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제3절 조선 중기의 고성군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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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조선중기의 고성군

조선중기에는 사화당쟁(士禍黨爭)으로 정치가 혼란하고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러 농촌사회가 피폐하고 임꺽정 같은 의적들이 횡행하는 등 사회가 불안하였다. 이러한때 북에서는 여진(女眞)의 세력이 강성해져 북방을 압박해 오고 남에서는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눈을 밖으로 돌려 대륙진출을 꿈꾸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 일본은 明(명)을 침공할 터이니 길을 비켜달라는 명목을 내세워 수륙군 17여만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로써 우리 국민은 임진왜란(壬辰僑亂)이라고 불리는 7년간에 걸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되었다.

선조 25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북으로 침략해 왔다. 한 갈래는 상주(尙州)를 거쳐 문경(聞慶)새재를 넘어 충주(忠州)→양평(楊平)→서울로 침략하였고, 다른 한 갈래는 서행하여 추풍령을 넘어 청주(淸州)→죽산(竹山)→용인(龍仁)→서울로 침략하였다. 그러므로 임란(壬亂) 초기에는 강원도는 직접적인 침입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주싸움때 원주에 있던 강원도 지방군이 출전했다가 신립(申砬)의 패전과 함께 크게 패하여 후일 원주(原州)방어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18일만인 5월 2일 한강에 이르고 이틀 후인 5월 4일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후 왜군은 북상하여 한갈래는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개성을 거쳐 평양을 점령하였고 다른 한갈래는 예성강(禮城江)을 따라 올라가 곡산(谷山)을 지나 함남 안변(安遺) → 영흥(永興)에 침입하였다. 또 부산 상륙제4진인 모리길성(毛利吉成)의 왜군은 서울에서 동두천(東豆川) → 철 원(鐵原) 평강(平康) 금화(金化) 회양(准陽) → 함남 안변에 이르렀다가 영동지방을 따라 남하하게 되었다. 이때 영동지방의 왜군 침입경로를 보면 1지대는 안변에서 통천(通川)→고성(高城)→양양(襄陽)→강릉(江陵)에 이르렀다가 양양(裏陽)에서 설악산 뒤를 돌아 한계령(寒溪嶺)을 넘어 인제(麟締)로 침입하였고 주력부대는 삼척(三陟)으로 내려가 두타산성을 함락시킨후 정선(旌善)→영월(率越)→충북(忠北)→영춘(永春)→평창(平昌)→주천(酒泉)→신림(神林)을 거쳐 원주를 침공하였다. 이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던 김제갑(金悌甲)은 치악산 영원산성(潟原山城)에서 항전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또한 왜군이 안변에서 남하할 때 금강산 유점사(楡帖寺)(고성군내)에서 승려 유정(維政)〔사명당(四溟堂)〕이 승병(僧兵) 7백여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전투를 벌여 많은 공을 세
우기도 하였다.
군사제도나 역마제, 조운, 봉수 등 교통 통신제도도 초기에 비해 달라진게 없으나 토지제도는 전란을 겪으면서 극도로 문란해졌다. 이때 고성군(高城郡)내에는 육군 경비전투기지인 관방(關防)은 간성 3, 고성 4곳등 7개의 城이 있었고 해안경비기지인 水防은 간성 7, 고성 4곳 등 11개소가 있었다 관방으로는 간성관내에 간성읍성(杆城邑城) 남산성(南山城) 고성산성(古城山城)이, 고성(高城)관내에 고성읍성(高城邑城) 전성산성(全城山城) 성관산성(城串山城) 성직소성(城直小城) 등이 있었는데 모두 돌로 쌓은 석성이다. 간성의 진산(鎭山)은 마기라산(麻耆羅山)이며, 고성의 진산(鎭山)은 전성산(全城山)이였다. 수방(水防)으로는 영진관(靈津串) 고성포(高城浦) 명사(鳴沙) 송도(松島)(이상 고성) 황포(黃浦) 송지포(松泌浦) 죽도(竹島) 무로도(無路島) 가도(街島) 저도(猪島) 초도(草島) 등이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토지제도를 비롯한 모든 제도는 전란을 계기로 더욱 문란해져 농지는 황폐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더구나 왜군은 가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 부녀자 겁탈을 일삼았다. 임진왜란이 끝난후인 광해군(光海喬) 3년 호조판서로 있던 황신(責愼)이 강원도의 실황을 말하면서 임란전에는 2만 8천결(結)이던 전토(田土)가 임란후에는 1만 1천결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의 피해가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선조 30년(1597)에 있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왜군의 침략이 남해안지방에 머물렀기 때문에 고성군(高城郡)은 물론 강원도 전역이 전화를 면하였다. 또 인조(仁祖)때 있은 정묘호란(丁卵胡亂)(1627),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도 강원도는 침입경로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직접적인 전란의 피해는 없었다.
조선조(朝鮮朝) 중기의 상황은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의 격화로 국력이 극도로 피폐한 위에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국란이 잇따라 민생이 극도로 어려웠던 시기였다. 따라서 고성군도 조선중기는 수난의 시대였다고 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