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3.강원청년연맹과 고성변성(邊城) 청년회의 활동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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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원청년연맹과 고성변성(邊城)청년회의 활동

가. 강원청년연맹(江原靑年聯盟)의 결성(結成)과 청년운동
일제 식민지하의 항일독립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정치(武斷政治 : 헌병경찰제도)로부터 소위 문화정치(文化政治)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치란 기만적인 정책에 불과하였고, 따라서 그들의 식민정책의 밑바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의 모순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문화정치하에서 한민족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제한적이나마 허용되자 전국각지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수많은 단체가 설립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국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조직된 단체가 청년회(靑年會)였다. 청년회는 1920년에 이미 251개의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고, 이에 자연히 각 단체의 연합문제가 제기되어 1920년 12월 1일 서울에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청년단체들은 이념문제를 둘러싸고 민족개량주의(民族改良主義)와 사회주의(社會主義)계열로 분열하여 양립되었으며, 결국 사회주의계열은 1924년 4월 2일 독자적으로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전조선청년동맹(全朝鮮靑年同盟, 이하 靑總)을 서울에서 결성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초부터 조직화하기 시작한 청년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발전하여 갔고, 강원도지역에서도 청년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렇듯 청년운동의 발전 속에 강원도 지역의 청년단체를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영동지방에서 맨먼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영동지방의 청년단체들은 1925년 1월 5일 관동청년회(關來靑年會) 발기인회를 개최하여 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어종면(魚宗沔)등 14인을 준비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동위원회에서는 1925년 3월 박태선(朴泰善)․최우집(崔禹集)등을 통천 ․회양 ․김화 등 영서북부지역에 파견하여 대회를 선전하고 청년단체를 결합시키려 하였다. 또한 관동청년회는 동년 5월 21일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서 청년대회를 열어 청년문제와 사회 및 정제문제에 대하여 토의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는 경찰이 금지하여 계획대로 진행 할 수 없게 되었고, 끝내 5월 22일 간담회를 개최한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영서지방에서도 1925년 10월 23일 청년단체의 대표자들이 철원에 모여 청년운동의 통일방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따라서 철원 등지의 부괴청년회(斧壞靑年會)․철원청년회(鐵原靑年會) ․갑성청년회(甲成靑年會) ․철원무산청년회(鐵原無産靑年會) ․성우회(星友會) ․진세회 (進世會)등이 발기하여 강원청년동맹 준비회를 조직하고, 준비사무소를 평강읍내 부괴청년회에 두면서 차근히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11월 25일 강원청년연맹(江原靑年聯盟, 이하 江靑)이 철원에서 정식으로 창립 발족하였다. 이때 강청(江靑)은 '전관동무산청년단체(全關東無産靑年團體)가 하나의 기치(族織)아래 모여 그 사명을 다 하자"고 결의하고, 강령(綱領)으로서 ①청년운동에 통일을 기할 것, ②필연적으로 전개될 사회진운(社會進運)에 공헌을 기할 것, ③계급의식을 환기하여 그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 것 등을 채택하였다. 정의식(鄭宜植, 동아일보 기자, 부괴청년회 주도)등을 서울 청총(靑總)에서 개최하는 각도 청년연맹 간부회의에서 대의원으로 파견하고, 지방에서 강연회를 참석했다는 것은 강청이 강원도청년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초기의 강청은 철원 ․평강 등 영서북부지방에 국한된 단체들이였기 때문에 강원도 전체의 청년운동을 지도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 활동 역시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영서중남부를 포괄하지 못한 영서지방의 부진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춘천청년회(春川靑年會, 1925. 8. 15 조직)는 1927년 2월 집행위원회에서 사회운동자들의 집회가 급선무임을 강조하고 영서지방의 사회운동자 간친회(懇親會)를 개최하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간친회를 준비하던 회원들이 1927년 5월 16일 조션사회단체 중앙협의회(朝鮮社會團體中央協識會)의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이날 창립대회에 참석한 대의원 10여명은 서울인사등(仁寺洞) 이화여관(梨花旅館)에 모여 강원도 전체를 범위로 하는 사회운동단체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동년 5월 29일 춘천청년회를 비롯하여 울진청년회(蔚珍靑年會) ․철원청년회(鐵原靑年會) ․고성변성청년회(高城邊域靑年會) ․양양동화청년회(裏陽同化靑年會) ․원주청년회(原州靑年會) ․삼척전진회(三陟前進會)등 7개단체를 중심으로 전강원 사회운동단체대회(全江原社會運動團體大會)의 개최를 결정하고, 대회준비를 위한 임시사무소를 춘천청년회 안에 두기로 하였다.
전강원사회운동단체대회는 1927년 7월 11일부터 2일간 춘천기독교회관(춘천YMCA)에서 개최하였다. 도내 20여 단체에서 40여명의 대의원이 참가하여 각 지역의 운동상황을 보고한후, 조직 ․교육 ․당면문제(1926. 11. 15. 正友會宣言) ․경제 ․사회 ․정치 등 사회전반에 걸쳐 토의를 진행하였다. 그 중에서 우선 조직문제로서는 청년 ․형평(衡平) ․노농(勞農) ․여성 ․소년운동에 관한 것이었고, 특히 당면문제에서 다루어진 정우회선언은 일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하여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창립대회(1927. 5. 16)를 개최한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를 계기로 종래의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방향전환론이 대세를 이루었고, 전강원사회운동단체에서도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 또 경제분야에서 제기된 노동문제와 소작문제 등은 식민지정책의 모순에 대한 정면적인 저항이었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나, 식민통치적 모순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였다. 이에 대한 비판은 전강원사회운동단체대회에서도 제기되어 신간회(新斡會, 1927. 2. 15 창립)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현존의 결사단체(給社圍體) 모두가 신간회에 그대로 가입할 것을 결의한 후 해산하였다. 전강원사회운동단체대회가 끝난후 강원청년연맹 "강원청년연맹(江靑)은 일부 단체의 국부적(局部的) 연합체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혁신대회를 통하여 "도내 청년단체의 통일을 기하고 아울러 막스주의적 중앙집권조직하에 전민족청년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 것"을 결의하였다.
강청이 주관한 혁신대회는 1927년 9월 28일부터 3일간에 걸쳐 강릉에서 진행되었다. 대회첫날은 신임위원의 선거와 규약의 통과, 군동맹(郡同盟) 기준규약을 제정한 후 폐회하였다. 둘째날은 각 분야별 주제토론이 이루어겼다. 특히 이날 제3부에서는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 결성촉진, 신간회 지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에 관한 건 등 주로 정치문제에 대한 토의가 폭넓게 진행되었다. 셋째날에는 도일(渡日)조선인노동자, 조선공산당공판, 교육제도 등에 관하여 토의가 벌어졌다. 이때 경찰은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이에 간섭하여 주의 ․중지 ․금지등의 조치를 수시로 내렸다. 그중에서 대회집행위원장인 한명찬(韓明燒, 그후 新幹會 高城支會 정치문화부 총무간사)의 '세계일반정세보고'와 춘천농업학교 동맹휴학사건(1927. 9. 12)에 관한 것 등이 금지 혹은 토의중지 되었다.
그후 강청(江靑)에서는 동년 10월 1일 집행위원회를 열어 혁신대회에서 제기되었던 사항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논의하고, 혁신대회의 내용을 알리기 위해서 강원도를 영동 ․영북 ․영서로 나누어 순회강연대를 파견하였다. 전강원도 사회운동단체대회, 각 군청년회 혁신총회, 강원청년연맹 혁신대회 등의 결의과정을 거치면서 도내 각 지역의 항일운동은 신간회를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런 와중에서 강청(江靑)은 신간회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청총(조선청년동맹)이 1931년 초부터 우경화(右傾化)되어가자 각 지역단체들은 서울의 청총에 반대하여 해소(解消)를 제창하고 나섰다. 이에 강원지방에서도 1931년 2월 12일에서 18일 사이에 삼척청년연맹을 필두로 3월 16일 양양 청년동맹, 3월 20일 강릉청년동명 등이 집행위원회를 열어 해소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강청(江靑) 역시 1931년 3월 30일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청총(靑總)의 해소(해체)를 결의하였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청년단체들도 자진 해소되어 갔다. 이때 강청에서도 해소에 대한 이론의 확립과 전선(戰線)의 통일, 그리고 해소 이후의 운동방침을 논의하기 위하여 사회단체연합 간친회를 개최함으로써끝내 해소하게 되었다.

