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제2절 고려의 지방 행정 및 군사조직과 강원도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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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절 고려의 지방행정 및 군사조직과 장원도

고려의 지방제도는 주현제도(州縣制度)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주(州)․부(府)․군(郡)․현(縣)이 각기 토착적인 호족의 자치에 일임되고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지방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대(成宗代981~997)부터었다. 성종 2년 2월에 처음으로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고, 금유(今有)․조장(組藏)을 파(罷)하였다. 따라서 전국을 12목으로 구획하는 동시에 중앙으로부터 12목에 각기 상주하는 외관이 파견되었다. 이때 설치된 12목은 광주(廣州)․양주(楊州)․충주(忠州)․공주(公州)․진주(晉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황주(黃州)․해주(海州) 등이었다. 한편, 서북면과 동북면의 군사지역에는 성종 8년 병마사제(兵馬使制)를 실시하였다. 이때 강원도 지방은 고려에서도 북경(北境)에 가깝기 때문에 군정이 베풀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동북면 병마사가 다스렸다.



<지도 1> 5도 양계

성종 14년(995)에는 지방의 명령체계를 군사체계로 전환하면서 다시 10도제(道制)를 실시 하였다. 그 명칭은 관내(關內)․중원(中原)․하남(河南)․강남(江南)․영남(嶺南)․영동(嶺東)․산남(山南)․해양(海壞)․삭방(朔方)․패서(浿西)등인데, 이는 지리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도명을 지은 것이다. 10도 중에 강원도 지역에 해당되던 곳은 삭방도(朔方道)였는데 지금의 함남(咸南)․경기(京畿)․경북(慶北)의 일부가 포함되었고 소관 주현수는 7주 62현이였다. 그리고 강원도의 원주(原州)․영월(率越)과 평창군의 일부가 중원도에 속해 있었다.
다시 지방제도는 현종(顯宗) 9년(1018)4도호(都護)․8목(牧)․56지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獎)․20현령(懸令)이 설치되어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었다. 전국은 일반 행정구역인 5도와 북경(北境)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양계(兩界)를 두었으며 도(道)밑에는 주(州), 군(那), 현(縣)을, 양계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그 이하는 촌(村)단위로 되어 있었다. 행정구획으로서의 5도는 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교주(交州)․서해도(西海道)를 말하며, 군사관할지역으로서의 양계는 동계(東界). 북계(北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현재 강원도의 영서지방 북부는 교주도에, 남부는 양광도에, 영서지방 북부는 교주도에, 남부는 양광도에, 영동지방은 동계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도를 맡은 장관은 안찰사(按察使)였으며 양계의 장관으로는 병마사(兵馬使)가 임명되었다. 그 뒤 동계는 명종(明宗) 8년(1178)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 원종(元宗) 4년(1263)에 강릉도(江陵道), 충열왕(忠烈王) 16년(1290)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불렀고, 교주(交州)는 명종(明宗) 8년에 춘주도(春州道)라 불렀으며 후에 동주도(東州道), 원종 4년에 교주도(交州道), 충숙왕(忠肅王) 1년(1314)에 회양도(淮陽道), 우왕(禑王) 14년(1388)에 영동과 영서를 합쳐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고하였다. 그 후 동계에 속해있던 영동지방은 명주도(溟州道), 혹은 강릉도(江陵道)로 개편되어 강릉에 있던 안찰사(接察使)가 관장하였으며 교주도는 춘천에 있던 안찰사가 관할하였다.
고려 말기인 우왕 때에는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쳐서 교주강릉도라 했는데 이때 강원도에 속해 있던 이천(伊川)과 철원지방은 경기도에, 원주와 영월은 양광도에 소속되었으나 현재 경기도의 가평(加平)지방이나 경북의 울진(蔚珍)지방은 교주강릉도 에 속해 있었다



