윤용선(1829―1904) 찬(撰), 박기양(1856―1932) 서(書) 및 전(篆)인데 입비일(立碑日)은 확실치 않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고성 장평리 고인돌(高城 長坪里 支石臺)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장평리
【시 대】청동기 시대
【유적내용】
화진포 콘도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가 위치한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오각형이고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장축 250cm×240cm×30cm―40cm이며 남북방향이다.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석실의 크기는 장축 190cm×120cm이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 지상에 노출되어 북방식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문화유적총람≫에 장평리 유적으로 보고되었으나 현 행정 지도상 화포리에 속하므로 화포리 유적으로 분류된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고성 금구도성지(高城 金龜島城沚)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산1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초도항에서 직선으로 약 500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섬인 금구도에 위치한 성지로, 6.25 이후 지금까지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관계로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해송, 전죽(箭竹), 해당화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섬의 명칭은 화진포호수 쪽에서 바라보면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어 금구도(金龜島)라 불러졌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초도고성(草島古城)≫'으로도 명기되어 있기도 하다. 일제때의 조사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현내면 초도리 국유 초도리부락의 동방 약 이백간(368m)의 해상 금구도에 있음. 연장약백이십간(218m) 대부분 토축 불완전' 이라 되어 있다. 본 조사에서 확인한 성의 구조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령 뚜렷이 남아 있다. 이와 연하는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잔돌끼움 쌓기의 협축법으로 석축한 불연속의 (추정)외성이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현재 잔존하여 있는 길이는 약 60m,높이 170―230cm, 협축벽간거리 약 350cm이다. 해송의 군락이 있는 부근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전죽이 우거져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으나, 건물의 주초석(50cm×50cm)과 기와편, 토기편들이 확인되였다. 유물 및 성벽의 촉조기법으로 보아 북방 세력의 남하, 비번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열산현(烈山縣)의 수성처(守城處)로 추정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죽정리 고분(高城 竹亭里 古墳)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 1리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이 고분군은 고성 화진포 호수 북서편 해발 3―40m 야산 남쪽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이르는 길은 죽정초등학교 입구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600m 가면 화진포콘도 진입로가 나오는데, 이 곳에서 약 850m를 더 진입하여 동편 야산 기슭으로 약 lOOm 정도 오르면 된다. 경사면에 고려시대 질그릇편들이 산재하여 있고 고분의 봉토(3―4기)로 생각되는 곳이 유수(流水)에 의해 자연적으로 계속 유실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토기편들이 노출된 것으로 생
각된다. 명기로 보이는 녹유대접 1, 완 2, 발 1, 청동그릇 1, 청동숟가락 1, 토기편 다수가 수습되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죽정리 북방 약 8정(八町)의 전중(田中)에 2기가 있고 석반석 2개가 잔존함"이라 하였고, ≪문화유적총람≫에는 "신라토기 조각이 산재하고 있으며 석실분 천정석으로 보이는 판상석이 있다"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
적총람≫상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죽정리 고인돌 ①(高城 竹亭里 支石墓①)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 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1반
【시 대1】청동기시대
【유적내용】
