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제3절 고려의 전란사와 고성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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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 女眞의 침략과 강원도지방의 항전지

제3절 고려의 전란사와 고성

우리나라의 외란(外亂)은 당시 대륙의 형세와 외교정책에 따라서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고구려 때 외교정책인 북진정책(北進政策)은 발해(渤海)와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여 만주(滿洲)벌판까지 영토를 넓혀 보려는 야심에서 세워진 것이었으나, 북중국(北中國) 혹은 만주(滿洲)지방에서 거란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 그리고 몽고족(蒙古族)이 계속 강성하여 북진정책은 본래의 의도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침략을 피할 수가 없었다.

고려시대 강원도 지역은 여진(女眞), 거란(契丹), 몽고(蒙古), 합단적(哈丹賊), 홍건적(紅巾賊), 왜(倭)가 빈번히 침략했다. 우리나라 전란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강원도 지방의 교통로는 등북으로 함남에서 철령을 념어 회양(淮陽) 으로 오는 길로 격전(激戰)의 통로였고, 평안도(平安適)에서 이천(伊川)을 거쳐 철원으로 오는 길, 철원에서 동두천과 양평을 거쳐 원주에 이르러 다시 제천과 충주로 통하는 길이 있었고,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양양에서 한계령을 넘어 인제로 통하는 길, 강릉에서 대관령을 념어 가는 길, 북평의 용추골로 백복령을 넘어 정선(旅善)을 거쳐 영월․원주로 통하는 길 등이 전략상 중요한 길이었다. 이와 같은 길이 평화로운 때에는 고려의 정치․경제를 이끌어 가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나 전시에는 외적의 침입로로, 혹은 우리 민족의 방어를 위한 군대 이동로가 되었다.



<사진 1)동여진과의 격전지(고성 송도)전경

여진(女眞)은 만주에도 있었지만 동북계의 북쪽인 함경도북부 일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강원도 지방에 대해 항상 침입을 자행(恣行)하고 있었다. 현종(照宗) 20년(1029) 3월에 동여진의 적선 10척이 명주(溟州)에 침입하여 병마판관(兵馬判官) 김후(金厚)가 이를 물러쳤다. 같은 해 7월에 삭방도(朔方道)의 등주(登州) (함남 安邊)와 명주관내에 번적(著賊)이 침략했고, 문종(文宗) 6년(1052) 6월에 동여진 고지간(高之間)등이 바다를 건너와 삼척현(三陟縣) 임원수(臨遠成)를 치니 수장(守將) 하주여(河周呂)가 이를 쳐서 물리쳤다. 그들은 국경지방(國境地方) 특히 동북계를 자주 침범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적단(海賊團)을 만들어 강원도 동해안과 경상도 동해안 지방을 급습해 와서 고려에서는 이에 대비한 해군부대로 '동남해선병도부서사(東南海略兵都部署司)' '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 '진명도서(鎭溟都署)'등의 해양방위부대를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진족은 추장(酋長) '우야소'때에 이르러서는 함흥평야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려와 정면 충돌하였다. 그래서 숙종(肅宗)과 예종(睿宗)때는 동북면에 남하한 여진세력을 막느라고 국력을 기울였고, 결국 윤관(尹瓘)의 구성축성(九城築城)에 이르렀으나 구성을 다시 돌려주었다. 이렇게 완강히 싸우고․막았기 때문에 강원지방 내부까지 침입하지는 못하였어도 당시 통천(通川)․고성(高城)․간성(杆城)․양양(羨陽)․강릉(江陵)․삼척(三陟)에 주둔하고 있었던 군대는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싸우는데 대한 군사적 대비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몽고군이 고려의 동북지방, 강원도나 경상도 같은 동해안지역에 익숙해 있거나 앞서 이 지역에서 전쟁을 치룬 경험이 있는 동진병(東眞兵)을 끌어들여 이 지역을 공략하였다. 1249년 9월 1일 동여진병(車女眞兵)이 동주(東州)(철원鐵原)를 침략하니 별초병(別抄兵)이 이를 막았고, 동월(同月) 20일에 지유(持論) 박천부(朴天府)가 별초군(別抄軍)을 인솔하고 동진(東眞)과 고성, 간성에서 싸워 모두 쳐 부수었다. 또 1257년 윤 4월9일에도 동진(東眞)이 동주계(東州界)를 노략질 했으며 1258년 12월 1일에도 동진국이 주사(舟師)로 고성현의 송도를 포위하고 전함을 불태왔다고 1259년 1월 3일에도 동진이 금강성을 노략질하자 별초 3,000명을 보내 구원하였다.
거한은 몽고와 퉁구스의 혼혈족으로 요하상류인 시라무렌 남쪽에서 유목하고 있던 유목민들이다.



