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인물

◇ 문학(文學)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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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신(鄭胤臣) : 호(號)는 한매(寒梅)라 하였고 본관(本貫)은 영일(迎日)이며 현신(賢臣)의 아우이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문하(門下)에서 배웠고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벼슬이 참봉(參奉)에 이르렀으며 광해군(光海군)이 바뀌자 세속(世俗)의 영달(榮達)을 구(求)하지 아니하고 금서(琴書)를 즐기며 지냈다.

이자록(李自祿) : 호(號)를 습암(襲岩)이라 하였고 완창대군(完昌大君)의 후손(後孫)이다.
덕의(德儀)가 반듯하였고 문학(文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인조(仁祖) 때에 수직(壽職)으로 등추(車樞)가 되었다.

심세영(沈世英) : 호(號)는 정재(諒齋)이고 참판(參判) 윤조(胤祖)의 현손(玄孫)이다. 우암(尤腐)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며 박약교치(博約交致)의 공이 있어 유림(儒林)이 추앙(推仰)하였다.

권임도(權任度) :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고 참적(參義) 응기(應箕)의 후손(後孫)이다.
산수(山水)를 즐기는 벽(癬)이 있어 벽송정(碧松亭)이라는 정자를 강상(江上)에 짓고 우암(尤庵) 송시열(末時烈)을 방문(訪問)하고 당인(唐人) 정훈(鄭蕓)의 의(義)를 취(取)하여 칠송정(七松亭)이라 정자(亭子)의 이름을 바꾸었으며 제액(題額)을 고쳤다. 조우재(趙亏齋), 박서계(朴西溪), 이직재(李直齋), 윤농은(尹農隱), 오서파(吳西坡), 이한포재(李寒圃齋) 등 여러 사람의 기문(記文)과 제영(題味)이 있으며 벼슬은 호군(護軍)을 지냈다.

심성구(沈聖奇) : 호(號)는 농은(農隱)이고 참판(參判) 윤조(胤祖)의 후손(准孫)이다. 그의 종조(從祖)인 세영(世英)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을 하였으며 학문(學問)이 정심(精深)하여 사방(四方)의 학자(學者)들이 화양(華陽)이 재전(再傳)하였다고 칭송(稱頌)하였다. 저서(著書)로는 애경전서(哀敬全書)가 있고 창주(滄洲) 권규(權揆)가 이 책을 읽고 감탄(感嘆)하여 이르기를 그의 학문(學問)을 어찌 나같은 것이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박사중(朴思中) : 호(號)는 전암(傳岩)이고 본관(本館)은 고령(高靈)이며 찬성(贊成)의 영준(永悛)의 후손(後孫)이다. 문행(文行)과 학업(學業)으로 당시에 이름을 날렸고 향학(鄕學)에서 높아 도천(道鳶)으로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에 올랐으며 유고(遺槁)가 있다.
최 균(崔 均) : 호(號)는 감호(鑑湖)이고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이며 교리(核理) 자점(自需)의 후손(後孫)으로 현석(玄石) 박세송(朴世宋), 택당(澤堂) 이식 (李植)과 교의(交誼)가두터웠다.

김기병(金箕柄) : 호(號)는 순암(順腐)이고 본관(本貫)은 광산(光山)이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후손(後孫)이다. 문장(文章)과 글씨로 당세(當世)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최치협(崔致添) : 호(號)는 일감당(一鑑堂)이고 교리(校理) 자점(自霑)의 후손(後孫)이다.
도제(陶緹)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여 문학(文學)과 효행(孝行)으로 여러번 천거(薦擧)되었다.

최양호(崔養好) : 호(號)는 초은(樵隱)이고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이며 사마(司馬) 세환(世桓)의 후손(後孫)이다. 문학(文學)과 독행(篤行)으로 여러번 천거(薦擧)되었고 향리(鄕里)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유고(遺槁)가 있다.

권 유(權 維): 호(號)는 칠송(七松)이고 참의(參議) 응기(應箕)의 증손(曾孫)으로 학문(學問)이 순수(純粹)하였고 최명사(崔明沙) 박서계(朴西溪)와 동학(同學)하여 칠송처사(七松處士)라 일렀다.

김문수(金文流) : 일명 재호(在治)라 하였고 호(號)는 정헌(靜軒)이라 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추존(推尊)을 받았다.

권덕혜(權德혜) : 호(號)는 동제(東溪)이고 응기(應箕)의 현손(玄孫)이다. 숙부(叔父) 구(絲)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여 문장과 행의(行誼)가 향리(鄕里)에서 청송(稱頌)받았다.

윤자익(尹滋益) : 호응기(應箕)는 종와(種窩)이고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이며 문정공(文定公) 황(煌)의 후손(後孫)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학문(學問)이 넉넉하였으며 사림(士林)과 협의(協義)하여 학문(學問)을 근장(勤獎)하였으며 문행(文行)으로 당세(當世)의 칭송(稱頌) 받았다.