죽정리 1반 고인돌 유적은 7번 국도를 따라 통일 전망대 쪽으로 가다가 죽정리 마을에서 화진포콘도로 가는 비포장길을 따라 1.5km 가량가면 화진포 호수와 접하여 위병 초소가 나오는데 이 위병 초소 반경 50m 이내에 모두 6기의 고인돌이 구릉의 능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이 구릉의 동남쪽은 화진포 호수와 접하고 있어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형태이고, 여기에서 구릉을 따라 고성산 쪽으로 300m정도가면 청동기시대 유물산포지가 나온다. 1호 고인돌덮개
돌은 장축 345cm, 폭 258cm, 두께 40―50cm로, 덮개돌의 모양은 부정 삼각형에 가깝고 단면형태는 판석형이다. 하부 구조는 두께 14cm 정도의 판석을 이용하여 서쪽 40cm, 동쪽 85cm, 높이 83cm, 장축 174cm 크기의 석관을 만들었다. 이러한 매장 풍습을 머리 부분을 동쪽으로 향한 두실족협석관묘(頭實足狹石桔墓)의 매장풍습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2호 고인돌은 화진포콘도로 들어가는 시멘트 포장길과 접해 있는데 도로의 포장공사시 덮개돌 동쪽 부분이 조금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411cm, 폭 21Qcm, 두께 30―48cm이며, 덮개돌의 모양은 삼각형에 가까우며, 단면 형태를 보면 동쪽 부분은 판석형, 서쪽 부분은 삼각형이다. 3호 고인돌은 남―북 방향으로 위치해 있고,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55cm, 폭 245cm, 두께 35―47cm이며, 덮개돌의 모양은 사각형, 단면은 판석형이다. 덮개돌 동쪽 밑에는 장축 140cm, 폭 110cm, 두께 15―20cm 정도의 판석(뚜껑 돌로 추정)이 놓여 있고, 덮개돌에는 6곳의 정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를 떼어 내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4호 고인돌은 남―북 방향으로 위치해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30cm, 폭 191cm, 두께 20―30cm이고, 덮개돌의 모양은 각을 죽인 삼각형으로, 하부구조는 알 수 없다. 5호 고인돌은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고, 덮개돌의 각 크기는 장측 200cm, 폭 140cm, 두께 30―60cm이며 덮개돌의 모양은 부정형, 단면 형태는 판석형이고, 하부 구조는 알 수 없다. 6호 고인돌 역시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10cm, 폭 120cm, 두께 12―30cm이며 덮개돌의 모양은 부정형, 단면은 판석형이고, 단면은 판석형이고, 하부 구조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최숙경, 1962, ≪고성군 현내면의 선사시대유적≫ : 최숙경, 1966, <화진포주변의 토기 석기 지석묘>, ≪한국문화연구원논총≫ 제7집. : 백흥기, 1977, ≪동해중부지방의 선사시대유적과 유물≫ : 백흥기, 1982, <강원도동해안의 지석묘>, ≪고고미술≫156 : 고동순, 1994, ≪영동지방의 지석묘에 관한 고찰≫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죽정리 고인돌 ②(高城 竹亭里 支石墓 ②)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시대 분묘(지석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 2반
【시 대】청동기시대
【유적내용】
죽정리 2반 고인돌 유적은 화진포 호수의 북서쪽에 위치한 고성산에서 시작하여 화진포 호수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약 20―30m의 구릉에 산재해 있다. 이 구릉의 남쪽 사면에는 죽정리 2반 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마을 앞에는 고직령에서 발원하여 화진포 호수로 흘러드는 월안천이 있으며, 뒤쪽으로는 죽정리 1반의 청동기시대 유물산포지와 고인돌이 위치한 구릉이 300m정도 떨어져 이 구릉과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1호 고인돌은 동―서 방향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410cm, 폭 250cm, 두께 20―30cm이고, 모양은 장타원형이며 단면은 판석형이나 전체 규모에 비하여 얇다. 덮개돌 상면에는 지름 10cm, 깊이 7cm정도의 구멍 7개가 일렬로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덮개돌을 깨어서 옮기려고 한흔적이 보이며, 하부 구조 알 수 없다. 2호 고인돌은 남―북 방향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20cm, 폭 160cm, 두께 20―50cm이고 모양은 부정형이며 단면은 판석형이다. 하부 구조는알 수 없으나 서쪽면에 하부 구조의 일부로 보이는 판석이 조금 노출되어 있고. 덮개돌 상면에 는 5개의 정자국이 있다. 3호 고인돌은 동남―서북 방향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7Ocm, 특 180cm, 두께는 뒤쪽 80cm, 앞쪽 46cm이며, 형태는 모죽인 장방형으고 단면은 판석형이다. 하부구조는 이미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죽정2리 주민들의 성황당 제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4호 고인돌은 동북―남서 방향으로, 덮개돌 절반이 이미 결실되어 반만 남아 있고, 결실
된 부분에는 하부 구조로 보이는 돌과 판석들로 석곽을 이루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덮개돌의 크기는 장축 210cm, 폭 95cm, 두께 24cm이고, 형태는 장방형이며 단면은 판석형이다. 5호 고인돌은 동북―남서 방향으로, 덮개돌의 크기는장축 200cm, 폭 120cm, 두께 20cm이고 형태는 장타원형이며 단면은 부정형이다. 하부 구조는 알 수 없고 덮개돌의 남서쪽에 지름 7cm, 깊이 4cm,의 성혈이 1곳 있다.
