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1. 성(城)
작성일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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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고 적
1. 성(城)
가. 금구도(金龜島)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앞 해상 300m에 있는 1,000평가량의 섬 금구도는 신라시대의 수군 기지로 사용, 해안을 지켰던 곳이다. 형태가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금구도라 불러왔다는 이섬에서는 지금도 당시 신라수군들이 돌로 참호를 구축하고 성을 쌓은 성터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이섬에 한여름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거룻배를 타고 건너와 해수욕을 하며, 해초, 전복등을 따내기도 하는 조용한 놀이터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소나무등 수목들이 많았으나 6.25동란으로 헐벗었고 대신 대나무 숲이 우거진 가운데 몇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을 뿐이다
나. 간성지(杆城址)
위치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축성년대 : 고려조 덕종 2년 (1033년)
중축년대 : 조선 선조 24년 (1591년)
간성은 원래 수성(䢘城) 또는 수성(水城)이라 하였으며 또 간성(杆城)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성곽을 쌓았던 것 만은 사실이지만 읍지에 의하면 동문과 서문이 있었으나 1917년 간성읍 도로확장때 동문과 서문을 철거하여 현군청 뒷산에 루각산해루(樓閣山海樓)를 건립하여 주민의 휴식처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석축(石築)의 일부가 간성읍 신안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수성지내(這城逃內)에 전래되는 삼정(三井) 사지(四池) 오목(五木)의 유적(遺蹟)이 있었던 바 역사(歷史)의 유구(悠久)함으로 인하여 현재에는 일목(一木)(500년전 은행(銀杏나무)과 이정(二井)만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축성으로 상금도 그 흔적이 요연하며, 조선 240년(인조 9년) 간성군수 택당 이식은 부재학 차시형을 호영(呼詠)한 바 구절은 다음과 같다.
古城山下邑之陽 文星乾亥嗚崗鳳
猛虎出林藜藿長 地勢丙丁下棧羊
案向玉帶三品位 深鋪海門看不見
水回金谷一庫藏 蓬萊歸客立彷徨
다. 백촌 성지(栢村 城址)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백출리
축성년대 : 고려말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며 본성지(本城址) 축성년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말의 축성으로 전하고 있다. 서남 218m의 봉근(峰筋)을 이르고 있었으며 약 450m의 토축이 있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기록으로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발행 문화유적총람에 기재되어 있다.
라. 봉포성지(鳳浦城址)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
축성년대 : 고려초
이곳 봉포리성지의 축성년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초 축성으로 전하여 오고 있으며 토축(土築)으로 해안에서 약 200m 서쪽에 위치한 곳에 옛성터의 성지가 남아있다. 둘레는 약 500m
의 토축이였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기록으로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발행 문화유적총람에 기재되어 있다.
마. 죽도성지 (竹島城址 일명 : 오호리 성지)
위치 : 장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 산1번지
축성년대 : 조선시대
본 성지는 오호리 부락의 동쪽에서 약 864m떨어진 죽도에 있다. 토축(土築)길이는 약 360m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택당(澤堂)(1584~1647)이 이곳에서 군수로 부임하였을때 성을 만들어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술을 연마 시켰다고한다. 성지 남쪽에 용바위가 있는데 가뭄때 개를 집어 넣으면 부정을 피워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내려온다. 현재는 흔적이 전혀없고 군사시설물 설치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이다. 옛적에 관사(館舍)와 창고(倉庫)를 지었던 유허(遺墟)가 있다. 기록으로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발행 문화유적 총람에 기재되어 있다.

바. 산학성지(山鶴城址 일명: 古聲山城)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축성년대 : 고려초
이곳 산학리 성지는 일명 고성산학(古聲山城)이라고도 불리우며 지금 남아있는 성의 축성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초 축성으로 전하는데 당초 산성의 둘레는 2.403척, 높이가 10척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과 6.25때의 격전지이기도 한 이곳 주위에 지금도 약 12m정도의 흔석이 남아 있으나 군사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이다. 기록으로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발행 문화유적총람에 기재되어있다.
사. 마차진 봉수지(麻次津烽燧址 일명 : 쑥고개 봉화대)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마차진리
축조년대 : 고려초
이곳 마차진봉수지는 일명 쑥고개 봉화대라고도 불리우며 석축의 길이 약 6m, 높이 GOcm의 흔적만이 양호하게 남아 있다. 그동안 민통선 북방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군사시설물이 설치된 지역이어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출입이 가능하다.
아. 삼포 봉수단(三浦 烽燧壇)
위치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봉수리 정상에 봉수단이 있다.
축조년대 : 신라건국초
넓이(둘레) : 7.27m(24척)
높이 : 5.45m(18척)
구조 : 석축
이곳은 이조이전 국가통신연락기관으로 구축한 석단으로 2천여년전 신라건국초 여진족과 말갈족이 쳐들어 왔을때 위난을 알리기 위한 통신기관으로 구축했는데 둘레 24척(7.27m)에 높이 18척(5.45m)의 대석축이다. 일․숙직 감시원을 배치하여 봉화로 연락을 했으며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가지고 적의 침략 상황을 연락한 곳이다. 연락방법으로는 국내사정의 평상시에는(사고가 없을시에는) 1거, 작은 란이 일어 났을때는 2거, 국란이 일어났거나 적이 출현하면 3거, 적이 경계선에 접근하면 4거, 적이 경계안에 들어오면 5거, 적과 싸울때는 6거를 들어 연락하였다. 이조말 왜적의 침입때까지 사용하였는데 일제치하에는 폐허가 되었으나 아직 석기유물들이 남아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것으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발향 문화유적 총람에 기재되어 있으며 고성군 수성지 권오진소장(高城郡 水城誌 權五鎭所藏)에도 수록되어있다.
자. 봉포 봉수지(鳳浦 峰燧沚)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 88번지
축조년대 : 고려초
봉포리 봉수는 외적의 침입이 있을때마다 인근 삼포리 봉수지와 연결된 신호장소로 병영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특히, 여진족․말갈족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하여 고려초기에 축조한 것으로 전하며 봉수지의 형상이나 규모등을 알아볼 수 없는 봉수지이다. 기록으로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발행 문화유적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차. 명파고분(明波古墳)
위치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130번지
마을 북쪽으로 벗어나면 만나게 되는 명파 2교에서 좌측으로 구철로를 따라 다시 내려오다 보면 논둑 옆에 위치하고 있다. 명파 2교에서는 서남편으로 약 150여m거리에 떨어져 있다. 봉분형태는 장타원형인데 경작으로 인한 현상변경이 이루어져 원형이 손상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축은 북북서―남남동향이며 길이는 660m이고 단축은 380m이다. 기단일부로 보이는 자연석으로 쌓은 단이 보이고 있으나 경작자에 의해 쌓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명파리에 사는 김영기(70세)씨에 의하면 고려 건국시기에 장군이 북쪽을 토벌하러 송현리를 지나는 도중에 말이 다리에 빠지자 전쟁에 패할 징조라 여겨 자결하자 주민들이 묻어 주었다고 한다.〔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전국문화유적총람 제3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