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4.신간회(新幹會)의 창립과 고성지회의 활동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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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간회(新幹會)의 창립과 고성지회의 활동
가. 신간회(新幹富)의 창립(創立)과 활동(活動)
신간회(新幹會)운동은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이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으로 양분된 조건 속에서 1927년에 성립되어 1931년에 해체되기까지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의 독특한 성격을 지닌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었다. 따라서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 운동에 자극되어,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간의 타협에 의하여 1927년 2월 15일 조직된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 에 가장 대규모의 합법적인 결사임에도 늘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신간회의 성립요인은 ①1924년 전후에 만연되기 시작한 사회주의사상에 압도되어 온 민족주의진영에서는 대표기관의 탄생을 열망하고 있었다. ②국내 사회주의진영의 활동이 1926년 6․10만세를 고비로 점차 퇴조를 면하지 못하자 민족주의진영과 손잡고 재기하려는 뜻에서 좌우합작을 제의하여 민족유일당을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③일제는 민족․사회주의진 영의 동태파악과 계보활동을 예의추적, 구금하기 위하여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이를 허가해 주었다
당시 신간회의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澔)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으며, 이때의 선언서는 일본경찰에 압수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규약은 25개조로 회의 명칭과 사무실의 설치 등을 명기하였다. 활동강령으로는 ①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②단결을 공고히 함 ③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그후 신간회는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민흥회(民興會)의 명제세(明濟世)등과 통합을 추진하여 이상재․권동진(權東鎭)을 정․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간사는 35명을 선출하기로 하고 권동진 등 11명을 전형위원으로 뽑았다. 창립총회에서 전형한 35인으로 간사회를 소집, 총무 ․재무 ․출판 ․정치문화 ․조사연구 ․조직 ․선전의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무실은 이갑수(李甲洙)의 집을 사용 하였다.
창립 당시 중앙본부의 회장단은 거의 민족주의진영에서 독점하여, 사회 ․공산주의계의 기선을 제압당하는 듯하여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1927년 3월 회장 이상재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부회장인 권동진이 계승하여 통수체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간회에서는 합법적이고 타협적인 테두리 속에서 활동이 허용되었으므로 민족자주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우선 국내의에 지회(支會)를 설치하기로 하고, 일본 동경(東京)에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는 조헌영(趙憲永)이 맡게 되었다. 이어 7월 10일에는 서울지회를 설치하여 한용운(韓龍雲)이 지회장을 맡았다.
신간회는 1928년 말에 국내외 143개 지회와 3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후 해마다 증가하여 회원총수는 1929, 11. 23 현재 37,260명이었고, 解體大會日인 1931년 5월 16일에는 39,91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자 일제는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여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대회를 개최하지 못하였다. 이에 본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를 소집하여 전체회의를 대행하였다. 1929년 7월 1일 서울의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이미 기선을 제압당하던 사회주의 ․공산주의진영은 회칙을 개정하고 대거 참여하였다. 이는 간사제(斡事制)로 부터 중앙의 권한을 증강시켜 집 행위원제(執行委員制)로 하면서 임원을 개선하였다. 그 결과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越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데 동조하여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이에 가세하였다. 이와 같이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신간회의 투쟁목표는 뚜렷하였다. 이는 구호와 실천강령 등에서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예속에서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척한다는 점을 천명하는 동시에 언론 ․집회 ․결사 ․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 ․부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을 지원할 것도 아울러 투쟁방향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파벌 ․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회사(車洋拓植會社),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재만(在滿)동포의 구제도 포함시켰다. 근검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의 건재성을 국내외에 과시하여야만 우리 민족은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하고,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냉담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적극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하여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 대회를 열어 그 부당성을 규명하기로 결정하고, 1929년 12월 31일을 개최일로 권동진 ․한용 운 ․조병옥 ․송진우 ․홍명희(洪命漂)․이관용(李灌錡)․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輪)․이원혁(李源赫)등 관계자가 이관용의 집에 모여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경찰은 대회개최를 중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를 묵살하고 강행하려하자 일본경찰은 조병옥 ․김무삼(金茂森, 일명 東駿) ․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여성단체)간부 등 40명을 연행 구속하였다. 이때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 되었으며,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신간회는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분란을 계속하다가, 좌익계가 우익진영에 기선(機先)을 제압당하자 부산지회를 통해서 해소론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청년회(서울 YMCA)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해체)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함으로써 신간회는 4년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 신간회(新幹書) 고성지회(高城支富)의 조직(組織)과 활동
신간회 지회의 설립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지역의 각종 단체로부터 지지와 후원 혹은 직접적인 발기에 따라 고무되거나 계기가 되어 이루어졌다. 이는 종래 그 지역의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단체의 회원과 사상가들이 토대가 되어 전국적으로 지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회의 회원구성은 기존 사회단체의 소속회원과 사상운동 활동가 등 집단이 아닌 개인별로 중복가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시 지회는 정책과 활동에 있어서 사회적 ․정치적 범주 가운데 전개되었다. 사회적으로 일종의 계몽운동, 생활․생존권의 수호운동, 반봉건적인 운동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또 정치적으로는 연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각종 억압법률의 철폐, 단결권과 파업권 보장 등과 같은 안건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관철되도록 지회가 벌인 활동은 사회적 인 것에 집중되었으며 , 그 성과 역시 정치보다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신간회 지회의 설립과정 가운데 강원도 지방의 경우, 원주(1927. 10. 31)․양양(1927. 11.
