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권기수(權基沫) 외
작성일
2025-07-26
조회
35
☞ 권기수(權基沫)
1893. 1. 21~1922. 1. 9. 독립운동가. 이명 : 쌍라(雙羅)․쌍희(雙喜), 호 : 청계(淸溪), 자 : 성원(聖原)이다. 고성군 간성 출신으로 1896년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 강릉의병으로 활약하던 권인규(權仁圭)의 손자이며 정미의병때 활동한 권종해(權鍾海)의 장남으로 부친의 행적 때문에 일본군에 잡혀 모진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동지들과 함께 강원도 영월․평창․정선지역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해 일경에게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실형을 언도받아 함흥감옥에서 수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에 옥사하였다.(同編輯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3,4쪽)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권석근(櫂錫根)
1886~1907. 11. 4. 의병운동. 고성군 상정리(上汀里)출신이다.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해산을 원인으로 하여 봉기한 정미의병(丁未義兵)당시 구국항쟁을 벌이고자 김옥배(金玉培)의 병진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20일 고성군내에서 활약한 의병 소모장(義兵召寡將) 김옥배의 휘하에서 그의 지시에 따라 고성읍내의 일본군동정을 정탐하던 권석근(23세)은 일본헌병대 고성분대(高城分隊)에게 체포되어 이덕근(李德根, 22세)와 함께 동년 11월 4일 장전(長箭)에서 총살 순국하였다.(國史編襲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8,090쪽)
정부에서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권원호(櫂元浩)
1904. 8. 5~1944. 4. 3. 독립운동가. 고성군 고성출신이다. 1941년 10월 도내 회양감리 교회(淮壤監理敎會)의 전도사로 있을 때 일제의 동방요배(車方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강요를 주일예배 시간에 완강히 거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피체되었다. 이에 1942년 1월 29일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옥중에서도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동방요배를 반대하였으므로 소위 불경죄(不敬罪)가 추가되었다.
마침내 1943년 11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형이 가형(加刑)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緣 6,594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권 인규 (櫂仁圭)
1843. 7. 12~1899. 11. 6. 의병운동. 이명 : 인규(仁奎), 호 : 소은(巢隱), 고성군 간성출신이다. 아들 종해(鍾海), 손자 기수(基洙)와 더불어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경상남도 산청(山淸) 출신의 의병장 민용호(間龍鎬)가 을미의병 당시 의진을 이끌고 강릉으로 진출하여 광동방면의 의진을 규합하고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그때 강릉일대에서 유력한 인물이며 저명한 유학자인 권인규는 강릉지방의 토착세력을 규합하는 민용호에게 글을 보내어 의병운동을 격려하였다
특히 그는 관동창의소효유문(關東倡義所曉諭文)․관동창의소포유문(關東偏義所布諭文).
경고문(警告文)․창의통문(倡義通文)․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등을 작성 선포하여 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예안창의통문(禮安倡義通文)등 격려의 글을 발표하여 의병활동 을 고무하는 등 을미의병 당시 강릉의진의 막후에서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소은창의록』(巢隱倡義錄)은 그의 아들 권종해가 이러한 글을 모아 엮어낸 단행본이다.(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1. 169쪽 : 同, 獨立運動史資料集 3. 259~276쪽)
정부에서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권종해(樣鍾海)
1869. 6. 16~1922. 2. 9. 의병장. 이명 : 주성(周成), 호 : 성파(惺波), 자 : 선명(宣明)이다. 고성군 간성 출신으로 권인규(權仁圭)의 아들이다. 1906년 강릉유림대표로 선정되어 성균관(成均館)에 진정서를 내는 동시에 대동문우회(大同文友會) 및 법부평의회(法部評謠會)에 고소하여 당시 친일군수 이재화(李載和)와 친일거부(巨富) 이근우(李根宇)․조익환(曺翊煥) 등에게 추방지시를 내리도록 청하였다.
1907년 8월 정미의병(丁未業矣)이 봉기하자 거의(擧義)를 다짐하고,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障)에 가서 민긍호(間肯鎬)․이중희(李重熙)․김덕제(金德濟)등과 의병항쟁의 전략을 모의하는 한편, 관동일대에서 의병소모장(義兵召募將)이 되어 의병과 해산군을 모으는 동시에 인제의 운두령 (雲頭嶺)에서 왜병(僑兵)과 접전끝에 대파하였다.
또 1908년 2월 이강년(李康秊)의진과 합류하여 동 4월 인제 백담사(百潭寺)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렀으며, 5월 정선군 북면 단림(丹林)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러자 6월 6일 왜병은 그의 본가에 침입하여 모친 김씨를 타살하고, 차남 증수(曾流)에게 총검으로 복부상을 입혔으며, 가옥을 전소시켰다. 그리고 1909년 4월 양양으로 이진(移陳)하여 활동중에 적의 밀정 김성서(金聖瑞)의 밀고로 적의 야습을 받아 크게 패전하였다.
그는 1913년 서울의 김종익(金鍾翊)과 함께 의군부(義軍府) 조직에 참여하고, 그 유격장에 임명되어 의거를 준비하던 중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沙川面)의 장재호(張在鎬)의 집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지 6년만에 출감하였다. 그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충청북도 일대를 잠행하면서 무력항쟁을 획책하다가 그간의 행적이 적에게 노출되어 다시 체포 되었으며, 끝내 무기형을 언도받고 투옥된지 4년이 되던 해에 옥사하였다.
