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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원지방의 학생운동과 고성보통학교 학생의 맹휴(盟休)운동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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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6. 강원지방의 학생운동과 고성보통학교학생의 맹휴(盟休)운동
가. 강원지방(江原地方)의 학생운동(學生運勳)
3․1운동 이후 일제는 헌병경찰 지배체제인 무단정치(武斷政治)로부터 이른바 문화정치(文化政治)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실은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고등기만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민에 대하여 민족차별정책과 식민지노예교육을 통하여 한국민의 민족혼을 뿌리채 뽑으려 하였다. 이에 한국의 학생들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으로 함양된 애국심과 지정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고, 동맹휴학․비밀결사․학생단체운동․계몽운동․만세시위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3․1운동 이후 6․10만세운동(1926)과 광주학생운동(1929)을 전후하여 학생운동은 주로 동행휴학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당시 강원도의 경우 1920년대의 학생운동으로는 고성(1923. 4)을 비롯하여 양양(1923. 5. ; 1927. 2) ․원주(1926. 4) ․평강(1927. 4)등 보통학교학생들이 맹휴운동이나 만세시위를 통하여 항일을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0년을 전후하여 증등학교 학생들이 벌인 맹휴운동과 만세시위운동은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의 4회(1926~1935, 퇴학처분 40여명), 춘천농업학교(현, 춘천농공)의 4회(1927~1937, 퇴학처분 40여명), 강릉농업학교(현, 강릉농공)의 3회(1930~1933, 퇴학처분 30여명)에 걸쳐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강원도에서 일어난 학생맹휴의 회수는 전국 5위에 해당할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 학내독서회조직(學內讀書會組織)과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
일제는 1920년대부터 본국의 부족한 식량을 충족시키고자 토지조사사업의 토대위에 산미증식정책을 수립하여 막대한 분량의 쌀을 약탈 반출해갔으며, 한국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1930년대에 세계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여 만주사변(1931. 9)․중일전쟁(1937. 7)․태평양전쟁(1941. 12)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
켰다. 그들은 한국을 군수병참기지화하였고, 동시에 한민족말살정책을 구체적으로 자행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징용(1939) ․학병(1943) ․징병(1944)등으로 한국인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보냈고,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挻身隊, 1944)라고 이름하여 종군위안부로 희생을 강요하였다. 뿐만아니라 황국신민정책을 통해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일선등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워 한국어 사용금지․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등을 강요하여 물력(物力)과 인력(人力)동원에 광분하였다.
이렇듯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른 한국병참기지화와 한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농촌계몽운동(歸農運動)과 교내비밀결사 특히 독서회 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항거하는 반전운동(反戰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같은 학생운동의 흐름은 강원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강릉농업학교의 독서회(讀書會, 1929. 5~1933. 11)에서는 약 5년동안 일제에 항거하던 중에 주동학생 29명이 퇴학처분을 당했고, 또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常綠會, 1937. 3~1938, 9)에서는 독서회를 통하여 민족정신의 함양과 민족의식을 배양하면서 교외로 발전하여 귀농운동․항일공동전선․국외상록회(만주 吉林지방)등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비밀조직이 탄로되어 졸업생을 포함한 137명이 검거되고 그 중 36명이 송치되었으며, 복역 10명 중에 1명이 순국하는 수난을 겪었다.
흔히 제2차 상록회라고도 부르는 춘천중학교(1983년 춘고보 개명)의 독서회(1939~1941) 도면에서 본부를 두고 지역별․학교별로 조직된 하나의 단위조직이었다. 춘사의 백의동맹(또는 白衣同盟旅圍)은 일제적 패망을 촉진하고 소요와 저항을 주도하며, 민족사기의 앙양과 무력적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등의 항일반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종전을 몇달 앞두고 검거되어 주동학생들은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한편 1920년 이후 항일독립운동은 애국운동과 농촌계몽운동 등이 민족운동으로 확산 발전하였다. 이같은 움직임은 강원도에서도 자주독립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민족운동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궁억(南宮億)이 세운 양양군의 현산(峴山)학교와 홍천군의 모곡(牟谷: 보리울)학교, 그리고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참여 활동한 천전수양단이었다. 양양의 현산학교(1906년 개교)는 애국교육을 통하여 주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홍천모곡학교(1919년 개교)는 우리역사와 무궁화(나라꽃) 보급운동을 통하여 민족혼을 지키려 하였다. 또 춘천군 신북면의 천전수양단(泉田修瀁團)․오정경로회(梧井敬老會, 1936~1939)등은 당시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가 벌인 귀농운동의 일환으로 회원들이 적극 참가하여 농촌개량사업 등의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상록회가 해체되면서 계몽활동 역시 끝내 중단되고 말았다.
