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지명

1. 화암사(禾巖寺)와 수(秀)바위

작성일
2025-07-2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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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사(禾岩寺)와 수(秀)바위

위    치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청 건 년 대 : 신라 36대 혜공왕5년(惠恭王)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약 1210여년전)

화암사는 금강산 최남단의 절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1216년전(서기 769년)신라 36대 혜공왕 5년에 진표율사가 설악산 북쪽기슭에 창건하고 화엄사(華嚴寺)라 이름하였다. 화암사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다섯차례나 화재를 입었다고 전한다.
이절 남쪽에 있는 秀바위와 북쪽에 코끼리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맥이 서로 상충하는 자리에 절터가 있어 수바위가 뿜어내는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여 여러차례 화재를 겪었다고 전한다.



이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절은 창건당시 위치에서는 남쪽으로 lOOm쯤 떨어진 장소에 있다. 화엄사는 조선 인조(仁祖) 원년 계해년(1623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3년뒤인 인조 4년에 중건했다. 두번째 화재는 인조12년(1634년)에 산불이 나면서 소실되어 그후 인조 22년(甲申年 1644년)에 구지동(句址東)에 옮겨 중건하였다. 그후 현종 3년(王寅年 1662년)에 세번째 화재를 당하여 3년뒤인 현종 5년(甲辰年 1664년)에 중건되었으며 또 한번 영조 36년(庚辰年1760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음해 구지(舊址)에 다시 세웠다. 고종원년(甲子年 I864년)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그해 9월에 수봉(穗峰)으로 이전하여 건립하고 수암사(穗岩寺)라 이름하였다. (穗峰의 화(禾)는 화(火)와 동음(同音)이므로 火를 면(免)한다는 뜻이고 穗는 水와 同音이므로 火를 막는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임자년(壬子年) 1912년에 수(穗)자의 惠자를 없애고 화(禾)를 인용하여 화암사(禾岩寺)라 개칭하였다.



화암사 사찰내에는 익타암(刻陀庵)과 안양암(安養庵)의 두 암자가 있다.
익타암(刻陀庵): 신라 혜공왕 을유년(乙酉年)에 진표율사가 건립하고 지장암(地藏庵)이라 불러오다 조선 태종원년(太宗元年 辛巳年 1401년) 때 옛터로 옮기고 익타암이라 하였다.
안양암(安養庵) : 조선 인조 6년(仁祖 1628년)에 광명선사(廣明禪師)가 창건하고 조선 경종원년(景宗元年) 신축년(辛丑年 1721년) 에 이절에 있던 해성(海城)스님이 중수하였다.

부근의 울창하였던 송림들은 지각없는 나뭇군에 의해 베어졌고 주위의 오래된 야자수나무 몇그루와 아람들이 은행나무 및 주목등이 옛날의 웅장하였던 사찰을 대변하여 주고 있다.
화암사 남쪽 300m지점에는 수바위라는 왕관모양의 우람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서 화암사 창건자인 진표율사를 비롯한 이절의 역대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계란모양의 바탕위에 왕관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놓여 있는데 윗면에는 길이 1m, 둘레 5m의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있어 가뭄을 당하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수바위 이름의 '수'자를 수(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바위의 생김이 뛰어나 빼어날 수(秀)자로 보는 사람이 많다.
수바위의 전설을 보면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항상 시주를 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절 두 스님이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 끼니때마다 지팡이로 세번 흔들라고 말하였다. 잠에서 깬 스님들은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꿈을 생각하며 노인이 시킨대로 했더니 두 사람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후 두 스님은 식량 걱정없이 편안히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날 객승(客僧) 한사람이 찾아와 이절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 않고도 수바 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객승은 세번 흔들어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번 흔들었다. 그러나 쌀이 나와야 할 구멍에서는 엉뚱하게도 피가 나오는 것이었다. 객승의 욕심에 산신(山神)이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그후부터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