20)․강릉(1927. 12. 3)․고성(1928. 1. 16) ․삼척(1928. 3. 11) ․양구(1929. 2. 19정기 대회 개최) ․울진(1929. 3. 16) ․춘천(1925. 5. 이전설립) ․이천(伊川, 1928. 1. 29. 준비 위원회 개최)등이 지회로 설립하였다. 그 중에서 1928년 1월 6일 결성한 고성지회의 부서 및 간부진의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고성지회의 조직구성>
회 장 : 윤성한(尹星漢)
서무재정부 총무간사 : 하인락(河寅洛), 상무간사 : 임영준(林永俊)․김선진(金善鎭)
정치문화부 총무간사 : 한명찬(韓明燦),상무간사 : 조동수(趙東秀)
조사연구 총무간사 : 황도준(誇道悛), 상무간사 : 박길수(朴吉守)
조직선전부 총무간사 : 함연호(咸演峰), 상무간사 : 김영 (金英)
간 사 : 홍기섭(洪璣燮)․김영찬(金泳燦)․황응수(賁應秀)․김용해(金溶海)․정일(鄭ㅡ)․김탁(金譯)․최록식(崔錄植)․김재원(金載元)․함연응(咸演應)․최봉수(崔鳳秀)(동아, 1928. 1. 23.참조)
<고성지회 정기대회 결의사항>
1)정치 : ①~③삭제, ④이민반대, ⑤조선인본위교육, ⑥조선인본위의 산업정책, ⑦국고금으로 일반민중의 생활을 위협하는 특수회사 보조 반대, ⑧~⑨삭제, ⑩소․중․대학교 조선어 사용.
2)경제 : ①~②삭제, ③소작료 4할이내로 감할것, ④소작인 노예사역 금지, ⑤소년․부인의 야간노동, 갱내(坑內)노동 위험작업 금지 ,⑥8시간 노동제 실시, ⑦~⑧삭제,
3)사회 : ①여자의 공법 사법상 처벌 철폐, ②백정(白丁)대우 평등, ③실업․질병․양로재험보험 실시(이균영, 신간회연구, 역사비평사, 1993, 295~296쪽. 참조)
가. 신간회(新幹富)의 창립(創立)과 활동(活動)
신간회(新幹會)운동은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이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으로 양분된 조건 속에서 1927년에 성립되어 1931년에 해체되기까지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의 독특한 성격을 지닌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었다. 따라서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 운동에 자극되어,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간의 타협에 의하여 1927년 2월 15일 조직된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 에 가장 대규모의 합법적인 결사임에도 늘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신간회의 성립요인은 ①1924년 전후에 만연되기 시작한 사회주의사상에 압도되어 온 민족주의진영에서는 대표기관의 탄생을 열망하고 있었다. ②국내 사회주의진영의 활동이 1926년 6․10만세를 고비로 점차 퇴조를 면하지 못하자 민족주의진영과 손잡고 재기하려는 뜻에서 좌우합작을 제의하여 민족유일당을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③일제는 민족․사회주의진 영의 동태파악과 계보활동을 예의추적, 구금하기 위하여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이를 허가해 주었다
당시 신간회의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澔)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으며, 이때의 선언서는 일본경찰에 압수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규약은 25개조로 회의 명칭과 사무실의 설치 등을 명기하였다. 활동강령으로는 ①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②단결을 공고히 함 ③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그후 신간회는 비슷한 목적으로 성립된 민흥회(民興會)의 명제세(明濟世)등과 통합을 추진하여 이상재․권동진(權東鎭)을 정․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간사는 35명을 선출하기로 하고 권동진 등 11명을 전형위원으로 뽑았다. 창립총회에서 전형한 35인으로 간사회를 소집, 총무 ․재무 ․출판 ․정치문화 ․조사연구 ․조직 ․선전의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무실은 이갑수(李甲洙)의 집을 사용 하였다.
창립 당시 중앙본부의 회장단은 거의 민족주의진영에서 독점하여, 사회 ․공산주의계의 기선을 제압당하는 듯하여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1927년 3월 회장 이상재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부회장인 권동진이 계승하여 통수체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간회에서는 합법적이고 타협적인 테두리 속에서 활동이 허용되었으므로 민족자주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우선 국내의에 지회(支會)를 설치하기로 하고, 일본 동경(東京)에 지회를 설치, 지회장에는 조헌영(趙憲永)이 맡게 되었다. 이어 7월 10일에는 서울지회를 설치하여 한용운(韓龍雲)이 지회장을 맡았다.