【참고문헌】최숙경, 1962, ≪고성군 현내면의 선사시대유적≫ : 최숙경, 1966, <화진포주변의 토기 석기 지석묘>, ≪한국문화연구원논총≫ 제7집 : 백흥기, 1977, ≪동해중부지방의 선사시대유적과 유물≫ : 백흥기, 1982, <강원도동해안의 지석묘>, ≪고고미술≫156 : 고동순, 1994, ≪영동지방의 지석묘에 관한고찰≫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죽정리 유물산포지(高城 竹亭里 遺物散布地)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사유적(선사유물 출토지․분포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1리
【시 대】청동기시대
【유적내용】
이 유적은 화진포호수 중심부의 서편에서 동편으로 관처럼 튀어나온 야산 능선상의 지역, 그리고 이 곳의 북쪽에 서편으로 내만되어 있는 지형의 산록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죽정리 지석묘군이 함께 하고 있어 큰 범위의유적이 형성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야산 능성상의 지역에서는 석검과 무문토기편이 수집되었으며. 내만한 산록의 경작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류와 갈돌, 석부편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경작지에서의 유물들은 신석기시대의 특징을 가진 것들인데 또한 주변 지역이 입지상 청동기시대와 결부되기 때문에 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최숙경, 1962, ≪고성군 현내면의 선사시대유적≫ : 백흥기․지현병, 1992, ≪강원영동지방의 선사문화연구≫Ⅱ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열녀 정씨 정려(烈女 鄧氏 旌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내대동)
【시 대】조선기시대
【유적내용】
유학(幼學) 윤태벽의 처로, 남편이 죽자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빈소에 옆에서 목매어 자결하였다. 이로써 정려가 세워졌다. 지금의 현내면 죽정리 속칭 내내동에 이전하였으나, 열녀각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참고문헌】≪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관동읍지≫
◇고성 산성(古城 山城)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산성)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시 대】통일신라시대
【유적내용】
고성 산성은 화진포에서 좌측 죽정초등학교 진입로를 따라 북서편으로 가다 보면 갈보리 교회 입구에서 우측으로 통일기원 철탑이 보이는 해발 약 200m높이의 8부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고성 산성지의 정상붕에는 군 작전 지역으로 병커 시설과 핼기장 설치 공사로 거의 대부분이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봉우리 중 가장 높은 곳에는 갈보리교회에서 설치한 통일기원첩탑이 세워져 있다. 고성산의 약 8부 능선상에는 할석으로 쌓은 석성이 남아 있으나 거의 대부분무너져 내린상태이다. 성도(城道)는 폭 약 4m, 높이 약 4-5m, 남쪽 벽면에는 성벽이 그나마 남아 있으나 동벽은 급경사이기 때문에 축성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정상 부근에 서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지표 채집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 뚜껑도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영역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옛 열산현 북쪽 1리에 있으며, 고성군에서 35리 떨어져 있는 진산인 고성산에 있는 열산고현의 석성인데, 본디 마기라(麻耆羅), 소물달(小勿達)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16년 (757) 12월 동산, 고려 태조 23년 (940) 3월 열산(烈山)으로 고친 곳으로, 둘레가403척(122m)이라 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신증동국여지승람≫권45 : ≪열녀실기술≫별집 권17 : ≪증보문헌비고≫권28 : ≪대동지지≫권16
◇고성 군수 권익륭 불망비(高城 郡守 權益隆 不忘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불망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2반(속칭 외솔백이)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산학리 2반 김정순씨댁 남쪽 100여m 논둑가에 위치하여 있다. 주변에는 둘레가 3m 되는 300년 이상된 소나무가 서 있다. 비는 자연 암괴위에 시멘트로 좌대를 마련하여 세웠다. 비좌대 뒷편에는 1973년 3월28일에 산학리 예비군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대는 타원형이며 크기는 150cm×l25cm×60cm이다. 이 비는 화강암을 치석하여 비갓없이 만들었으며 윗부분은 호형으로 마무리 되였다. 크기는 156cm×75cm×24cm이다. 비의 전면에는 자경 11cm로 "군수권익륭 영세 불망비(郡守權益陵永世不忘碑)"라 적었고, 이 글 좌우에는 그의 치적에 대해 4자씩 위에 4행, 아랫쪽에 4행을 기록하고 있다. 음기(陰記)로는 "숭정후임진(禁禎后壬辰)"이라
적었는데 효종 3년 (1652)으로 추정된다.
