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이재호(李在浩) 외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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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호(李在浩)

1878~1933. 9. 8. 독립운동가. 이명 : 범재(範宰), 고성군 현내면(縣內面)출신으로 서울 관수동(觀水洞)에서 살았다. 1919년 3․1운동 직후 전협(全煬)․최익환(崔益煥)이 주동하여 조직한 대동단에 가담하여 항일유고문(抗日諭告文)등을 인쇄 배포하고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꾀하던 대동단이 이강(李坰 : 義親王)을상해 임시정부의 수령으로 참여시키기 위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9일 의친왕을 호위하여 정남용 등이 기차편으로 서을 수색역을 떠나 출국하였다.
그러나 동 11일 일행이 암록강을 건너 안동역에서 하차와 동시에 일본경찰(평북경찰부 米山경부)에게 사전 탐지되어 이강․정남용․이을규 등이 서울로 압송당하자 다음날 (12일) 이재호는 서울 초음동(初音洞)에서 체포되었고, 이어 전협 등 관련자 20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른후 1933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3, 1983 97~100쪽 참조)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정남용(鄧南用)

1896~1921. 4. 18. 독립운동가. 이명 : 남용(南容)․필성(必成) 혹은 홍우식(洪字植). 고성군 현내면 철동(縣內面 鐵補)출신이다. 고성의 친봉사(乾鳳寺)승려이던 그는 3․1운동 직후 조직된 대동단(大同圍)에 가입하여 일경에게 검거된 최익환(崔益煥)의 후임으로 이 단체의 선전활동을 주관하였다. 전협(全煉)․최익환등이 주도한 대동단은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꾀하는 한편, 의친왕(義親王 : 李剛)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1919년 11월 9일 그는 이을규(李乙奎)․한기동(韓基東)․송세호(宋世鎬)등과 함께 의친왕을 보위하고, 동행 혹은 각자 기차편으로 출국하였다.
그러나 상해로 향하던 중 만주 안동역에서 탐지한 일본경찰(평북경찰부 米山경부)에게 하차와 동시에 의친왕과 이을규․정남용이 서울로 연행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협등 관련자 20여명이 차례로 체포되어 그는 1919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5개월만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3. 1983, 97~100쪽 참조)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정훈(鄭薰)

1920. 8~1973. 9. 13. 독립운동가. 고성군 간성(杆城)출신이다. 중국호남성 장사(湖南省長沙)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상해임시정부산하 광복군(光復軍) 제 1지대에 입대하여 동지대 제2분대장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國家報動處, 獨立有功人物論 5 1071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주광석(朱光錫)

1867~미상. 의병장. 고성군 율암리(栗崙里)출신이다.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자 고성군 일대에서 의병 1백여명을 모아 의거 하였다. 특히 그는 간성(杆域)․고성(高城)․양양(襄陽)일대에서 활약하였는데, 1907년 9월 15일 의병 50명으로 간성읍을 습격하여 일본 강릉수비대와 교전하였고. 동년 10월 10일에는 의병 1백여명을 거느리고 고성읍을 습격하여 그곳의 일본군 고성분견대(分遣隊)와 약 1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다가 퇴각하였다.
또한 동년 11월 3일에는 의병장 민긍호(閔肯鎬)․박장호(朴長鎬 : 朴華南)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의병을 이끌고 양양읍을 습격하여 읍내의 순사주재소(巡査驗在所)를 파괴하고 많은 물품을 노획하였으며, 이틀후인 5일에는 양양읍의 순사와 일본군 무전군조(式田軍曹 : 군조는 우리나라 中士에 해당)를 죽이고 퇴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1월 27일에는 박장호․박내익(朴乃益)등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약 1천여명의 의병으로 갈릉읍을 서․남․북의 3방향의 고지에서 포위 공격하여 일본 정찰대․수비대와 4시간동안 접전을 벌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일제측이 기록한 『暴徒史編輯䙽料』에 의하면 "주광석은 고성․양양․강릉지방에 걸쳐 의병항쟁을 전개하다가 부상을 입은 뒤로는 행방불명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부상은 1907년 음 12월 중순경 인제군 내면 신흥리(內面 新興里)에서 적병과 접전시 발에 입은 골절
상으로 그곳에서 곧 퇴각 하였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3. 618. 621~622쪽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 9. 64쪽)

☞ 천성환(千成燥)

1917. 6. 22~1954. 1. 27. 독립운동가. 고성군 고성출신이다, 1938년 6월 26일 향리인
고성읍 율대리(栗垈里)에서 김종희(金宗熙)․황동현(責東鉉)등과 함께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한글보급과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할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이에 고성남공립소학교의 교사로 재직할 때 그의 담임반 학생 70여명 에게 "조선어는 조선인의 생명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주당 1시간의 제한된 조선어 교육시간을 4~5시간으로 임의 배정하는 등 일본인화(日本人化)교육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39년 3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194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세 소위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결국 동 9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12. 1115~1116쪽 참조)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