다. 고성보통학교(高城普通學校) 학생(學生)의 맹휴운동(盟休運勳)
3․1운동 당시 1919년 3월 17일에 간성보통학교 전교생 150명이 교정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어 간성장터의 군중들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관헌에게 제지되어 무산되었다.(고성지방 3․1운동 참조) 그로부터 4년후인 1923년 4월말경 고성보통학교에서 전개한 동맹휴학운동은 한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기 위해서였다. 문제의 일본인은 일본군출신으로 후지다(讓田門一)라는 교사였다. 그는 평소에 한국인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민족을 모욕하는 언사를 거침없이 사용하였으며,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등 폭언과 광폭한 행동을 자주하였다. 오랫동안 참다못한 4․5학년 학생 60여명이 후지다 교사를 몰아낼 것을 주장하여 항일적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일본인 후지다 교사는 사직하고 말았다.(江原道抗日獨立運動史 Ⅲ, 光復會江原支部, 1992, 418쪽) 편 1928년 2월 29일 고성보통학교 학생 하용락(河容洛)과 김용득(金容得) 수만매의 격서(激書)를 살포하여 인심을 소란하게 하여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당시 신문(동아, 1928. 3. 30)은 '高城善校 삼일(3․1)기념범 보교생 송국' 이라는 표제로 "강원도 고성에서 지난달 29일 밤에 수만매의 격서를 살포하여 인심을 소란하게 하고 경찰에 체포된 고성보고 5학년 하용락(16), 6학년 김용득(17) 두명은 그동안 취조를 마치고 지난 10일에 일건 서류와 함께 원산 검사국으로 넘겼었는데 경찰은 계속하여 그 연루자 체포에 각 방면으로 활동 중이더라"고 보도하였다.
가. 강원지방(江原地方)의 학생운동(學生運勳)
3․1운동 이후 일제는 헌병경찰 지배체제인 무단정치(武斷政治)로부터 이른바 문화정치(文化政治)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실은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고등기만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민에 대하여 민족차별정책과 식민지노예교육을 통하여 한국민의 민족혼을 뿌리채 뽑으려 하였다. 이에 한국의 학생들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으로 함양된 애국심과 지정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고, 동맹휴학․비밀결사․학생단체운동․계몽운동․만세시위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3․1운동 이후 6․10만세운동(1926)과 광주학생운동(1929)을 전후하여 학생운동은 주로 동행휴학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당시 강원도의 경우 1920년대의 학생운동으로는 고성(1923. 4)을 비롯하여 양양(1923. 5. ; 1927. 2) ․원주(1926. 4) ․평강(1927. 4)등 보통학교학생들이 맹휴운동이나 만세시위를 통하여 항일을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0년을 전후하여 증등학교 학생들이 벌인 맹휴운동과 만세시위운동은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의 4회(1926~1935, 퇴학처분 40여명), 춘천농업학교(현, 춘천농공)의 4회(1927~1937, 퇴학처분 40여명), 강릉농업학교(현, 강릉농공)의 3회(1930~1933, 퇴학처분 30여명)에 걸쳐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강원도에서 일어난 학생맹휴의 회수는 전국 5위에 해당할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 학내독서회조직(學內讀書會組織)과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
일제는 1920년대부터 본국의 부족한 식량을 충족시키고자 토지조사사업의 토대위에 산미증식정책을 수립하여 막대한 분량의 쌀을 약탈 반출해갔으며, 한국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1930년대에 세계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여 만주사변(1931. 9)․중일전쟁(1937. 7)․태평양전쟁(1941. 12)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
켰다. 그들은 한국을 군수병참기지화하였고, 동시에 한민족말살정책을 구체적으로 자행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징용(1939) ․학병(1943) ․징병(1944)등으로 한국인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보냈고,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挻身隊, 1944)라고 이름하여 종군위안부로 희생을 강요하였다. 뿐만아니라 황국신민정책을 통해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일선등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워 한국어 사용금지․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등을 강요하여 물력(物力)과 인력(人力)동원에 광분하였다.