◇고성 열산현성지(高城 烈山縣城沚)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7번 국도에서 갈보리교회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향해 약 300m정도 가면 고성산 남쪽 길가에 1984년 9월에 세운 표석을 찾을 수 있다. 이 표석의 아래부분부터 남서편으로 나 있는 약 100여m의 언덕 단면부에 기와와 자연석으로 높이 약 1m 정도 쌓여진 판축혼이 보이고 있다. 또한 이 비석의 동북편으로 150m정도 되는 거리의 민묘 2기가 있는 곳의 소나무숲 하단부와 북북동편 약 250m 거리의 언덕 단면부에도 판축흔이 보이고 있다. 과거 열산현의 방어시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마을에 14대째 살고 있다는 주민의 말에 의하면 비석의 북북동 언덕 단면이 드러난 곳에서 현재 과수를 경작하는 집이 있는 곳이 옛 관아터였
다고 한다.
◇고성 마달리 석조여래좌상(高城 馬達里 石造如來坐像)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석불(석불)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달리 (마달리 버스정류장 앞)
【시 대】통일신라시대
【유적내용】
마달리 마을 중앙의 도로 옆에 있는 불상으로 주변의 사지에서 옮겨 왔다는 전설외에는 연혁이 자세하지 않다. 지금은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인 직골의 절터에 있었던 것을 마달초등학교 교사들이 떨어져 나간 불두(佛頭)와 함께 1970년도에 옮겨왔으나 불두(佛頭)는 도난 당했다고 한다. 현재 이 석불의 현상은 다음과 같다. 대좌는 양분되어 있는데 파손이 심하다. 단엽 16판의 복련이 조식되었고, 상면에는 팔각형 2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팔각의 지름은 65cm이며, 한변의 길이는 29cm이다.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불은 머리가 결실되었고, 신체부의 파손이 심하다. 특히 오른쪽 팔과 어깨부분이 많이 훼손되었다. 법의는 뒷면의 옷주름으로 보아
통견으로 보이는데 양무릎사이에 부채꼴형의 옷주름이 남아 있다. 배면에는 왼쪽 어깨부에 치우쳐 원형의 매듭을 중심으로 4종의 의문이 밑으로 흐르면서 왼쪽 무릎으로 향하고, 다른선은 원문의 바깥쪽에서 6조의 의문이 등을 타고 오른쪽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선각되었다. 불상의 크기는 상고(像高) 75cm, 견폭(肩幅) 43cm, 흉폭(胸幅) 29cm, 슬폭(膝幅) 77cm. 슬고(膝高)17cm이다. 대좌와 불상 모두 화강암을 사용하였으며 통일신라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P514: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P.434: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마달초등학교 문관석(高城 馬達初等學校 文官石)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석조물(수표 등)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달리
【시 대】<시대 미상>
편과 와편들이 일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수병들의 주거시설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조선총독부, 194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상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권익강 선정비(高城 櫂益降 善政碑)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선정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295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명파초등학교