<지도 3> 몽고의 5차 철학과 주요 항전지 :
강원도(※)

고려와 거란은 994년, 1010년과 1015~1019년에 걸쳐 3차례 전쟁을 하였다. 1217년을 전후하여 침입해 온 거란족과의 전투에서도 강원도 지역의 피해는 막심하였다. 철원․춘천․원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김취려(金就勵)장군이 이끄는 관군과 지방민이 합세하여 물리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패전한 거란족들은 평창을 거쳐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침입하였으나 고려
관군이 거란군을 추격하여 명주(溟州) 모노원(毛老院)에서 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퇴각하던 중 양양으로 들어갔다가 양양읍민과 지방군의 거센 항전(抗戰)에 크게 대패하고 통천(通川)(金接 금양)을 거쳐 함경도 쪽으로 북상해 여진의 땅으로 되돌아 갔다.
몽고족은 본래 몽고평원에 자리잡고 있던 유목민족으로 요(遠)․금(金)시대에는 그 지배를 받아왔으나, 13세기초에 테무진이 주변의 부족을 정복․통일하여 마침내 강대한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고종 18(1231)년에 몽고는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로부터 귀국하던 중 살해된 것을 구실로 제1차 침입을 해오게 되었다. 몽고는 이때부터 고종 46년(1259)까지 28년간 7차례에 걸쳐 침입을 해 왔다. 특히 가장 격렬했던 것은 고종 40년(1253)의 제5차 침 입이었는데, 고려는 거의 각지가 병란을 입었다.
몽고 병력 중 송주(松州)의 동군은 이해 7월 15일에 서경에서 동북계(東北界)와 북계(北界)를 비롯하여 거의 각지가 병란을 입었다. 몽고 병력 중 송주(松州)의 동군은 이해 7월 15일에 서경에서 동북계(東北界)의 화주(和州)―안변(安邊)―동주(東州)―춘천(春川)―광주(廣州)를 잇는 통로로 척후기병대를 진출시켜 서북계로부터 남진하고 있는 야굴(也窟)의 서군과 연락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몽고군의 일부는 철원․금화를 거쳐 춘천에 이르렀다. 당시 춘주성에는 안찰사(按察使) 박천기(朴天器)가 춘주와 인근 제읍의 군민을 거느리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몽고군의 포위가 장기화됨에 따라 산성에 물이 모두 말라 우마(牛馬)의 피를 마시기도 했고 안찰사(按察使)인 박천기(朴天器)는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뛰쳐나가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으며 성내의 모든 백성은 그와 더불어 전사하게 되었다.
이어서 동군의 주력부대는 척후기병대의 뒤를 따라 삼양․양덕을 통과하여 8월 14일 화주(和州)를 함락시킨 다음 다시 별동대를 편성하여 안변(安邊)―통천(通川)―고성(高城)―간성(杆城)―양양(襄陽)―강릉(江陵)에 이르는 동해안 여러읍을 약탈하였다. 이에 따라 동군의 별동대는 8월 중순부터 10월 1일까지 고려군과의 악전고투 끝에 안변성을 공략하고 10월 21일에는 양양을 거쳐 10월 하순에는 강릉까지 진출하였다가 돌아같다.

