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3. 빈대와 적곡사지(笛谷寺地)
작성일
2025-07-26
조회
21
3. 빈대와 적곡사지(笛谷寺址)
위 치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2리 서북쪽으로 3km 지점
창 건 연 대 : 고려초
고성군 죽왕면 오봉2리에서 서북쪽으로 3km쯤 오르면 흩어진 기와조각만이 나뒹구는 적곡사의 절터가 폐허로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적곡사는 고려초 한 고승이 이곳을 지나다 온천을 발견하여 절을 세웠다 한다.
이곳에 절을 세우자 인근 부락인 탑동(塔洞), 화정(花亭), 평촌(坪材), 적동(笛洞) 등에서 신도들이 찾아와 절이 점점 번창해 갈수록 절에서 승려들은 게을러 지고 수도에 힘쓰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탁발승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탁발승에게 보여준 이절 승려들의 행실은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나태하고 타락한 것이었다. 승복은 빨지를 않아 때와 이가 득실거렸고 절 주위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사람이 살고 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였다. 또한 승려들이 곳곳을 다니며 못된짓을 하여 신도 및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탁발승은 생각끝에 이들에게 훈계로는 문란해진 생활을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후「앞으로 3년동안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 부처님의 노여움을 크게 사리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절을 떠났다. 탁발승이 떠난 뒤부터 이절에는 전에 없던 빈대가 득실 거리기 시작하여 승려들을 괴롭혀 앉아있을 수도 잠을 잘수고 없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승려들은 잠자리를 마당이나 숲속으로 옮겼으나 빈대는 여전히 괴롭혔다.
참다못한 승려들은 마침내 회의를 열었다.「이러한 상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3년동안 떠나 생활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빈대들도 먹을것이 없어 굶어죽게 될 것이니 그때 다시 모입시다.」하고 한 노승이 제의했다. 그러자 다른 승려들고 모두 찬성하여 3년후 추석날, 다시 모이기로 한후 제각기 흩어졌다.
절을 띠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승려들의 생활이란 편할리가 없었다. 살을 에이는듯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이집 저집 처마밀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찬 이슬을 맞으며 숲속에서 자기도 하며 떠돌아 다녔다.
그런데 중들은 속죄는 커녕 자기들이 왜 고생을 하는지 반성하지도 않고 빈대를 피할 수 있었던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이들의 떠돌이 생활은 계속되었고 밥만 먹으면 아무데서나 딩굴며 3년의 세월이 빨리 가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떠돌이 3년이 지나자 중들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갖은 고생을 다하며 기다리던 중들이라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걸식생활을 면하게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중들은 마당에 모여 그동안의 고생을 이야기하면서 빈대가 없어진 절 주변을 돌아보며 서로 기뻐하였다
중들이 법당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처님 앞에 난데없이 금주(金徒)가 서 있었다. 중들은 자기들의 3년 동안 고생을 불쌍히 여겨 부처님이 하사하신 금기둥이라 믿고 기쁜 마음에 와락 끌어 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천둥과 함께 금기둥은 무너지고 기둥에 매달렸던 중들은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 기둥은 금기둥이 아니고 빈대들이 3년동안 부처님 앞에 응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기둥을 이룬 빈대 기둥이었던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이절을 찾아 왔던 탁발승을 게으르고 타락한 중들을 구제하러 왔던 부처님의 현신(現身)이라 말하고 있다. 그후 적곡사(笛谷寺)는 폐허가 됐고 따뜻한 물이 솟아 오르던 온천도 서서히 찬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산나물을 캐러왔던 아낙네들이 타는 목을 이 샘터에서 축이며 쉬어갈 뿐 천년의 세월 속에 수풀만이 우거져 있다.
위 치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 2리 서북쪽으로 3km 지점
창 건 연 대 : 고려초
고성군 죽왕면 오봉2리에서 서북쪽으로 3km쯤 오르면 흩어진 기와조각만이 나뒹구는 적곡사의 절터가 폐허로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적곡사는 고려초 한 고승이 이곳을 지나다 온천을 발견하여 절을 세웠다 한다.
이곳에 절을 세우자 인근 부락인 탑동(塔洞), 화정(花亭), 평촌(坪材), 적동(笛洞) 등에서 신도들이 찾아와 절이 점점 번창해 갈수록 절에서 승려들은 게을러 지고 수도에 힘쓰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탁발승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탁발승에게 보여준 이절 승려들의 행실은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나태하고 타락한 것이었다. 승복은 빨지를 않아 때와 이가 득실거렸고 절 주위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사람이 살고 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였다. 또한 승려들이 곳곳을 다니며 못된짓을 하여 신도 및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탁발승은 생각끝에 이들에게 훈계로는 문란해진 생활을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후「앞으로 3년동안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 부처님의 노여움을 크게 사리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절을 떠났다. 탁발승이 떠난 뒤부터 이절에는 전에 없던 빈대가 득실 거리기 시작하여 승려들을 괴롭혀 앉아있을 수도 잠을 잘수고 없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승려들은 잠자리를 마당이나 숲속으로 옮겼으나 빈대는 여전히 괴롭혔다.
참다못한 승려들은 마침내 회의를 열었다.「이러한 상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3년동안 떠나 생활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빈대들도 먹을것이 없어 굶어죽게 될 것이니 그때 다시 모입시다.」하고 한 노승이 제의했다. 그러자 다른 승려들고 모두 찬성하여 3년후 추석날, 다시 모이기로 한후 제각기 흩어졌다.
절을 띠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승려들의 생활이란 편할리가 없었다. 살을 에이는듯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이집 저집 처마밀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찬 이슬을 맞으며 숲속에서 자기도 하며 떠돌아 다녔다.
그런데 중들은 속죄는 커녕 자기들이 왜 고생을 하는지 반성하지도 않고 빈대를 피할 수 있었던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이들의 떠돌이 생활은 계속되었고 밥만 먹으면 아무데서나 딩굴며 3년의 세월이 빨리 가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떠돌이 3년이 지나자 중들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갖은 고생을 다하며 기다리던 중들이라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걸식생활을 면하게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중들은 마당에 모여 그동안의 고생을 이야기하면서 빈대가 없어진 절 주변을 돌아보며 서로 기뻐하였다
중들이 법당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처님 앞에 난데없이 금주(金徒)가 서 있었다. 중들은 자기들의 3년 동안 고생을 불쌍히 여겨 부처님이 하사하신 금기둥이라 믿고 기쁜 마음에 와락 끌어 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천둥과 함께 금기둥은 무너지고 기둥에 매달렸던 중들은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 기둥은 금기둥이 아니고 빈대들이 3년동안 부처님 앞에 응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기둥을 이룬 빈대 기둥이었던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이절을 찾아 왔던 탁발승을 게으르고 타락한 중들을 구제하러 왔던 부처님의 현신(現身)이라 말하고 있다. 그후 적곡사(笛谷寺)는 폐허가 됐고 따뜻한 물이 솟아 오르던 온천도 서서히 찬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산나물을 캐러왔던 아낙네들이 타는 목을 이 샘터에서 축이며 쉬어갈 뿐 천년의 세월 속에 수풀만이 우거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