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권형원(權亨源) 외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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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형원(權亨源)

1855. 1. 23~1907. 9. 17. 의병운등 이명 : 하교(夏敎)~하경(夏卿), 고성군 서면(西面)출신이다. 1896년 1월 봉기한 을미의병(乙末義兵) 당시 민용호(鬧龍鎬)의 강릉의병은 개항장원산공략을 목표로 북진(北進)하여 양양․간성(양 3. 8)을 거쳐 등년 3월 9일(음 1. 26)고성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군 8명을 포박, 민용호에게 인계하여 참수토록 하고 그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이에 그는 강릉의병의 고성유진장(高城留陣將)에 임명되어 항전을 벌였으나, 동년 7월부터 강릉의병이 함경도 지역으로 북상함에 따라 그 역시 을미의병 항전을 종식하게 되었다. 그후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확산 격화되자, 그도 의병항전을 재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년 9월 17일 고성 남강(南江)전투에서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일군에게 대패한 끝에 피체되어 끝내 총살당하였다. (國史編纂姜員會, 關東倡義錄, 27쪽 :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錄 6. 43~44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갑성(金甲誠)

1912~1935. 독립운동가. 이명 : 왕의성(王義誠), 고성군 외금강면(外金剛面)출신이다. 1931년 후반부터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상해임정의 김구(金九)는 강화된 한인독립운동과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간에 국제적 연대를 형성할 목적에서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국민당정부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한 독자적인 투쟁역량을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따라서 1933년 봄 김구는 중국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에 장개석과회합하여 한인특별반을 설치함에 따라 1934년 2월 동교 낙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 제10기생으로 입학하여 독립군 간부양성훈련을 받았다. 그후 1934년 12월 하순 김구가 동군관학교 입교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하자 이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던 1935년 9월 동교 사격장에서 수류탄 투석 연습중 중국인 학생의 잘못으로 던진 수류탄의 파편에 맞아 순국하였다.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錄 12. 132-133쪽)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동원(金東元)

1898~미상. 독립운동가. 고성군 신북면 계월리(新北面 桂月里)출신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동년 3월초 독립선언서 1통을 입수한 그는 3월 13일 밤 고성면 사무소의 등사판을 가지고와 자기집에서 '고성재판'이라는 표제를 붙인 독립선언서 50매를 등사한 후 그 다음말 14일 고성읍 밖에서부터 간성가도 지경리까지 게시판에 붙이거나 노상에 뿌려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30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0월의 징역형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5. 972~973쪽)

☞ 김백룡(金伯龍)

1864~미상. 의병장. 고성군 출신이다. 일제측 기록(暴徒史編輯資料)에 의하면 "김백룡은 고성군 주민으로 나이는 43세, 부하 70여명을 거느리고 고성군에서 폭동하기 시작하여 고성․회양군(淮陽郡)을 횡행하였다."고 하였다. 이같이 김백룡은 자신이 소모한 의병을 거느리고 고성․회양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당시 고성지방에는 김백룡을 비롯하여 주광석(朱光錫)․김해석(金海石)․어득수(魚得水)의 의용부대가 활동하였는데 특히 간성군(이때는 고성군과 분리되고 있었음) 현내면(縣內面), 고성군 금강산 부근 등지를 거점으로 일본군과 친일적인자를 경고 살상하고, 재산을 빼앗는 등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3. 618쪽)

☞ 김연수(金延洙)

1894. 6. 24~1928. 10. 24. 독립운동가. 고성군 토성면 운봉리(土城面 雲峯里)출신이다.
그는 1919년 10월 이근옥(李根玉)의 권유로 애국단 양양군단(愛國團 襄陽郡團)에 가입활동 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애국단은 상해임정(上海臨政)의 지원단체로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충청․전라도 등지에 도단(道團)을 설치하고 그 아래 군단을 두었는데 양양군단은 강원도단(속칭 : 鐵原愛國團)의 산하조직이었다. 동단의 활동은 임정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조직망을 통한 상해임정의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는 1919년 10월 하순에 이근옥․이석규(李錫圭)․문명섭(文命燮)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건너가 임정에 직접 참여 활동할 목적으로 서울의 애국단 본부를 경유, 상해로 출발할 계획 이었으나, 당시 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끝내 귀향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양양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탄로됨으써 일경에 피체되어 1년여 동안 고초를 치르고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 법원에서 증거불 충분으로 풀려났다. (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9. 990~1008쪽 참조)
정부에서는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