【유적내용】
조선 숙종 37년(1711) 고성 군수로 부임한 권익강이 민정을 잘 보살핀 공을 기리어 명파역에 세웠는데 크기는 높이 91cm, 폭 39cm, 두께 14cm로 구 명파초등학교 산비탈에 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명파리 고분(高城 明波里 古墳)
【지정사긴】<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130
【시 대】고려시대
【유적내용】
명파리 마을을 북쪽으로 벗어나면서 만나게 되는 명파 2교에서 좌측으로 구철로를 따라 다시 내려오다보면 논둑 옆에 위치하고 있다. 명파 2교에서는 서남편으로 약 150여m거리에 떨어져 있다. 봉분형태는 장타원형인대 경작으로 인한 현상변경이 이루어져 원형이 손상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축은 북북서 - 남남동향이며 길이는 660cm이고, 단축은 380cm이다. 기단일부로 보이는 자연석으로 쌓은 단이 보이고 있으나, 경작자에 의해 쌓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명파리에 사는 김영기(70세)씨에 의하면 옛날 고려 건국 시기에 장군이 북쪽을 토벌하여 송현리를 지나는 도중에 말이 다리에 빠지자 전쟁에 패할 징조라 여겨 자결하자 주민들이 묻어
주었다고 한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상, P.431: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고성 명파리 고분군(高城 明波里 古墳群)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시 대】고려시대
【유적내용】
명파리 고분군은 명파리 부락의 서쪽 1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표고 214km인 배봉산의 동쪽능성을 따라 표고 80-120m지점에 lOm간격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석장골(일명 섭장골)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일대에 수십 여기의 고분이 있는 지점은 약간의 봉분이 있고 20-40cm 크기의 할석이 몇개 노출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도굴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 고려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여러 점 채집되었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명파리 문관석(高城 明波里 文官石)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석조물(수표 등)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명파 1교 옆 신선식당 옆)
【시 대】<시대미상>
【유적내용】
7번 국도를 따라 쑥고개를 넘어 명파리 마을의 관문인 명파 1교를 건너기 전 동편 신선식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다. 이 문인상의 원래의 소재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전쟁 이후 명파리가 민통선 북쪽 마을로 개척되면서 동시에 세워졌던 옛 명파초등학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농협창고 건설등 택지공사에 의해 개울가로 방치되었다가 현재의 장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한다. 문관석의 크기는 104cm의 화강암재로 옷주름은 모두 음각선으로 표현하였으며, 홀을 잡고 있는 두손의 부분은 명확치 못하다. 얼굴부분에서는 귀가 부처상과 같이 목부분까지 길게 늘였고, 눈과 코는 양각, 입은 음각선으로 얇게 표현하였다. 관모도 간단히 음각선으로
표현하였다. 조선 후기 관료를 역임했던 문관의 묘소에 있던 석상으로 추정된다.
