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 사찰(寺刹)
작성일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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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와 사명대사
건봉사에서의 의병활동 : 사명대사 유정(溜溟大師 惟政)은 강원도 유점사(楡岾寺)에서 임진왜란을 맞았다. 왜적들이 강원에 침입해와 한참동안 난동을 부릴무렵 그는 10여명의 제자를 거느러고 山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왜병들은 유점사까지 침입하여 그의 제자들을 포박하였다. 그는 왜병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어 그의 제자들을 구하고 유점사를 왜병들로 부터 구하였다. 그는 고성에 가 왜장 3인과 필담을 통해 백성들을 살해하지 말도록 권유함으로써 인근 9개군을 적의 약탈과 살인으로 부터 구하였다. 그후 선조가 왜병들에게 쫓겨서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에 접하자 나라를 적으로부터 구하기로 결심하고 곧 乾鳳寺에서 義僧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평안도 순안으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다른 곳에서 온 승병들과 함께 연합군을 조직하였는데 그 숫자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 때 西山 淸虛대사는 왕명에 의하여 여러도에서 올라온 승병을 지휘하기로 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임무를 惟政으로 하여금 대신하여 수행하도록 하였다. 유정은 體奈使인 柳成龍과 협동하여 明군과 함께 선조 26년(1593년) 정월 평양을 공격하여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를 패주시켰다. 이어서 그는 都元帥 權慄과 함께 영남 宜率에 가서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일본과의 강화교섭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탁월한 것이 었다.

〈해석문〉
유명조선죽 팔도도총섭 의병대장 홍제준자 사명대사 기적비명 병서 가선대부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군수절도사 원주목사 원임규당각직각지제교 남동철이 짓고 통정대부 행영월도호부사 겸 원주진관병마사 첨절제사 토포사 허질이 아울러 전서를 쓰다. 금강산은 비로봉으로 부터 두 줄기로 나뉘었으니 단발령 서쪽은 내첩이라 하였고. 안문 동쪽은 외첩이라 하였다. 내첩에 자리잡고 있는 표훈사는 서산대사가 교를 베풀던 곳이며, 외첩에 있는 건봉사는 사명대사가 의병을 모집한 곳이다. 두사람이 비록 불교에 몸을 담고 출발 하였으나 서산대사는 그 곧은 절개로서, 사명대사는 그 높은 공으로 이름을 떨친 곳이기에 모두 소중하게 여기며, 또 이러한 사연이 있으므로 해서 오늘 날 국내에서 유명한 사찰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도서의 기록을 살펴보니 당나라 건원 년간에 산인 정신이란 사람이 이곳에 도량을 설치, 미타․관음 두 보살상을 봉안하고 이름을 건봉사라 하였다. 절에는 옛날부터 보관하고 있던 화상과 원불․은탑․향로 철장․교혜․산호염주가 하나씩 있었으며, 또 금으로 만든 가사 일습이 세상에 전해 오는데 그 가운데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치아)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니 그 말은 이서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석탑이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는가. 산중 사람들은 이를 두고 말하기를 혹시 상서로운 기운이 이곳에 뻗치지나 않았나라고 하였다. 사명대사의 이름은 유정이요, 본래의 성은 임씨로서 경남 밀주 사람이다. 조상 대대로 벼슬을 지낼 가문에서 자랐으며, 성장해서는 은사 중덕을 따라 배웠다. 그 뒤 낙서암에서 삭발을 하고 서산대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연화경 육만 구천여 마다를 익혔다. 만력20년(1592) 왜구가 조선을 침략하자 휴정은 묘향산으로 부터 승려를 불러모아 병사(승병)로 삼고 명나라 도독 이여송과 함께 평양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으니 이때 목을 베인자 만도 2천여명이나 되었다. 소경왕이 행궁에서 그를 불러 직접 목죽을 그려 주면서 팔도 도총섭의병장을 명하고 수레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대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대신들이 전쟁을 그만두라는 의론이 분분하였다. 