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 향교(鄕校)
작성일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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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팔월이십일일통우남북
세 터를 결정하지 못하였으며 성주가 전사를 살핀 뒤에 결정키로 했다. 이때 지사는 소정우와 원구로 결정 되었고 이들은 보통 지사가 아니다.

◇문묘(향교내에 있으며 소설위(小說位)이다.)
대성전 10간, 동서무 6간, 신문 5간, 취정 3간이다. 고종 신미년에 군수 김조헌이 이곳의 조금 위쪽 구기에 명륜당 팔간을 옮겼고 고종 갑술년에 군수 민종수가 대성전 앞에 이건한 뒤로는 대소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연이어 나왔다.
※ 고종조 이후부터는 중설위로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향교기적비명
간성은 나의 선조 문정공이 다스리던 고을이다. 내가 일찍이 공무로 관동에 갔을때 간성을 지나다 온후한 민심, 순박한 품속에 느낀 바 커서 삼십년이 지난 오늘도 잊을 수가 없다. 을축년에 서울에 갔을 때 간성 사람 김효범이 김박 제공의 사적을 가지고 두루 공경대부와 문사를 찾아 다니면서 묘정에 비를 세우기 위하여 비문을 받으려 하기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개 사인의 비를 묘정에 세우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비를 세우려면 그만한 예가 있어야 할 것이며 예에 이르기를 큰 난에 항거하여 이를 극복하였으면 사하고 대공이 있으면 기문으로 전하는 법인데 사하고 기할만한 행적이 있으면 벼슬에 관계하였을 것이니 이 들이 어떻게 항난하였기에 입비를 하려고 하는가고 물었더니 그가 이르기를 옛날 선조조의 임진웨란 때에 왜구가 육해로 침략하여 우리 팔도강산을 제멋대로 휩쓸 때에 간성에 와서는 부자묘에 유하면서 강당을 마구간으로 개축하는 등 행패가 심하였음으로 수직하던 사람도 도망하여 그들의 세를 감히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때에 재임 김자발과 박응렬이 통곡하면서 왜구의 행패가 공자의 성묘를 이와 같이 모욕하니 우리는 의를 위하여 죽자고 그 아우 자택 자용과 응훈을 거느리고 왜구의 창검을 두려워 않고 교궁에 뛰어 들어「네놈들이 교활하고 포악한 도적이라 할지라도 여기가 공부자의 묘인 것을 모르냐. 여기가 어디라고 피를 뿌려 성역을 더럽히느냐」고 호통을 하니 왜구들이 감히 대항치 못하였다. 급히 열성의 위패를 거두어 청결한 곳에 봉안했고 그 뒤 얼마 아니하여 왜는 향교를 불태우고 떠나가 버렀다. 그 후 제공이 사재를 털어 자재를 구하여 익년 시월중에 성묘의 중건에 착공하여 그 다음 해 이월초에 낙성하였기 제생들과 제례를 봉행하였다. 도백정술이 이 사실을 조정에 주달하여 상이 가상히 여기어 자발은 고성훈도 자택은 통천훈도 자용은 흡곡훈도 응열은 양양훈도 응훈은 삼척훈도에 명하고 그 교지에 자력으로 호성하고 사재로 향교를 중건하였으니 그 지기는 고상하다」성 인의 일언 포상의 극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제공이 항왜할 때에 신상의 위해를 돌보며 호성복묘 하였겠는가. 이것은 하늘이 제공으로 하여금 부자께서 피비린내를 피하게 함이요. 제공으로 하여금 부자에게 의를 바치게하여 의열을 빛나게 하였으니 비에 그 사적을 기록치 아니하리요. 가전에 김공자발의 자는 활경이요 호
는 해은이다. 자택의 자는 군오요 호는 송재이다. 자용의 자는 사함이고 호는 태열제로 강릉인이며 명주군왕 주원의 후손이다. 박공 응열의 자는 경무요 호는 동계이다. 응훈의 자는 경요로 영해인이며 제상군의 후손이다. 제공이 집에서는 소행이 순독하고 향인에게 충효를 가르치니 향인이 심복하여 향선생으로 추대하고 사후에는 신전에 사(祀)를 받드니 백년을 이어 왔다
명(銘)
아 부자시여, 성인의 성덕은 천지를 덮고 만물을 비치며 적시다. 중인이 다 존경하여 왔는데 교악한 왜구가 간성을 짓밟고 성묘에 진을 치고 성역을 마잔(馬棧)으로 만들었다. 김박제공이 형제를 거느리고 이들을 꾸짖어 항거치 못하게 하였다. 위패를 정한 곳에 이봉하고 보니 교궁은 이미 적수에 불타고 있다. 사재로 교궁을 중건하니 일년이 못가서 웅장한 성전이 이룩 되었다. 회랑과 학궁이며 포주와 욕실이 옛 규모와 같아 유생들이 모이여 대제를 봉행했다. 성상의 포상으로 동사의 훈도되니 황황한 은지는 만세에 빛나도다. 후손이 치비하니 일향이 협조하다. 임금이 임금 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 답다. 사람의 삶은 부자의 규범이요 성훈에 보답함은 제공들이 한결 같다. 바다가 망망하듯 끝 없이 번성하리. 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官春秋諒觀象監事世子師李秉模撰


◇간성향교연혁개요
조선조 세종2년 경자(1420년)에 성북 용연동(현 간성읍 상리 쇠롱골)에 창건하여 그 뒤 풍수설을 쫓아 대대리 방축동에 이전하였으나 기지가 좁아 명종 원년 병오(1546년)에 당시 해상토방척촉화동(현 간성읍 교동리 한밭꽃골)에 이전하였다. 그 뒤 46년만인 선조 25년에 임란이 나서 왜구가 침입하여 전란으로 탄노하고 전래의 유물도 이 때에 다 불타버린 것을 다음 해에 중건하였다. 인조 18년 경진(1640년)에 문표기지가 협소하여 현위치인 주봉산하에 다시 이건한 것이 현재의 교지이다. 임란과 6․25동란중에도 위비는 청정한 곳에 이봉하여 위패 만은 창건시에 조성한 위비이다. 1954년~1956년에 유림의 성의와 관의 협조로 대성전 동․서재 대성문을, 1960년예 명륜당을, 1966년에 동․서무를 재건하였고 1982년에 외삼문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5년 1월 12일자로「강원도 민속자료 제104호」로 지정건립연대 : 서기 1661년(이조 현종2년) 최초건립장소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향교앞 노상 추정 매장경위 및 발견동기 : 왜정시(1922년경)진부령 도로건설 당시 매몰되어 1981년 3월 14일 도로확장공사시 배수로에 매몰되어 있음을 당시 향교전교(김경명)가 발견하였다. 건립경위 : 간성현감(이조 인조9년~10년․1631~1622)으로 재임중 학문을 깨우쳐 추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무술연마등 이고장 개발에 기여한 공적을 기르기 위하여 간성군민이 거사비를 건립하였다. (참고 택당선생간성정록) 이조 500년동안 사대문장가의 한사람이었던 택당 이식선생의 유적을 후세에 길이 보전하고자 1982년 4월 26일 군수 이찬규와 전교 이백규가 주축이 되어 옛자리인 향교앞에 복원하였다. 선생의 문장과 덕업을 전승키 위하여 각지방인사로부터 수집한 시문은 후세의 교화에도 본보기가 되겠으므로 고성군문화원이 거사비중 건시집을 발간하여 1985년 9월에 요로에 배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