◇고성 부호군 활성일묘(高城 副護軍 黃聖一墓)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묘(피장자가 알려진 묘)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명파리 마을에서 통일전망대 쪽으로 7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보면 '명파 3교'라는 콘크리트다리가 나오는데, 이다리에서 동편(해안쪽) 120m거리 야산(지도상에는 소봉바위로 표기되어 있는 남쪽산)서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묘소 앞에는 장대석으로 된 기단(940cm)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llOcm)과 1기의 망주석(146cm)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오랜 세월 방치되 었던 관계로 잡목으로 뒤덮여 있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전면에는 혼유석과 복련과 안장이 조식된 비대좌위에 파손된 채로 있는 묘표(54cm×38cm×l4cm)가 있고, 3면에 각자되어 있는 상석(lllcm×76cm×43cm)과 향로석 (28cm×23cm×22cm)이 놓여 있지만 다른 석물들과 같이
한국전쟁 때의 상흔으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새로 발견된 묘표 중간부분의 선재 전면에는 "부호군황공지묘(副護軍責公之墓)"라 되어 있고, 상석에는 피장자인 부호군 횡성일의 가계, 약력, 재산현황등이 3면에 새겨져 있다. 석물의 재질은 모주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현내면명파리 토목국소유 명파((明波)리 부락의 남방약 십삼정(南方約十三町)(1.4km)곡간에 있음. 적석 직경 약 2간(3m)1기 불완전"이라 하였고, 상동서에 "현내면 명파리 국유 '명파리 부락의 서남방 팔정(八町)(872m) 곡간에 있음. 적석 직경 약 이간(二間)(3m) 오기 불완전(五基
不完全)"이라 하였다. ≪문화유적총람(상)≫에는 "일명 장군묘 또는 말부덤이라고 불리우는 직경 4m, 높이 3m의 고분으로 옛이야기로 전해오는 전설로는 명파리에 장수가 탄생하자 역적으로 몰아 죽였는데 함께 나타난 용마(龍馬)도 그 자리에 죽어 묻은 무덤이라는 전설이 있다. 상석(床石)의 측면에 돌아가면서 각자(刻字)를 하였으며, 묘비(墓碑)는 깨어져 없어져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 묘전의 문인석등으로 보아서는 조선시대의 민묘로 추정된다."라고 하였고, 상동서에 "고성명파리 고분 직경 약 3.6m 고분 5기가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조제암지(관음암지)(高城 鳥啼庵址(觀音庵址)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지(폐찰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현내면 명파리 마을 북편의 명파 2교에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좌측(서편)으로 나 있는 비포장의 농로를 따라 6km를 진입하여 들어가면 향로봉 산맥 동편 계곡 깊숙한 곳에 사지가 위치하고 있다.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寺蹟)≫에 의하면 조제암은 혜공왕 8년 (772)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하고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 1년(1358) 나옹선사(懈翁禪師)가 중건하였으나 고려말에 전소하였고. 그 후 세조 10년(1465)에 중건하고 조제암(鳥啼應)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與地圖書)≫ 간성군 사찰조에는 "조제암재군북육십리오리 팔간(鳥啼庵 在郡北六十五里 八間)"이라는 기록이
있다. 조제암지(鳥啼庵址)는 건물지 축대가 계단식으로 2단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으나 울창한 숲풀로 인해 초석과 관련 유물은 수습할 수 없었다. 잔존하고 있는 축대의 규모는 길이 약 9m, 높이 약 1m 정도이고 두 축대간의 거리는 8.6m이다. 진입로 및 전면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계단식 산지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줄 수 있다. 활엽수가 우거져 있고, 전면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관음암지(윗절터)는 조제암에서 계곡물을 따라 3분정도 올라가서 40-50년 생의 활엽수가 울창히 우거져 있는 약 1500여평의 넓은 평지의 상단(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위치하며 2단석축의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앞쪽기단은 길이 약 25m, 높이 50cm 규모이며, 뒤쪽 기단은 'ㄷ'자형태로 길이 15m, 높이 45cm정도의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녹음이 우거져 건물지의 정밀조사 어려우나 6․25전까지 1동의 사우에 법당과 요사의 기능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 석축은 자연석을 이용 정연하게 축조하였고 건물지 초석 일부와 와편 다수가 확인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황 효자각(黃 孝子閣)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효지비)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민통선 이북)
【시 대】조선시대
【유적내용】
