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 사마(生員과 進士科)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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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최세환(崔世桓) : 괴헌(槐軒) 자점(自需)의 아들로 중종(中宗) 갑오년(甲午年)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였다.
정강성(鄭廉誠) : 호(號)는 정제(諍薺)이고 본관(本貫)은 연일(延日)이며 충순공(忠順公) 청(淸)의 손(孫)이다. 중종(中宗) 때 사마성(司馬試)에 합격(合梧)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있어 세상에서 추대(推戴)되었고 훈도(訓導)로 있을 때에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세웠다.
정세당(鄭世唐) : 호(號)는 호은(湖隱)이고 본관(本貫)은 연일(延日)이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後孫)으로 문학(文學)에 능(能)하여 인조(仁祖) 때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여 태학(太學)에서 유학(遊學)하였고 많은 사람의 추앙(椎仰)을 받았으며 필명(筆名)이 있었다.
박천장(朴天秊) :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고 참봉(參奉) 빈부(빈富)의 아들이다. 어렸을때 장안사(長安寺)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이 때 도백(道伯)이 장안사(長安寺)에 온다고 학생(學生)과 승려(僧呂)들이 모두 하던 일을 중단하고 도백(道伯)을 맞으로 갔으나 그만 홀로 단정(端正)히 앉아 자리를 뜨지 아니하고 독서(讀書)를 하였다. 도백(進伯)이 절에 들려 보니 글 읽는 소리가 낭낭(朗朗)히 들려오기에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 도백(道伯)을 영접(迎接)치 않는 그 오만(傲慢)을 책(責)하였더니 그가 배사(諦謝)하고 이르시를 "제가 매일(每日) 독서(請書)의 회수(回數)를 정(定)해 놓고 독서(讀書)를 하는데 아직 오늘분을 다 읽지 못하였으므로 다 읽고 나서 가 뵈올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답(答)하였거니 도백(道伯)이 그 뜻을 칭찬하고 후(厚)한 상(賞)을 내리고 갔다. 인조(仁祖) 기사년(己巳牟)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 하니 상(上)이 그를 인견(引見)하고 선훈(先勳)의 후예(後裔)임을 알고 진무원종공신(桭武原從功臣)에 명하였다.
권덕회(權德誨) : 호(號)는 목헌(睦軒)이고 참의(參議) 응기(應箕)의 손으로 영조(英祖) 때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梧)하여 문학(文學)이 뛰어나 향리(鄕里)에서 추앙(推仰)하였다.
권규(權辯) : 영조(英祖) 병자년(丙子年)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권계만(權努萬) : 호(號)를 인암(忍庵)이라 하였고 교관(敎官) 규(揆)의 아들로 정조(正祖) 때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친상(親喪)에 여막(廬幕)살이를 하며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있었고 남석정(南石亭)을 짓고 초당(草堂)을 세워 양졸재(養拙齋)라 이름하고 여러 선비와 여기서 강론(講論)을 하였으며「사례편차(四禮編次)」를 저술(著述)하였고 문집(文集)이
있으며 삼강록(三綱錄)에 올라 있다.
박간은(朴幹般) :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이고 충열공(忠烈公) 제상(提上)의 후손(後孫)으로 성종(成宗) 을묘(乙卯)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어진창(於震昌) : 본관(本貫)은 수안(遂安)으로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최명택(崔明澤) : 성종(成宗) 임진년(壬辰年)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윤극건(尹克蹇) :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고 문행(文行)이 높았다
김사만(金思萬) : 진사(進士)에 합격 (合格)하였다.
이석우(李錫雨) :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김현구(金鉉龜) :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최용각(崔龍珏) : 호(號)는 제일당(霽日堂)이고 찰방 신방(察訪信邦)의 후손(後孫)으로 고종(高宗) 기묘년(己卵年)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뛰어나 고종(高宗)으로 부터 어묵(御墨)을 하사(下賜)받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다.
정강성(鄭廉誠) : 호(號)는 정제(諍薺)이고 본관(本貫)은 연일(延日)이며 충순공(忠順公) 청(淸)의 손(孫)이다. 중종(中宗) 때 사마성(司馬試)에 합격(合梧)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있어 세상에서 추대(推戴)되었고 훈도(訓導)로 있을 때에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세웠다.
정세당(鄭世唐) : 호(號)는 호은(湖隱)이고 본관(本貫)은 연일(延日)이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後孫)으로 문학(文學)에 능(能)하여 인조(仁祖) 때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여 태학(太學)에서 유학(遊學)하였고 많은 사람의 추앙(椎仰)을 받았으며 필명(筆名)이 있었다.
박천장(朴天秊) :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고 참봉(參奉) 빈부(빈富)의 아들이다. 어렸을때 장안사(長安寺)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이 때 도백(道伯)이 장안사(長安寺)에 온다고 학생(學生)과 승려(僧呂)들이 모두 하던 일을 중단하고 도백(道伯)을 맞으로 갔으나 그만 홀로 단정(端正)히 앉아 자리를 뜨지 아니하고 독서(讀書)를 하였다. 도백(進伯)이 절에 들려 보니 글 읽는 소리가 낭낭(朗朗)히 들려오기에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 도백(道伯)을 영접(迎接)치 않는 그 오만(傲慢)을 책(責)하였더니 그가 배사(諦謝)하고 이르시를 "제가 매일(每日) 독서(請書)의 회수(回數)를 정(定)해 놓고 독서(讀書)를 하는데 아직 오늘분을 다 읽지 못하였으므로 다 읽고 나서 가 뵈올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답(答)하였거니 도백(道伯)이 그 뜻을 칭찬하고 후(厚)한 상(賞)을 내리고 갔다. 인조(仁祖) 기사년(己巳牟)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 하니 상(上)이 그를 인견(引見)하고 선훈(先勳)의 후예(後裔)임을 알고 진무원종공신(桭武原從功臣)에 명하였다.
권덕회(權德誨) : 호(號)는 목헌(睦軒)이고 참의(參議) 응기(應箕)의 손으로 영조(英祖) 때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梧)하여 문학(文學)이 뛰어나 향리(鄕里)에서 추앙(推仰)하였다.
권규(權辯) : 영조(英祖) 병자년(丙子年)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권계만(權努萬) : 호(號)를 인암(忍庵)이라 하였고 교관(敎官) 규(揆)의 아들로 정조(正祖) 때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친상(親喪)에 여막(廬幕)살이를 하며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있었고 남석정(南石亭)을 짓고 초당(草堂)을 세워 양졸재(養拙齋)라 이름하고 여러 선비와 여기서 강론(講論)을 하였으며「사례편차(四禮編次)」를 저술(著述)하였고 문집(文集)이
있으며 삼강록(三綱錄)에 올라 있다.
박간은(朴幹般) :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이고 충열공(忠烈公) 제상(提上)의 후손(後孫)으로 성종(成宗) 을묘(乙卯)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어진창(於震昌) : 본관(本貫)은 수안(遂安)으로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최명택(崔明澤) : 성종(成宗) 임진년(壬辰年)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윤극건(尹克蹇) :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고 문행(文行)이 높았다
김사만(金思萬) : 진사(進士)에 합격 (合格)하였다.
이석우(李錫雨) :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김현구(金鉉龜) :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최용각(崔龍珏) : 호(號)는 제일당(霽日堂)이고 찰방 신방(察訪信邦)의 후손(後孫)으로 고종(高宗) 기묘년(己卵年)에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다.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뛰어나 고종(高宗)으로 부터 어묵(御墨)을 하사(下賜)받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