나. 고성변성청년회(高城邊城靑年富)의 조직(組職)과 활동(活動)
변성청년회는 간성의 유지(有志)청년들이 발기하여 1921년 12월 18일에 창립한 후 한달만에 백여명의 회원으로 늘어났는데, 동 청년회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변성청년회의 조직>
회장 : 박태선(朴泰善), 부회장 : 주환(朱端)
총무 : 함연호(咸演皥), 덕(德)육부장 : 함연응(咸瀉應)
지(智)육부장 : 전창영(全昌永), 체(體)육부장 : 함하각(咸河珏)
경리부장 : 하선(河璿), 사교부장 : 함희재(咸熙在)
서기 : 함하원(咸河瑗)․김재영(金在泳)․함옥인(咸玉隣)․윤향룡(尹香龍)․남형준(南亨駿)․전나환(全羅煥)
의사장(議事長): 안정 훈(安貞勳)
의사(崙麥): 김정분(金鼎焚)․김도영(金道永)․함태희(咸泰禧)․임용식(林龍埴)․황희로(黃熙老)․황병룡(黃炳龍)
(동아, 1922. 1. 25. 참조)

<변성청년회의 활동>
변성청년회는 토론회와 강연회를 자주 개최하여 회원의 수양과 일반인의 각성을 촉구하며, 남여야학회(夜學會)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청년회의에서는 향촌(鄕村)의 개선과 풍습의 개량을 목적으로 순회 연극단을 조직하였다. 단원으로는 박용식(朴用植) ․주환 ․전창영 ․윤향룡 ․함연응 ․박태선 ․함연호 ․김재영 ․장수원(張壽源) ․최문학(崔文學)등을 선정하였다. 그리하여 순회 연극회는 동년 2월 4․5일 양일간에 걸쳐 고성읍에서 금강청년회(金剛靑年會)와 동아일보 간성분국의 후원하에 연출하였다.(동아, 1922. 2. 14.참조) 한편 청년회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동년 3월 9일 오후 7시 변성청년회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연사 함길조(咸吉祥)의 "나의 성공관"이라는 주제와 박태선의 "우리 청년에게"라는 제목으로 열변을 토하여 많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동아, 1922. 3. 26.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