휴정이 임금에게 청하기를 "신은 노약하고 또한 병이 많은 몸이라 원하옵건데 병사에 관한 일은 저의 제자 유정에게 부탁하고 늙은 육신은 그만 돌아가 쉴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자 마침내 그 뜻을 가상히 여기시고 허락 하였다. 곧이어 유정에게는 역말을 타고 궁성으로 들어 오도록 명하고는 승병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사이에는 44자가 빠져 있다.) 그 말은 모두 청신하고 깨끗하여 살인을 하려는 뜻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이에 화합을 바탕으로 일을 성사 시켰으며, 돌아올 때 죄없이 붙잡혀간 우리동포 3,000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이에 앞서 신라 자장법사는 서역으로 들어가 석가여래 치아 12매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으나 후에 왜적들이 이를 약탈해 가자 대사가 앞장서서 간곡히 타이른뒤 되찾아와 이곳 건봉사에 안치 하였으니 바로 이 석탑을 이른 것이다. 유교가 불교와 교리가 달라 학사 대부분들은 일찍이 비난하고 그것을 배척하기만하였지 유교와는 동일시 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자비가 인의와는 근본취지가 달라 인간의 본성을 살피는 것이 격물치지와 같지 아니하고, 불도를 닦는것은 유가에서 말하는 성과 경에 어긋나 처음생긴 조그마한 차이는 갈 수록 커져 성인의 도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그 세운 업적을 미루어 보건데 군신 부자간의 의리에 있어 과연어떠하였겠는가, 유자로서 의관을 반듯이 하고 상세히 성리를 강구하여 인의를 높이 말하면서 행실이 독실하지 못한 사람과는 한가지로 말 할 수 없다. 불자의 이름으로 유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은 성학의 도 뿐이요, 유자의 이름으로 불도를 행하는 것은 상서로운 일만 쫓는 것일 뿐이니 이는 물으면 옳다고 하고 바로 잡자고 하면 그르다고 하니 우리는 이러한 폐단을 물리쳐야 할 것이니라. 당시 조정은 일본과 화친을 주장함에 현인 군자는 나아가 죽을 만한 곳도 없는지라 모두가 스스로 그 몸가짐을 정결히 가짐이 옳다고 하였다.
서산대사는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오롯한 덕업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요, 사명대사와 같이 훌룹한 업적을 남길 수 없으니 힘껏 그들의 공을 논하고 찬양함이 어떻겠는가. 대체로 서산대사는 경에 가까우면서 그 절의는 높고, 사명대사는 권에 가까우면서 그 공은 넓었던 친이다. 그러나 전쟁을 그만 두자는 쪽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사시켰으니 이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터였다. 비록 사명대사가 아니었더라면 이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함을 근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더구나 일본은 불교를 숭배하므로해서 요순, 공자와 같은 도와는 서로 화합치 못하니 진실로 이일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바르게 인도함이 당연한 것이었다.
사명대사의 충성과 믿음은 가이 오랑케 나라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니 이는 어찌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구하게 자기 의견을 설명하며 이를 받아 주기를 바라는 하찮은 선비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 나라를 열며 백성을 이롭게 한지도 어언 300여년이 되었다. 서산대사는 물러나 끝까지 도를 지켰고, 사명대사는 불굴의 의지로 무리를 구제 하였으니 이는 그 의로움으로 해서 이름이 났으며,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자 하는 일념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 무렵 서산대사를 쫓아 배운 해안과 영규란 제자가 있었다. 해안은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는 일찍이 대열공 중봉이 조헌의 문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금산 싸움에서 죽었다. 밀주에 옛 스승의 신주를 섬겨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목릉성세 나라에서 사당 이름을 표충이라고 내렀다.
