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13.가정자(佳亭子) 원집이야기
작성일
2025-07-26
조회
30
13. '가정자(佳亭子)' 원집 이야기
옛날 고구려 문화권에 있던 간성군에는 인가없는 곳을 지나다 해가 저물어 잠잘 곳을 찾지 못할 경우 나그네가 쉬어갈 수 있는 집을 마련한 곳이 있었다. 그 지방 또는 지역사람들이 모아서 집을 지어 놓고 연료로 사용할 나무를 잔뜩 쌓아 놓으면 장사꾼 또는 길손이 그곳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용자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 도끼와 낫을 이용해 사용한 나무 만큼 나무를 해서 다시 쌓아 놓고 간다. 이와 같은 원막이 간성군에는 지금의 토성면 도원리 원터와 현내면 구천동 두곳이 있었다. 남쪽지방에 없는 독특한 숙박시설은 추운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로서 나그네가 밖에서 잠을 잘 경우 동사하거나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음에 따라 여행자를 서로 돕고자하는 고구려 문화권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내면 구천동에는 고성과 간성의 경계로서 한양 등 영서로 통하는 길목으로 그곳에 '계경지(堺境地=堺亭子)'라 하는 원막이 있었다.
현내면 명파리에서는 며느리를 대부분 수동면 외면이라는 동네에서 얻어 오곤 했다. 그런데 수동면 외면에서 명파까지는 길이 멀어서 중간 원막을 지나게 되며 신랑 측에서 가마와 신부측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술과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원막까지 약 30리 마중을 나간다. 어느날 이 맞박일(마중)을 계정지까지 가던 가마꾼들이 가마와 술을 지고 가다가 그 길을 가던 도증에 그만을 술을 먹고 술에 취해서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이 시간에 신부 측에서는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계정지까지 왔으나 신랑 측에서 마중 나와야 할 가마가 보이지 않자 신부을 싣고온 가마꾼(교군)들은 화를 내며 "이 여기까지 온다는데 우릴 말이여 즈 마당까지 미다 달라구 하냐?"하며 신랑 집까지는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 때 신부가 가마에서 나오며 함아비에게 "함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신부는 전안할 때 사용하는 나삼을 꺼내고 짚신을 벗은 다음 버선을 벗어 함 속에 넣고 한삼을 꺼내 발에 감발(발이 얼지 않도록 보호)을 하고는 처음 보는 신랑에게 전안을 한 다음 "앞에서 길을 가르키시오."라고 말했다. 신부가 걸어 가겠다는 말에 신부측 교군들은 친정아버지를 따라 돌아가고 신부와 함께 신랑 후객이 날이 저문데도 30여리를 걸어서 시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 오던 길에 만난 신랑측 가마꾼들은 아직도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상객과 함애비가 가마꾼들에게 "거서거냥 자면 얼어 죽는 거야. 술 먹고 거냥 자면 추운데 깨어나지 못해!"라고 호통을 쳐 깨워 데리고 왔다. 늦은 밤에 시집에 도착한 신부는 그 날밤이 지내기 전에 초야를 치르고, 결혼식 사흘 후에 첫 밥을 짓는 관례를 깨고 그날 첫 닭이 울자 신부가 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나갔다. 밥을 지으려면 물이 필요한데 강에 물을 길어 와야 하지만 시어머니는 이 어린신부가 물동이를 깨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못미더워 물옹백이(물동이)를 주지 않고 남박을 주었다. 남박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쭐럭쭐럭 거리며 돌아가는 어린 신부가 힘겨워 고개도 못세우는 것을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지난 방에 30여리길을 자기가 걸어서 와서 아침에 물 길어 오는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측은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신부는 그후에 부모를 잘 모시면서 현모양처로서 자식을 키우고 훌륭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간성군 현감 택당 이식 선생은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그곳의 이름을 '계경지'에서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으로 '가정자(佳亭子)'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옛날 고구려 문화권에 있던 간성군에는 인가없는 곳을 지나다 해가 저물어 잠잘 곳을 찾지 못할 경우 나그네가 쉬어갈 수 있는 집을 마련한 곳이 있었다. 그 지방 또는 지역사람들이 모아서 집을 지어 놓고 연료로 사용할 나무를 잔뜩 쌓아 놓으면 장사꾼 또는 길손이 그곳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용자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 도끼와 낫을 이용해 사용한 나무 만큼 나무를 해서 다시 쌓아 놓고 간다. 이와 같은 원막이 간성군에는 지금의 토성면 도원리 원터와 현내면 구천동 두곳이 있었다. 남쪽지방에 없는 독특한 숙박시설은 추운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로서 나그네가 밖에서 잠을 잘 경우 동사하거나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음에 따라 여행자를 서로 돕고자하는 고구려 문화권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내면 구천동에는 고성과 간성의 경계로서 한양 등 영서로 통하는 길목으로 그곳에 '계경지(堺境地=堺亭子)'라 하는 원막이 있었다.
현내면 명파리에서는 며느리를 대부분 수동면 외면이라는 동네에서 얻어 오곤 했다. 그런데 수동면 외면에서 명파까지는 길이 멀어서 중간 원막을 지나게 되며 신랑 측에서 가마와 신부측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술과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원막까지 약 30리 마중을 나간다. 어느날 이 맞박일(마중)을 계정지까지 가던 가마꾼들이 가마와 술을 지고 가다가 그 길을 가던 도증에 그만을 술을 먹고 술에 취해서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이 시간에 신부 측에서는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계정지까지 왔으나 신랑 측에서 마중 나와야 할 가마가 보이지 않자 신부을 싣고온 가마꾼(교군)들은 화를 내며 "이 여기까지 온다는데 우릴 말이여 즈 마당까지 미다 달라구 하냐?"하며 신랑 집까지는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 때 신부가 가마에서 나오며 함아비에게 "함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신부는 전안할 때 사용하는 나삼을 꺼내고 짚신을 벗은 다음 버선을 벗어 함 속에 넣고 한삼을 꺼내 발에 감발(발이 얼지 않도록 보호)을 하고는 처음 보는 신랑에게 전안을 한 다음 "앞에서 길을 가르키시오."라고 말했다. 신부가 걸어 가겠다는 말에 신부측 교군들은 친정아버지를 따라 돌아가고 신부와 함께 신랑 후객이 날이 저문데도 30여리를 걸어서 시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 오던 길에 만난 신랑측 가마꾼들은 아직도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상객과 함애비가 가마꾼들에게 "거서거냥 자면 얼어 죽는 거야. 술 먹고 거냥 자면 추운데 깨어나지 못해!"라고 호통을 쳐 깨워 데리고 왔다. 늦은 밤에 시집에 도착한 신부는 그 날밤이 지내기 전에 초야를 치르고, 결혼식 사흘 후에 첫 밥을 짓는 관례를 깨고 그날 첫 닭이 울자 신부가 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나갔다. 밥을 지으려면 물이 필요한데 강에 물을 길어 와야 하지만 시어머니는 이 어린신부가 물동이를 깨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못미더워 물옹백이(물동이)를 주지 않고 남박을 주었다. 남박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쭐럭쭐럭 거리며 돌아가는 어린 신부가 힘겨워 고개도 못세우는 것을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지난 방에 30여리길을 자기가 걸어서 와서 아침에 물 길어 오는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측은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신부는 그후에 부모를 잘 모시면서 현모양처로서 자식을 키우고 훌륭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간성군 현감 택당 이식 선생은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그곳의 이름을 '계경지'에서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으로 '가정자(佳亭子)'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