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문화와 역사

Culture and History

역사

++제4절 고성지방과 화랑과의 관계

작성일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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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고성지방과 화랑과의 관계

고성 군에는 신라 화랑도와 관련된 유적 및 전설이 첫부터 많이 전해 내려온다. 특히 사선[四仙]에 관해서는 여러 이설(異說)이 뒤섞여 있어, 그 갈래를 잡기가 힘들다. 사선(四仙)을 언급하기에 앞서 다음의 《삼국유사》권3, <백률사(栢栗寺)>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신라 효소왕 때에 대현(大玄) 살찬(薩喰. 第8官等)의 아들 부례랑(夫禮郎)이 국선(國仙)이 되었다. 그는 일천 여명의 낭도(郎徒)를 거느렸는데, 그중에서도 안상(安常)과 더욱 가까웠다. 천수(天授) 4년(693) 3월에 이들은 금란(金蘭. 通川)에 출유(出遊)하여 북명(北溟)에 이르러 적적(狄賊)에게 붙잡혀 갔다. 문객(門客)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돌아왔으나, 홀로 안상만이 찾아나섰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난 뒤 신라의 만파식적(萬波息笛)과 현금(玄琴)도 잃어버려, 누구든지 이 두 보물을 찾아오면 후히 상을 준다고 하였다. 부례랑의 양친은 백률사의 대비(大悲. 관세음보살) 상(像)에 여러 날을 기도하니, 갑자기 금적(琴笛)과 두 사람이 나타났다. 양친은 그 연유를 물었다. 부례랑은 적국(狄國)에 가서 방목(放牧)을 했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스님이 금적을 가지고 와서 그를 따라오라고 하여 가본즉 안성과 만나게되어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들은 물론 후한 상을 받았다. 아울러 부례랑은 대각간(大角干)이 되고, 안상사(安常師)는 대통(大統. 僧職의 하나)이 되었다. 세간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郎)의 도(徒)라고 하는데 자세히 알 수 없다. 영랑(永郎)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才). 번완(繁完)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別傳에 자세히 보인다 - 原註)

부례랑은 그 부모의 관등(官等)과 이름 및 생존기간이 정확히 나오는 점으로 보아 현존 사료에 근거하는 한 그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부례랑과 그의 낭도 안상이 유오(遊娛)했던 정확한 지명이나 안상에 대한 승직수여(僧職授與) 등으로 보아 안상에 대해서도 이 조(條)의 처음 기사를 그대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우선 부례랑이 잡혀간 복명이 어디인가를 알아보자. 이병도는 예(濊)의 영역을 따져서 지금의 원산만 부근이라 하였으며, 김종권은 단순히 명주로 본듯 지금의 강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삼일포의 지명 유래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의 간성 .고성 및 통천지방은 이들 화랑의 전설이 가장 많은 곳이다. 이러한 속전(俗傳)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으로서, 부례랑의 피랍지(被拉地)는 고성 부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북명은 통일신라 때 명주 관내의 북쪽 즉 고성.통천 등지로 일단 비정해 본다.

문제는 일연이 부기(附記)했듯이 세상에서 안상을 준영랑의 무리라고 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은 일연 당시에 이미 안상을 영랑과 관련짓는 설이 유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일연이 알고 있는 바로는 영랑의 무리로서 진재 . 번안 등이 있을 뿐이며, 이들 낭도 또한 의심할 수 없는 이유는 협주에서 보듯이 따로 소상한 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상이 영랑의 무리로 연결지어진 내력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일연이 당시의 속전(俗濤)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 같다.

「四仙〕을 칭한 첫번째의 문헌은《해동고승전》(1215)〈법운(法雲)〉조(條)이다.

自原郞至羅末 凡二百餘人 其中四仙最賢 且如世紀中

이 200여인(餘人)이라는 숫자는《삼국사기》권47,〈김흠운(金歆運)〉전(傳)의 해당 기사와도 일치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말하는 「세기(世紀)」는 김대문(金大問)의《화랑세기》를 지칭한 것이다. 삼대(三代)의 전체 화랑 200餘人 가운데서 낭도는 물론 제외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4명의 국선(國仙)이라고 하면 안상 같은 낭도가 사선(四仙)에 들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이치다.
안상은 대통(大統)이라는 승직(僧職)을 받은 승려낭도(僧侶郎徒)로서, 이러한 예는 진자사(眞慈師).월명사(月明師).융천사(融天師)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원도의 해안지방은 산수(山水)가 빼어나며 또 국경지대로서 화랑도의 주술수업(呪術修業) 및 전사적(戰士的) 훈련에 적합한 곳이다. 이제 고성 지역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후대의 기록을 살펴보겠다.

