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이근옥(李榥玉) 외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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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옥(李榥玉)

1884. 2. 16~1959. 12. 28. 독립운동가. 고성군 토성면 운봉리(土城面 雲峯里)출신이다
그는 1919년 4월경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인 운봉리․교암리(橋岩里)․죽왕면 오호리(竹旺面 五湖里)․토성면 용암리(龍岩里) 일대의 게시판과 기로표에 '충고동포(忠告同胞)'라고 제한 선동문을 첨부게시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동년 10월초 조종대(趙鍾大)․김영학(金永鶴, 애국단 양양군단장)의 권유로 애국단양양군단(愛國園 裏陽軍團)에 가입하는 동시에 김연수(金延流)․문명섭(文命燮)․이석규(李錫圭)등을 단원으로 포섭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錡九)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독립애국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강원․충청․전라도등지에 도단(道鬪)을 설치하여 그 아래군단(軍圍)을 두었는데, 양양군단은 강원도단(속칭 철원애국단)의 산하조직체였다.
동단의 활동은 주로 상해임정의 연통부(聯通府)와 같이 임정의 선전․재정자금조달 등의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에 동년 10월 하순 그는 동지 김연수․이석규․문명섭 등과 함께 상해임정에 참여하기 결의하고 서울을 경유, 상해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본부와 연락이 두절되어 다른 동지들은 귀향하고 그만 혼자 서울에 체류하였다. 이때 그는 독립대동단(獨立大同園)이 주도하여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선전물을 박화진(朴華鎭)으로부터 전달받고, 이를 가지고 내려와 고성의 건봉사(乾鳳寺)등지를 다니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필치던중 1920년 1월 자금모집과정에서 강원도단의 정체가 들어나 피체됨으로써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9990~1030쪽 참조)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이덕근(李德根)

1885~1907. 11. 4. 의병운동. 고성군 상정리(上汀里)출신이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이 봉기하자 1907년 10월 20일 고성군내에서 활약한 의병소모장(義兵召募將) 김옥배(金玉培)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이덕근(23세)은 고성읍내의 일본군 동정을 정탐하던 중 일본 헌병대 고성분대(高城分隊)에게 체포되어 권석근(權錫根, 22세)과 함께 동년 11월 4일 장전(長箭)에서 총살형에 처하여 피살 순국하였다.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8. 90쪽)
정부에서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이동진(李東振)

1902. 6. 15~1973. 5. 25. 독립운동가. 고성군 간성(杆城)출신이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3월 17일 간성읍 간성보통학교 전교생 150명과 교정에서 만세시 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에 다니던 이동진이 향리인 간성에 돌아와 그곳 청년 함기석(咸基錫)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한 선전문 "지금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키니 문명교육을 받은자 등은 누구라도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는 내용을 작성하여 간성 보통학교 4학년 교실 입구에 붙여 학생들의 각성을 촉구함으로써 전개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배후조정을 한 탓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19년 5월 12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6월징 역형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 2. 607쪽 : 同. 獨立運動史資料集 14. 981쪽 :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錄 11. 207쪽)
정부에서 199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이석규(李錯圭)

1894. 9. 7~1960. 7. 31. 독립운동가. 고성군 토성면 백촌리(土城面 栢村里)출신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임정을 지원할 목적으로 신현구(申鉉九)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애국단 양양군단(愛國團 讀陽軍團)에 가입활동하였다. 이 당시 애국단은 충청․강원․전라도에 도단(道團)을 설치하고 그 산하조직으로 도단 아래 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양양군단은 강원도단(속칭 철원애국단)의 산하조직체였다.
그는 동향인 이근옥(李根玉)의 권유로 1919년 10월 중순경 애국단에 가입한 이래 이근옥․ 문명섭(文命燮)․김연수(金延洙)등과 함께 상해임정에 투신하여 활동하기로 뜻을 모으고, 서울 본부를 경유 상해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간 그들은 본부와의 연락두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근옥을 제의한 모두가 귀향하였다. 그러던 중에 1920년 1월 애국단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피체되어 동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되었다. (國史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9. 990~1008쪽 참조)
정부에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홍태식(洪泰植)

1917. 5. 30~1945. 2. 6. 독립운동가. 이명 : 태식(太植), 고성군 외금강면 출신이다.
1940년 10월 외금강면 창대리(外金剛面 倉垈里)에서 동지 5명과 함께 신동아동지회(新東亞同志會)를 비밀리에 결사하고,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1941년 10월경 밀고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에 1942년 5월 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19일 출옥하였다. 그러나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5년 광복전에 사망하였다.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錄 9. 532쪽)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