우리 임금이 보위에 오르신 이래 더욱 서산 사명 두대사께서 남기신 덕업에 대하여 감복고 계셨으며, 일찍이 영변에 있는 옛사당에 나가 그를 표창 하기도 하였다. 본 조에서는 오로지 유교의 도를 승상 하였기 때문에 아직 승려와 비구니가 널리 흩어져 있음을 헤아리지 못해사찰을 숭치 하였으며, 이성께서 이를 못잊어 뒤돌아 보는 것은 어디 까지나 충의로서 불도를 권장 하고자 함에 있었으니 어적 성하지 않겠는가 내가 관동을 살펴 볼때 이 사찰의 유적을 돌아 보고나서 예부에다 의론을 부치고 또 조정에 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자 신도들이 힘을 입어 대사의 기적비를 새우자고 뜻을 모아 마침내 돈 백꿰미를 마련하여 이를 추진하였으며, 또 시주를 청하는 모연문 다섯 축을 만들어 역사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비명에 이르기를 "불교는 서역으로 부터 중원에 들어 왔으며, 한나라와 양나라를 지나 당나라 원년에 이르렀다. 유교는 이를 이서라고 하여 나무라며 같은류로 다루려 하지 않았으나 대사와 같이 불교로 부터 깨달음을 얻어 의로움을 일삼으며 믿음으로석 길을 연 분도 있었다. 대사는 불자 가운데서도 우뚝 솟은 분으로 이룩한 업적을 더욱 빛나고 있는 것이다. 대사의 엄전한 화상은 금강의 사찰에 보존되어 있으며 곁에는 석탑이 섰고, 이곳에는 석가여래의 진신이 안치되어 있기도 하다. 유리의 목구멍과 산호의 혀로 천여년의 오묘한 형상이서로 바리를 전한 것 같도다.
만력 년간에 섬나라 오량케 무리가 친명을 거느리고 이웃나라를 침범하자 서산대사께서 제자 유정으로 하여금 이를 다스려 공을 세우도록 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저 도적들은 바로 나에게 닥친 환난이었으며, 8년 전쟁에 백성들은 편안치 못했으니 그 많은 조정 신하들 가운데 누가 나의 우려를 덜어 주었단 말인가. 공경들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간사한 오량캐들이 궁벽한 곳에서 오량케 옷을 입고 보잘 것 없이 지낸 깃 들인데 … 저들은 본래 불교를 숭상하는 습속이 있었으나 참된 도리를 바른 곳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불교의 이치를 벗어남으로서 환난을 자초하였다. 이에 대사께서 분연히 일어나자 임금께서 일본으로 채비를 갖추어 보내시니 바다길 만리에 하늘은 가이 없고 땅마져 요원하였다. 3월에 배를 띄울 준비를 마치고 순풍을 기다려 4월에 돛을 올리자 이내 적진에 당도했다. 대사는 두목을 만나 온화한 모습으로 담소하며 성의를 다하자 마침내 화친이 성사 됐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팔도에서는 왜구들이 더럽혀 놓은 곳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정리했다. 남녀 모두가 노래하고 춤을 추니 하나같이 태평했다. 무엇보다 이는 서산대사의 높은 절개와 사명대사의 위대한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니 오늘날에는 혹 없어지기도 했으나 그 의로움은 아직껏 여전 하다.
대사께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산하를 두루 살핌은 검푸른 말과 화룡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구리 화로와 쇠로 만든 지팡이, 나막신과 구슬주머니는 천년 세월을 손으로 주물러 아직까지도 그 손때 거친 곳에는 불향을 듣는 것 같은지라 서산대사는 구름과 같은 분이고. 사명대 사는 물과 같은 분이라 물은 흐르며 자취를 남기고, 구름은 흘러가도 그침이 없느니라.'
※譯. 강릉시립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정항교(鄭亢敎)
◇십바라밀 석주
능파교를 건너면 곧바로 50m가 넘게 이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보이고 대석담의 중앙 통로좌우로 높이 158cm의 사각형 석주 2기가 우뚝 서 있다. 이 석주에는 십바라밀의 원형이 음각 되어 있어 이를 십바라밀 석주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비록 조성연대는 1020년이라 하지만 시각적인 교육효과를 지닌 중요한 문화재이다.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기본수 행법(行法)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바라밀에다 이 여섯가지를 보조하는 방편, 원. 역, 지의 4바라밀을 첨가하여 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 가지 수행의 방법을 상징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그 하나하나에게는 깊은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
※ 지혜 : 사물의 실상을 관조하여 의혹을 끊고 정각을 얻는 힘.



