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함희석(咸熙錫)

작성일
2025-07-2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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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각 위치:江原道 高城郡 竹暇面 五峰里 396
희석(熙錫)의 아버지인 덕인(德仁)은 (이조 순조(李朝 純祖) 28년 무자(戊子) 3년 서기 1828년 5월 10일생~경신년(庚申年) 서기 1860년 3월1일 졸 수(卒 壽)는 33세)3형제를 두었으며 희석(熙錫)은 그의 장남이였다. 어렸을때부터 천성이 온후하여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였으며 가세가 빈곤하여 하고 싶었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집안 일을 도맡아 하여 왔으며 항상 부친이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10여세의 어린 소년이지만 혹시 부친에게 실수나 유고가 있을까봐 늘 걱정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효행 봉양하였다.
무오년(戊午年)(서기 1858년) 겨울 부친이 병환으로 앓아 눕게되자 엄동설한(嚴冬雪寒)에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가 약으로 봉양하여 다시 소생(蘇生)케 하였으며 경신년(庚申年) 서기 1860년 2월에 천화가 나서(당시 산림이 울창하여 나무와 나무의 마찰로 일어나는 산불을 천화라 일컬었음) 영동(嶺東) 구읍(九邑)이 일시에 화란(火亂)이 일어나던 때 부친이 술에 취하여 귀가 도중 길가에서 잠들었다가 큰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그때 당시 희석의 나이는 16세였었다.
동년 경신년(庚申年) 3월 1일 서기 1860년 부친의 상을 입고 3년간이나 묘 앞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 밤에는 범의 호위 아래 시묘(待墓)하였다.
그칙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으로부터 정여(旌闇)를 하사받았다.
효자(孝子) 통정대부행돈영부도정(通政大夫行敦寧府都正)
희석은 이조 헌종 12년 10월7일에 출생하였으며(을사년(乙巳年) 서기 1845년)서기 1918년 10월 14일에 졸하여 수(壽)는 74세였다.
자(字)는 사언(仕彦)이요 호(號)는 오헌(梧軒)이요 묘(墓)는 공현진 선유담(仙遊潭)에 있다.
슬하에는 영두(泳斗), 영준(泳悛), 영우(泳祐)를 두었다.
비신의 높이는 1.75m 이며 정, 축 1칸의 보호각이다.
비는 1869년 (기사년己巳年))에 세운 효자비이며 비각은 1871년(신미년(辛未年)) 12월에 건립하였다.

註)함씨(咸氏)의 관향(貫鄕)을 양근(場根) 또는 강릉(江陵)으로 통칭한다. 함씨(咸氏)의 관향(貫鄕)은 고려시대에는 양근(楊根)으로 통용되었고 이조(李朝)에 와서 일부가 강릉(江陵)으로 개향(改鄕)하였다.

오봉리(五峰里)마을에 같은 함씨 성씨(姓氏)의 효자각이 두 곳에 있으나 각기 다르게 한 쪽은 양근함씨사세오효지정각(楊根咸氏四世五孝之旌閣)으로 되여 있고 또 한 쪽은 효자 전통정
대부 돈영부도정 강릉함희석지각(孝子 前通政大夫 敦寧府都正 江陵咸熙錫之閣)으로 되여 있으나 같은 본향(本鄕)의 함씨 조상임을 밝히며 타지에서 오는 손님이나 후세에 오해가 있을까 하여 특히 여기 에 (註)를 붙인다.

   

이니 3일을 더 연명하여 인홍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의 아들인 덕우(德祐)(字는 正甫)도 인홍이 위독하자 역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니 1년을 더 연명하게 하고 시묘 3년을 살아 嘉善大夫(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고 熙龍 역시 부친인 德祐가 위독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니 3일을 더 연명하였다. 그러므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라는 벼슬을 내리고 4대 5효자가 났다 하여 조정에서 보기 드문 효자집안이라 하여 벼슬을 내리시고 이를 길이 전하고저 서기 1820년 비를 건립하게 하고 4대의 5효자가 났다 하여 4세 5효자각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