이렇듯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른 한국병참기지화와 한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농촌계몽운동(歸農運動)과 교내비밀결사 특히 독서회 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항거하는 반전운동(反戰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같은 학생운동의 흐름은 강원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강릉농업학교의 독서회(讀書會, 1929. 5~1933. 11)에서는 약 5년동안 일제에 항거하던 중에 주동학생 29명이 퇴학처분을 당했고, 또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常綠會, 1937. 3~1938, 9)에서는 독서회를 통하여 민족정신의 함양과 민족의식을 배양하면서 교외로 발전하여 귀농운동․항일공동전선․국외상록회(만주 吉林지방)등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비밀조직이 탄로되어 졸업생을 포함한 137명이 검거되고 그 중 36명이 송치되었으며, 복역 10명 중에 1명이 순국하는 수난을 겪었다.
흔히 제2차 상록회라고도 부르는 춘천중학교(1983년 춘고보 개명)의 독서회(1939~1941) 도면에서 본부를 두고 지역별․학교별로 조직된 하나의 단위조직이었다. 춘사의 백의동맹(또는 白衣同盟旅圍)은 일제적 패망을 촉진하고 소요와 저항을 주도하며, 민족사기의 앙양과 무력적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등의 항일반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종전을 몇달 앞두고 검거되어 주동학생들은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한편 1920년 이후 항일독립운동은 애국운동과 농촌계몽운동 등이 민족운동으로 확산 발전하였다. 이같은 움직임은 강원도에서도 자주독립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민족운동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궁억(南宮億)이 세운 양양군의 현산(峴山)학교와 홍천군의 모곡(牟谷: 보리울)학교, 그리고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참여 활동한 천전수양단이었다. 양양의 현산학교(1906년 개교)는 애국교육을 통하여 주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홍천모곡학교(1919년 개교)는 우리역사와 무궁화(나라꽃) 보급운동을 통하여 민족혼을 지키려 하였다. 또 춘천군 신북면의 천전수양단(泉田修瀁團)․오정경로회(梧井敬老會, 1936~1939)등은 당시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가 벌인 귀농운동의 일환으로 회원들이 적극 참가하여 농촌개량사업 등의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상록회가 해체되면서 계몽활동 역시 끝내 중단되고 말았다.
다. 고성보통학교(高城普通學校) 학생(學生)의 맹휴운동(盟休運勳)
3․1운동 당시 1919년 3월 17일에 간성보통학교 전교생 150명이 교정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어 간성장터의 군중들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관헌에게 제지되어 무산되었다.(고성지방 3․1운동 참조) 그로부터 4년후인 1923년 4월말경 고성보통학교에서 전개한 동맹휴학운동은 한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기 위해서였다. 문제의 일본인은 일본군출신으로 후지다(讓田門一)라는 교사였다. 그는 평소에 한국인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민족을 모욕하는 언사를 거침없이 사용하였으며, 함부로 손찌검을 하는 등 폭언과 광폭한 행동을 자주하였다. 오랫동안 참다못한 4․5학년 학생 60여명이 후지다 교사를 몰아낼 것을 주장하여 항일적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일본인 후지다 교사는 사직하고 말았다.(江原道抗日獨立運動史 Ⅲ, 光復會江原支部, 1992, 418쪽) 편 1928년 2월 29일 고성보통학교 학생 하용락(河容洛)과 김용득(金容得) 수만매의 격서(激書)를 살포하여 인심을 소란하게 하여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당시 신문(동아, 1928. 3. 30)은 '高城善校 삼일(3․1)기념범 보교생 송국' 이라는 표제로 "강원도 고성에서 지난달 29일 밤에 수만매의 격서를 살포하여 인심을 소란하게 하고 경찰에 체포된 고성보고 5학년 하용락(16), 6학년 김용득(17) 두명은 그동안 취조를 마치고 지난 10일에 일건 서류와 함께 원산 검사국으로 넘겼었는데 경찰은 계속하여 그 연루자 체포에 각 방면으로 활동 중이더라"고 보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