몽고(蒙古)의 세조(世祖)가 일본원정(日本遠祉)에 거듭 실패하고 있을 때 북중국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이 있었고, 이 반란의 여파는 고려까지 미쳐왔다. 충렬왕 16년(1290)초에 합단(哈丹)(乃顔의 부장)족(族)이 두만강을 건너 고려의 동북면으로 침입하여 왔다. 정부에서는 중군만호(中軍萬戶) 김흔(金炘)은 환가현계(拳槪縣界 高城)에 라유(羅裕)는 통천(通川)에, 좌군만호(左軍萬戶) 박지량(朴之亮)은 이천(伊川)에, 한희유(韓希愈)는 쌍성(雙城 永與)에,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는 금기산등(禁忌山洞)에 각각 주둔케하여 합단(哈丹)의 침입에 대비케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합단적은 철령(鐵嶺)을 넘머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성(楊根城)을 빼았고, 원주(原州)에 진을 쳤다. 적들은 원주산성을 4~5차례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중갑(元仲甲)등의 결사적인 반격으로 사살된 자가 반수에 달하였다. 몽고(蒙古)의 원(元)나라 말기에 방국진(方國珍)․장사성(張士誠)․한산등(韓山童)등이 중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중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는 북중국(北中國) 각지를 휩쓸고 요동(遼東)을 침범하더니 마침내 고려를 쳐들어 왔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에 홍건적이 침입해 오자 왕은 경북 안동(安東)으로 피난하고 적은 개경을 점령하였다. 개경을 점령한 홍건적은 강원도 북부를 짓밟고 함남 안변(安邊)으로 쳐들어 가고 한편으로는 남하하여 원주(原州) 침공하니 원주목사(原州牧使) 송광언(宋光彦)이 전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 강석(姜碩)을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도순문사(都巡問使) 겸(兼) 병마사(兵馬使)에 임명하는 등 전시체제(戰時體制)를 피고 정세운(那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개경을 회복하고 적을 격퇴(擊退)하였다. 고려의 연해(沿海)에 왜구(僑達)가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조(高宗刻)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창궐하게 된 것은 충정왕(忠定王) 2년(1350)이후였다. 왜구는 공민왕(恭愍王) 21년 4월부터 동해안 일대에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이달 15일 진명창(鎭溟倉)을 약탈한데 이어 6월 6일에는 강릉부(江陵府)와 영덕(盈德)․덕원(德源)의 두 고을로 밀려 들어왔는데, 이옥(李沃)이 용감하게 싸워 이를 물리쳤다. 또 공민왕 23년 5월에 강릉과 삼척을 침범해 왔다. 우왕(禑王) 7년(1381)왜구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영해부(寧海府)를 소각하고, 3월에는 강릉도(江陵道) 권현룡(權玄龍)을 현지로 보내어 이를 격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강릉도에서는 크게 흥년이 들어 왜구방어에 취약점이 많았으므로, 고려조정은 다시 동지밀직(同知密直) 이숭(李崇)을 보내어 교주도(交州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작전을 조치하였다. 왜구는 동해연안의 송생(松生)․울진(蔚珍)․삼척(三陟)․평해(平海)․영해․영덕 등지를 휩쓸고 삼척현을 소각하였다. 이에 따라 강릉도부원수(江陵道副元帥) 남좌시(南佐時)의 건의로 교주도 일대의 방어병력을 정예부대로 배치하여 동해안 방어태세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우왕 8년 왜구는 상당히 큰 규모로 영월(寧越)을 침입하였고, 9년에 강릉으로 틈입(鬪入)한 왜적이 평강으로 침입, 다시 홍천(洪川)을 침략(侵掠)했던 것으로 보아 강릉(江陵)․양양(襄陽)․간성(杆城)․고성(高城)․통천(通川)․회양(淮壤)․금성(金城)․김화(金化)․평강(平康)이 침략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와 같이 고려시대에 우리조상들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심한 고초를 겪었으며, 그 험난하고 위험한 고비를 버티어 민족사의 명맥을 유지하여 우리들에게 혈사(血史)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속에서 강원도민은 자연의 산세(山勢)를 이용하고 슬기를 쏟아 생명을 아끼지 않고 항쟁하며 민족사를 빛냈다. 이러한 투쟁정신은 바로 고성인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 주민들의 자기고장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신의 표출이었으며,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목숨을 바쳐 우리나라를 보존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이 지방사람들이 타지역 주민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고 오히려 앞선 민족정신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