한편 고성지역은 후삼국의 정치적 혼란기에 명주지방과 함께 궁예가 건국한 태봉(泰封)의 영역으로 편제되었고, 이어서 개성의 호족을 기반으로 건국한 왕건의 고려 영역으로 편제되었
다. 후삼국의 분열정국을 경과하여 고려의 건국으로 이어지면서 고성과 간성은 최초로 통합된행정편제를 이루었다.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을 띠면서 후삼국을 통일해 낸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행정개편을 추진하였으며, 이 시기에 수성군(守城那)은 간성현(杆城縣)으로 읍호가 변경되었고 이어서 간성군(杆域郡)으로 읍호가 승격되면서 고성현을 겸임하는 형태로 통합편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통합편제는 행정구역상의 변화를 불러온 것은 아니었고. 다만 간성군의 수령이 고성의 통치를 겸임하는 형태로서 이 시기의 영역은 아래와 같다. 고려의 행정편제에 개편에 따라 간성군은 1개의 속현(屬縣) 즉 열산현(烈山縣)을 임내로 확보하고 있었다. 열산현은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증산현(增山縣)으로 뒤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동산현(童山縣)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조에 들어와서 열산현으로 개칭되면서 간성군의 임내로 편제되었다.
한편 고성현 역시 2개의 속현 즉 환가현(豢豭縣)과 안창현(安昌縣)을 임내로 확보하였다. 환가현(豢猳縣)은 처음에는 고구려의 저수혈현(猪䢘穴縣)으로 뒤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환가현으로 개칭된 이래 고려에 들어와서 고성현의 임내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안창현(安昌縣)은 원래 막이현(莫伊縣)이었는데,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안창현으로 개칭되면서 고성현의 임내로 편제되었다.
이러한 고려초기의 행정편제의 개편에 따라 추진된 간성과 고성의 통합편제는 그 영역의 개편없이 지방사회의 세력판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통합편제의 특성을 갖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편제는 주민생활의 편리성에 기초한 개편이라기 보다는 중앙정부의 지방통제상의 편리성에 근거한 것으로서 이후 다시 분리될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결국 고려전기에 간성군으로 통합편제되었던 간성과 고성은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에 다시 분리되어 간성군과 고성현으로 편제되었다. 다음으로 고려의 군사조직과 고성지방(高城地方)을 포함한 강원지역과의 관련을 살펴보겠다. 고려의 군사조직은 건국초부터 북방민족과 군사적 충돌이 심하여 정비에 관심을 쏟았다. 정비의 방향은 태조 직속군을 정치군화하였고 지방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는 무장해제를 거쳐 양민화하여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국방군 체제가 확립된 것이었다. 중앙군의 대표적인 것은 태조의 직속군이 근본이 되어 편성된 2군(軍) 6위(衛)였다. 지방군은 광군(光軍)이 개편되면서 성립된 것으로 양계지역의 진(鎭)에 배치된 주진군(州鎭軍)과 기타 지방의 주현을 단위로하여 부대를 조직한 주현군(州縣軍)으로 구분된다. 주진군은 북방 국경지대에 설치하여 외적에 대비한 둔전부대(屯田部隊)였다.
강원도 지방에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주현군(州縣軍)이 있었고 고성군이 속한 영동지방인 동계(東界)에는 변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일반 주현(州縣)보다 보강된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정종(定宗)때에는 거란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 30만을 뽑아 광군(光軍)을 설치하고 국경지대에 성을 쌓았는데 이때 삼척(三陟)에 큰 성을 쌓았다. 이 광군은 制(제)는 거란에 대비하여 장기간 존속하던 것으로서 예비군적인 성격을 띤 특수군단이었다. 5도에 배치된 주현군의 임무는 경군(京軍)과 마찬가지로 전투였으나 내란진압도 하였다. 국방을 위한 동원에는 경군과 함께 출동하게 되는데 이때의 주현군(州縣軍)은 주력부대이 기보다는 후원과 엄호의 구실을 당당하였고 성을 쌓는 것과 같은 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주진군(州鎭軍)이란 고려의 북방국경지대에 설치된 특수행정구역인 양계(兩界)에 배치된 지방군으로 강원도 지역인 동계(東界)에도 있었다. 양계의 방수(防成) 지휘에 있어서는 병마사(兵馬使)를 보내어 군권을 전담케 하고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으로 병마판사(兵馬判事)를 삼아 경성(京城)에 머무르면서 양계의 병마사를 영도(領導)케 하였다. 양계의 제진(諸鎭)에 배치된 군대는 주진군의 기간이 되는 초군(招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및 보창군(保昌軍), 영새군(率塞軍)과 예비군인 공장(工匠), 전장(田匠), 투화(投化) 등이 있었다. 고려는 북쪽으로 거란(契丹), 여진(女眞),몽고(蒙古)등의 이민족과 늘 대립해 있었고, 또 침략을 받아 자주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민족이 침입할 때는 경군(京軍), 주현군(州縣軍)이 동원되었으나 이에 대항하여 가장 먼저 전투를 하는 것은 주현군이었다.
영서지방에서는 북쪽 철령 (鐵嶺)에서 넘어오는 길목인 교주(交州)와 동주(東州)에 , 그리고 춘주(春州)에도 많은 군대가 배치되어서 동북계(東北界)를 튼튼히 지켰으며 영동지방에는 더욱 진(鎭)을 많이 설치하여 북쪽의 적과 동해안으로 침투하는 해적을 방어하였다.
또한 현 고성군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등계 내의 고성현과 간성현의 주진군은 별장(別將) 2명, 교위(被財)9명, 대정(隊正)19명, 초군(抄軍)5대, 좌군(左軍)5대, 우군(右軍)5대, 영새군(率塞軍) 3대로구성되어 있다. 이들두 현 중 지리적으로 고성현이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성현의 주진군이 약간 많은데, 이것이 어떠한 연유에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