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 가. 의미의 미분화(未分化) 현상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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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리는 대․싸리․버들 따위로 엮어 만든 그릇으로 바닥은 둥글고 촘촘하며, 전은 성기며 높은 것이다. 바구니는 대나 싸리를 쪼개어 둥글게 결어 속이 깊숙하게 만든 그릇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멱둥구미는 짚으로 둥글고 울이 깊게 결어 만든 그릇으로 곡식이나 채소를 담는데 쓰는 것이며, 삼태기는 가는 싸리나 대오리․칡 또는 새끼나 짚 따위로 엮어 만든것으로 앞은 벌어지고 좌우 양편은 뒤로 갈수록 높아져 뒤는 우긋하여 흙이나 쓰레기․거름따위를 담아 나르는데 편하게 만든 그릇을 말한다. 이러한 그릇들은 대부분의 농촌가정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에 대해 이 지역 주민들은 광주리와 삼태기는 분명히 알고 있으나 바구니와 멱둥구이는 혼란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즉, 광주리는 '광우리, 괌지리'라 답하고 삼태기는 '삼태기, 삼탱이'라 답하고 있어 그들에 대하여는 분명히 알고 있으나, 바구니에 대해서는 '삼태기, 둥구미'라 답하고, 멱둥구미에 대해서는 '광우리, 광지리, 함지(낭구로 만든 것)'라 답하고 있어 바구니나 멱둥구미는 그들에게 생소한 것임을 드러내 준다. 이중 바구니에 대해서는, 이 지역의 지리적 조건이 대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대나무를 주로 사용하여 만드는 바구니란 대상의 인식이 극히 어려운 것이어서 그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으나, 멱둥구미는 대부분의 농촌에서 널리 쓰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용어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혹시 다른 지역과의 문화적차이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는 하나, 이들에 대한 조사연구가 발표된 적이 없어 무엇이라 단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2)방이나 마루의 벽에 두개의 긴 나무를 건너질러 물건을 얹어놓게 만든 것이 시렁이며, 이것이 좀더 발전하여 두개의 긴 나무 대신 널조각을 까치발로 받쳐 벽에 가로 매어서 만든 것이 선반이며, 모습은 시렁과 같되 부엌에서 그릇 따위를 얹어 놓기 위해 부엌의 벽 중턱에 가는 서까래 두개를 건너 질러서 만든 것이 살강이다. 결국 이들의 차이란 부엌 살림에 소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부엌 살럼을 제외한 다른 생활도구를 없어 놓은 것인가에 따라서 선딴과 살강이구별되며, 다시 일반 살림살이를 얹어 놓기 위한 것이라도 그 만듬새가 긴 나무 두개를 사용하
여 만든 것인가, 아니면 널조각을 사용하여 만든 것인가에 따라서 시렁과 선반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 사람들은 살강에 대해 모두 '실겅'이라 답하고, 시렁에 대해서는 한 분만 '선반'이라 답하고 다른 모든 제보자들은 '실겅'이라 답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답이 나온다는 것은 살강과 시렁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선반보다는 실겅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을 사용하여 만든 것이건, 혹은 무엇을 위해서 만든 것이거 구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실겅'이라 사용하고 있어 어휘의 미분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⑶ 연체동물의 복족류(腹足類)에 속하는 다슬기, 소라, 우렁이, 달팽이도 방언에 따라 그 지칭하는 명칭이 일정치 않다. 강릉, 삼척 등의 지역에서는 우렁이, 소라, 다슬기를 통칭해서 '골맹이'라 부르고 달팽이를 '틀펭이'라 부르는 반면, 평창이나 단양 등에서는 우렁이는 '울벵이'라 부르고 달팽이를 '틀펭이'로, 달팽이를 '틀팽이'로 지칭하여 이들 사이의 의미분화가 단순치 않음이 지적된 바 있다. (李翊燮, 1980, .4). 그런데 고성 방언에서는 이들 모두들 '골(꼴)뱅이'라 하여 이들 사이의 명칭에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새우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새우는 상당히 다양한 명칭으로 세분화하여 불리는 것으로 (李崇率, 1967, P.382, 金亨奎, 1980, P.24)이러한 명칭의 세분화하는 새우의 크기에 따라서, 또한 새우가 서식하는 장소에 따라서, 또한 새우가 서식하는 장소에 따라서 분류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李秉根, 1969, p.I, 李翊燮, 1980, p.10). 그런데, 이 지역방언에선 새우가 서식하는 장소에 따른 명칭은 구별하지 않고 크기에 따라서만 구별하고 있다. 즉, 큰 것은 '새우'고, 적은 것(젓을 담는 잔 새우)은 '새비새끼' 라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같은 어휘의 미분화현상은 이외에도 상당히 많을 것임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거의 모든 제보자들이 자기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아니면, 다시말해 자기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은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는 극히 심한 언어적 무관심을 드러내준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음에서이다. 