정섭기(鄭燮杞) : 호(號)는 은암(隱岩)이고 정포은(鄭圃隱)의 후손(後孫)이며 문학(文學)으로 향리(鄕里)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정두이(鄭頭履) : 호(號)는 성산(聲山)이고 동추(同樞) 현신(賢臣)의 후손(後孫)으로 늦게 매산 (梅山)홍직필(洪直弼)의 문하(文下)에서 글을 배웠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경전간란(經戰間蘭難),의례변석(疑禮辨釋)을 편집(編韓)하였고 유고(遺槁)가 있다

황치사(黃致沙) : 호(號)는 향락(鄕洛)이고 이중(履中)의 손으로 산영재(山映齋)라는 작은 재실(齋室)을 짓고 동계(冬季)에는 강(誇)하고 여름에는 영하여 향사(鄕士)들의 문풍(文風)을 진작(振作)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가헌십장(家憲十章)과 향악십규(鄕約十規)의 저서(著書)가 있다.

최두남(崔斗南) : 호(號)는 계암(淺庵)이고 승지(承旨) 치우(致雨)의 후손(後孫)이다. 장재(匠齋) 조시겸(趙持謙)의 문하(文下)에서 수업(受業)하여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으며 총명이 뛰어났다. 양사재(養士齋) 창건(創建) 때에는 때마침 그의 스승 정재(廷齋)가 이 고을 수령(守令)으로 있었기에 위에 상신(上申)하여 명경과(明經科)를 열었다.

최영시(崔永時) : 호(號)는 취선(聚蟬)이고 승지치우(承旨致雨)의 후손(後孫)이다.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문사(文祠)에 조예(造詣)가 깊어 사우(士友)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유고(遺槁)가 있다.

정표(鄭漂) :호(號)는 경재(敬齋)라 하였고 본관(本貢)은 영일(迎日)이며 참판(參判) 유(油)의 증손(曾孫)이다. 가정의 훈교(訓敎)를 이어 그 규범(規範)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고 널리 경사(經史)를 읽었으며 춘추(春秋)에는 문인(文人)들과 함께 향약(鄕約)을 강논(講論) 하였으며 유고(遺槁)가 있다.

최찬진(崔燦軫) : 호(號)는 월포(月浦)이고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으로 효자 치일(致日)의 후손이다.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알려 졌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심동진(沈東鎭) : 호(號)는 면와(勉窩)이고 본관(本貫)은 삼척(三陟)이며 동노(車老)의 후손이다. 금의(錦議) 이근원(李根元)에 사사(師事)하여 정학(正學)을 익혀 오도동(五道東)이라 칭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권형원(權亨源) : 호(號)는 회정(晦亭)이고 응기(應蓂)의 후손(後孫)으로 학문(學問)이 높았고 예설(禮諦)에 더욱 밝았다.

이재은(李在般) : 호(號)는 율계(栗溪)이고 본관(本貫)은 전주(全州)로 자록(自祿)의 후손이다. 경전(經情)에 박통(惰統)하였고 후생들을 계발(啓發)하였으며 문학(文學)과 덕망(德望)으로 당시에 널리 알려졌었다.

정완교(鄭完敎) : 호(號)는 중산(重山)이고 문충공(文忠公) 몽주(夢周)의 후손(後孫)이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효성(孝誠)을 다 하였다. 재예(才藝)가 영민(英敏)하고 문학(文學)이 뛰어나 당시에 널리 알려졌으며 벼슬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필기(鄭弼基) : 호(號)는 성계(聲溪)이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손(後孫)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에 능하여 나이 14세 때에 향천(鄕鳶)을 입어 고시(考試)에 나갔다가 수석(首席)을 하였다. 임원(林原) 속에서 성정(性情)을 길렀고 증직(贈職)으로 비서승(秘書丞)이 되었으며 유고(遺槁)가 있다.

김연덕(金演德) : 호(號)는 동은(東隱)이고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後孫)이다. 재예(才藝)에 뛰어나고 문사(文辭)가 높아 고종조(高宗朝)에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었으며 일향(一鄕)의 스승이라 불리었다

김황현(金難支) : 호(號)를 정헌(靜軒)이라 하였고 해은(海隱) 김자발(金自潑)의 후손(後孫)으로 금한(錦漢) 이근원(李根元)의 문하(文下)에서 수업(受業)하였으며 저서(著書)에 용학의해(庸擧銳解), 역설증해(易設增解), 격물잡지(格物雜誌)와 유고(遺稿)가 있다.

최대현(崔大玄) : 호(號)는 화포(花浦)이고 교수(敎授) 명택(明澤)의 현손(玄孫)이다. 벼슬이 교수(敎授)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郡)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에는 산수(山水)에 묻혀 살았다. 그의 시(詩)에



최간(崔澗) :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이고 찰방(寮訪) 산해(山海)의 아들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하(文下)에서 수업(受業)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났으며 택당(澤堂)이 그에게 준 임별시(臨別詩)가 있고 숙종(肅宗) 때에 벼슬이 동추(同樞)에 이르렀다.

정선(鄭瑄) : 직장(直長) 두문(斗文)의 아들로 문학(文學)으로 향리(鄕里)에서 추존(推尊)을 받았다.

황윤하(黃允河) : 호(號)는 송암(松庵)이고 참봉(參奉) 숙(淑)의 후손(後孫)으로 일찍부터 문사(文祠)로 향당(鄕黨)에 알려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