其(三日浦)崖東北面 有六字丹書 ‥‥‥ 日述郎徒南石行 ‥‥‥ 人言 新羅時 有永郎述郎徒南 四仙童子(李穀, 東遊記)

이 인용문을 발단으로 하여 첫째,「육자단서(六字丹書)〕의 판독(判讀)과 둘째, 사선(四仙)에 대한 고증을 시도해 보겠다
단서(丹書) 중의 「述郎…」을 안축(安軸)(關東遊記)과 어숙권(魚叔權)(稗官雜記)은「永郎…〕으로 읽었다. 따라서 동일한 단서(丹書)를 판독하기에 따라 사선(四仙)중의 두 사람이 충족되는 셈이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해동고승전》의 사선(四仙)이 아래에서 보게 될 삼일포 주변에서 전해지는 사선(四仙)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안상의 신분 문제가 그러하고,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확실한 판독, 그로 인한 와전으로 사선(四仙)의 명단이 채워지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사선(四仙)을 차례대로 하나씩 살펴 보겠다.

영량(永郎)은 「永郎湖」,「新羅僊人永郎鍊丹石臼」등에서 보듯이 이미 설화상으로 저명한 인물이며 , 아래에서 보듯이 후대까지도 신선시되던 인물이었다.

永郎者 向彌山人也 行年九十 有孀兒之色 鷺羽之冠 鐵竹之杖柱 逍遙于湖山 遂傳文朴之 業(《靑鶴集》)

그러나 술랑(述郎)부터는 의심이 가는 인물들이다. 삼일포의 단서(丹書)를 제외하고는 그 이름을 들어볼 수 없으므로, 단서(丹書)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름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러나 아유가이(鮎貝房之進)의 주장 처럼, 술랑(述郎)이 부례랑(夫禮郎)의 동음차(同音借)라면 그의 이름은 이미 《삼국유사》에 나오며 ,〈백률사〉조의 부기(附記)는 안상(安常)이 술랑(述郎)의 도(徒)가 아니라 영랑(永郎)의 도(徒)가 된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안축(安軸)이 전한 아래 인용의 삼일포 유래에서 보듯이 ,

三日浦 昔四仙遊此而三日不返 故得是名

〈백률사〉조와 견주어 술랑은 사선 중에 들 수가 없다. 〈백률사(栢栗寺)〉조(條)에서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실종된 것이고, 이것을 후대의 사인설(四人說)과 맞추어 본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가 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추론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세번째 인물인 남랑(南郎)에 대하며 살펴보겠다. 사선(四仙)의 이름이 처음으로 밝혀지고 그 가운데 남랑이 나오는 것은 《동국여지승람》 , 통천군(通川郡), 「총석정 (叢石亭)」조(條)이다.

諺傳 新羅述郎南郎安詳 遊賞于此 號稱四仙峯

이곡(李穀)도 사선동자(四仙童子)라 하여 이들을 밝혔지만 「영랑술랑도남(永郎述郎徒南)]으로만 끝났다. 따라서 이곡 당시만 해도 아직 사선(四仙)에 대한 구체적 명단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남랑(南郎)은 단서(丹書)의 「남석행(南石行)」 혹은 「남석(南石)〕을 「남랑(南郎)]으로 처리한 것 같다. 한편 「남석(南石)」을 단서(丹書)가 쓰인 돌의 이름으로도 본 것 같다(《강원도지》, 권2,금강산, 1940).

마지막으로 안상(安常)에 대하여 알아보자. 안축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공민왕 때 정구(鄭樞)의 시(詩) 등에 이미「安詳」으로 표기되었다. 이는 부례랑의 낭도(郎徒) 안상(安常)을 지칭함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러한 화랑과 낭도의 관계가 사선(四仙) 전설에서 오히려 뒤바뀐 것을 알 수 있다.

有花郎安詳永郎之徒 來有三日不返 故名焉(《稗官雜記》;

이와같이 사선(四仙)에 대해서 설화상으로는 흥미있는 문제이지만, 역사상으로는 고증이 불가능하다. 이외에도 삼일포(三日浦) 남쪽에 1309년(忠宣王 元年)에 세운 매향비(埋香碑)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이 《잡고(雜攷)》중 <속문고(俗文攷)>에서 자세히 논술하였다.

【참 고 문 헌】
o신태현, 《삼국사기지리지의 연구》,우종사, 1958.
o신종원, <고성군지역 향토문화 조사보고, 역사부문> 《강원문화연구》 2, 1982.
o이해준, <매향신앙과 그 주도집단의 성격> 《김철준박사회갑기념사학논총》 , 1983.
o강릉대학교 박물관, 고성군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5.
o김태식 ,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154, 1997