심지어는 그들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라도 그것이 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 경우 그들은 그 대상을 지칭하는 명칭들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 식물들(잡초류)에 대해서 대부분의 경우 그냥 '풀'이라 답하거나, 그것이 반찬으로 식용할 수 있는 경우라도 대부분 '나물' 이라 답한은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권을 달리하는 혹은 생활환경을 달리하는 대상들에 대해서 질문하였을 경우 얼마나 심한 어휘의 미분화 현상을 목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은 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이 지역 주민들은 광주리와 삼태기는 분명히 알고 있으나 바구니와 멱둥구이는 혼란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즉, 광주리는 '광우리, 괌지리'라 답하고 삼태기는 '삼태기, 삼탱이'라 답하고 있어 그들에 대하여는 분명히 알고 있으나, 바구니에 대해서는 '삼태기, 둥구미'라 답하고, 멱둥구미에 대해서는 '광우리, 광지리, 함지(낭구로 만든 것)'라 답하고 있어 바구니나 멱둥구미는 그들에게 생소한 것임을 드러내 준다. 이중 바구니에 대해서는, 이 지역의 지리적 조건이 대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대나무를 주로 사용하여 만드는 바구니란 대상의 인식이 극히 어려운 것이어서 그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으나, 멱둥구미는 대부분의 농촌에서 널리 쓰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용어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혹시 다른 지역과의 문화적차이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는 하나, 이들에 대한 조사연구가 발표된 적이 없어 무엇이라 단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2)방이나 마루의 벽에 두개의 긴 나무를 건너질러 물건을 얹어놓게 만든 것이 시렁이며, 이것이 좀더 발전하여 두개의 긴 나무 대신 널조각을 까치발로 받쳐 벽에 가로 매어서 만든 것이 선반이며, 모습은 시렁과 같되 부엌에서 그릇 따위를 얹어 놓기 위해 부엌의 벽 중턱에 가는 서까래 두개를 건너 질러서 만든 것이 살강이다. 결국 이들의 차이란 부엌 살림에 소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부엌 살럼을 제외한 다른 생활도구를 없어 놓은 것인가에 따라서 선딴과 살강이구별되며, 다시 일반 살림살이를 얹어 놓기 위한 것이라도 그 만듬새가 긴 나무 두개를 사용하
여 만든 것인가, 아니면 널조각을 사용하여 만든 것인가에 따라서 시렁과 선반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 사람들은 살강에 대해 모두 '실겅'이라 답하고, 시렁에 대해서는 한 분만 '선반'이라 답하고 다른 모든 제보자들은 '실겅'이라 답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답이 나온다는 것은 살강과 시렁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선반보다는 실겅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을 사용하여 만든 것이건, 혹은 무엇을 위해서 만든 것이거 구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실겅'이라 사용하고 있어 어휘의 미분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⑶ 연체동물의 복족류(腹足類)에 속하는 다슬기, 소라, 우렁이, 달팽이도 방언에 따라 그 지칭하는 명칭이 일정치 않다. 강릉, 삼척 등의 지역에서는 우렁이, 소라, 다슬기를 통칭해서 '골맹이'라 부르고 달팽이를 '틀펭이'라 부르는 반면, 평창이나 단양 등에서는 우렁이는 '울벵이'라 부르고 달팽이를 '틀펭이'로, 달팽이를 '틀팽이'로 지칭하여 이들 사이의 의미분화가 단순치 않음이 지적된 바 있다. (李翊燮, 1980, .4). 그런데 고성 방언에서는 이들 모두들 '골(꼴)뱅이'라 하여 이들 사이의 명칭에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새우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새우는 상당히 다양한 명칭으로 세분화하여 불리는 것으로 (李崇率, 1967, P.382, 金亨奎, 1980, P.24)이러한 명칭의 세분화하는 새우의 크기에 따라서, 또한 새우가 서식하는 장소에 따라서, 또한 새우가 서식하는 장소에 따라서 분류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李秉根, 1969, p.I, 李翊燮, 1980, p.10). 그런데, 이 지역방언에선 새우가 서식하는 장소에 따른 명칭은 구별하지 않고 크기에 따라서만 구별하고 있다. 즉, 큰 것은 '새우'고, 적은 것(젓을 담는 잔 새우)은 '새비새끼' 라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같은 어휘의 미분화현상은 이외에도 상당히 많을 것임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거의 모든 제보자들이 자기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아니면, 다시말해 자기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은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는 극히 심한 언어적 무관심을 드러내준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음에서이다. 심지어는 그들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라도 그것이 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 경우 그들은 그 대상을 지칭하는 명칭들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 식물들(잡초류)에 대해서 대부분의 경우 그냥 '풀'이라 답하거나, 그것이 반찬으로 식용할 수 있는 경우라도 대부분 '나물' 이라 답한은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권을 달리하는 혹은 생활환경을 달리하는 대상들에 대해서 질문하였을 경우 얼마나 심한 어휘의 미분화 현상을 목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은 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