신간회는 1928년 말에 국내외 143개 지회와 3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후 해마다 증가하여 회원총수는 1929, 11. 23 현재 37,260명이었고, 解體大會日인 1931년 5월 16일에는 39,91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자 일제는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여 한번도 대규모의 전체대회를 개최하지 못하였다. 이에 본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를 소집하여 전체회의를 대행하였다. 1929년 7월 1일 서울의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이미 기선을 제압당하던 사회주의 ․공산주의진영은 회칙을 개정하고 대거 참여하였다. 이는 간사제(斡事制)로 부터 중앙의 권한을 증강시켜 집 행위원제(執行委員制)로 하면서 임원을 개선하였다. 그 결과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越炳玉)이 허헌 위원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데 동조하여 광주․목포 등의 지회가 이에 가세하였다. 이와 같이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신간회의 투쟁목표는 뚜렷하였다. 이는 구호와 실천강령 등에서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예속에서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척한다는 점을 천명하는 동시에 언론 ․집회 ․결사 ․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 ․부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을 지원할 것도 아울러 투쟁방향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파벌 ․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회사(車洋拓植會社),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재만(在滿)동포의 구제도 포함시켰다. 근검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의 건재성을 국내외에 과시하여야만 우리 민족은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하고,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냉담하였다. 이에 이 운동을 적극적인 항쟁으로 확대, 파급시키기 위하여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에 따라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 대회를 열어 그 부당성을 규명하기로 결정하고, 1929년 12월 31일을 개최일로 권동진 ․한용 운 ․조병옥 ․송진우 ․홍명희(洪命漂)․이관용(李灌錡)․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輪)․이원혁(李源赫)등 관계자가 이관용의 집에 모여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경찰은 대회개최를 중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를 묵살하고 강행하려하자 일본경찰은 조병옥 ․김무삼(金茂森, 일명 東駿) ․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여성단체)간부 등 40명을 연행 구속하였다. 이때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 되었으며,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신간회는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분란을 계속하다가, 좌익계가 우익진영에 기선(機先)을 제압당하자 부산지회를 통해서 해소론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청년회(서울 YMCA)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해체)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함으로써 신간회는 4년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 신간회(新幹書) 고성지회(高城支富)의 조직(組織)과 활동
신간회 지회의 설립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지역의 각종 단체로부터 지지와 후원 혹은 직접적인 발기에 따라 고무되거나 계기가 되어 이루어졌다. 이는 종래 그 지역의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단체의 회원과 사상가들이 토대가 되어 전국적으로 지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회의 회원구성은 기존 사회단체의 소속회원과 사상운동 활동가 등 집단이 아닌 개인별로 중복가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시 지회는 정책과 활동에 있어서 사회적 ․정치적 범주 가운데 전개되었다. 사회적으로 일종의 계몽운동, 생활․생존권의 수호운동, 반봉건적인 운동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또 정치적으로는 연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각종 억압법률의 철폐, 단결권과 파업권 보장 등과 같은 안건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관철되도록 지회가 벌인 활동은 사회적 인 것에 집중되었으며 , 그 성과 역시 정치보다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신간회 지회의 설립과정 가운데 강원도 지방의 경우, 원주(1927. 10. 31)․양양(1927. 11.
20)․강릉(1927. 12. 3)․고성(1928. 1. 16) ․삼척(1928. 3. 11) ․양구(1929. 2. 19정기 대회 개최) ․울진(1929. 3. 16) ․춘천(1925. 5. 이전설립) ․이천(伊川, 1928. 1. 29. 준비 위원회 개최)등이 지회로 설립하였다. 그 중에서 1928년 1월 6일 결성한 고성지회의 부서 및 간부진의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고성지회의 조직구성>
회 장 : 윤성한(尹星漢)
서무재정부 총무간사 : 하인락(河寅洛), 상무간사 : 임영준(林永俊)․김선진(金善鎭)
정치문화부 총무간사 : 한명찬(韓明燦),상무간사 : 조동수(趙東秀)
조사연구 총무간사 : 황도준(誇道悛), 상무간사 : 박길수(朴吉守)
조직선전부 총무간사 : 함연호(咸演峰), 상무간사 : 김영 (金英)
간 사 : 홍기섭(洪璣燮)․김영찬(金泳燦)․황응수(賁應秀)․김용해(金溶海)․정일(鄭ㅡ)․김탁(金譯)․최록식(崔錄植)․김재원(金載元)․함연응(咸演應)․최봉수(崔鳳秀)(동아, 1928. 1. 23.참조)
<고성지회 정기대회 결의사항>
1)정치 : ①~③삭제, ④이민반대, ⑤조선인본위교육, ⑥조선인본위의 산업정책, ⑦국고금으로 일반민중의 생활을 위협하는 특수회사 보조 반대, ⑧~⑨삭제, ⑩소․중․대학교 조선어 사용.
2)경제 : ①~②삭제, ③소작료 4할이내로 감할것, ④소작인 노예사역 금지, ⑤소년․부인의 야간노동, 갱내(坑內)노동 위험작업 금지 ,⑥8시간 노동제 실시, ⑦~⑧삭제,
3)사회 : ①여자의 공법 사법상 처벌 철폐, ②백정(白丁)대우 평등, ③실업․질병․양로재험보험 실시(이균영, 신간회연구, 역사비평사, 1993, 295~296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