조선조 중엽 황효자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준비하여 어느덧 과거보러 갈 채비를 하던 중 부친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부친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부친은 아들을 꾸짖어 과거길을 띠날 것을 채근하였다. 이 황효자는 과거길에 올랐으나 과거날을 이틀 앞두고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고, 또 한번 낙방하여 서둘러 귀가하였으나 부친의 시신은 몹시 부패할 지경이 되었다. 이에 황효자는 기름으로 자신의 열 손가락을 지져 부친의 소생을 기원하였으며, 다시 뜰 앞 은행나무에올라가 다시 열손가락에 불을 지르자 사망하였던 아버지가 소생하였다가 3일만에 세상을 띠났다고 한다. 이로서 비각이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민간인 출입 통제 지역이라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죽도성(高城 竹島城)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성(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 산 1 죽도
【시 대】<시대 미상>
【유적내용】
죽도성은 오호리에서 정동으로 보이는 해발 약 53m높이의 작은 섬에 위치한다. 오호항에서 어선으로 약 5분정도의 거리이다. 섬의 형세는 평면상 장타원형을 이루고 있고 장축방향이 남동-북서이며 북편이 남편보다 더 높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성은 간성군의 남쪽 20리, 바다쪽 육로에서 2리 떨어진 죽도에 있는데 둘레가 2리 조금 넘고, 섬 위에는 영사(營舍)의 옛 터가 있으며, 오동(梧桐)과 전죽(箭竹)이 가득갖다고 하였다. 이 섬은 영사나 성으로서 보다는 남쪽 양양․덕산봉수와 북쪽 정양산 봉수에 연락하던 죽도봉수가 더 유명하다고 하였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죽도면 오호리 국유 오호리 부작의 동북 약 8정(872m)의 해상 죽도에 있음. 토축 연장 약이백간(363m)불완전"이라 하였다. 현지 조사결과, 전죽이 300~400cm 정도로 크게 자라고 있어 조사가 거의 불가능하였으나 성의 입구 시설로 보이는 돌계단을 확인하였으며, 섬 정상부분에서 건물지로 추정되는 초석군(礎石群)과 기와가 누적되어 있는 곳을 확인하였는데 빽빽한 전죽(箭竹)으로 인해 건물지의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었다. 또한 토성의 흔적도 전죽이 너무 울창하여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상부 하단에 단이 진 것으로 보아 옛 기록과 같이 존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상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신증동국여지승람≫권45 : ≪여지도서≫상
◇고성 가학정(高城 駕鶴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정․각(정자)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
【시 대】조선시대
【유적내용】
조선시대 동헌에서 10리쯤의 거리에 선유담이 있으며, 이곳에 노송이 어우러진 자그마한 산세가 자리하고 있다. 이 산의 넓은 반석 위에 택당 이식이 '가학정'을 건립하고, 김광우는 영조 22년 (1746)에 선유담 산록에 '유한정'을 건립하였다고 전하다. 현재는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의 절경에 감탄하여 정자의 전면에 우암 송시열의 친필로 새겼다는 '선유담'이란 글씨가 현재에도 뚜렷이 남아 있어 선인들의 풍류를 회상케 한다. 현재 가학정은 다만 선유담 유적을 중심으로 그 위치를 가늠해 볼 뿐이다. 가학정 초석은 선유담 호수 남쪽 곶형태 지형의 끝에 있다. 두개의 바위위에 기둥자리(굴립초석) 4개가 남아 있다. ① 57cm×27cm×8cm, ②57cm×27cm×9cm, ③ 55cm×31cm×7cm, ④ 60cm×32cm×4cm인데 ①과 ② 사이의 간격은 275cm인데 거의 남북 방향을 하고 있다. ③은 ①의 바로 뒤에 있으며, 이로부터 방향이 약간 틀어져 있지만 275cm거리에 ④가 있다. 이 초석과 주변에 기와 조각이 산포한 것을 볼 때 두 번 정도의 건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곶의 동편 바로 뒤에는 1기의 민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역시 주변에서 기와 조각들이 노출되어 있으며 치석된 2기의 장방형 대석이 자리하고 있다. 크기는 76cm×50cm×현측 두께 30cm, 96cm×48cm×현재두께30cm인데 이 두개의 장대석은 1체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고성군, 1985, ≪고성군지≫ : 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 ≪관동읍지≫
◇고성 송현진리 고분(高城 松帳津里 古墳)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고분(기타)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송현진리(금강산 전망대)
【시 대】고려시대
【유적내용】
공현진리 출토 토기는 금강산 전망대 축조시 나온 유물들로 무덤의 규모나 형태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진열된 토기들로 보아 고려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고성군․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성 선유담(高城 仙遊潭)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유적
【소 재 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