이로써 관동의병의 선구자인 부친 권인규(權仁圭) 그리고 그의 아들 기수(基洙)․증수(曾流)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독립운동사상 큰 업적을 남기었다. (同編襲委員會, 獨立運動資料集 3,4쪽 :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錄 1,483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893. 1. 21~1922. 1. 9. 독립운동가. 이명 : 쌍라(雙羅)․쌍희(雙喜), 호 : 청계(淸溪), 자 : 성원(聖原)이다. 고성군 간성 출신으로 1896년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 강릉의병으로 활약하던 권인규(權仁圭)의 손자이며 정미의병때 활동한 권종해(權鍾海)의 장남으로 부친의 행적 때문에 일본군에 잡혀 모진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동지들과 함께 강원도 영월․평창․정선지역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해 일경에게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실형을 언도받아 함흥감옥에서 수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에 옥사하였다.(同編輯委員會, 獨立運動史資料集 3,4쪽)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권석근(櫂錫根)
1886~1907. 11. 4. 의병운동. 고성군 상정리(上汀里)출신이다.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해산을 원인으로 하여 봉기한 정미의병(丁未義兵)당시 구국항쟁을 벌이고자 김옥배(金玉培)의 병진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20일 고성군내에서 활약한 의병 소모장(義兵召寡將) 김옥배의 휘하에서 그의 지시에 따라 고성읍내의 일본군동정을 정탐하던 권석근(23세)은 일본헌병대 고성분대(高城分隊)에게 체포되어 이덕근(李德根, 22세)와 함께 동년 11월 4일 장전(長箭)에서 총살 순국하였다.(國史編襲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8,090쪽)
정부에서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권원호(櫂元浩)
1904. 8. 5~1944. 4. 3. 독립운동가. 고성군 고성출신이다. 1941년 10월 도내 회양감리 교회(淮壤監理敎會)의 전도사로 있을 때 일제의 동방요배(車方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강요를 주일예배 시간에 완강히 거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피체되었다. 이에 1942년 1월 29일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옥중에서도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동방요배를 반대하였으므로 소위 불경죄(不敬罪)가 추가되었다.
마침내 1943년 11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형이 가형(加刑)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緣 6,594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권 인규 (櫂仁圭)
1843. 7. 12~1899. 11. 6. 의병운동. 이명 : 인규(仁奎), 호 : 소은(巢隱), 고성군 간성출신이다. 아들 종해(鍾海), 손자 기수(基洙)와 더불어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경상남도 산청(山淸) 출신의 의병장 민용호(間龍鎬)가 을미의병 당시 의진을 이끌고 강릉으로 진출하여 광동방면의 의진을 규합하고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그때 강릉일대에서 유력한 인물이며 저명한 유학자인 권인규는 강릉지방의 토착세력을 규합하는 민용호에게 글을 보내어 의병운동을 격려하였다
특히 그는 관동창의소효유문(關東倡義所曉諭文)․관동창의소포유문(關東偏義所布諭文).
경고문(警告文)․창의통문(倡義通文)․창의포고문(倡義布告文)등을 작성 선포하여 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예안창의통문(禮安倡義通文)등 격려의 글을 발표하여 의병활동 을 고무하는 등 을미의병 당시 강릉의진의 막후에서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소은창의록』(巢隱倡義錄)은 그의 아들 권종해가 이러한 글을 모아 엮어낸 단행본이다.(同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1. 169쪽 : 同, 獨立運動史資料集 3. 259~276쪽)
정부에서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권종해(樣鍾海)
1869. 6. 16~1922. 2. 9. 의병장. 이명 : 주성(周成), 호 : 성파(惺波), 자 : 선명(宣明)이다. 고성군 간성 출신으로 권인규(權仁圭)의 아들이다. 1906년 강릉유림대표로 선정되어 성균관(成均館)에 진정서를 내는 동시에 대동문우회(大同文友會) 및 법부평의회(法部評謠會)에 고소하여 당시 친일군수 이재화(李載和)와 친일거부(巨富) 이근우(李根宇)․조익환(曺翊煥) 등에게 추방지시를 내리도록 청하였다.
1907년 8월 정미의병(丁未業矣)이 봉기하자 거의(擧義)를 다짐하고,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障)에 가서 민긍호(間肯鎬)․이중희(李重熙)․김덕제(金德濟)등과 의병항쟁의 전략을 모의하는 한편, 관동일대에서 의병소모장(義兵召募將)이 되어 의병과 해산군을 모으는 동시에 인제의 운두령 (雲頭嶺)에서 왜병(僑兵)과 접전끝에 대파하였다.
또 1908년 2월 이강년(李康秊)의진과 합류하여 동 4월 인제 백담사(百潭寺)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렀으며, 5월 정선군 북면 단림(丹林)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러자 6월 6일 왜병은 그의 본가에 침입하여 모친 김씨를 타살하고, 차남 증수(曾流)에게 총검으로 복부상을 입혔으며, 가옥을 전소시켰다. 그리고 1909년 4월 양양으로 이진(移陳)하여 활동중에 적의 밀정 김성서(金聖瑞)의 밀고로 적의 야습을 받아 크게 패전하였다.
그는 1913년 서울의 김종익(金鍾翊)과 함께 의군부(義軍府) 조직에 참여하고, 그 유격장에 임명되어 의거를 준비하던 중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沙川面)의 장재호(張在鎬)의 집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지 6년만에 출감하였다. 그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충청북도 일대를 잠행하면서 무력항쟁을 획책하다가 그간의 행적이 적에게 노출되어 다시 체포 되었으며, 끝내 무기형을 언도받고 투옥된지 4년이 되던 해에 옥사하였다.
이로써 관동의병의 선구자인 부친 권인규(權仁圭) 그리고 그의 아들 기수(基洙)․증수(曾流)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독립운동사상 큰 업적을 남기었다. (同編襲委員會, 獨立運動資料集 3,4쪽 : 國家報勳處, 獨立有功人物錄 1,483쪽)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