나. 화암사(禾岩寺)
건봉사 말사중 束草, 襄陽, 麟騎, 洪川郡 등지의 것을 빼고 나면 고성군내에는 화암사(禾岩寺)가 하나 있다. 화암사는 토성면 신평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신라 36대 혜공왕 5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창건초에는 화암사(禾巖寺)라 명명하였으나 화암사(禾岩寺)라 개칭하였다. 이 절에는 觀音菩薩像 六疊書屛이 正祖의 하사품으로 전래하였으나 해방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죽암당부도(竹岩堂浮屠)를 비롯하여 15基의 부도(浮屠)가 있고 진표당(眞表堂)의 진영(眞影)을 비롯하여 16점의 진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 휴전선이북 고성사찰
휴전선 이북 고성지역에는 금강산이 있는 탓으로 크고 작은 많은 사암(寺庵)이 있었다. 유점사(楡岾寺) : 조선불교령(朝鮮佛敎令)에 의한 본산(本山)사찰의 하나로 53불의 월씨국으로 부터 철주를 타고 왔다는 녹기설화가 있는 사찰로 유명하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산중거찰(山中巨刹)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계사(神溪寺): 외금강 관음봉(觀音峰) 아래 있는 절로 신라 법흥왕 기해년(巳亥年)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보광암(普光庵) : 神溪寺 山內에 있다.
보운암(普雲庵) : 神溪寺內에 있으며 신라시대에 普雲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법운암(法雲庵) : 外金剛 神溪寺 山內에 있다.
삼성암(三聖庵) : 外金剛 神溪寺 山內에 있다.
문수암(文殊庵) : 神溪寺 山內에 있고 哲宗 辛酉年에 창건되었다.
미륵암(彌勒庵) : 神溪寺 山內에 있고 朝鮮 高宗 甲戍年에 창건하였다.
발연암(鉢淵庵) : 外金剛에 있다.
성불암(成佛庵) : 外金剛에 있으며 이 암자에서는 동해가 보인다.
몽천암(夢泉應) : 三日浦淵岸에 있다.
라. 전설과 유래
◇조제암(烏啼庵)과 세조(世祖)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 있는 조제암(鳥啼庵)은 서기 772년(新羅 惠恭王 8年)에 진표율사(眞表律師) 때에 창건하고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다. 그후 암자의 건물이 퇴패(頹驗)하였기에 1358년(고려 공민왕 1년) 나옹화상(懶翁禪師)때 중건하였으나 고려말엽 강풍으로 산화(山火)가 일면서 이절에 까지 연소되어 잿더미로 되었다. 이 절은 원래 간궁(艱窮)하였기에 복구할 수 없어서 폐허가 되어 버려진지 100여년 후에 후계세대가 고적만을 빙고(憑考)하여 옛터를 찾으려고 몇해를 두고 수목이 울창한 산중에서 헛수고만 하였다. 하루는 단념할려고 하던 어느 가을 저녁때에 북쪽 양지바른 산기슭 고목나무 위에서 여러 마리 까치우는 소리가 육감에 닿으므로 그곳을 찾아가서 보았더니 그 주위에는 과연 옛절의 초석만이 많이 남아 있었기
에 천우불조(天祐佛助)로 고지(古址)만은 찾았으나 역시 복구에는 막연하였다.
〈1465年(世祖 10年) 4월11일 世祖〉
대왕이 건봉사에 거동(東幸)하시여 원당(願堂)을 정하고 어실각(御室閣)을 짓기로 하면서 5일간을 머무르시는 때에 건봉사 책임선사(住持)가 명파리 관음암(觀音庵)의 사록(事綠)을 진달한 바 그 효력으로 조선 세조(世祖) 어명으로 중건하고 "새가 우는 소리로 절터를 찾았다"고 하여 조제암(鳥啼庵)이라 개칭하고 또한 사산(寺山)을 내려 주셨다.
(寺山賜牌) 1912년 건봉사의 말사로 되었다.
(자료제공 草溪里 李白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